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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없는데 말입니다

죽고 나니 마왕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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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stable
그림/삽화
Zig
작품등록일 :
2019.02.24 00:11
최근연재일 :
2024.06.22 21:55
연재수 :
308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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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692
추천수 :
3,292
글자수 :
1,713,963

작성
19.08.22 01:24
조회
549
추천
13
글자
9쪽

제물

DUMMY

“슬슬 눈치 빠른 자는 알아챘을 테지. 허나 이미 늦었다.”


나는 마법진의 이동속도를 더욱 빠르게 하며 즐겁게 중얼거렸다. 이 역사적인 순간을 함께하는 지상의 부하들을 위해 왕국 내부의 영상도 큼지막하게 몇 개 띄워놓았다. 이제 슬슬 첫 번째 희생자가 나오려는 순간이다.


하늘의 마법진을 경계하면서도 제자리를 지키던 제국의 병사. 그 머리 위로 마법진이 지나가는 순간 다리가 풀린 것처럼 털썩 쓰러진다.


손에 들고 있던 창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땅 위에 구른다.


부릅뜬 눈동자에 비치는 건 같은 운명을 맞이하는 동료들이다.


쓰러진 자들의 심장 부근에서 하나같이 붉은 빛의 구슬이 나오더니 그대로 떠올라 마법진에 흡수되었다.


그 구슬은 생명의 원천이자, 인간에게 있어 제일 소중한 것ㅡ영혼.


내가 짠 술식은 일정 범위 안의 생명체의 영혼을 모조리 먹어치우는 마법이다.


왕국을 감싸는 세 개의 마법진이 만드는 삼각형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작아질수록 희생자가 늘어난다.


혼을 빼앗기는 발동조건은 단 하나: 삼각형의 영역을 벗어나는 것이다.


즉, 마법이 발동된 시점에서 범위 안에 있던 놈들은 한참 전에 확정된 죽음을 피할 방법이 없다. 아무리 필사적으로 달려봤자 마법진의 이동속도를 제칠 수도 없을 뿐더러, 결국엔 허망하게 영혼을 탈취 당하게 된다.


인위적으로 마법식을 파괴하는 게 유일한 탈출구겠지만 상대의 반응으로 봐서 그게 가능한 인재는 저곳에 없겠지.


빛나는 글자들이 지나가는 것만으로 한 순간에 수천, 수만의 병사들이 죽는다.


생이 자신의 육신을 떠나는 것에 아무 저항도 하지 못한다.


앗, 하고 위험을 알아차리는 순간 모든 게 끝인 것이다.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움직이던 병사들이 끈이 끊어진 퍼펫들처럼 차례로 쓰러져가는 양상은 마치 죽음의 파도가 왕국에 들이닥친 것 같았다.


준비과정은 꽤나 까다로웠지만 그만한 보람이 있는 마법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래를 슬쩍 보자 대다수가 소리를 내는 것도 잊고 입을 벌리고 있었다. 진심으로 놀랐을 때만 나올 수 있는 반응. 이게 역대급의 마법이라는 카니앗의 말에는 과장이 없었다는 것이겠지.


알트레아 왕국에 침공해온 제국군은 30만이나 된다. 그들은 착실하게 병사와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왕국의 인간을 섬멸하며 진군해왔기에 지나온 길에 왕국 측의 생존자 따위는 남기지 않았다. 덕분에 당장 내 마법에는 제국군만 죽어나가고 있는 꼴이니 이건 명분있는 반격이라 보아도 되겠지.


그래도 일단 잔뜩 쳐들어와준 덕분에 결국엔 꽤나 많은 수의 영혼을 취하고 있었다.


물 흐르듯 부드럽게 나아가던 마법진이 베르돌트 시를 어느 정도 지나는 순간,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마법진들의 움직임이 내 뜻에 따라 불현듯 멈춘다.


제국이 아무리 빠른 속도로 왕국을 갉아먹었다 해도 여태 침범한 건 왕국령의 2할이다.


베르돌트 시도 꽤 가장자리에 위치한 변경 도시. 기어들어온 해충들을 정리했으면 그걸로 족하다.


괜히 그 앞에 있는 왕국 시민들까지 죽일 필요는 없는 것이다. 왕국의 실권을 손에 넣은 이상 저들은 내가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장기 말이었다.


하지만 마법진이 멈춘 시점에서 최소 30만의 죽음은 이미 확정되어 있었다.


마법을 발동하고 나서 1분이라는 시간이 지나기도 전에 제국군은 그리 허망하게 전멸했다.


“마법 한방으로 저만한 숫자의 적을 없애다니, 역시 보스이십니다!”

“이 순간을 함께할 수 있어 정말 영광입니다, 마왕님.”


린이나 스키잔이 칭찬하는 걸 한귀로 흘려들으며 나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잔챙이들을 정리했다고 해서 딱히 기쁘지는 않다. 계속 마음에 걸리는 건 단 하나.


어린 암살자의 행방이다.


끝끝내 나타나지 않은 붉은 유령은 저걸로 사망했을까. 근거는 없지만 이렇게 쉽게 죽을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째서일까.


설령 아직도 왕국 안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었다고 한다면 제일 안전할 왕도에 있겠지. 확인 차 왕도까지 마법진의 범위에 넣어버리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래서야 벼룩을 잡자고 집을 태워버리는 일이나 마찬가지.


무자비하게 이웃국가를 침략한 제국의 만행을 주변국에 알려 인간들끼리 편을 가르고 싸우게 할 생존자도 필요하니 말이다.


...


아무리 적이라고 해도 수십만의 인간을 죽여 버린 것에 대한 후회나 자괴감은 전혀 들지 않는다.


일말의 죄책감도 없다.


자신만만하게 쳐들어오다가 이렇게 당해버렸으니 합당한 결과라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혼이 빠져나간 시신이 그대로 남았으니 썩어서 냄새가 나기 전에 사후처리를 해야겠지.


하지만 그보다 먼저인 건 이 수많은 영혼들로 뭘 할까다.


애초에 이 술식은 빼앗은 영혼을 강제로 마나로 변환하는 종류의 것이다.


마법은 세계의 법칙을 개변하는 것이고 마나는 그 정도를 결정하는 원천. 이 정도가 모였으면 불가능이라고 생각되는 일도 손쉽게 해낼 수 있다. 천계나 마계로 통하는 문을 열수도 있다.


“어떠냐, 린. 과거의 원수와 지금 재회를 하게 해줄 수도 있다.”

“그건ㅡ”


린이 말을 삼켰다.


어쩌면 정말 듣고 싶었던 말이자 기다리고 있던 순간일지도 몰랐다. 한번 죽고 나서도 버리지 못한 푸른 복수심은 언제나 그 안에서 조용히 타오르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순간 반색하며 고개를 들었던 린은 곧 표정을 지웠다. 살짝 숙인 고개 밑에서 나온 건 감정을 최대한 억제한 목소리다.


“그렇게 한다면 저나 가름은 둘째 치고... 다른 동료들이 위험해집니다, 보스. 정말 감사한 제안이지만... 무례를 무릅쓰고 뒤로 조금 미루는 것을 간청합니다.”


신화의 늑대, 펜리르에게도 역시 동료애가 우선시되어있는 건가. 속으로 생각한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지 않았다면 애초에 대전에 참전할 이유도 없었을 테니.


“지금은 그 놈들 말고도 아인헤랴르 따위를 걱정해야하니 맞는 말이군. 막상 진짜배기 대전이 터지면 박쥐처럼 편을 갈아탈 놈들도 있으니 말이다.”

“어려운 결정 잘 내리셨습니다, 누님.”


가름이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린의 손을 쥐어준다. 린의 결정에는 그도 동의한 모양이었다. 아무런 계획 없이 당장 철천지원수인 신들을 불러낸다고 해서 깔끔한 복수를 맛보지는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다른 의견은 없나? 아무리 나라 해도 저 정도의 마력덩어리를 계속 붙잡아두고 있을 수는 없다.”


에너지가 더 혼돈으로 나아가듯 마나 또한 금방 흩어져버리려 하는 방대한 에너지다. 특히 강제로 한군데 모은 것은 바로 쓰지 않으면 타이밍을 놓치게 된다. 그건 어느 쪽이냐고 하면 매우 아까운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악마를 소환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스키잔이 의견을 내었다.


“이 규모의 마나를 쓴다면 꽤 고위 악마가 나타날지도 모릅니다. 마왕군의 전력에 도움이 되지 않을지...”


마왕군에서 확실하게 규격 외라고 할 수 있는 건 나, 린과 가름 셋밖에 없으니 일단 신의 반대편 위치를 꿰찬 악마를 부르는 건 일단 좋은 생각 같아 보였지만.


“악마 소환이라. 소환된 놈이 내 명령에 불복하고 날뛸 가능성은 있나?”


기본적으로는 같은 편이라고 할 수 있는 악마와 마족이지만 주인을 죽여 버리는 소환수는 옛날부터 꽤 자주 나오는 전개다. 굳이 수고를 들여서까지 귀찮은 일을 벌이기는 싫었다.


“극히 드문 경우로 발생하지만 마왕님은...”


스키잔이 말끝을 흐린 의미를 이해하고 나는 가볍게 웃었다.


“그랬지. 말을 듣지 않는다면 '죽여버리면' 될 일이다. 네 아는 사이가 나올 경우에는 잘 부탁한다, 가름.”


지옥사냥개로도 불리는 가름이 고개를 숙여보였다.


“충성을 다하지 않는다면 이 이빨로 찢어발겨 보이겠습니다.”


과거 마계의 끝에서 지옥의 문을 지키던 번견다운 말이었다.


“그럼 지체 없이, 해보지.”


세 개의 마법진으로부터 번개폭풍이 일며, 수거한 마나(혼)가 이번에는 왕국 전체를 홀로 덮고도 남을 정도의 크기인 새로운 마법진으로 변모했다.


끊임없이 흘러내려가는 고대 문자의 열이 하늘을 빽빽하게 뒤덮어 햇빛까지도 가렸다.


“칠흑의 마왕의 이름으로 명한다.”


나는 눈을 감고 손을 뻗어 마법진을 가리킨 채 영창을 시작했다.


“아직은 깊은 어둠에 묶여 잠들어있는 자여. 그대의 정신은 주인의 의지를 담을 그릇, 육신은 녹슬지 않는 검일지니.”


내 말이 이어질 때마다 하늘을 찢는 것과도 같은 소리가 드문드문 났다.


“불변하는 영원의 약속을 새기며 같은 종말을 바라보는 자여. 더 깊은 심연에 속박됨을 갈망한다면 이 명령에 따라 현계해라.”


30만의 영혼을 바친 소환의식.


마른하늘에 내려치는 번개와 함께 '그것'은 내 인지 범위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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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1 20.01.09 303 8 9쪽
99 적발 +1 20.01.05 292 9 9쪽
98 잠입 +1 19.12.29 310 9 11쪽
97 간부 회의 +3 19.12.26 327 8 10쪽
96 침공 준비 +1 19.12.22 316 10 9쪽
95 어딘가 수상한 나들이 계획 +1 19.12.18 303 8 9쪽
94 위화감 +1 19.12.14 315 12 11쪽
93 천재 드워프 소녀 +1 19.12.11 330 7 11쪽
92 천벽인광 +1 19.12.08 345 8 11쪽
91 섬광의 리우 에스타 +1 19.12.05 335 9 12쪽
90 첫 번째 마무리 +1 19.12.01 330 10 10쪽
89 뜻밖의 개입 +2 19.11.28 386 10 11쪽
88 인간 대 지옥개 +1 19.11.24 342 9 10쪽
87 난투 +2 19.11.21 332 10 9쪽
86 임박하는 갈등 +1 19.11.17 342 11 10쪽
85 왕국의 사절 +1 19.11.14 339 9 12쪽
84 천천히 흘러가는 밤 +1 19.11.10 334 10 10쪽
83 사소한 충돌 +2 19.11.07 350 11 11쪽
82 엘프와 술 +1 19.11.03 384 10 10쪽
81 마력 증강 +1 19.10.31 380 11 11쪽
80 포로의 결정 +1 19.10.27 385 11 11쪽
79 돌이킬 수 없는 선택 +2 19.10.24 391 13 10쪽
78 바르포르도 +1 19.10.20 388 13 10쪽
77 승전국의 대위 +1 19.10.17 406 10 10쪽
76 자격의 증명 +1 19.10.13 482 11 10쪽
75 세계수 +1 19.10.10 416 12 11쪽
74 에델가르드 토벌 +1 19.10.06 412 12 11쪽
73 빙결의 마수 +1 19.10.03 411 11 11쪽
72 설원 +1 19.09.29 436 11 11쪽
71 류아 +2 19.09.26 468 11 11쪽
70 서로의 요구 +2 19.09.22 453 13 11쪽
69 대화의 시작 +1 19.09.19 450 12 10쪽
68 해제 +1 19.09.15 446 12 7쪽
67 장로회의 +1 19.09.12 467 10 9쪽
66 항구도시 프냐르 +1 19.09.09 482 11 11쪽
65 짧은 여정의 출발 +1 19.09.08 511 11 9쪽
64 하이엘프 +1 19.09.04 553 12 9쪽
63 사전 준비 +3 19.09.01 543 15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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