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갯벌바람 님의 서재입니다.

마법소녀 유리하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라이트노벨

유모세
작품등록일 :
2016.05.18 00:04
최근연재일 :
2016.12.28 01:54
연재수 :
5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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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2.21 0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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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쪽

아픔을 넘어서

DUMMY

리하를 바라보는 모민의 눈빛에는 안도가 섞여 있었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 무슨 의도인지 리하는 알 수 없었다. 괴물의 가식일까? 아니면 속임수?

무엇이 됐든 이제 그 진짜 속마음을 알아볼 것이다.


“당신이 우리에게 우호적이라는 걸 증명하고 싶으면 그 두 번째 단계로서 유리하 씨에게 협조해주시기 바랍니다.”


하셀의 사무적인 말투에 리하는 그녀를 짜증스럽게 곁눈질했다. 나서지마, 귀찮아.


“제가 당신에게 어떤 협조를 하면 될까요?”


그리고 모민의 조심스런 질문이 있었다. 그 또한 마음이 매우 불안한 듯했다. 하지만 지금 모민의 상태나 감정 따위, 안중에도 없는 리하는 만년필에 정제석을 끼우고 클린 미러의 마법을 준비하고 있었다.


“나래가 죽었어요.”


리하는 날카로운 눈으로 모민을 쏘아보았다. 인간의 형상을 가진 그 프레네티코는 리하를 향해 유감이라는 표정을 지어보였고, 리하는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한 마음을 억누르며 그를 향해 말했다.


“당신이 우리 앞에 나타났을 때, 나래가 그 괴물들에게 붙잡혀 갔죠.”

“알고 있어요.”

“알아요? 알고 있다고? 그럼 대답해요. 왜 그때 우리 앞에 나타난 거죠? 왜 나래가 죽도록 내버려뒀나요? 왜 나래를 죽인 거예요?!”


리하는 마지막에서 기어이 분노를 터뜨렸다. 모민은 침착하라는 듯 리하에게 두 손을 들어보였다.


“당신을 구하러 간 거예요.”


그리고 모민이 대답한 말에 리하보다 피니엘이 더 놀라버렸다. 나래가 목숨을 잃었던 그때 피니엘 또한 같은 자리에 있었기에, 그녀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리하를 구하러 간 거라고요?”

“믿지 못하겠지요. 하지만 진실입니다. 난 생존자가 있다는 연락을 받고 그들을 구하러 간 것뿐이에요. 그게 당신과 유리하 씨라는 건 몰랐지만요.”


이어진 모민의 대답에 피니엘이 다시 다급하게 물어보았다.


“생존자가 있다는 연락을 누구에게 받았죠?”

“데이비드 오언.”


모민의 세 번째 대답은 피니엘에게 또 한 번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프레네티코가 사람을 구하러 왔다는 말도 믿지 못할 판인데, 심지어 그걸 데이비드 오언이 알려줬다니?

리하는 차가운 눈빛 그대로 모민을 쏘아보며 말했다.


“그 말을 지금 믿으라는 건가요?”

“증명할 수 없어 안타까워요. 하지만 진실이에요, 나를 믿어줬으면 해요.”


모민의 간절한 표정에서 안타까움과 억울함이 함께 전해져왔다. 하지만 리하는 싸늘한 얼굴 그대로 만년필을 들어 그를 조준했다.


“내 앞에서 거짓말은 통하지 않아요.”

“알아요, 당신 또한 일족이라는 걸. 그럼 클린 미러로 내 마음속을 들여다볼 수 있을 테죠.”


모민 또한 일족과 그 마법을 알고 있는 듯, 리하의 애매한 말에도 그다지 궁금증을 드러내지 않았다.


“할 테면 해보라는 것 같네요.”

“숨길 이유가 없으니까요.”

“당신 말대로 난 지금 당장이라도 당신의 마음을 들여다 볼 수 있어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지나온 세월이 어땠는지, 품고 있는 속셈은 어떤 건지 전부 다.”

“말씀드렸듯 저는 유리하 씨에게 숨길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부탁하고 싶군요. 그 마법을 써서 제가 진심이라는 걸 알아주시기를.”


말을 마친 모민은 평온하게 눈을 감았다. 그것을 오히려 도발이라 생각한 리하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감추지 않고 바로 클린 미러의 마법을 사용했다.

지정한 상대의 마음을 파고 들어가 그가 지금 하고 있는 생각과 지나온 나날을 모두 들여다 볼 수 있는 이 마법은 곧 모민의 마음속 모든 것을 캐내어 리하에게 전달해주었다.


클린 미러는 모민의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성장과정마저 전해주고 있었지만 그런 건 리하의 관심 밖이었고, 가장 중요한 그 날의 일을 찾아 우선적으로 살펴보았다.

그로 인해 알게 된 건 리하에게 여러 모로 충격적인 일들이었다.


그녀가 의심하고 있던 것과 다르게, 모민은 사념체의 폭주나 프레네티코 침공에 직접적인 원인이 되는 존재가 아니었다. 아주 무관한 것은 아니나, 그가 사건을 일으킨 장본인 또는 중심에 있다고는 절대 볼 수가 없었다.

오히려 피해자에 가까웠다. 12년 전, 그는 모국인 방글라데시에서 운 좋게 해외 취업 알선을 받아 부푼 마음을 안고 미국에 건너갔다. 애리조나주 투손시 근교의 공장에 외국인 근로자로 취직하여 일을 하던 어느 날, 그는 어딘가에서 나타난 정체불명의 괴물들에게 납치되어 끌려가 하루아침 만에 신체 개조를 당했다. 자신의 의지대로 육체를 바꿀 수 있는 변신의 능력을 이식받은 것이었다. 변하고 난 후의 모습은 전설과 괴담에 나오는 늑대인간의 모습과 똑같았고, 그 후부터 그의 머릿속에는 시종일관 알 수 없는 속삭임이 들려오며 행동을 강제하려 들었다.

복종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는 그 강박관념과 초조함을, 모민은 12년 동안이나 참고 버텨내었다. 어떻게 그렇게까지 버틸 수 있었는지는 모민 자신조차 몰랐다. 그는 명령에 따르지 않는 자신을 제거하기 위해 뒤쫓는 다른 괴물들의 추격을 뿌리치면서 도망쳐 다녔고, 그렇게 세계를 떠돌아다니다 일족과 마주치게 되었다.


모민과 처음 만난 자는 데이비드 오언이었다. 그는 모민에게 안전을 보장하는 대신 자신과 일족을 도와줄 것을 조건으로 하여 계약을 맺었다. 원래도 소탈한데다, 현재 처하게 된 상황으로 인해 물질적인 욕구에 거의 관심이 없었던 모민은 데이비드에게 그저 조용히 살아가고만 싶다는 희망을 밝혔고, 데이비드는 소원대로 해줄 테니 자기 일족의 안위를 위해 힘써달라는 부탁을 해왔다. 괴물들이 지구에 쳐들어오기 전에 일족 내의 문제를 해결하고 사람들을 피난시켜야 한다면서 말이다.

데이비드는 모민에게 사념체 현상에 대한 것을 알려주었고, 이것을 뿌리고 다니는 자들의 체포를 도와 달라 했다. 모민은 그의 부탁대로 세계를 돌아다니며, 늑대인간의 힘을 사용해 사념체를 뿌리고 다니는 범인들과 맞서 싸우면서 데이비드가 그들을 검거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여기서 리하를 놀라게 헌 것이 하나 더 나왔다. 데이비드가 지목하고 모민이 앞장서서 잡아들인 그 범인이란 사람들 중에는 리하, 그리고 어머니인 캐시와 왕래가 있던 이들도 섞여있었던 것이다. 그들과의 연락이 어째서 끊겼는지 그 이유도 알 수 있었다. 모민에게 체포된 그들은 데이비드의 오언의 손에 의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음을 당했으니까.


그때까지 모민은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다.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린 것은 데이비드의 부탁으로 한국에 넘어와 일을 시작했을 때였다. 데이비드가 마지막 범인이라며 알려준 인물이 바로 캐시였고, 그녀는 다른 이들과 달리 강한 힘을 가지고 있으니 좀 거칠게 손을 써야 한다고 귀띔해주었다.

이때만 해도 데이비드를 철석같이 믿고 있던 모민이었으나, 그 사건이 있던 날 당일이 되자 주위가 심상찮게 돌아가는 걸 보고 의구심을 품게 되었다.


아침부터 사람들이 마구 자살을 하기 시작했을 때, 모민은 그것이 궁지에 몰린 범인 캐시가 사람들을 해치고 급히 에너지를 모아 달아나기 위해 그런 것인 줄로만 알았다. 한시라도 빨리 그녀를 저지하기 위해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들을 눈에 띄는 대로 막아내며 나아가던 도중 그 아수라장 한복판에서 리하와 마주치게 되었던 것이다.

리하를 처음 만난 모민은 자기 딸마저 악행에 끌어들인 캐시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생각은 마침내 캐시를 찾아 그녀와 직접 마주치고 나서야 아주 잘못된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지금까지 적대적이인 반응을 보였던 다른 일족들과 달리, 캐시는 그런 것 전혀 없이 그저 사람들을 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범인이라면 어째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구하고 있을까? 비록 데이비드의 지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녀에게 상처를 입혀 제압해두었지만 잘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데이비드 오언은 붙잡아둔 캐시를 모민의 눈앞에서 살해했다. 그것을 보고 모민은 더욱 충격을 받았다. 그녀를 체포하려던 게 아니었냐고, 그렇게 따져 묻자 데이비드는 본색을 드러냈다. 더 이상 알 것 없고, 그동안 수고 많았다면서.

화가 나 덤벼드는 모민을 데이비드는 아주 간단하게 제압했다. 다른 일족들은 물론, 그 캐시조차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강력한 마법을 사용해 그를 건물에서 내던져 버린 것이다.


모민은 자신이 그동안 데이비드에게 놀아나 그의 충실한 개 노릇을 해주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를 붙잡고 싶었지만 주위에는 수도 없이 자살하는 시민들과, 본격적으로 침공을 개시한 괴물들이 연이어 덮쳐왔기에 그럴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자신의 몸만 겨우겨우 건사하면서, 모민은 한국에 와 알게 된 일행들을 보호하기 위해 그들을 찾아갔다. 눈에 띄는 괴물들을 닥치는 대로 쓰러뜨려 시민들의 안전도 확보하려 했지만 혼자서는 매우 벅찬 일이었다.

홀로 고군분투하는 그에게 데이비드의 연락이 조롱처럼 닿았다. 다른 생존자들의 위치를 알려줄 테니 가서 한 번 구해보라고. 그들이 있는 곳에 내 위치가 어딘지 알 수 있는 힌트가 숨겨져 있다고.


모민은 자신의 일행을 안전한 곳에 데려다놓은 다음 그 생존자들을 구하러 갔다. 수많은 괴물들의 무리를 뚫고 도착한 그곳에는 아침에 만났던 유리하라는 소녀와 친구처럼 보이는 다른 두 소녀가 괴물들을 피해 달아나는 중이었다. 그 소녀들을 구하려했지만 이미 한 발 늦은 뒤였다. 그 중 한 명이 괴물들에 의해 목숨을 잃고 만 것이다. 조금만 더 빨리 왔더라면 구할 수 있었을 거란 죄책감이 들었지만 모민에게는 그런 감상에 젖을 여유조차 없었다. 새로운 먹잇감을 발견한 괴물들이 도로 밖에서부터 홍수처럼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기에, 모민은 자신이 미끼가 되어 괴물들을 유인해 소녀들이 마법 결계가 쳐진 건물 안으로 도망칠 수 있도록 시간을 벌어 주었다. 그러느라 데이비드 오언이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단서는 잠시 포기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 이후, 일행에게 돌아가 그들을 보호하며 싸우던 중 갤럭시 블레이드라는 조직을 만나 구조되어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당신이······.”


리하는 몸을 떨면서 모민을 바라보았다. 클린 미러를 통해 알아낸 정보는 그 무엇보다 정확한 것이지만, 이번만큼은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남자가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려 했다고? 나와 친구들을 구해주려 했다고? 데이비드에게 속아서 그랬던 것이라고?

그 모든 것이 진실이지만 정말이지 믿을 수 없었다. 믿고 싶지가 않았다.


“엄마를······.”


엄마가 어떻게 돌아가신 건지 보아 버렸기에, 그 죽음에 어쨌든 모민이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리하는 진실을 알고도 부정하고 싶었다.

원망의 대상이 필요했던 걸까. 화풀이를 할 상대가 있었으면 한 걸까. 이런 의심과 비난은 모민에게 억울한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리하는 그를 향해 자신의 분노를 쏟아내고 싶었다.


“미안합니다.”


그러나 진심어린 사과를 건네는 모민에게, 리하는 화를 낼 수가 없었다. 무어라 쏘아붙일 수도 없었다. 입술을 깨물고 눈물을 흘리며,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리하야, 괜찮아?”


모민의 마음을 들여다 본 리하가, 그에게 분노하는 대신 말없이 울기만 하고 있자 걱정이 된 피니엘이 얼른 다가왔다.

다 믿을 수 없었지만 그래도 피니엘만큼은 신뢰하는 리하였다. 울음을 그치기 위해 연신 심호흡을 한 리하는 두 번째의 마법을 준비했다. 클린 미러로 알아낸 정보를 타인에게도 넘겨 공유할 수 있는 커넥트의 마법이었다.

리하의 마법으로 모민의 사정을 알게 된 갤럭시 블레이드의 대원들 또한 다들 놀란 얼굴이 되었다.


“이게 사실이라면 저 분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이군요.”


가장 먼저 셀렌의 조심스런 의견이 나왔고, 나머지 대원들도 대체로 셀렌의 의견에 따르는 듯했다. 모민을 조사해야한다던 하셀 또한 우선은 이 정보에 만족하는 듯 순순히 한 발 물러나주었다.


“격리실을 당장 나갈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위험도는 몇 단계 낮춰도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옴센은 방금 전 리하가 사용한 마법에 대해 은근한 호기심을 드러내었다.


“언제고 시간이 될 때 자네와 마법체계에 관한 대화를 한 번 나누고 싶네만.”


하지만 리하는 그 중 어느 누구의 말도 듣고 있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모민에게 음울한 시선을 던지고는, 조용히 몸을 돌려 격리실을 나왔다. 모든 것이 너무 허망하게 느껴졌다. 가야 할 길을 잃어버린 느낌이었다. 걷고는 있지만 자신이 어디로 가는 건지도 의식할 수 없었다.

하루아침 만에 벌어진 참극으로 인해, 그리고 그 마음을 표출해야 할 분노의 대상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에, 리하에게 남은 것은 오직 공허함뿐이었다.

더 이상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기에 눈물도 어느덧 멎어있었다. 리하는 어둡고 슬픈 얼굴이 되어 자신의 병실까지 되돌아갔다. 그리고 문을 닫아 걸었다. 누구도 안에 들이려 하지 않았다. 리하의 마음 또한 굳게 잠가버린 병실의 문처럼 그렇게 닫혀버렸다.



* * *



그 뒤로 시간이 얼마나 더 지났는지는 리하도 잘 몰랐다. 모민과의 짧은 만남 이후 쭉 병실에 틀어박힌 채, 그녀는 텅 비어버린 가슴속의 빈 공간을 더듬으며 망연해 있을 뿐이었다.

모든 걸 다 잃었고, 그래도 일어서야 하지만, 무엇을 위해 그래야 하는지 그 이유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 며칠 새에 눈물도 다 말라버린 듯했다. 이제는 아무리 엄마를 떠올려도, 나래를 떠올려도, 마지막까지 자기를 지키려다 목숨을 잃은 진흥을 떠올려도, 더 이상 눈물이 흘러나오지 않았다.

의욕 없이 침대에 쓰러져 누운 리하에게는 문병을 오는 이조차 없었다. 하루에 두 번씩 받는 회진 때 소피아가 찾아오는 것을 제외하면 갤럭시 블레이드의 그 누구도 그녀를 찾아오지 않았다. 왜 그런 건지는 모를 일이었으나, 리하로서는 아무도 자기를 건드리지 말아주었으면 했기에 오히려 조금은 마음이 편했다.

유일하게 찾아오는 소피아는 올 때마다 리하의 몸 상태를 체크하고, 또 말도 걸어주었지만 리하는 그녀에게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반응이 거의 없자 소피아도 포기했는지 리하와 대화를 만들어나가지 않고 자기 할 일만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며칠 지났을 때쯤, 갤럭시 블레이드 멤버들 중에서 소피아 다음으로 리하를 찾아온 이가 있었다.


“유리하, 나 들어갈게.”


조심스러워하는 목소리와 함께 병실로 들어온 이는 바로 피니엘이었다. 몸 상태가 나아진 이후 밀렸던 일을 처리하다가, 소피아에게서 리하의 현재 상태를 전해 듣자 친구를 그냥 방치할 수 없다는 생각에 찾아온 것이다.

그 날 이후 지금까지 말 한마디 입 밖으로 내뱉은 적이 없었던 리하가 피니엘에게는 며칠 만에 처음으로 대답을 해주었다.


“모민은?”

“격리실에서 나왔지만 당분간 우리 대원들이 관찰하기로 했어.”


무겁고 풀죽은 목소리였지만 그래도 리하가 입을 열었다는 것에 피니엘은 안도했다. 며칠 동안 우울해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걱정을 많이 했는데, 그래도 말문이 아예 닫혀버린 것까지는 아닌 듯 해보여서였다.

그러나 리하는 그 한마디만 물어보더니 다시 고개를 숙이고 피니엘을 외면해버렸다. 다른 할 말 더 없으면 이만 가라는, 날 좀 내버려두라는 신호였다. 피니엘을 믿고 있는 리하였으나, 지금은 그 피니엘과 함께 있는 것도 불편하기만 했다.


“나, 리하한테 할 얘기가 있는데.”

“······.”


피니엘의 조심스런 말을 들은 리하가 고개 숙인 채 눈만 그녀에게로 향했다.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로.


“리하는 클린 미러로 내 마음 속을 들여다볼 수 있으니까, 그렇게 하면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금방 알게 될 거야. 그 편이 더 간단하겠지. 하지만 난 직접 리하에게 말해주고 싶어.”


리하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손을 까딱이는 작은 움직임 하나조차 보이지 않은 채 석상과도 같이 그 자리에 굳어있을 뿐이었다.


“미안해.”


피니엘은 그런 리하에게 슬픈 얼굴을 하고 말했다.


“갤럭시 블레이드에 들어오지 않겠냐는 제안, 리하의 기분을 생각하지 않고 내가 멋대로 말해버렸어. 정말 미안해.”


리하는 약간이지만 고개를 돌렸다. 피니엘을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 또한 무척이나 우울해 보이는 것이었다.


“아무 것도 변하는 건 없어.”


그 우울한 표정 그대로 리하가 말했다.


“갤럭시 블레이드에 들어가도, 아무 것도 변하지 않는다고.”

“무슨 뜻인지 물어봐도 될까?”


리하가 말문을 열자 피니엘은 반색하면서도 동시에 우울한 기분이었다. 말이 없던 친구가 대화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한 건 좋지만, 그래도 상태는 여전히 좋지 않았으니까.

리하는 다시 고개를 깊이 숙이고는 울먹이듯 중얼거렸다.


“벌어진 일은 되돌릴 수 없잖아. 갤럭시 블레이드에 들어가 봐야, 우리 가족은 돌아오지 않아. 나래도 돌아오지 않아. 형사님도 마찬가지고. 파괴된 세계도, 죽은 사람들도, 아무 것도 돌아오지 않잖아. 그럼 나한텐 아무런 의미도 없어.”

“그래, 이해해.”


리하의 말에 피니엘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약하다면 나약한 말이지만 당연한 반응이기도 하다. 리하는 불과 며칠 전까지 그냥 평범한 학생일 뿐이었고, 상상해본 적조차 없는 사태로 인해 모든 것을 하루아침 만에 잃은 몸이다.

그런 아이에게 갤럭시 블레이드에 들어와 함께 싸우자고 한 경솔했던 발언을 후회하는 피니엘이었다. 처음부터 전쟁을 경험했거나 그 못지않은 수라장과 지옥도를 헤쳐 나왔던 기존의 대원들에 비하면, 리하는 입장이 많이 다르다. 일상의 평온을 따르며 살아가야 할 소녀에게, 갤럭시 블레이드 가입 권유는 너무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발언이었다는 걸 깨달은 피니엘이었다.


“하지만 말이야.”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피니엘은 리하를 포기할 수가 없었다.


“지금 우리가 있는 여기 이 세계에도 사념체들이 존재하고 있어.”


리하가 이렇게 누워있는 며칠 동안, 갤럭시 블레이드 대원들이 조사해온 내용 중에는 앞으로 맞서야 할 새로운 적에 대한 정보들이 있었다. 피니엘이 스캔해온 사념체의 데이터를 토대로, 그 마력의 형태와 흐름을 분석한 셀렌과 옴센이 이 세계에도 사념체가 존재하고 있다는 걸 확정해낸 것이다. 사념체가 있다면 그것을 숨어서 퍼트리고 있을 일족도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것이고, 그들의 목적은 이 지구 또한 프레네티코의 먹이로 던져주기 위함이라고, 하셀이 또한 그렇게 추리해냈다고 한다.


“지금 버티기 매우 힘들다는 건 알아. 하지만 일족에 맞설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인물은 현재로선 리하 하나뿐이야.”


피니엘은 가만히 리하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우릴 도와줘.”


하지만 리하의 대답은 무겁기 그지없었다.


“내겐 아무 의미도 없다고 했잖아.”

“우리에게는 있어.”

“그래봐야 나와는 상관없어.”


피니엘은 슬픈 얼굴로 리하를 바라보았다.


“그럼 리하는 내가 무엇을 해줬으면 하는 거야?”

“도와준 건 고마워. 하지만 나는 피니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없고, 피니도 내게 굳이 무언가를 해주려 할 필요는 없어. 날 그냥 내버려둬 줬으면 해.”

“그렇게는 못해, 리하는 내 친구니까. 친구가 힘든 걸 극복해내지 못하고 이대로 망가지게 둘 수는 없잖아.”

“그렇겠지. 하지만 그 어떤 일도 나에겐 이제 무의미해. 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단 말이야. 할 수만 있다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어. 아무도 죽지 않도록, 다치지 않도록, 그렇게 하고 싶어. 하지만 그럴 수가 없잖아.”


리하는 문득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다 죽었는데, 그런데······ 그들을 다시 구할 수가 없잖아. 내가 지금 누군가를 돕는다 해도, 그러려고 해도······. 엄마 얼굴이 자꾸 떠오를 것 같아. 나래도, 형사님도, 그 얼굴들이 계속 눈앞에 아른거릴 것 같아. 다른 사람은 구해도 그들을 구하지 못하면, 난 아무도 구할 수 없는 거나 마찬가지야······.”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눈물이 다시 흘러내려와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흐느끼면서, 리하는 어느덧 피니엘을 끌어안고 하소연하듯 울고 있었다.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 돌아가서 엄마랑 나래랑, 형사님을 다시 구하고 싶어. 하지만 그럴 수가 없잖아. 아무도 구할 수가 없잖아. 내 옆에는 아무도 없단 말이야. 그런 세계가, 모두가 없는 세계가, 나한테 어떤 의미가 있다는 거야······.”


리하의 아픔은 피니엘 또한 옆에서 함께 보고 겪었기에 깊이 공감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거기서부터 다소 엄한 표정이 되었다.

한때는 거대한 영토를 지닌 제국의 황녀였고, 지금은 갤럭시 블레이드라는 한 조직의 장인, 리하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은 세계를 여러 번 헤쳐 나온 경험을 지닌 이 다부진 소녀는 리하가 이렇게 주저앉은 채 일어나지 못하면 그대로 끝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모민은 우리를 돕겠다고 했어.”

“뭐······?”

“그렇게 해서 다른 사람들을 구하고, 리하에게 사죄하고 싶다면서 말이야.”


리하는 잠시 얼떨떨해하며 피니엘을 바라보았다. 모민이 피니엘을 돕겠다 그랬다고? 그럼 설마 그 사람도 이제부터······.


“갤럭시 블레이드에 가입한 건 아니야. 하지만 객원 협력자 정도로는 볼 수 있겠지. 우리 대원들은 안전이 확실히 될 때까지 그를 감시할 테니까.”

“그 사람이 피니엘을······.”

“그 사람도 마음속에 깊은 갈등과 고뇌를 품고 있었어. 하지만 그걸 이겨내기 위해 자신이 믿는 길을 나아가겠다고 했지. 리하도 그렇게 해야 돼. 슬픔에 짓눌려선 안 돼. 딛고 일어나서 사라졌다는 그 삶의 의미를 찾아야한다고.”


단호히 말하면서 피니엘은 무언가 시커먼 두루마리 같은 것을 꺼냈다. 생소한 물건이라 리하의 시선이 무의식중에 그리로 향하자, 피니엘은 그 두루마리를 펼쳐 보이며 말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다 그랬지? 유감스럽게도 리하의 세계는 다시 손쓰기엔 너무 늦었어. 하지만 비슷한 상황이라면 만들 수 있지.”


피니엘은 그 두루마리에 무언가 숫자를 쓱쓱 적어 내려갔다. 그리고는 그것이 무엇인지 짧게 설명했다.


“이 두루마리는 우리가 만나봤던 어떤 조직의 인물들이 쓰는 도구를 마법으로 최대한 재현해본 물건이야. 원하는 시점의 과거로 되돌아갈 수 있게 해주지.”


과거로 돌아간다는 말에 리하의 눈이 잠시나마 생기를 띄었다.


“타임머신?”

“써봐야 지금 이 세계의 과거로밖에 돌아갈 수 없고, 사용횟수는 딱 한 번뿐이지만 말이야.”

“우리 세계로 돌아갈 수는 없다는 거구나.”


다시 흥미를 잃은 리하에게, 피니엘은 선택지 하나를 주었다.


“하지만 이 세계의 과거로는 분명하게 돌아갈 수 있어. 리하는 어떡할 거야? 이걸 써서 과거로 돌아가겠다면 그렇게 해주겠어. 딱 하나밖에 없는 결전병기라 신중하게 써야 하지만, 새로운 적을 상대하려면 이 정도는 써야 수지가 맞다고 판단했거든.”


리하는 그 말의 의미를 바로 알아듣고는 대답했다.


“나더러 이 세계의 과거로 돌아가라는 소리구나. 똑같이 이 세계의 과거 시점으로 숨어들어온 우리 일족들을 잡아내기 위해서.”

“리하에게 그들을 다 잡으라고 하는 게 아니야. 내가 바라는 건 견제일 뿐이지. 일족들이 뿌리고 다니는 사념체를 리하가 그들 몰래 정화시켜서 되도록 오랫동안 방해할 것.”

“오랫동안이라면 얼마나?”


피니엘은 거기서 자신도 각오를 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리하의 일족은 지금 시점의 약 20년 전부터 이 세계로 잠입해온 것 같으니까······.”

“20년 전의 과거로 돌아가 잡으라는 소리네.”

“이 세계의 과거로 돌아가 일족을 견제하면서 20년 후, 즉 현재 이 시점의 나랑 갤럭시 블레이드와 다시 만날 때까지.”

“앞으로 20년 동안 이 세계에서 썩으라는 소리구나.”

“가혹한 소리지만 맞아.”


리하는 잠시 망설였다. 굳이 할 필요는 없는 일이고, 거절해도 피니엘은 자신에게 싫은 소리를 하지 않을 것이다. 억지로 하라는 강요는 더더욱.

리하가 거절하면 피니엘은 동료들과 함께 다른 대응 방법을 찾아내 일족과 맞서려 들 것이다. 클린 미러를 사용하지 않아도 그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리하가 할 수 없을 것 같다면 우리는 다른 방법을 찾아 대응할 거야. 신중하게 생각해야 하는 일이니까, 대답은 지금 당장 하지 않아도 돼. 아니면 아예 거절을 해도 되고.”


그래, 지금 피니엘도 그렇게 말했다. 내키지 않으면 하지 않아도 좋다고.

그럼 그냥 무시하면 되는 일이었다. 안 한다고 고개를 젓기만 하면 그걸로 끝난다.

하지만 리하는 어째서인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래, 알았어.”


왜 그런지도 모르게 대답을 하고 말았다. 그리고 조금 지나서야 왜 자신이 이런 무모한 일에 뛰어들려고 하는 건지 깨달았다.

아무 것도 없는 세계지만 그래도 살아가야 하니까, 의미를 잃어버렸다면 그것을 다시 찾고 만들어야 하니까, 그 기회를 부여 받은 셈이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앗아간 이들은 지금 이 세계의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고, 그들이 같은 짓을 되풀이하지 못하도록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리하는 그 자신 역시 같은 일을 두 번 당하고 싶지 않았다.


“데이비드 오언, 그리고 우리 일족······.”


무엇을 위해 그래야 하는가? 리하는 스스로에게 자문한 순간 바로 답을 찾아내었다.


“내가 막아볼게.”


죽어간 사람들을 위해서, 친구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서, 그리함으로 자신의 감정에 충실해지기 위해서였다. 리하의 마음에 들어차있는 것은 슬픔의 감정 못지않은, 데이비드 오언과 일족에 대한 복수심이었고, 그것을 위해 필요한 수단과 방법 또한 알고 있었다.

그들이 풀어놓은 사념체를 최대한 많이, 그리고 몰래 정화시키면 되는 일이다.

성공할 수 있을지 없을지, 확실한 자신은 없었다. 그러나 해내고 싶었다. 그 끔찍한 일이 다시는 벌어지지 않도록, 그것을 저지른 자들이 자신들의 행위에 대가를 치를 수 있도록, 그렇게 만들 수 있는 것이 지금 나밖에 없다면, 그럼 해야만 했다. 어느덧 리하의 눈가에는 조금씩 생기가 감돌기 시작했고, 피니엘은 미소를 지으면서도 금세 눈물이 쏟아져 나올 것 같은 얼굴이 되어 조용히 통신을 전달했다.


“갤럭시 블레이드, 일족의 범죄에 대응하기 위한 플랜 A가 방금 통과됐습니다. 모두 준비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런 피니엘에게 리하도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로서도 오랜만에 지어보는 표정이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밖에 나갈 준비를 했다. 데이비드 오언과 일족을 잡아내기 위해 자그마치 이 세계의 20년 전으로 돌아가야 한다니, 정말 사전에 철저한 준비가 필요할 것만 같았다.


작가의말

모민씨... 알고 보니 이분도 피해자였습니다. 그래도 리하양은 모민에 대한 감정이 풀리지는 않은 것 같네요.
그런 리하양에게 남겨진 퀘스트는 무려 20년 전의 과거로 돌아가 데이비드 오언과 살아남은 다른 일족들이 앞으로 저지를 짓거리를 미리 방해하고 견제하는 것으로 결정되었습니다. 과거로 날아간 리하양은 또 어떻게 될지...
다음 주에 마지막 파트를 올려서 직접 확인하실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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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소녀 유리하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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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2부 에필로그 16.12.28 220 0 31쪽
» 아픔을 넘어서 16.12.21 70 0 28쪽
53 아픔을 넘어서 16.12.14 119 0 26쪽
52 은하를 가르는 검 16.12.07 167 0 26쪽
51 은하를 가르는 검 16.11.30 122 0 16쪽
50 은하를 가르는 검 16.11.23 121 0 22쪽
49 은하를 가르는 검 16.11.16 93 0 34쪽
48 손을 내밀어 준 것은 16.11.09 140 0 19쪽
47 손을 내밀어 준 것은 16.11.03 148 0 16쪽
46 손을 내밀어 준 것은 16.11.02 217 0 16쪽
45 손을 내밀어 준 것은 16.10.27 229 0 16쪽
44 무너지는 시간을 헤맬 때 16.10.26 142 0 17쪽
43 무너지는 시간을 헤맬 때 16.10.20 216 0 19쪽
42 무너지는 시간을 헤맬 때 16.10.19 125 0 23쪽
41 무너지는 시간을 헤맬 때 16.10.13 140 0 21쪽
40 무너지는 시간을 헤맬 때 16.10.12 195 0 12쪽
39 악몽을 꾸다 16.09.29 135 0 14쪽
38 악몽을 꾸다 16.09.28 208 0 16쪽
37 악몽을 꾸다 16.09.22 160 0 19쪽
36 악몽을 꾸다 16.09.21 157 0 17쪽
35 악몽을 꾸다 16.09.15 270 0 20쪽
34 악몽을 꾸다 16.09.14 267 0 18쪽
33 악몽을 꾸다 16.09.08 152 0 14쪽
32 악몽을 꾸다 16.09.07 218 0 20쪽
31 어둠 속에서 16.09.01 214 0 18쪽
30 어둠 속에서 16.08.31 137 0 18쪽
29 어둠 속에서 16.08.24 150 0 19쪽
28 어둠 속에서 16.08.18 202 0 12쪽
27 광풍이 몰아칠 때 16.08.17 272 0 17쪽
26 광풍이 몰아칠 때 16.08.11 152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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