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도주(逃走)
1시간 정도 이어진 출병식이 끝나고 사람들이 흩어져서 대광장이 조금 한산해지자 나는 곧바로 여관으로 돌아가서 대충 짐을 챙겨가지고 수도 아트리센을 떠났다.
오늘밤은 성에 들르지 않고 밤을 새워서 달릴 예정이었다.
아트리센을 빠져나오는 길은 들어갈 때보다는 훨씬 더 한산했다.
늦은 시간이었기에 관도를 달리는 말이나 마차는 거의 보이지 않아서 덕분에 나는 제법 빠른 속도로 말을 달릴 수 있었다.
특별한 목적지가 없었기에 일단 왔던 길을 그대로 거슬러서 되돌아갔다.
2시간 정도 달리고 30분 쉬어주면서 밤새워 말을 재촉했더니 새벽 무렵에는 가는 길에 들렀던 자카인성 보다 50km 더 멀리 떨어진 로이안성 근처까지 도착했다.
이미 충분히 도망치기도 했고 또 준비했던 음식은 아까 마지막 휴식을 취하면서 마저 다 먹어버렸기에 이젠 슬슬 성으로 들어가는 게 좋을 것 같다.
보통 성문이 열리는 시간은 새벽 6시 부터니까 지금부터 천천히 달려가면 입성시간과 딱 맞을 것 같아서 나는 조금 편안한 마음으로 아세르에게 물었다.
“여기쯤이면 아이키사르 대마법사로부터 안전하겠지?”
[상당히 멀리 떨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확실히 안전하다고 말씀드리기는 힘듭니다.]
“뭐?”
아니 써칭마법의 탐지거리는 80km라며.
여기는 수도에서 거의 400km는 떨어진 곳인데 왜 아직까지도 안전하지 않다는 건가?
아이키사르가 무슨 신도 아닐 텐데 어쩐지 아세르가 좀 과장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수도에서 여기까지 탐지할 수 있다는 게 말이나 되? 아니······, 넒은 범위를 탐지할 수 있다고 해도 만약 그랬다가는 뇌에 과부하가 걸려서 견딜 수 없다며?”
[아이키사르 대마법사를 일반인과 같은 수준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의 연산력이라면 반경 500km이내에서 일어나는 특이한 이상 현상을 실시간으로 모두 탐지하고 확인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아! 고 등급의 탐지마법은 특이한 이상 현상만을 지정해서 탐지할 수도 있구나.
그 생각은 미처 못 했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쩐지 아세르가 아이키사르를 극도로 경계하고 있다는 느낌은 지울 수가 없었다.
또 그냥 상대를 조심하느라 이렇게 도망가는 느낌도 기분이 상당히 더러웠다.
뭐 이미 말이 지쳐서 더 달릴 수도 없는 상태였기에 나는 일단 로이안성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적당한 여관을 찾아들어가서 곧바로 말을 마굿간에서 쉬게 만들고 나도 좀 쉬었다.
적당히 씻은 후에 방으로 음식을 넉넉하게 주문해서 아침식사를 하고 또 인벤토리도 채워두었다.
사실 아세르의 경고 때무에 아트리센에서 도망쳐 나오면서 나는 좀 암담한 기분이 들었다.
아이키사르 대마법사의 능력이 그렇게 위험하다면 그의 능력을 복사하는 게 과연 잘하는 짓일까 하고 걱정스럽기도 했다.
물론 그렇다고 그의 능력을 복사하지 않겠다는 것은 아니다.
사실 나는 대략 이쯤에서 아이키사르 대마법사의 능력을 복사하고 나의 고유능력을 활성화시켰으면 했는데 결국 아세르의 경고 때문에 잠깐 미루고 있는 중이었다.
느긋하게 잠들었다가 오후 1시쯤 깨어난 나는 이젠 어떻게 해야 할지 잠깐 고민을 했다.
지금 당장 출발하기에는 아직까지 말이 충분한 휴식을 취하지 않아서 좀 곤란했다.
그렇다고 말이 충분히 쉰 타이밍에 맞춰 출발하자면 오늘도 저녁에 출발해서 밤새도록 달려야 한다는 뜻이었다.
아트리센에서 급하게 빠져나오는 바람에 생활리듬이 완전히 꼬여버린 것이다.
잠깐 마굿간으로 가서 말을 살펴보니까 상당히 지쳤는지 평소처럼 서서 잠든 게 아니라 아예 바닥에 드러누워서 잠들어 있었다.
잔뜩 쌓여있는 짚더미 위에 드러누워서 제법 편해 보이긴 했지만 적어도 한두 시간 안으로 깨어날 것 같지는 않았다.
결국 나는 잠시 여관을 빠져나와서 로이안성을 구경하기도 했다.
로이안성은 제이슨 로이안 백작의 영지로 아트리센으로 이어지는 꽤 중요한 요지에 있는 성이었기에 상업적으로 무척 발달한 곳이었다.
“로이안성에는 뭐 좀 특별한 곳이 없어?”
[특별한 곳이라면······, 제이난 마탑이 이곳에 있습니다.]
“제이난 마탑?”
[대륙을 지배한 8대 마탑 중 하나로 만약 박진우님이 아이스트롤의 피와 마석을 판매할 생각이라면 이곳에서 파는 게 가장 좋은 가격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오! 그래?”
마탑은 보통 거대 상단을 통해서 필요한 마법물품들을 구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탑을 직접 찾아오는 모험가를 박대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필요한 물건이라면 대형 상단에서 구입하는 것과 비슷한 가격으로 구입해 주기에 모험가들의 입장에서는 중간마진을 빼앗기지 않고 판매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멀리서 몬스터를 사냥하고 그것을 여기까지 들고 와서 판매하는 모험가가 그리 많은 건 아니지만 말이다.
“잘됐다. 인벤토리 정리나 좀 해야겠네.”
아세르의 설명에 따르면 제이난 마탑의 무력은 여덟 개의 마탑 중에서도 최하위권이지만 마법무구제작과 연금술에서는 최고의 실력을 자랑하는 곳이었다.
그래서 마법재료를 구입하는 일에 상당한 노력을 쏟고 있다고 한다.
나는 인벤토리에서 공간 확장 마법이 걸려있는 자루를 꺼내서 어깨에 둘러맸다.
허름하게 생긴 이 자루에 보관마법이 걸려있는 밀폐용기 15개 모두를 넣어두었던 것이다.
비싼 아이스트롤의 피를 허름한 자루에 보관하는 게 어쩐지 언밸런스 하면서도 상당히 어울리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나는 느긋한 걸음으로 제이난 마탑의 거래소를 향해 들어갔다.
이곳은 마탑의 입구와는 달리 거래만을 위해서 따로 만들어 둔 문이었는데 안으로 들어가니까 마치 은행이나 백화점처럼 화려하고 깔끔하게 꾸며진 곳이 나왔다.
조용하면서도 차분하게 가라앉은 분위기 때문에 아마도 이곳을 처음 이용하는 용병이나 모험가들은 상당히 긴장하게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시설이라면 나는 지구에서도 여러 번 이용해 봤기에 상당히 편안한 느낌을 받았다.
느긋하게 실내를 돌아보며 안으로 들어가니까 나를 발견한 점원 한명이 친절한 미소를 머금으며 가까이 다가온다.
30대 초반의 남성인데 언뜻 보아도 전혀 단련하지 않은 것 같으면서도 몸 안에는 어느 정도의 마나를 가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마법사인가?
하지만 그가 가진 마나는 전혀 위협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았기에 만약 마법사라면 초급수준일 것 같았다.
“어서 오세요, 무엇을 하실 건가요?”
“마법재료를 판매하고 싶소.”
나의 말에 상담원은 아주 반가운 표정으로 웃으면서 나를 내실로 데려했다.
내실이라고 해도 개인실은 아니었고 넓은 방을 마치 사무실처럼 꾸며서 십여 개의 책상이 놓여 있었는데 그는 그중에 하나로 나를 안내했다.
나는 일단 마법자루에서 보관마법이 걸려있는 밀폐용기 하나를 꺼내서 보여주며 말했다.
“아이스트롤의 피요.”
“네에? 아이스트롤의 피요?”
그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그렇게 나의 말을 그대로 따라했다.
아이스트롤의 피를 팔라 왔다는 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그렇소.”
“자······ 잠깐 테스트를 좀 하겠습니다.”
그는 당황한 표정을 애써 감추고는 서랍 속에서 마법진이 그려져 있는 금속의 판을 꺼냈다.
그리고는 밀폐용기의 뚜껑을 조심스럽게 열더니 기다란 바늘을 써서 통속의 피를 한 방울 정도 떠서 그 금속판 위로 떨어뜨렸다.
그리고는 곧바로 다시 밀폐용기의 뚜껑을 닫고는 보관마법을 활성화시켰다.
으흠, 뭔가 어설프긴 하지만 그래도 체계적인 움직임이네.
상담원은 이어서 금속판 위의 마법진을 활성화 시켰는데 아마도 마법적인 확인과정을 거치는 모양이다.
그런데 그때 상담원의 오른쪽 뒤에서 어떤 중년인이 한명 가까이 접근해 온 것이 언뜻 나의 눈에 들어왔다.
그는 내가 판매하는 물건에 관심이라도 있는지 온 신경이 이쪽을 향해 있었지만 또 그런 자신의 행동을 들키기는 싫었는지 비스듬한 자세로 서서는 책을 읽는 척하고 있었다.
그런대 상담원은 그런 중년인의 행동을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하고 그저 자신이 할 일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조금 황당한 상황이었지만 나도 그냥 모르는 척하고 그냥 상담원이 하는 것에만 집중했다.
그런데 마법 확인을 끝낸 상담원은 감탄 섞인 음성으로 말했다.
“이······ 이건! 우와! 이 아이스트롤의 피는 정말로 아주 신선한 상태군요! 잡자마자 보관함에 넣었다고 쳐도 신선함이 아직 100%유지하고 있다니! 보관함에 넣은 지 아직 일주일도 안 지났나 봐요.”
“예, 뭐······.”
나는 그렇게 어정쩡한 대답으로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잡은 지 1년 넘은 것도 있고 다른 놈들도 최소 45일 이상은 지났지만 뭐 시간이 흐르지 않는 인벤토리에 보관했으니까 그렇게 보일수도 있겠다.
“일단 아이스트롤의 피를 구매하는 가격은 용기 하나에 90골드에서 100골드정도 인데, 이정도의 신선함이라면 제가 재량껏 110골드 까지 드리겠습니다. 어떻게······ 파실 거죠?”
“으흠, 비슷한 상태로 모두 열다섯 통을 가지고 왔소.”
“뭐라고!”
“끄악!”
아이스트롤의 피가 100%를 유지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안절부절못하며 서 있던 중년의 사내가 열다섯 통을 가져왔다는 내 말을 듣자마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나는 그의 상태를 대강 느끼고 있어서 그의 갑작스러운 끼어듦에도 별로 놀라지 않았지만 나를 상대하던 상담원은 그만 깜짝 놀라서 비명까지 지르고 말았다.
무척 우스운 상황이었지만 나는 고개를 살짝 돌려서 그들의 시선을 피하며 허탈한 웃음을 겨우 참았다.
다 큰 어른이 진짜 뭐하는 짓인지······, 나 원 참······.
“워······ 원장님?”
“커흠, 여기 이분은 내가 상담할 테니 제시군은 그만 나가보도록 하게.”
“아! 네······.”
원장이라는 사람의 말에 제시는 풀죽은 음성으로 그렇게 대답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뭐지? 왜 갑자기 끼어드는 거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 중년인을 바라보자 그는 밝게 웃으며 나에게 인사를 건네 온다.
“안녕하시오, 나는 제이난 마탑에서 구매상담부를 맡고 있는 원장 실버슨이라고 하오.”
“그렇소?”
뚱한 나의 표정과 대답에도 그는 여전히 미소를 유지하며
“사실 이 시기에는 아이스트롤의 피를 구하기가 상당히 어려워서 말이오. 대량 판매한다는 말을 들으니 신입 직원에게 맡겨 놓을 수가 없었소이다. 양해를 부탁드리오.”
“아! 그런 것이오?”
어쩐지 좀 많이 놀라기도 하고 버벅거리더니 그가 신입이었구나.
신입의 실수를 커버하기 위한 움직임이라면 뭐 이해할 수 있지.
내가 회사를 다닐 때도 그런 일은 일상다반사였으니까.
“모두 열다섯 통이라고 하셨소? 그것들의 신선도도 모두 동일한 수준이오?”
“그건 내가 대답하는 것보다 아무래도 직접 확인하시는 게 좋겠소.”
그는 내가 차례로 꺼내놓은 밀폐용기들을 열어서 그대로 마법을 사용해서 상태확인을 했다.
상담원처럼 마법진이 적혀있는 도구를 사용하지 않고 그냥 간단한 수인만으로 확인했기에 아까의 상담원보다는 훨씬 더 빠른 확인이 가능했다.
아마도 제법 높은 수준의 마법사인 모양이다.
피의 신선도에 상당히 만족한 그는 열다섯 상자를 모두 판매하는 조건으로 한 상자 당 130골드씩 총 1950골드를 제안했다.
그것은 그냥 상단에 판매하는 것보다 무려 750골드가 더 높아진 판매가였다.
거기에다가 아이스트롤의 마석 3개의 값으로는 600골드를 받았다.
이것도 실제로 측정된 마석의 크기와 밀도에 따르면 개당 170골드에서 180골드 사이의 가격이 산출되었는데 이 마석이 피와 함께 적출한 것임을 확인하고 조금 더 높게 책정해 준 것이다.
그래서 피와 마석의 총 판매대금은 모두 2550골드였다.
이쯤 되면 사실 이제 나는 더 이상 돈에 연연하지 않아도 되는 수준이 되기는 했다.
매일 1골드씩 써도 10년 안에는 다 쓰지 못할 정도로 엄청난 돈을 모아버린 것이다.
하지만 어차피 돈이라는 것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이니까.
마탑에서의 일을 끝내고 여관으로 돌아온 나는 조금 휴식시간을 가진 후에 5시쯤 간단하게 저녁을 먹고는 다시 말을 몰아서 로이안성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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