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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힘법사의 서재입니다

내 몸 안의 블랙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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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올힘법사
작품등록일 :
2021.05.05 08:35
최근연재일 :
2022.02.05 18:40
연재수 :
300 회
조회수 :
13,305
추천수 :
327
글자수 :
1,661,802

작성
22.01.14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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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0쪽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3)

DUMMY

그날 밤, 안락원의 주방에서는 칼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점점 날카로워졌다. 아마, 칼이 잘 갈리고 있는 것일 터다. 한편, 노인들이 자는 수면실은 조용했다.


안락원은 스케쥴 시간이 정해져있다.

오전 6시 반에 기상, 일어난 후 약 한시간가량 자율운동,

7시 30분부터 9시까지 아침식사.

9시부터 점심때까지는 자율시간.

12시부터 1시까지 점심식사 후 저녁 먹기 전까지 자율시간.

그리고 저녁을 먹고 오후 9시 30분에 단체 취침.


자율시간은 말이 자율시간이지, 사실상 지옥의 시간이나 다름없다.

거동이 불편하고 말도 안 통하는 노인네들을 한 곳에 모아두고 알아서 하라니, 이게 말이 되나.

심지어는 혼자서 일어서지도 못하는 노인도 상당수였다. 왕씨할아버지는 그나마 상태가 좋은 편이었다.

아니, 상태가 멀쩡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그저 나이가 들었을 뿐이다.


끼이익- 끼익-


칼 가는 소리가 점차 잦아들었다.

그 덕에, 왕씨할아버지가 공책에 끄적이는 소리가 수면실을 가득 메웠다.

숨죽이며 쓰고 있으니, 그 소리가 밖까지 들리지는 않을거라 믿었다.

글씨가 삐뚤빼뚤하다. 늦깍이로 배운 한글을 애써 공책에 옮겨적는다. 자세히 보니 남자아이에게 주고 싶은 듯 하다.


[내 옆에 있던 김할매가 죽었다.]


할아버지가 글을 적다가 멈칫한다. 침을 삼킨다.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애써 차오르는 감정을 참아내는 모습이다.


[나 역시, 언제 죽을지 모른다.]

[늙은이에게 소원이 있다면, 이곳을 나가는 것이다.]

[청계천도 좋다. 서울역도 좋다. 차라리 나는 노숙자가 되기를 원한다.]

[이곳은 지옥이다. 먹을 것 주고 입을 것 주고 잘 곳 주는 지옥.]


꿀꺽. 글을 쓰던 왕씨 할아버지는 침을 삼키며 오른쪽 침대쪽을 힐긋 보았다. 아무도 없다.


[조금 전, 보호사들이 내 오른편에서 잠을 자고는 했던 박씨 할배를 데려갔다.]

[칼 가는 소리가 들려온다.]

[오늘도, 잠 자기는 글렀다.]







다음 날 8월 7일 일요일 점심시간 전, 황대근은 한 형사와 마주쳤다. 황석현이었다. 둘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황대근이 안락원을 기웃거리는 것을 보자, 형사의 본능으로 그것을 수상히 여긴 황석현이 말을 건 것이다.


"남자애라고?"

"제가 아는 어린 남자애 한 명 있거든요. 걔가 여기서 만나자고 해서 잠깐 왔는데... 아마 까먹은 모양이네요. 좀 더 기다렸다가, 안 오면 걍 가야죠."

"남자애면, 어린애 말하는 거냐?"


황석현은 어제 창문 밖으로 보았던 아이를 떠올리며 물었다.


"네가 그 애 친형이냐?"


'네가 그 애'라고? 황대근은 순간 황석현을 의심했다.


내가 누굴 이야기하는지 알고 있는 걸까?


"음, 아뇨. 어쩌다 친해진 사이랄까요."


황대근의 대답에 황석현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아무튼, 질문 하나만 하자. 괜찮겠냐?"

"네. 상관없어요. 오래 걸리지만 않으면."

"오래 걸리지는 않아. 질문 몇 개만 할 거니까."

"하나만 하시는 거 아니었어요?"

"꼬치꼬치 캐묻지 마라. 피곤하니까. 아무튼, 내가 이곳에 어제 왔었는데 말이다, 주방쪽에서 수상한 움직임이 보이더구나. 혹시 뭐 아는 거 있니?"


황대근은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저는 잘 몰라요. 안락원에 가본적이 없으니까."

"그럼 요 주위만 돌아다녔군?"

"네. 제가 여길 올 이유는 없으니까요."

"혹시 그 남자애한테서 안락원의 주방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건 없냐?"

"주방이요?"

"그래. 주방이든,음식이든, 암튼 그런 것들하고 관련된 것들 말이다. 아는 거 있냐?"


황대근은 잠시 고민하더니 대답했다.


"그러고보니까, 무슨 얘기를 들은 것 같기는 하네요."

"그래? 무슨 얘긴데?"

"안락원 노인분들이 밥을 잘 안 드시는 것 같다고요."

"..밥을 잘 안 먹는다고?"

"네. 그 남자애가 친하게 지내는 할아버지 있거든요? 왕씨 할아버지인가? 남자애가 할아버지가 먹는 식판에 손을 가져다댔더니, 그분이 소리쳤대요."

"뭐라고 소리쳤는데?"

"이런 거 먹는 거 아니라고요."


황석현에게 수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닌 듯 하다. 얼마 전, 김씨 할머니의 유족들이 했던 얘기와 일맥상통하는 것 같으니까.

노인네들이 밥을 안 먹으니 얼굴들이 그리 죽상들이었을 터다.


"고맙다. 시간 뺏어서 미안하다."

"별 말씀을요."


그렇게 두 사람은 헤어지는 듯 해 보였다.

안락원 입구로 들어가던 황석현은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무언가 생각이 난 듯 해 보인다.


"잠깐, 저기 학생!"


황석현이 저만치 걸어가고 있던 황대근을 불러세웠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물어보자! 우리 어디서 본 적 있지 않나?"


황대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초면인데요."







(경기도 평택시 - 안락원)



황석현은 안락원의 2인 수면실로 갔다. 그곳에는 왕씨 할아버지와 황석현 뿐이었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멍하니 응시하는 할아버지에게 황석현이 물었다.


"왕씨 할아버지라고 하셨죠? 여기 계시던 할아버지는 어디 가셨습니까?"


황석현은 왕씨 할아버지 옆에 있는 빈 침대를 가리켰다.

그 침대에는 아마 침대의 주인이었을 노인의 이름과 생년월일 등이 적혀있어야 할 터인데, 아무것도 없었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할아버지, 알고 계시나요?"


황석현이 끈질기게 질문했지만, 왕씨 할아버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입을 꾹 다문채, 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황석현은 의아했다. 안락원이 무슨 비밀집단도 아니고, 왜 죄다 하나같이 행동을 이딴식으로 하는 걸까.


다혈질 성격의 황석현은 순간 들고 있던 수첩을 내동댕치치고 싶다는 욕구가 강렬하게 일었으나, 애써 참았다.

여기서 화를 내면 안 된다. 난 더 이상 혈기왕성한 2,30대 청년이 아니니까.


"할아버지."


황석현이 목소리를 낮춘 채 할아버지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할아버지. 저한테 얘기해주셔도 됩니다. 저는 증인들의 비밀을 잘 지키니까요."


황석현이 그동한 형사생활을 해온 내공을 이용해 할아버지를 회유하려 무진 애를썼지만, 헛수고였다.

할아버지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분명 자기 목숨이 위험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황석현은 확신했다.


'내가 형사생활하면서 이런 경우 한 두 번 본 게 아니지. 범인한테 해코지 당할 까봐 진술을 거부하거나 거짓진술을 하는 놈들을 말이야.'


허나 여기까지 왔는데, 포기할 수는 없었다.


'안전을 보장해 줘야겠어. 절대 위험할리 없다고. 지켜주겠다고.'


포기하지 않고, 황석현이 재차 말했다.


"할아버지께는 아무런 피해도 가지 않도록 약속하겠습니다. 할아버지가 위험에 처하지 않도록, 제가 지켜드릴게요."


황석현의 믿음직한 목소리에 왕씨 할아버지의 두눈이 떨리기 시작했다.

황석현의 얼굴은 쳐다보지도 않고 천장만 바라보던 할아버지는, 천천히 시선을 황형사에게 돌렸다.


그리고 그제서야, 드디어 입을 열었다.


"여기, 여기 주방에.... 주방에..."


할아버지의 목소리는 떨렸다. 오랫동안 정상적인 '대화'라는 것을 하지 못한 사람처럼 말하는 폼이 어색해 보인다.


"주방에 뭐가 있습니까?"


황석현이 도와주자, 할아버지는 용기를 내어 겨우 말을 이었다.


"주방, 주방에.... 커다란 고기, 커다란 고기가.... 떫은 맛이 나고, 역겨운 고기가....!"


황석현은 할아버지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여기서 썩은 고기를 취급하나? 유통기한 지난, 폐기처리해야 하는 고기들을?

실제로 구석에 있는 학교나 이런 요양시설에서 유통기한 지난 식자재료를 싼값에 얻어 활용하거나 음식을 재활용하는 경우가 종종있다.


황석현은 물었다.


"여기서 식자재를 제대로 사용하지 않는가 보군요? 걱정마십시오. 저희가 신고...."


답답한지 할아버지는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야...! 여긴.... 여기 고기는 사실.... 인ㄱ...!"


벌컥-


그때, 보호사 하나가 수면실로 들어왔다.

보호사의 손에는 따끈따끈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식판이 들려있었다.


"할아버지~! 수면실에서는 식사하시면 안 된다니까요~! 오늘만 봐드리는 거예요~! 할아버지 자녀분들이 할아버지를 이제 집에 데려가시겠대요. 기분 좋지요, 할아버지? 이제 영원히 귀여운 자녀분들을 볼 수 있어요!"







(대근건설 - 메모리아부서 구내식당)



한편, 메모리아 4인방도 점심을 먹고 있었다. 오늘의 점심메뉴는 삼계탕이었다.

그래서일까, 4인방의 입꼬리가 귀에 걸려있다.


"세상이 망하려나봐요!"


삼계탕의 다리부분을 뜯어먹으며 혜윰이 말했다.


"왜 이렇게 맛있지? 이해가 안 되네!


그동안 얼마나 구내식당 밥이 맛이 없었으면 저런 반응일까. 안타깝다.


"인간 황대근이 이번에 안락원에 대해 관심을 좀 갖고 있는 듯 한데, 뭔 일 일어나지 않겠죠?"


삼계탕의 진한 국물을 수저로 떠먹으며 황대근이 말하자, 혜윰이 대답했다.


"글쎄요, 뭔 일 일어나지 않을까요? 대근이가 가는 곳마다 사건이 터져서요. 뭔 유명일본탐정만화 주인공도 아니고. 가는 곳마다 누가 죽네요."

"저는 그 왕씨 할아버지라는 그 분이 걸립니다. 왠지 걱정스러워요."


레이지가 말하자 황대근이 그에게 공감을 표했다.


"저도 그렇습니다. 남자아이가 인간 대근이한테 했던 말이 영 신경쓰여요."


[왕씨 할부지가 그러는데, 안락원 고기는 너무 맛이 없대요!]

[고기맛이 떫다고 했는데, 떫은 게 무슨 맛인지 알아요, 형?]

[아~ 그럼 쓴맛하고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되는 거네요?]

[할아버지가 그러는데, 자긴 여길 빨리 빠져나가고 싶대요.]

[근데 할아버지는 나랑 똑같아요.]

[나처럼 가족이 없어요. 할아버지 외톨이에요.]

[그런데, 보호사 형누나들이 언제부턴가 할아버지한테 가족들이 데려올 거라고 한대요.]

[할아버지가 나한테 거짓말한 걸까요?]

[아니에요. 할아버지는 나한테 거짓말하실 분이아니에요.]

[우리 할아버지, 완전 좋은 할아버지에요. 진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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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7 왕자의 발악 (2) 22.01.20 12 1 11쪽
266 왕자의 발악 (1) 22.01.20 12 1 11쪽
265 인생은 한 방 22.01.19 13 1 11쪽
264 메모리의 아르바이트 (3) 22.01.19 15 1 10쪽
263 메모리의 아르바이트 (2) 22.01.18 11 1 11쪽
262 메모리의 아르바이트 (1) 22.01.18 16 1 10쪽
261 왕의 분노 (2) 22.01.17 20 1 11쪽
260 왕의 분노 (1) 22.01.17 14 1 12쪽
259 아이를 위한 나라도 없다 (2) 22.01.16 16 1 10쪽
258 아이를 위한 나라도 없다 (1) 22.01.16 12 1 11쪽
257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5) 22.01.15 12 1 10쪽
256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4) 22.01.15 12 1 11쪽
»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3) 22.01.14 14 1 10쪽
254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2) 22.01.14 13 1 11쪽
253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1) 22.01.13 14 1 11쪽
252 안락원(安樂院) (3) 22.01.13 13 1 11쪽
251 안락원(安樂院) (2) 22.01.12 12 1 11쪽
250 안락원(安樂院) (1) 22.01.12 15 1 10쪽
249 인페르노(inferno) (4) 22.01.11 16 1 11쪽
248 인페르노(inferno) (3) 22.01.11 15 1 11쪽
247 인페르노 (inferno) (2) 22.01.10 15 1 10쪽
246 인페르노 (inferno) (1) 22.01.10 17 1 11쪽
245 더러운 배신자 (3) 22.01.09 19 1 11쪽
244 더러운 배신자 (2) 22.01.09 17 1 12쪽
243 더러운 배신자 (1) 22.01.08 19 1 11쪽
242 악인 혹은 선인 (3) 22.01.08 21 1 12쪽
241 악인 혹은 선인 (2) 22.01.07 18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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