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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없는데 말입니다

죽고 나니 마왕이 되어 있었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Testable
그림/삽화
Zig
작품등록일 :
2019.02.24 00:11
최근연재일 :
2024.06.22 21:55
연재수 :
308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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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713,963

작성
20.02.20 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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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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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글자
10쪽

온천

DUMMY

“류셀!”


날 보고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안도의 표정을 띄운 건 시이나다. 현자의 거처 앞으로 전이시키고 그렇게 시간이 지나진 않았지만, 걱정을 많이 했는지 평소보다 많이 지쳐 보였다.


“어떻게 됐어? 우리가 여기에 온 걸 보고 현자가 바로 어디론가 떠나던데. 설마... 로그를 죽인 건 아니지...?”


내 몸에 남아있을 피 냄새를 맡았는지 시이나가 말끝을 흐렸다.


“그건 아닌 것 같네요.”


벌어진 일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고민하자니 이스가 대신 대답했다.


“그렇게 불만족스러운 얼굴을 하고 계신 걸 보니 제대로 풀리지 않은 거예요. 그렇죠, 류셀 씨?”

“아무도 죽지 않고 끝났다. 일단은 말이지.”

“일단은?”

“우리를 안내했던 용은 잘못하다간 죽을지도 모르겠군. 꽤 너덜너덜해졌으니까.”

“나, 나들이치고는 조금 살벌하지 않아...? ”

“상황에 따라선 아까와 같은 일이 반복될 수 있다. 그럴 땐 너희 먼저 왕국으로 전이시킬 테니 먼저 돌아가 있도록.”


현자는 내 정체를 알고 있다. 암 속성 마법을 사용하는 것에서 유추했는지는 모른다. 드물지만 마왕 말고도 암 속성을 사용하는 자들은 인간에도, 마족에도 있으니까.


이제 뻔히 보이는 연극에 수고를 들일 필요는 없겠지.


디의 대답에 따라 내 행동은 두 갈래로 나뉜다. 전면전이 된다면 여기에 남는 건 나 혼자다. 확실하게 숨통을 끊어놓지 않으면 후일에 위협이 되니 말이다.


“디는 일단 다툼에 대해선 발설하지 말라고 했으니 당장 문제 삼을 것 같진 않다. 너희는 편히 쉬고 있으면 돼. 온천이라도 가보는 건 어떤가.”

“그, 로그는 괜찮아?”


의외로 시이나가 붉은 골칫덩이의 안부를 물었다.


“류셀, 진심으로 화나 보였으니까... 분명 반죽음으로 만들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 녀석보단 오빠 쪽을 걱정해야겠지.”


로그는 과다출혈 말고는 이렇다할 부상이 없다. 왼팔이 깊게 베이긴 했지만 그뿐,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 진에 비교하면 금방 나아도 이상하지 않다.


“여기서 이러고 있어 봐야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아. 숙소는 이미 소개받았을 터다. 오늘은 이만 휴식을 취하는 거로 하지.”

“저도 류셀 씨에 찬성이에요. 시이나 씨 정도는 아니지만 저도 여행으로 좀 지쳐있어요.”

“아무 일도 아니라면 좋겠지만...”


시이나는 계속 신경 쓰이는 듯 푸른 건물을 흘낏 보며 발걸음을 옮기는 우리를 따랐다.


“숙소는... 분명 여기였지.”


작긴 하지만 아늑해 보이는 단층 건물이었다. 다른 건물들과 마찬가지로 수수께끼의 소재로 되어있었지만, 제대로 인간 크기의 생물이 사용할 수 있도록 문도 아담한 사이즈의 것이 달려있다.


드래곤밖에 살지 않는 이곳에서 어째서 이런 것들이 존재하는가 하면, 라드레이드의 오랜 역사 동안 그를 찾은 타종족이 간혹 있기 때문이다.


어떠한 경위로 용에게 커다란 은혜를 베푼 자는 주어지는 징표로 들어오는 게 가능하다. 우리처럼 용을 죽이고 온 경우는 분명 드물겠지.


숙소 내부는 간단한 가구들을 빼면 별다른 게 없었지만 하나 특이한 게 있다면 2층 옥상에 개인 온천이 마련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에메랄드 색의 보옥으로 지어진 온천은 항상 관리가 되어있는 것처럼 맑은 물을 담고 있었으며, 밤이 되며 살짝 쌀쌀해진 지금 몸을 담아 피로를 해소하는 데는 더할 나위 없어 보였다.


“로그가 말했던 온천이 이거일까?”

“아뇨, 그건 좀 더 마을 중심에 있는 저걸 말하는 게 아닐까요.”


이스가 가리킨 쪽에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건물이 있었다. 거대한 돔처럼 생겼다고 하는 게 맞는 표현이리라.


“여기 있는 것도 충분히 큰데, 저긴 얼마나 크다는 소리야?”

“그야, 용이 들어갈 만한 크기여야 하니까요... 류셀?”


다시 1층으로 내려가는 나를 이스가 부른다.


“온천은 너희들끼리 즐겨라. 나는 조금 생각할 게 있어서 말이다.”


다시 내려와 식탁 앞에 앉은 나는 턱을 괴었다.


오늘 있었던 일은 확실히 나답지 않았다. 그렇게까지 이성을 잃은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을 텐데. 어째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주체못한 걸까.


아무 생각 없이 자신의 몸을 위험에 처하게 한 로그와, 그걸 제때 말리지 못한 진.


그 둘의 어디가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은 건지, 더 이상 알 수 없다. 알 것 같으면서도 손을 뻗으면 마음의 심연으로 빠져버린다.

답답하다.


이리저리 둘러보던 나는 생색만 낸 것 같은 장식장을 훑었다. 아름답게 조각된 병에 술이 담겨있다. 숙소에 있는 건 사양 없이 사용하라고 했으니 괜찮겠지.


승천하는 세 마리의 용을 형상화 한 병의 마개를 따니 좋은 향이 올라왔다. 같이 있었던 술잔에 반 정도 따르고 찰랑이니 향이 더 강하게 났다.


이렇게 술에 의존하는 건 언제나 내 나쁜 버릇이다. 이 육신은 독에 내성이 있으니 이전처럼 취하는 것도 하지 못하는데.


나는 술잔을 금세 비웠다. 달콤하면서도 적당히 씁쓸한 뒷맛이 있는, 좋은 술이다.


“뭐하고 있는 거지, 난.”


이래서야 전생과 다를 게 없다. 충직한 부하를 늘리고 적을 찍어누르며 나날이 조직을 키워가지만 정작 내 마음 한쪽에 자리 잡은 공허함은 사라지지 않는다. 군대를 이끄는 몸이 되어서도 그건 달라지지 않은 채.


모르겠어. 모르겠다. 나는 이 주어진 역할을 완수하는 것으로 그 빈칸을 채울 수 있을까.


가증스러운 신들을 하늘에서 끌어내리고, 오랜 핍박을 견뎌온 마족에게 주도권을 넘겨준다는 숭고한 목적을 내세우긴 했지만 사실 그렇게까지 대의에 집착한 적은 없다.


이젠 나를 믿고 따라가면 찬란한 미래가 있을 거라고 굳게 믿는 부하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싶을 뿐이다.


더 이상 잃어버리는 건 사양이니까. 더이상 당하고 사는 건 싫으니까. 철저하게 빼앗는 쪽이 되기로 결정했으니까.


“저, 류셀.”


시이나가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온천은 벌써 끝난 건가?”“아직 들어가지도 않았어. 류셀 상태가 조금 이상해 보여서.”

“... 웨어울프는 감이 좋아.”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보이고 싶지 않은 부분까지 알아버리는 건 어쩔 수 없군. 너와도 이젠 꽤 알고 지낸 사이니까 말이다.”

“고민이라도 있는 거야?”

“고민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그저 묵묵하게 참고 살아갈 뿐이지.”


나는 눈을 감고 길게 숨을 내뱉었다.


“시이나. 너는 마족의 번영을 위해 살아가고 있다고 했었지. 불합리하게 핍박당하는 마족에게 이전의 영광을 가져다줄 수 있다면 그보다 기쁜 일은 없다고.”

“그런 거, 마족이라면 누구나 품고 있는 소원이야. 적어도 인간과 동등하게 서지 않으면 미래는 없는걸.”

“인마전쟁이 다시 발발한다면, 너는 마왕군에 들어올 의향이 있나?”

“전쟁이 또다시...?”


시이나는 생각하는 얼굴을 했다.


“무고한 사람들이 죽겠지. 그건 전쟁의 특성상 어쩔 수 없다. 너는 부외자가 싸움에 말려드는 걸 싫어하잖나. 그래도 마족을 위해 무기를 들 자신이 있냐는 소리다.”


시이나는 여리다.


억세게 살아왔음에도 타인의 죽음 앞에선 금방 약한 마음이 나와버린다. 인간 대 마족, 나아가선 천계와 하계의 전쟁이 될 이번 전쟁에서 일익을 맡을 수 있을까.


“하지만 대의를 위한 전쟁인 거잖아? 우리가 다시 일어설 방법이 그것밖에 없다면... 난 아마 할 수 있을 거야. 그야 사람들이 죽는 건 싫지만... 그것밖에 없다면.”


미지근하지만 어느 의미로는 시이나 다운 대답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질문을 계속했다.


“그렇다면 너는 드래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인마전쟁에 아무 신경을 안 쓰고, 마족이 패배해도 인간과 나눈 맹약을 들먹이며 이런 곳에서 놀고 먹는 놈들 말이다. 같은 마족인 주제에 언제까지고 중립을 타령하는 이들을, 너는 어떻게 다룰 건가?”

“물론 드래곤들이 합세해준다면 좋겠지만, 딱히 강제할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 강제할 수 있다 해도 분명 뒤에선 투덜거릴걸?”


놀랍게도 나와 똑같은 견해를 늘어놓는 시이나.


“그런가.”

“그런데 그건 왜? 인마전쟁은 마왕과 용사가 강림하지 않으면 시작 안 한다구?”

“그냥 물어본 것 뿐이다.”


나는 술잔을 탁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기분전환 겸 색다른 게 하고 싶었다. 시이나가 아직 온천에 들어가지 않았다고 했으니 둘보다 먼저 몸을 데워놓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 온천, 나도 한 번 구경이나 해보지.”

“아? 지금은...”“응?”


시이나가 무슨 일인지 아니 괜찮나.. 라고 혼잣말을 하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으응, 물이 딱 적당하게 따뜻해서 좋아. 먼저 담구면서 얘기라도 하고 있어.”

“얘기?”


서로 말이 안 맞는다는 느낌이 있었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기로 하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놀러온 건 아니지만 기분전환 쯤은 괜찮겠지.


걸친 옷을 대충 벗어 바구니에 넣어두고 문을 열어재낀 내 얼굴에 온천의 김이 불었다.


“어?”

“아.”


언제나 하고 다니는 머리띠를 풀어 은색 머리를 늘어뜨린 이스가 살짝 놀란듯 이쪽을 보고 있었다.


열기가 올랐는지 살짝 얼굴은 붉어져 있었다. 당연하지만 그 백옥같은 살결은 전부 훤히 보이고 있었다.


“이건 또 반가운 서프라이즈네요.”

“먼저 들어가 있는 줄은 몰랐다. 미안.”


괜히 어색하게 변명을 늘어놓아봤자 이스에게 더 수치심만 줄 뿐이다. 정직하게 사과하고 나가려는 내 뒤에서 방울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아무도 싫다고는 하지 않았어요. 상대가 류셀 씨라면 혼욕도 환영이에요.”


이스는 몸을 가리려고 하지 않고 옆의 자리를 톡톡 쳤다.


“류셀 씨도 지치셨겠죠. 사양 말고 이리 오세요.”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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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난입 +1 20.02.16 289 8 8쪽
109 분노 +3 20.02.13 307 8 9쪽
108 피바람 +1 20.02.09 303 8 9쪽
107 방아쇠 +1 20.02.06 281 10 9쪽
106 용족 소녀 +1 20.02.02 322 9 11쪽
105 현자 +1 20.01.31 282 12 8쪽
104 임무 실패 +1 20.01.23 297 9 9쪽
103 용의 이상향 +1 20.01.19 300 11 10쪽
102 꽃잎은 천천히 떨어진다 +1 20.01.16 296 8 12쪽
101 어쩔 수 없는 희생 +1 20.01.12 303 10 10쪽
100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1 20.01.09 303 8 9쪽
99 적발 +1 20.01.05 292 9 9쪽
98 잠입 +1 19.12.29 310 9 11쪽
97 간부 회의 +3 19.12.26 325 8 10쪽
96 침공 준비 +1 19.12.22 315 10 9쪽
95 어딘가 수상한 나들이 계획 +1 19.12.18 303 8 9쪽
94 위화감 +1 19.12.14 314 12 11쪽
93 천재 드워프 소녀 +1 19.12.11 330 7 11쪽
92 천벽인광 +1 19.12.08 344 8 11쪽
91 섬광의 리우 에스타 +1 19.12.05 335 9 12쪽
90 첫 번째 마무리 +1 19.12.01 330 10 10쪽
89 뜻밖의 개입 +2 19.11.28 386 10 11쪽
88 인간 대 지옥개 +1 19.11.24 342 9 10쪽
87 난투 +2 19.11.21 332 10 9쪽
86 임박하는 갈등 +1 19.11.17 342 11 10쪽
85 왕국의 사절 +1 19.11.14 339 9 12쪽
84 천천히 흘러가는 밤 +1 19.11.10 334 10 10쪽
83 사소한 충돌 +2 19.11.07 348 11 11쪽
82 엘프와 술 +1 19.11.03 384 10 10쪽
81 마력 증강 +1 19.10.31 379 11 11쪽
80 포로의 결정 +1 19.10.27 384 11 11쪽
79 돌이킬 수 없는 선택 +2 19.10.24 391 13 10쪽
78 바르포르도 +1 19.10.20 388 13 10쪽
77 승전국의 대위 +1 19.10.17 406 10 10쪽
76 자격의 증명 +1 19.10.13 481 11 10쪽
75 세계수 +1 19.10.10 416 12 11쪽
74 에델가르드 토벌 +1 19.10.06 411 12 11쪽
73 빙결의 마수 +1 19.10.03 410 11 11쪽
72 설원 +1 19.09.29 436 11 11쪽
71 류아 +2 19.09.26 468 11 11쪽
70 서로의 요구 +2 19.09.22 452 13 11쪽
69 대화의 시작 +1 19.09.19 449 12 10쪽
68 해제 +1 19.09.15 446 12 7쪽
67 장로회의 +1 19.09.12 467 10 9쪽
66 항구도시 프냐르 +1 19.09.09 482 11 11쪽
65 짧은 여정의 출발 +1 19.09.08 510 11 9쪽
64 하이엘프 +1 19.09.04 553 12 9쪽
63 사전 준비 +3 19.09.01 542 15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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