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료
《지금 생각해보면 참 멍청한 짓이긴 했지만, 그래도 어차피 죽을 목숨, 이렇게 보내는 것도 꽤 나쁘진 않은 것 같다. 물론 여기서 죽어봐야 남는 거라곤 저 놈들과 비슷한 모습의 괴물들 뿐이겠지만, 아직 시간은 충분히 있다. 비록 퀘퀘한 지하실에 갇혀있어 저 망할 깜빡이는 전등처럼 정신이 잠깐잠깐 나가버리고 있긴 해도, 적어도 나보다 설쳤던 최성민, 이 약해빠진 새끼보다는 더 버텨낼 자신이 있다. 그나저나 이 놈. 이젠 내가 누군지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날뛰기 시작했다. 망할 새끼··· 누구 때문에 이 지랄이 난건데··· 당장 죽여버리고 싶긴 해도 총소리가 나면 필시 괴물새끼들이 들이닥칠게 뻔하다. 여긴 그야말로 놈들의 본거지나 다름없는 곳이니까. 아마 운이 나쁘다면 최성민, 저 개자식이 내지르는 고함 때문에 걸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망할... 저 놈이 먼저 뒈지든지 내가 먼저 뒈지든지, 어쨌든 결정은 해야겠군. 어차피 식량도 없고 마실 물도 다 떨어져가고 있으니까. 솔직히 저 입에 들어가는 것들을 죄다 끄집어내고 싶은 심정이다. 도움도 안될 바에야 차라리 굶으라지. ···어쨌든, 다시 나갈 때까지 쥐 죽은 듯 숨어있는게 지금으로썬 아주 좋은, 아니, 유일무이한 방법이다.
그러고보니, 꽤 운이 좋았지. 설마 누가 거실에다 통로 같은 걸 만들어놨다고 생각하겠어? 시체들만봐도 그냥 평범한 가족들 같아보였는데. 굳이 이런 비밀 통로까지 만들어야할 이유가 있었을까? 그 할밴가? 꽤 볼품없이 뒈져있는 늙다리. 얼굴만 봐선 젊었을 때 돈놀이 좀 해봤을 것 같던데... 딱 봐도 도망칠 상이더만. ···젠장, 이런 곳에 쳐박혀있으니 쓸데없는 망상만 늘어나잖아. 얼른 탈출이나 해야지. 뒷뜰로 통하는 문을 가로막은 저 덩치 큰 늑대. 일단 저것부터 어떻게 해야돼. 아, 빌어먹을··· 또 눈이...》
이 후에도 갖가지의 잡담들이 마치 낙서처럼 죽죽 그어져있는 수첩에게서 마침내 시선을 뗀 한서준은 기대한대로 지하실로 내려갈 수 있는 또다른 방법을 고스란히 뇌에 아로새겨낸 뒤, 수첩을 왼쪽 건빵 주머니에 넣어두고 다시금 내부를 샅샅히 둘러보았다.
유일하게 남아있는 왼쪽 눈을 이리저리 굴려가며 조금이라도 의심되는 부분이 있으면 곧장 그곳으로 기어가 수차례 매만지기를 반복하던 한서준이 수첩의 내용대로 비밀 통로라 생각되는 부분을 발견한건 그로부터 약 다섯 번의 착오가 있은 후.
운 좋게 눈을 스쳐지나간 새카만 잿물이 바닥을 장식한 반들반들한 대리석의 특정 부근 사이로 꿀떡꿀떡 흡수되어감을 정말 미묘한 차이로 알아챈 것이다. 수류탄에 맞고 날아간 몬스터들의 파편들로 가득한 그 부근에만 이상하리만치 새카만 잿물이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는 것은 물론, 잿물이 번져나간 곳치곤 유독 잿빛으로 물들여지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 덕에 흡사 포위를 당한 형태로 둘러싸여져 있어 언뜻보면 다른 곳과 별로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보여지고 있었으니 그가 눈치를 못챈다는 것도 마냥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으나, 사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금방 그 미묘한 차이를 알아챌 수 있을만큼 허술한 카모플라쥬이기도 했다.
한서준은 서둘러 그쪽으로 기어가 사람 한명이 들어갈만한 크기의, 정확히는 대리석 한면을 죄다 뒤덮은 몬스터들의 조각조각을 두 팔로 한꺼번에 쓸어버린 뒤, 그제서야 선명해진 다른 대리석과의 경계면을 더듬어대다 이윽고 손가락 몇개가 들어갈만한 구멍을 찾아내곤 망설임 없이 왼팔에 잔뜩 힘을 불어넣었다.
다행히 정문 쪽 창고의 그 무식한 철제문과는 달리 '드그그극' 소릴 내며 천천히 들어올려지는 대리석의 벌려진 틈 사이로 다급히 몸을 틀어 오른쪽 어깨를 집어넣은 그는 한계까지 도달해 부들부들 떨어대는 왼손을 서둘러 대리석 안쪽으로 뻗어내 묵직한 고통을 선사하는 대리석의 무게를 어깨에서 절감시키고, 자칫 쑥 빠질 것만 같은 가파른 계단 위엔 공기총을 지지대로 세워둠으로써 찍어누르는 어마어마한 대리석의 중압감도 다소 감소시킨 다음 천천히 몸을 앞으로 밀어내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듯, 조금씩조금씩 입을 벌려가는 대리석과 더불어 점차 눈 앞으로 다가오는 엄청난 경사면의 계단을 공기총으로 대신 디뎌가며 떨어지지 않도록 중심을 잘 잡아가던 그는 돌연 심한 통증을 호소하는 오른팔과 깨져나갈 것만 같은 알싸한 고통을 전해다주는 어깨의 담담한 아우성에 그만 힘이 쭉 빠져버리고 말았으나, 바로 그 순간 몸을 사정없이 구겨버려 계단에 집어던졌기에 다행히 하반신이 대리석 사이에 낑기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허나 '쿵' 귓속을 먹먹하게 만드는 커다란 굉음과 함께 전신을 가로지르는 생생한 고통이 선명하게 뇌 속을 긁어내고 있음에, 빠르게 굴러떨어지는 몸을 멈춰세우려 공기총을 바닥에 거의 메다꽂듯 박아대던 그는 어느순간 '콰직' 하는 소리와 함께 반항할 수 없는 마찰력에 의해 삽시간에 무게의 주축으로 변한 공기총에 매달려 한차례 크게 몸을 회전시키고나서야 간신히 구르는 것을 멈춰세울 수 있었다.
- 작가의말
4차 수정 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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