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올힘법사의 서재입니다

내 몸 안의 블랙기업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공포·미스테리

완결

올힘법사
작품등록일 :
2021.05.05 08:35
최근연재일 :
2022.02.05 18:40
연재수 :
300 회
조회수 :
13,248
추천수 :
327
글자수 :
1,661,802

작성
21.11.27 07:15
조회
20
추천
1
글자
12쪽

그릴 것은 너무 많은데 하얀 종이가 너무 작아서 (2)

DUMMY

(수원역 내 백화점)


오전 10시 30분, 검은 모자를 쓰고 최대한 모습을 감춘 채 영부는 수원역 내에 있는 한 백화점에 도착했다.


이곳에 가면 가발을 전문으로 하는 가게가 하나 있다. 중년의 여성들 중 갱년기가 오고 여성호르몬이 줄어들면서 남성형탈모가 오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주 고객이 중년 여성들이라고 한다. 물론, 남자가 고객으로 간다 해서 안 될 것은 없다.



"고객님 모발이 곱슬기가 있어서, 제 생각엔 이게 잘 맞을 것 같은데요."


가게에는 이미 손님 한 명이 와 있었다. 중년의 여성이었는데, 특이하게도 뒷머리가 잔뜩 빠져있었다. 아마 부분가발을 살 생각인 것 같다.


"처음 오셨나요?"


가게를 둘러보는 영부를 발견한 한 직원이 그에게 다가왔다.

잠깐 동안의 상담이 끝나고 직원은 그에게 말했다.


"음, 부분가발을 하시면 될 것 같은데요."


직원이 영부의 상태를 진단해주자, 영부는 속으로 울상을 지었다.

자기 또래 남자들 사이에서 가발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 텅 빈 머리를 감출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그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자부심이나 다름없었다.


헌데 이제 그도 영락없는 흔한 아저씨가 되고 만 것이다.

최대한 실망한 티를 내지 않으려 애쓰며, 영부가 직원에게 물었다.


"부분가발 말고, 머리를 심는 건 안 되겠습니까?"


직원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물론 그 방법도 있긴 하지만, 그 방법이 모든 분들에게 맞진 않아서요. 요즘은 가발도 티나지 않게 잘 나와요! 예전처럼 촌스럽고 티나는 가발이 아니거든요. 이거 한 번 써보시겠어요? 고객님 모발색이 워낙 예쁘셔서 찾기 어려웠어요. 한 번 착용해보세요!"






한편, 황대근은 꿈을 통해 다시 영부의 몸 속으로 들어갔다.

배가 상당히 고프긴 했지만, 아침메뉴가 간에 기별도 가지 않을 묽은 팥죽이었던지라 슬프진 않았다.


"다 퇴근했나 보군."


영부가 한참 활동할 시간이라 그런지 드림팀에는 직원들이 없었다.

이번에는 꿈 속에 갇히지 않았다. 확실했다.


'레이지 말대로 영부가 깨어있을 때를 노려야 하는 건가.'


인간들이 잠을 자지 않고 활동하는 때, 즉 깨어있을 때에는 꿈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꿈이 재생되는 과정은 생각보다 매우 까다롭고 복잡한 편인데, 인간들은 대체로 눈치채지 못하겠지만 잠을 자지 않고 깨어있는 순간에도 꿈이 재생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현상을 보통 '멍 때리기'라고 부른다.



멍 때리는 것이 무슨 꿈을 꾸는 것이느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멍 때리는 순간 인간들은 주위를 잘 살피지 못하고 주위 소리도 제대로 듣지 못하게 된다.

주위에서 큰 소리를 내어 '너 뭐 하느냐'라고 물어야만 그제서야 주위를 파악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멍 때리는 동안 인간들은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들의 몸 속 회사에서는 자동적으로 폐기된 꿈을 처리하느라 바쁜 일상을 보내게 된다.

그렇게 되면, 인간들의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복잡하고 자잘한 생각 따위는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인간들은 멍 때리는 행위를 하며 영감을 얻기도 한다. 멍 때리는 것이 폐기된 자잘한 꿈과 내면의 무의식을 처리하는 일종의 분류과정이다 보니, 멍 때리는 과정에서 꿈이나 무의식 등의 재료를 통해 영감을 얻을 수도 있는 것이다.


평소에 멀쩡하니 깨어있을 때는 생각지도 못했던 번뜩이는 아이디어 말이다.


'됐어, 일단 들어오는 건 성공했으니까 케어를 찾아봐야지.'


어쨌거나 황대근은 폐기된 꿈을 통해 꿈 속을 빠져나와 영부의 몸 속 회사에 발을 들일 수 있었다.

드림팀 내부에는 아주 커다란 화면이 하나 있었다. 그 화면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Cureent mood : spacing out]


영부가 현재 무얼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현재의 영부는 생각하기를 멈추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뭐 입을 만한 게 없나?"


황대근은 주위를 둘러보며 뇌부서 특유의 분홍색 가운을 찾았다.

드림팀은 뇌부서에 포함되어있는 팀이다. 즉, 뇌부서 직원들만이 입을 수 있는 분홍색 가운이 있을 터였다.

그 전통은 대근건설만 포함될지, 아니면 영부의 몸 속 회사도 포함될지는 모르겠지만 황대근은 드림팀을 샅샅이 뒤졌다.


"역시, 가운이 있었어."


약 5분 정도 뒤진 끝에 그는 분홍색 가운이 잔뜩 걸려있는 옷장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영부의 몸 속 회사도 뇌부서가 제일인 게 틀림없다.


"조금 깜찍해진 기분이 드는데. 아니, 끔찍."


황대근은 귀여운 뇌그림이 그려진 분홍색 가운을 걸친 후, 최대한 뇌부서 직원처럼 보이도록 거만한 표정을 짓더니 드림팀을 빠져나갔다.






(대근건설 - 제 1건물 브레인 - 사장실)



"네가 봉산탈춤의 대가라며?"


헨리가 쉐도우를 비웃었다.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 심지어 반나절도 지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쉐도우가 뇌부서 구내식당에서 춤을 췄다는 소문은 순식간에 대근건설 전체로 퍼져버렸다.

헨리는 좋은 건수를 잡았다고 생각했는지 흐느적거리는 춤을 추며 쉐도우를 놀려댔다.


"이야, 춤하고는 우리 은하랑 다른 은하의 거리 만큼이나 먼 삶을 살아온 놈이 갑자기 웬 봉산탈춤? 나 몰래 그런 음침한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니, 나한테도 어디 보여주지 그래?"


헨리가 쉐도우 앞에서 폴짝폴짝 뛰어다니며 그를 놀렸지만, 쉐도우는 무시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굳은 표정으로 부서진 검은 크레파스를 매만질 뿐이었다.


크레파스가 작동하지 않는다. 그의 말을 듣지 않는다. 대체 왜 이런 것일까? 왜 작동하지 않는 것일까?


"크레파스 갖고 뭐하냐? 그림 그리게?"


헨리의 질문에 쉐도우가 대답했다.


"그림을 그리려고는 했는데, 그려지지 않는군."

"그건 네버랜드 크레파스 아닌가? 그 크레파스를 네가 어떻게 갖고 있는 거지?"

"주웠어."

"주웠다고?"

"그래. 너도 이게 어떤 크레파슨지는 잘 알고 있지? 왜 작동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알고 있나?"

"그 크레파스의 원동력은 상상력이야. 그게 없으면 작동하지 않아."


쉐도우는 어이가 없었다. 자신만큼 상상력이 풍부한 놈이 또 누가 있다고.

13년 전 황대근의 친부모를 죽였을 때부터 지금까지 자신의 상상력 풍부한 계획이 버젓이 존재하는데, 무슨 헛소리인가 싶었다.


파직—


헨리의 참견을 무시한 채, 영부의 몸 속으러 들어가려 하던 쉐도우는 순간 날카로운 무언가가 머리 속을 스치는 것을 느꼈다.


'젠장할, 영부 새끼 또 멍 때리고 있잖아? 내가 머리 좀 빠진 건 신경 쓸 것 없다고 그렇게 일렀는데도 저 지랄을 해? 하여간 인간들은 이해가 안 돼. 머리가 뭐 그리 중요하다고 저 지랄들이야? 인간들은 너무 감성적이라 탈이라니까.'


세포들이 뭘 알겠는가. 머리카락 한올한올이 얼마나 소중한지, 고개를 흔들었더니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얇은 머리카락들을 보는 그 심정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아마 세포들은 평생 모를 것이다.


'상상력이 원동력이라고? 이 크레파스가? 참나, 말도 안 되는 일이지. 내 머릿속에 이렇게 그릴 것들이 많은데 무슨 헛소리야. 난 할 수 있지. 암, 그렇고 말고.'


소파에 앉아 궁시렁대는 쉐도우를 보며 헨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현실의 어두움에 찌든 어른이 뭔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린다고. 쯧, 그려봐야 허구한날 돈이나 춘화 따위나 그려먹겠지.'


정도의 차이는 존재하겠지만 사실 누구에게나 상상력과 창의력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허나, 누구나 그 두 가지를 마음대로 다룰 수는 없다.

각자 개인에게 허락된 도화지는 한정되어있으니까.


특히나 현실에 찌들어버린 어른들은 더더욱.






황대근은 깜짝 놀랐다. 뇌부서 직원이라는 직위가 이토록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는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 누구도 그가 어디를 가든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먼저 가라고, 문을 열어드리겠다고 권할 정도였으니까.


대근건설에서는 메모리아부서 직원인 그가 지나가면 흘깃거리며 기분 나쁜 눈초리를 보내왔는데, 이곳은 아니었다.

모든 직원들이 분홍색 가운을 입은 그에게 존경의 눈빛을 보냈고, 또 선망의 눈빛을 보냈다.


'내가 어딜 가도 아무도 터치 안 해서 좋군.'


처음 누려보는 짜릿한 권력의 맛을 최대한 즐기며 그는 감옥으로 갔다.

물론, 그는 감옥이 어디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근처를 지나다니던 직원들에게 감옥의 위치를 물어보았다. 그들은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친절하게 대답해주었다.

모든 것은 일사천리였다. 오늘따라 운이 좋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따라오십시오."


황대근이 감옥에 도착하자, 회색빛이 도는 얼굴을 한 남자 간수 하나가(키는 왕근만했다) 황대근을 케어가 갇힌 곳으로 데려갔다.

케어가 갇힌 곳은 지하에 있었는데, 무려 지하 4층에 감금되어있었다.


지하로 내려가면서 황대근은 주위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나중에 케어를 데리고 몰래 빠져나갈 비상구 같은 게 있나 확인해야 했으니까.


"여깁니다 상상용팀장님. 갇혀있기는 하지만 놈이 제법 거치니 조심하십시오. 철장 틈으로 팀장님을 공격하려 할 수도 있으니까요. 감방 열쇠는 제가 갖고 있겠습니다."


간수가 황대근을 상상용이라 부르자 황대근은 그제서야 자신이 입은 가운의 가슴께에 작은 글씨로 상상용이라 적혀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가운의 주인 이름이 아마 상상용인 것 같다.


"그냥 문을 열어줘요."


황대근의 말에 간수는 당황했다.


"네? 하지만 범인이 상상용팀장님께 해코지라도 하면...."


황대근은 고개를 빳빳이 쳐들었다.


"걱정하지 마시죠. 제가 명색이 뇌부서인데 저깟 범죄자새끼한테 당할 것 같습니까? 제가 그렇게 만만해 보입니까?"


역시,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황대근은 뇌부서 직원 역할을 제대로 해내고 있었다.


싸가지 없는 말투에 근거 따윈 찾아볼 수 없는 저 쓸데없는 자신감. 지금 당장 드림팀 배우 오디션을 본다 해도 무리 없어 보인다.


"아, 알겠습니다 상상용 팀장님."


뇌부서의 권력은 막강하다. 간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열쇠를 이용해 케어가 갇힌 감방의 문을 열었다. 그리곤 말했다.


"위험하니 제가 곁에 있겠습니다."


이 눈치 없는 간수 때문에 짜증이 올라온 황대근은 두 눈을 부라렸다.


"날 무시하는 거야, 지금?! 내가 누군 줄 알고?! 너 내가 누군 줄 알아?! 앙?! 너 연봉 얼마야? 내가 얼마를 받는 줄 알아? 뇌부서는 입사하자마자 1억만셀을 연봉으로 받아! 알아?!"


결국, 황대근의 진상짓을 감당하지 못한 간수는 죄송하다는 말을 연신 내뱉더니 감옥을 빠져나갔다.

간수가 정말로 빠져나갔는지, 그로부터 확실하게 멀어졌는지 확인한 황대근은 입을 쩍 벌리고 있는 케어에게 다가갔다.

그가 케어의 손목에 단단히 묶인 밧줄을 풀어주는 동안, 케어는 그를 향해 존경의 눈빛을 보냈다.


"와, 대근씨! 진짜 개싸가지 없어 보였어요! 대단하네! 한 대 치고 싶을 정도였다니까요?"


저게 과연 칭찬인지, 아니면 칭찬을 빙자한 쌍욕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지만 지금의 황대근은 그런 것 따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네네, 저 개싸가지 없습니다. 최고의 싸가지죠. 그보다 일단 좀 따라오십시오! 그만 처웃고!"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내 몸 안의 블랙기업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80 유전무죄 무전유죄 (3) 21.12.08 23 1 13쪽
179 유전무죄 무전유죄 (2) 21.12.07 19 1 12쪽
178 유전무죄 무전유죄 (1) 21.12.07 20 1 14쪽
177 은행은 우리의 친구인가 (5) 21.12.06 18 1 13쪽
176 은행은 우리의 친구인가 (4) 21.12.06 19 1 12쪽
175 은행은 우리의 친구인가 (3) 21.12.05 18 1 11쪽
174 은행은 우리의 친구인가 (2) 21.12.05 20 1 13쪽
173 은행은 우리의 친구인가 (1) 21.12.04 21 1 11쪽
172 느그 아버지 뭐하시노? (2) 21.12.04 20 1 11쪽
171 느그 아버지 뭐하시노? (1) 21.12.03 18 1 12쪽
170 화이트 크리스마스? 요즘 대세는 레드(blood) 크리스마스! 21.12.03 19 1 13쪽
169 걱정과 오지랖은 한 끗 차이 (4) 21.12.02 19 1 11쪽
168 걱정과 오지랖은 한끗 차이 (3) 21.12.02 20 1 12쪽
167 걱정과 오지랖은 한끗 차이 (2) 21.12.01 22 1 12쪽
166 걱정과 오지랖은 한끗 차이 (1) 21.12.01 20 1 14쪽
165 양심불량 (2) 21.11.30 21 1 12쪽
164 양심불량 (1) 21.11.30 20 1 13쪽
163 이젠 더 이상 비밀이 아니야 (2) 21.11.29 17 1 12쪽
162 이젠 더 이상 비밀이 아니야 (1) 21.11.29 17 1 12쪽
161 평안을 빕니다 21.11.28 21 1 12쪽
160 발등에 불 21.11.28 17 1 13쪽
159 잠이들고 말았어요 음음 21.11.27 21 1 12쪽
» 그릴 것은 너무 많은데 하얀 종이가 너무 작아서 (2) 21.11.27 21 1 12쪽
157 그릴 것은 너무 많은데 하얀 종이가 너무 작아서 (1) 21.11.26 20 1 14쪽
156 한 손에는 크레파스를 사가지고 오셨어요 음음 (3) 21.11.26 19 1 11쪽
155 한 손에는 크레파스를 사가지고 오셨어요 음음 (2) 21.11.25 17 1 12쪽
154 한 손에는 크레파스를 사가지고 오셨어요 음음 (1) 21.11.25 18 1 12쪽
153 Caution! 머리 조심! 21.11.24 18 1 12쪽
152 라헬의 여종들(his slaves) (2) 21.11.24 22 1 14쪽
151 라헬의 여종들(his slaves) (1) 21.11.23 25 1 1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