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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향목 님의 서재입니다.

여우 전당포의 신비한 요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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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향목
작품등록일 :
2024.05.08 11:32
최근연재일 :
2024.06.28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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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6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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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2쪽

23. 향설고

DUMMY


“저것도 가면이야?”


시현이 은롱에게 속삭이자 은롱이 시현이 눈짓하는 쪽을 보았다.

곰의 모습을 한 상인이 손님에게 뭔가 설명하고 있었는데 옷을 입고 있었지만 얼굴이나 몸이 탈이라기엔 너무 자연스러웠다.


“아 저 사람은 곰 수인이야. 모습은 험상궂지만 사실은 순한 사람이야. 몽중시가 열릴 때마다 나오는데 직접 채취한 꿀을 가지고 나오지. 품질이 아주 좋아.”

“서천꽃밭의 꿀 같은 것도 여기서 사?”

“아니 우리는 식자재를 구해주는 상인이 따로 있어. 서왕모의 복숭아나 서천꽃밭의 꿀처럼 상비해 두는 식자재는 세나 누나가 그 사람을 통해서 구하고 있어.”


은롱은 말하면서 노점을 둘러보다가 다시 말했다.


“오늘은 말랑카의 사향고양이도 안 나왔네. 금손 씨 지인인데 지난번 그 커피를 팔거든. 그거 워낙 소량밖에 안 나오니까 이번엔 없나 봐.”


아하, 민수정의 몽로로 커피 스콘을 만들 때 썼던 커피가 여기서 구한 건가 보군.


들어왔던 동굴을 통해서 다시 죽림으로 돌아왔을 때는 날이 밝기 직전이었다.


“형아, 난 배랑 버섯, 인삼과를 간수하고 올게. 한숨 자고 일어나서 아침 먹자.”


시현은 몽중시를 본 게 너무 신기해서 잠이 안 올 것 같았는데 밤새 걸어다닌 게 꽤나 피곤했는지 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잠이 들었다.


***


“몽중시를 다녀왔나?”


금손이 물었고 시현은 배를 깎으면서 대답했다.


“예. 정말 신기한 경험이었어요.”

“마침 장날이 되었기 때문이겠지만 이렇게 빨리 몽중시에 데려가다니, 은롱이가 자네를 정말 믿고 좋아하는군.”


금손은 미야옹 헛기침을 했다.


“나도 같이 갔으면 좋았을 텐데 어제는 내가 중요한 일이 있어서 자리를 비울 수밖에 없었어.”


금손은 거실 쪽을 돌아보면서 물었다.


“은롱아, 지리산의 고양이 선인은 안 왔던?”


거실에서 은롱이 대답했다.


“이번엔 안 나왔던데요.”

“아하 그렇군, 그 양반이 가져오는 개다래나무는 품질이 아주 좋은데 말이지.”

“그러게요. 사향커피도 없던 걸요.”

“음, 그 친구는 작년에 커피를 팔았으니까 올해는 겨울에나 나오겠지.”


아쉬운 듯 코를 쫑긋거리던 금손이 시현에게 말했다.


“배가 향이 무척 진하군, 이무기의 산에서 가져온 배인가 보지? 지금 만들고 있는 건 뭔가?”

“향설고입니다.”

“오, 향설고, 마침 목이 텁텁하던 참인데 잘되었군.”


금손이 공연히 콜록콜록 마른기침을 하면서 기대에 찬 눈으로 시현을 보았다.


시현은 송가미록에 적힌 향설고 조리법을 떠올렸다. 보이지 않는 곳에 적힌 것 말고 사람들이 읽을 수 있는 후식 부분에 적힌 향설고.


-신맛이 강하고 단단한 문배를 골라 껍질을 벗긴다. 어른 주먹보다 큰 배는 팔 등분, 작은 배라면 사 등분으로 쪼갠다. 조각마다 통후추를 두세 알쯤 박아서 꿀에 재어 둔다.

노구솥에 생강과 대추를 저며 넣고 달이다가 꿀에 잰 배를 넣고 아주 약한 불로 졸이면 맛이 달다.

만약 배가 시지 않거든 오미자국을 좀 치면 빛이 붉고 맛이 좋다.

배와 꿀, 생강과 물의 분량은 다음과 같이 하면 좋으니라

–중략


옛날 조리서들은 분량이나 시간을 정확히 적지 않고 '적당히', 또는 '밥 한 끼 먹을 정도', 이런 식으로 표기한 경우가 많은데 송윤수의 송가미록은 분량이나 시간을 매우 정확히 기록해 두어서 참고하기가 좋았다.

시현은 이무기 산의 배와 서천꽃밭의 꿀의 맛이나 당도를 생각해서 적당히 비율을 조절하며 향설고를 만들었다.


후추알이 빠져나오지 않도록 젓가락으로 꼭꼭 찔러서 박아 주고, 생강과 대추 달인 국물을 맑게 하기 위해 면포로 찌꺼기를 한 번 걸러냈다.

걸러낸 물에 배를 넣고 달이기 시작하자 좋은 향이 우러나와 점점 짙어졌다.


문배는 원래 맛보다 향이 좋다고 하더니 정말 좋구나.

시현은 모락모락 올라오는 김을 들이마셨다. 코와 목이 뻥 뚫리고 눈까지 시원해지는 기분이었다.



“금손 씨, 목이 텁텁하다고 하셨죠? 향설고가 다 되었으니 드셔 보세요.”


향설고는 원래 차게 식혀 먹는 후식이지만 금손이 목이 텁텁하다고 하니 일단 뜨겁게 달인 향설고를 먼저 한 그릇 내주었다.


“난 차게 먹을 건데.”


은롱이 입을 뾰죽 내밀었는데 세나가 은롱을 지나치면서 말했다.


“전 그냥 뜨겁게 한 그릇 먹을게요.”

“아이 참 다들 향설고 먹을 줄 모르네. 차게 먹는 건데.”


은롱은 조금 투덜거리다가 결국 주방으로 쪼르르 들어왔다.


“나도 한 그릇 줘.”


응석이 잔뜩 담긴 은롱의 목소리에 시현은 웃으면서 향설고를 한 그릇 떴다.


“넉넉히 했으니까 지금 한 그릇씩 먹고 나중에 차게 해서 또 먹자. 참, 은롱이 건 몽로를 타야지.”


은롱의 향설고를 그릇에 뜨고 검정고양이 나미의 여우구슬에서 나왔다는 자주색 몽로를 은롱에게 받아 그릇 위에서 톡 터뜨렸다.


자주색 몽로 방울이 향설고 안에 쪼르륵 떨어지자 국물이 은은한 자줏빛을 띠면서 박하처럼 시원하면서도 약간 화한 향이 확 올라왔다.


“오, 이 몽로는 향이 강하네. 아까도 향이 좋았지만 몽로가 들어가자마자 향이 더 짙어졌어.”

몽로가 풀어지면서 배에 자줏빛이 물들어 배가 마치 투명한 자수정처럼 반짝였다.


시현은 향설고 네 그릇을 쟁반에 받쳐 거실로 나왔다.


“이거랑 같이 먹어도 괜찮겠네요.”


세나가 한지로 곱게 포장한 작은 바구니를 들고 왔다.


“어제 볼일 있어서 나갔다가 나미 생각이 나서 한과 가게 들러서 과자 좀 샀어요.”

“오 잘했구나. 그 집 한과는 많이 달지 않아서 좋더라.”


세나가 강정이며 유과를 쟁반에 담았다.


“나미랑 미미 봤어?”

“응, 잘 지내고 있더라. 그 미미라는 아이가 이제 말도 잘하고 노래도 잘하던데.”


한과를 꺼내 놓고 제 몫의 향설고 그릇에 숟가락을 대던 세나가 잠시 멈췄다.


“그런데 말이야, 시장에서 그 오 셰프를 봤어. 카메라가 따라다니는 게 뭐 촬영하나 보더라.”

“그래? 그 프로그램 촬영하는 거 아니야? 시현 형이 재밌게 보던 그거.”


얼마 전 시현이 보던 요리 프로그램 ‘최고의 한 상’ 이야기였다.

거기 나오는 스타 셰프 오인국이 시현 이전에 죽림 전당포의 요리사가 될 뻔했던 사람이라 해서 시현도 더 관심을 가지고 봤었다.


“요즘은 좀 바빠서 잘 못 봤는데, 일반인 도전 받는다는 공고가 났던 것 같아요.”

“흠, 일반인이라면 다른 직종 종사자도 되는 건가?”

“글쎄요. 자세히 보진 않았는데 일단은 요리사들의 지원을 받는 것 같더라고요.”


시현이 향설고에 든 배를 숟가락으로 잘라서 입에 넣었다.

푹 달인 배가 마치 젤리처럼 말캉말캉하고 부드러웠다.


아, 이거 별미네. 달콤새콤한 맛이 완전 진한 게 일반 배로 만들었던 향설고와는 차원이 다른 맛인데!

역시 배가 달라서 그런가.

한밤중에 배를 찾아 몽중시를 헤맨 보람이 있었다.


“그런데 말이죠.”


세나가 한과를 하나 집으면서 말했다.


“오 셰프는 죽림을 다녀갔을 때 기억을 지웠잖아요.”

“그랬지.”


세나가 조금 미심쩍은 듯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기분 탓인지 모르지만, 왠지 오 셰프가 절 알아보는 게 아닌가 싶은 느낌이 들었어요.”


딸깍!

은롱의 숟가락이 향설고 그릇에 부딪쳤다.


“그럴 리가 없어. 기억을 지우는 주술은 아버지한테 직접 전수받은 거고 내가 쓸 수 있는 주술 중에서도 세 손가락에 꼽을 만큼 강력한 건데!”

“혹시 말을 걸거나 그랬나?”


금손이 묻자 세나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그렇진 않았고요. 카메라가 따라다니고 같은 출연진인가 싶은 사람을 데리고 시장 보는 걸 촬영하고 있었는데요.”


오인국이 촬영을 하고 있을 때 세나는 마침 한과를 사서 가게를 나가려는 참이었다.

촬영 때문에 통행이 제한되고 사람들이 몰려 번잡스러운 바람에 사람이 좀 빠지고 나면 나가려고 가게 입구 근처에 서 있었는데, 건너편 채소 가게에서 촬영 중인 오인국의 목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요리사의 실력이란 말이지요, 요리도 요리지만 재료 고르는 데서부터 판가름이 나는 법입니다. 같은 재료라도 어떤 요리를 할지에 따라서 취사선택이 달라지고요. 이것 보세요. 이거, 채소가 다 거기서 거기 같지만 훈련된 눈에는 다른 게 보이거든요. 자, 내가 지금 고르는 걸 잘 보세요.”


청산유수처럼 흐르는 오인국의 말을 따라 방송국 진행자가 감탄도 하고 추임새도 넣고 하는 중이었다.

오인국의 말이 잠깐 뚝 끊어졌다.


“셰프님?”


진행자가 불렀지만 오인국은 건너편의 한과 가게 쪽을 향한 채 잠시 멈춰 서 있었다.


“셰프님? 왜 그러세요?”


진행자가 다시 부르자 오인국은 깜짝 놀란 듯 너털웃음을 웃었다.


“아이고 잠깐 딴생각을 했습니다. 미안해요. 다시 갑시다.”


***


“주변에 사람이 많았으니까 꼭 날 봤다고 할 순 없지만 왠지 느낌이 좀 싸했어.”


세나가 숟가락으로 향설고의 국물을 맛보면서 말했고 은롱이 말을 이었다.


“기억이 난 건 아닐 거야. 우리 전당포의 기억을 지우는 주술은 천 년 전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유서 깊은 주술인데 인간이 깰 수 있을 리가 없어.”

“세나 씨가 너무 미인이라서 그 셰프가 잠시 넋을 잃고 봤나 보지요 뭐.”


분위기를 풀어 보려고 시현이 농담을 했는데 세나가 눈꼬리를 올리면서 눈총을 주었다.


아니 왜, 세나 정도면 지나가던 사람이 다시 쳐다볼 정도의 미인 맞는데. 구미호가 아닌가 생각했을 만큼 묘한 매력도 있고.


“시현이 말도 일리가 있는데 왜 흘겨보니? 우리 세나 정도면 엉큼한 아저씨가 잠시 넋을 잃을 만도 하······, 캬웅!”


금손이 앉은 자리에서 팔짝 뛰었다.


“아니 내가 뭐랬다고 귀를 잡아당겨!”


금손이 앞발로 귀를 문지르면서 볼멘소리를 냈고 세나는 잠자코 숟가락으로 제 그릇의 배를 한 조각 떠서 금손의 그릇에 넣어 주었다.


“이거나 더 드세요. 향설고라더니 이름대로 정말 향기롭네요.”

“음, 배가 정말 좋은 거라 그렇지. 이거 고종 황제가 맛을 봤으면 삼시 세끼를 냉면으로 먹겠다고 했을 맛이다.”

“예?”


금손의 말에 시현이 궁금한 얼굴을 하자 금손이 향설고 국물을 홀짝 핥으면서 말했다.


“고종 말이야. 대한 제국 황제. 고종도 자네 5대조 할아버지가 만든 향설고를 좋아했지. 배를 엄청 좋아했거든.”

“아 네, 그런데 냉면이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고종은 냉면을 좋아했는데 냉면에도 배를 듬뿍 넣어서 만들었다네. 아마 송가미록에도 고종이 먹던 냉면 조리법이 있을걸?”

“예, 있기는 한데 지금은 못 봅니다. 앞쪽에 있거든요.”


송가미록의 앞부분이 분실된 게 생각난 시현이 새삼 시무룩한 얼굴을 했다.

예전에 송가미록을 잃어버리기 전에 가끔 송가미록을 봤을 때 냉면에 대해 꽤 많은 분량이 할애되어 있던 게 기억났다.

하지만 밥, 국, 면 등의 요리는 송가미록의 앞쪽에 있다. 그 부분이 분실되었으니 지금 냉면을 찾아볼 수가 없는 것이다.


“지금은 못 보지만 전에 읽어봤던 걸 떠올려 보면 오미자국에 메밀면이나 기장쌀면을 넣어 만드는 냉면이 있어서 신기하게 생각했던 기억이 나요. 그 이후 나온 밀가루면에 대한 기록도 있었고.”

“고종 황제가 먹던 냉면은?”

“그것도 있었어요. 배를 많이 넣은 동치미 냉면이어서 흥미롭다고 생각하면서 읽었거든요.”

“그럼 오늘은 그 냉면을 해먹으면 어떤가? 마침 이무기 산의 배가 있으니까, 이렇게 좋은 배를 날이면 날마다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응, 응, 냉면 좋아! 나 배 냉면은 안 먹어봤어!”


금손의 말에 은롱이 얼른 맞장구를 쳤고 세나도 향설고 그릇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향설고가 이렇게 맛있으니 배를 넣은 냉면도 맛있겠지요.”










향설고f.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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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33. 송화다식(1) +8 24.06.26 302 34 13쪽
56 32. 송화 +9 24.06.25 334 35 12쪽
55 31. 가지 누르미 +10 24.06.24 360 36 13쪽
54 30. 첫 번째 선물(2) +7 24.06.22 413 46 12쪽
53 30. 첫 번째 선물(1) +5 24.06.21 413 42 12쪽
52 29. 수제비(2) +10 24.06.20 413 43 12쪽
51 29. 수제비(1) +6 24.06.19 418 44 12쪽
50 28. 노리개(2) +8 24.06.18 424 39 12쪽
49 28. 노리개(1) +8 24.06.17 426 43 12쪽
48 27. 콩나물밥(2) +5 24.06.16 424 38 13쪽
47 27. 콩나물밥(1) +5 24.06.15 482 36 12쪽
46 26. 조우 +7 24.06.14 488 36 12쪽
45 25. 맥적(4) +9 24.06.13 480 38 13쪽
44 25. 맥적(3) +4 24.06.12 480 35 12쪽
43 25. 맥적(2) +6 24.06.11 481 33 12쪽
42 25. 맥적(1) +8 24.06.10 488 39 12쪽
41 24. 고종 냉면(3) +6 24.06.09 494 34 12쪽
40 24. 고종 냉면(2) +6 24.06.08 493 38 12쪽
39 24. 고종 냉면(1) +7 24.06.07 493 36 11쪽
» 23. 향설고 +5 24.06.06 500 42 12쪽
37 22. 몽중시(夢中市)(2) +4 24.06.05 504 42 13쪽
36 22. 몽중시(夢中市)(1) +5 24.06.04 510 40 12쪽
35 21. 나미와 미미(2) +7 24.06.03 511 41 11쪽
34 21. 나미와 미미(1) +5 24.06.02 513 39 12쪽
33 20. 경성 오므라이스(3) +6 24.06.01 524 47 11쪽
32 20. 경성 오므라이스(2) +6 24.05.31 524 4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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