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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없는데 말입니다

죽고 나니 마왕이 되어 있었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Testable
그림/삽화
Zig
작품등록일 :
2019.02.24 00:11
최근연재일 :
2024.06.22 21:55
연재수 :
308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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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713,963

작성
19.10.13 0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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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자격의 증명

DUMMY

마족과 인간이 다투는 인마전쟁은 이전에도 계속해서 있었다. 세계의 이권을 두고 싸움 없는 양보가 있을 리 없으니까.


하지만 그 전쟁은 횟수를 거듭할 때마다 그 잔혹함을 더해갔다. 특히 제일 최근에 있었던 70년 전의 인마전쟁은 패배한 마족을 대하는 잔인함의 정도가 달랐다.


이전에는 다툼으로 인해 깊어진 감정의 골을 두고도 상호의 이익을 우선시해서 일단은 더불어 살아갔다고 한다면, 이제는 마족을 완전히 박멸하려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의 인간의 보복이 돌아왔다.


마족이 인간에 잡히면 바로 살해당하거나, 높은 확률로 노예로 매매된다. 인간들이 운운하는 인권 같은 건 찾아볼 수 없다. 주인의 어느 명령이든 따라야 하는 노리개가 되는 것이다.


이건 엘프에게도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아무리 강한 마족이라 해도 간혹 방심하기 마련이고, 그럴 때 허를 찔리면 그대로 노예의 낙인이 찍히게 된다.


선천적으로 마족보다 신체가 약하기 마련인 인간들은 그런 점에선 매우 치밀했다. 무리를 지어 매복해서 홀로 있는 마족을 습격하는 등 온갖 비열한 수단을 가리지 않았다. 단지 마족이라는 이유만으로 긍지 없는 가축의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돈벌이 따위를 위해서.


그런 인간들의 박해를 피해 외진 산 구석에 살 수 밖에 없었던 다크엘프에게 있어 유일무이한 목적은 바로 생존이었다.


살고자 하는 본능이 몸을 지배하는 게 어쩌면 당연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당장 내일이 올 거라는 보장이 없는 삶은 얼마나 간절하고 피폐한가. 하등한 인간들이 무서워 몸을 웅크리고 덜덜 떨며 사는 것은 얼마나 치욕적인가.


광활한 바다를 건너 동쪽으로 계속 항해하면 인간의 눈치를 볼 필요 없이 어깨를 펴고 살 수 있는 기회의 땅이 나온다는 소리가 이따금씩 들려올 때도 있었지만, 모든 항구를 인간들이 지배하고 있는 마당에 그런 이주를 계획할 수도 없었다.


하이엘프들은 오랫동안 그래왔듯 안전하게 섬 생활을 이어갔던 반면, 다크엘프들은 몸을 숨길 오지를 찾아야만 했다.


어딜 가나 인간이 있는 땅에서 생존하며, 반드시 인간들의 눈에 띄지 않아야한다는 전제가 깔렸으니 절대 풍족하다고는 할 수 없는 삶이었다.


척박한 땅에서 힘들게 잡은 사냥감을 적절히 분배해 버텨나가는 하루. 그런 나날이 반복되다보면 굳이 무얼 위한 생존인지 알 수 없어질 때가 있었다. 무엇 때문에 이 고통을 감내하면서 꿋꿋하게 살아가야하는 건지 말이다.


물론 그건 족장의 딸이라고 해도 예외는 아니다. 오히려 그 위치에 있었기에 더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엘프의 수명은 길다. 길게는 500년 가까이 살아가는 종족이며, 인생의 막바지에 들어서기 전까지는 노화하지도 않는다.


그 긴 수명을 오로지 생존을 위한 발버둥으로 채우라고 한다면 카니앗은 정중히 사양할 것이다. 살아있다는 것 자체에 기쁨과 감사를 느끼는 성격과는 거리가 멀었으니까.


늘 냉정하게 사물을 바라보려 노력하는 카니앗에게 있어 인생이란 결과를 내기까지의 과정에 불과했다. 그게 뭔지는 몰랐지만 뭔가를 이루고 싶다는 것 하나만은 확실했다. 그래, 예를 들면 오만불손한 인간들을 절멸시키고 과거의 영광을 되찾는다든지.


지금 살아있기만 할뿐 아무런 의미 없는 인생에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어느 날 정해져 있을 죽음으로 한 발짝씩 다가가고 있는 것과 다를 게 없는데.


하지만 그럴수록 현실은 무겁게 다가온다.


그 의미를 찾지 못한 채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은 없어지기는커녕 날이 갈수록 점점 커져, 쉬지 않고 그녀를 괴롭히는 응어리가 되었다. 오랜 역사와 긍지를 가진 상급마족이 고작 하등종족이 무서워 도망 속에 생을 마감한다는 건 그 정도의 수치였으니.


그 응어리 때문인지 언제부턴가 아침은 가슴이 답답해서 숨이 막히는 고통 속에 깨는 게 일상이 되어있었다.


내색은 할 수 없다. 족장의 딸이 약한 모습을 보여 버리면 다른 다크엘프들을 제대로 통솔할 수 없으니까.


아무도 이해해주지 못하는 고통을 견뎌가며 아마 카니앗은 조금씩 부서져가고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태도를 유지하는 건 겉모습 뿐.


°ㅡ해라.°


순간, 어지러운 일련의 생각들이 흩어져버릴 정도로 정신이 번쩍 뜨였다.


°증명해라.°


들려온 건 여러 목소리가 섞인 소리였다.


카니앗은 자신의 몸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걸 알아차렸다. 언제부터 옛날 생각에 빠져 있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어둠이 가득한 세계에서 단지 의식만이 존재하고 있다.


°그대가 우리가 남긴 힘에 적합함을 증명해 보여라.°


목소리는 계속 요구했다.


카니앗은 이 불가사의한 공간은 아마 세계수가 만들어낸 일종의 이계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적합자만이 엘프가 남긴 마법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했으니 이건 그 시련 중 하나. 하지만 이런 식으로 마법과 직접 대면해야 할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건방진 하이엘프의 말을 따르자면 어기서 자격을 증명할 수 없을 경우, 그에 대한 벌로 죽게 되는 것이다.


‘다크엘프와 하이엘프. 둘로 나뉘기 전에는 하나였으니 자격이 있는 게 뻔하잖아. 원래 우리 것이었던 걸 되찾을 뿐인데.’


카니앗은 그리 생각했지만,


°증명해라.°


다시금 울리는 목소리는 엘프의 유산을 받는 일이 그렇게 쉽게 풀리지는 않을 것을 고했다.


‘단지 후손이라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건가.’


°그렇다.°


소리를 낼 입도 없기에 이번에도 생각하는 것에 그쳤지만, 그런 카니앗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목소리가 답했다.


증명이라. 힘이 필요하다는 걸 증명하라니, 쓸데없는 문답이었다.


‘힘이 필요한 이유라고? 바보 같아. 무얼 해내는데 힘이 필요하기 때문인게 당연하잖아. 그에 비하면 목숨은 가벼운 담보고.’


자신을 움직이게 하는 건 무엇인가. 단순한 힘에 대한 집착도, 생존본능에 거스르지 못하는 신체도 아니다. 그런 원초적인 본능은 카니앗의 원동력과 거리가 멀었다.


원하는 건 여태 살아있기 잘했다는 증명. 그 누구도 인정하지 않고는 못 배길 성취.


그렇게 해서 삶이 빛날 수 있다면 그걸로 카니앗은 충분한 것이다. 평범한 다크엘프로 생을 마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기만 한다면. 자신의 삶을 정의하는 뭔가를 이룰 수만 있다면.


°힘을 취한다 해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수도 있다.°


왠지 모르게 카니앗에게 그 목소리는 경고하는 것처럼 들렸다.


하지만 변하든 변하지 않든 상관없는 일이었다. 시도하지도 않고 포기부터 하는 건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카니앗의 각오는 이제 와서 쉽사리 바뀌지 않는다. 선조가 남긴 마법을 손에 넣는 건 단지 시작일 뿐이다. 새로운 마왕의 도래와 함께 세계는 이미 바뀌고 있었던 것이다.


하늘이 땅이 되고, 땅이 하늘이 될 것이다. 그 장대한 서사시의 막을 함께 올릴 기회가 주어졌다.


그때야말로 비로소 카니앗은 삶의 빛을 얻게 된다.


힘을 얻기에 마땅한지 증명하라면 언제나 망설임 없이 이리 대답할 것이다.


‘내 잿빛 세계에 색을 입혀준 게 그 분이었으니까.’


다음 순간, 카니앗은 높은 하늘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넓은 지상은 하나같이 불바다가 되어있었고, 인간과 마족들이 서로 죽고 죽이는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고 있다. 일말의 자비도 보이지 않는 지상의 전쟁터, 그건 끔찍한 아비규환이었다.


왜 싸워야 하는지조차 잊어버린 채 살육의 광기에 사로잡힌 병사들의 무기가, 마법이 맞부딪힐 때마다 시체가 늘어갔다.


대의를 위해서라면 때로는 희생이 필요할 수 있다는 주의의 카니앗이라고 해도 그 광경을 보고 있자니 마음에 동요가 일었다. 이건 단지 마법이 보여주는 환상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게 미래라 해도 그 뜻은 굽히지 않을 것인가?°


목소리가 다시 물어왔다. 그 어조가 아까보다는 조금 부드러워진 것 같은 건 기분 탓인지.


하이엘프들이 되도록이면 그들만의 섬에 틀어박혀있는 건 이 때문이었던건가. 과거 마왕군에 조력한 적은 있지만 성의만 보일 정도로 매번 밖에 보내는 엘프의 숫자를 제한했던 게 이런 결말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힘의 균형이 무너지면 무슨 일이 일어날 건지 알고 있냐고 목소리는 묻고 있는 것이다. 그 앞에는 지금까지 있었던 다툼보다 더 많은 파괴와 죽음이 있을 거라고 알려주며, 그럼에도 마음을 바꾸지 않을 자신이 있는지 말하고 있다.


그건 합리적인 의문이다. 동족들이 개죽음당하는 걸 기뻐할 리가 있나.


하지만 언제까지나 굴복하고 살 수는 없는 일이다. 신들이 인간의 편을 드는 이 세상은 아주 옛적부터 미쳐있었다. 이 미친 세계를 올바르게 되돌릴 아주 낮은 가능성만 있어도 충분했다.


‘힘을 추구한 끝에 기다리는 게 파멸뿐일지 몰라도.’


카니앗은 되뇌었다.


‘그건 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일이잖아.’


그에게 무릎을 꿇었을 때 이미 맹세했다. 끝까지 발버둥 쳐 보이겠다고.


그리고 지금도 알 수 있다. 자신이 섬기는 마왕은 역대 마왕들이 이루지 못했던 마족의 비원을 가져다 줄 수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그에게 조금이라도 더 힘을 보태는 것만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라는 것을.


‘나는 이제 굽히고만 사는 삶으로 되돌아가지 않을 거야.’


카니앗은 자신의 정신과 연결되어있는 목소리에게 직접 말했다.


‘포기하고 사는 건 죽은 거나 다름없으니까.’


그러자 주변이 다시 칠흑과도 같은 어둠으로 전환됐다.


°욕심이 많은 아이다. 그대는 현실과 꿈, 어느 쪽도 고르지 못하고 있다. 본인의 어리석음을 알면서도 발을 멈출 수 없는 어리석은 자여. 하지만 그렇기에ㅡ°


카니앗은 순간, 끝없는 어둠 속에 한줄기 빛이 반짝이는 걸 보았다.


°그대를 힘의 적합자로, 인정한다.°


빛은 점점 다가오더니, 카니앗에 융합되어갔다.


희미했던 의식이 더욱 더 흐려져 가는 가운데, 마지막으로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그 선택에 후회가 없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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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잠입 +1 19.12.29 310 9 11쪽
97 간부 회의 +3 19.12.26 325 8 10쪽
96 침공 준비 +1 19.12.22 315 10 9쪽
95 어딘가 수상한 나들이 계획 +1 19.12.18 303 8 9쪽
94 위화감 +1 19.12.14 314 12 11쪽
93 천재 드워프 소녀 +1 19.12.11 330 7 11쪽
92 천벽인광 +1 19.12.08 344 8 11쪽
91 섬광의 리우 에스타 +1 19.12.05 335 9 12쪽
90 첫 번째 마무리 +1 19.12.01 330 10 10쪽
89 뜻밖의 개입 +2 19.11.28 386 10 11쪽
88 인간 대 지옥개 +1 19.11.24 341 9 10쪽
87 난투 +2 19.11.21 332 10 9쪽
86 임박하는 갈등 +1 19.11.17 342 11 10쪽
85 왕국의 사절 +1 19.11.14 339 9 12쪽
84 천천히 흘러가는 밤 +1 19.11.10 334 10 10쪽
83 사소한 충돌 +2 19.11.07 347 11 11쪽
82 엘프와 술 +1 19.11.03 384 10 10쪽
81 마력 증강 +1 19.10.31 379 11 11쪽
80 포로의 결정 +1 19.10.27 384 11 11쪽
79 돌이킬 수 없는 선택 +2 19.10.24 391 13 10쪽
78 바르포르도 +1 19.10.20 388 13 10쪽
77 승전국의 대위 +1 19.10.17 406 10 10쪽
» 자격의 증명 +1 19.10.13 481 11 10쪽
75 세계수 +1 19.10.10 416 12 11쪽
74 에델가르드 토벌 +1 19.10.06 411 12 11쪽
73 빙결의 마수 +1 19.10.03 410 11 11쪽
72 설원 +1 19.09.29 436 11 11쪽
71 류아 +2 19.09.26 468 11 11쪽
70 서로의 요구 +2 19.09.22 451 13 11쪽
69 대화의 시작 +1 19.09.19 449 12 10쪽
68 해제 +1 19.09.15 446 12 7쪽
67 장로회의 +1 19.09.12 467 10 9쪽
66 항구도시 프냐르 +1 19.09.09 482 11 11쪽
65 짧은 여정의 출발 +1 19.09.08 510 11 9쪽
64 하이엘프 +1 19.09.04 553 12 9쪽
63 사전 준비 +3 19.09.01 542 15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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