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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없는데 말입니다

죽고 나니 마왕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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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stable
그림/삽화
Zig
작품등록일 :
2019.02.24 00:11
최근연재일 :
2024.06.22 21:55
연재수 :
308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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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4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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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92
글자수 :
1,713,963

작성
19.09.01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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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2
추천
15
글자
10쪽

사전 준비

DUMMY

날씨가 슬슬 싸늘해지기 시작한 초가을의 아침.


“아, 류셀 씨.”


왕궁 도서관에서 걸어나오다 마주친 이스의 팔에는 서적이 잔뜩 들려있었다.


“이렇게 만나다니 우연이네요.”


도서관 입구에 세워진 황금 사자상 옆에 잠시 책을 내려놓은 이스가 웃으며 인사했다.


이스의 말마따나 전쟁의 사후처리로 이것저것 바빴던 덕분에 둘이서 얼굴을 마주보는 건 꽤 간만이었다. 왕국 내 산더미처럼 쌓인 제국군의 시체더미를 처리하는 것만 해도 엄청난 노력이 필요했으니까.


“공부중인가?”

“학습을 게을리 하면 안 되니까요. 왕국에 있는 건 전부 검술 관련 서적일줄 알았는데 잘 찾아보니 마법서도 꽤 있더라고요. 성검사 재질이 있다고 해도 미리미리 배워두지 않으면 안 되겠죠.”


말은 그렇게 해도 이스는 딱히 몸을 쓰는 일을 맡고 있지 않았다.


이스에게 주어진 일은 현대의 직책으로 비유하자면 총리. 왕국 재정이나 경제 정책 등 정치 전반에 걸쳐 보고를 받고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일이다. 놀라운 것은 그녀 혼자가 하기에는 업무량은 절대로 적지 않을 텐데 틈을 내서 자기계발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왕성 일부에선 국왕의 전권을 업고 업무를 수행하는 이스를 바라보는 우려의 시선도 있었지만 일의 신속도와 완성도가 그녀의 능력을 증명했다. 한때 아무 대책 없이 국왕을 암살하러 왕국에 잠입한 사람과 동일인물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녀가 제국에서 받은 교육은 이런 방면에선 철저했다는 것이다.


“가름 씨와 네이아르 백작이 마침 마차를 타고 떠난 참이에요. 백작에게는 가름 씨가 류셀 씨의 수하라고만 간단히 소개해두었는데 문제없겠죠?”

“사실이다. 그 이상 그에게 설명해줄 의무는 없겠지.”


가름을 같이 보낸 건 혹시나 교섭이 잘못될 경우를 대비해서다. 지금의 제국이 그럴 배짱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만 인간의 마음은 모르는 법이니까. 헬하운드 하나면 제국의 수도를 순식간에 불바다로 만들고도 남았다.


“저는 어때요, 류셀 씨. 제가 더 알아야 할 건 딱히 없을까요?”


이스는 음흉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홀로 왕국에 떠내려 온 마족인줄 알았더니 차례차례 부하들이 나타나고, 뒤에서 무슨 일을 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스케일이 큰 걸 벌이고 있는 것 같다고 해야겠네요.”


이스에게는 국정에 필요한 정보 이외의 것은 전달해주지 않았다. 내 정체가 사실은 마왕이라는 것도, 마왕군을 대강 꾸린 것도 이스는 아직 알지 못하는 정보다.


마의 계약을 나눈 이스에게 숨길 이유는 없을 텐데도, 꺼려지는 건 어째서인지.


“세계의 파멸을 꾀하고 있다고 한다면, 너는 믿을 건가?”

“아침부터 농담인가요, 류셀 씨?”


내 발언을 가볍게 넘긴 이스는 책을 집어 들더니 종종걸음으로 나를 지나쳐갔다.


“필요한 게 있으면 불러주세요. 그러라고 저는 여기 있는 거니까요.”


나는 다시 발길을 재촉했다. 이 아침부터 도서관을 방문한 건 하이엘프에 대해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 않을까라는 기대 때문이었지만, 수확은 전무했다.


마왕군에 즉각 참가하기를 거절한 하이엘프에 대해 지금 알고 있는 건 카니앗에게서 들은 일부의 정보가 전부다. 그마저도 종족 사이의 반목 때문에 퍼진 단순한 악평일지도 몰랐다.


“역시 그 녀석에게 부탁하는 수밖에 없나.”


존재 자체가 수수께끼인 그 녀석은 당연하다는 듯이 교회에 체재하고 있었다. 그 본질을 생각해보면 별로 논쟁의 여지가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왕국에서 제일 큰 교회는 왕도의 북쪽 언덕에 자리 잡고 있다. 나라에 연이어 뒤숭숭한 일이 일어나는 바람에 종교에 별로 관심이 없던 자들도 마음의 안정을 찾으러 방문하고 있다는 장소.


나는 사람들이 북적이는 개방공간으로 전이하는 것보다, 훨씬 내부의 기도실을 택했다.


엄숙한 분위기가 감도는 어두컴컴한 곳이다. 시야를 밝히는 것은 가장자리에 설치된 등불 뿐. 신을 상징하는 거대한 흉상이 중앙의 움푹 파인 공간에 전시되어 있고, 그것을 바라보는 형태로 네 개의 석조 계단이 꽤 깊게 내려가고 있었다.


“왔는가, 주인.”


계단 맨 밑에 서서 기도실의 흉상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가브리엘은 내가 갑자기 전이해 온 것에 놀라지도 않고 올려다보며 덤덤히 말했다.


어둠이 깔린 곳임에도 그녀가 발산하는 신성한 아우라는 자신의 주위를 환하게 비춘다. 옆의 여신의 상도 구석구석 비춰지고 있다.


여장부와 같은 늠름한 자세로 한 손에는 지팡이, 다른 손에는 검을 든 여신의 이름은 루미아. 어둠을 밝히며 적을 처단하는 여신 루미아를 유일신으로 섬기는 종교는 알트레아 왕국뿐만이 아니라 대륙의 여러 나라들의 국교로 지정된 지 오래다.


종교의 자유를 표방하는 제국조차 인구의 절반 이상이 루미아교 신도일 정도니.


특이한 점이 있다면 가브리엘이 여신상을 바라보는 태도에 경애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자신이 모시는 유일신을 대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가브리엘, 네게 물어볼 것이 있다.”


나는 서두를 괜히 길게 끌지 않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주인의 명이라면.”


천사는 접고 있던 날개를 펼치며 계단을 훌쩍 날아올라,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던 내 앞에 섰다. 내 배까지 밖에 오지 않는 작은 키였지만 겉모습처럼 천진난만할 리가 없다는 건 이미 알고 있는 사실.


“너는 천사로서 아주 오래전부터 지상을 관찰하고 있었겠지.”

“그렇다.”


어리지만 어딘가 다른 느낌이 드는 목소리가 대답했다.


“하이엘프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가 있다면 알려주지 않겠나.”


내가 불러낸 소환수라고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신의 편인 천사다. 그렇게 간단하게 입을 열거라고 생각은 하고 있지 않았지만.


“좋다.”


의외로 가브리엘은 순순하게 입을 열었다.


“하이엘프는 태초의 대전 이후 인간의 땅에 내려왔다. 기본적으로 타 종족과의 접촉을 엄하게 금지하고 있어 인간도, 마족도 그들과 깊게 연관될 일은 드물었다. 고독 속에 사는 것을 좋아하는 생명체다.”

“다크엘프와 비교해서 힘은 어느 정도지? 그 숫자는 파악하고 있나?”

“천계의 기록을 열람하겠다.”


가브리엘의 두 눈에 금색 광채가 깃들었다. 자신에게만 보이는 뭔가를 읽는 것처럼 기계적인 답변이 나오기 시작했다.


“개채수 531. 무력 중. 마법력 상. 신앙심 중. 문명레벨 하. 신앙심을 가지고 있는 종족이나 발전 가능성은 하. 하늘의 개입이 없는 이상 자력으로 현 정체를 타파하기는 힘들 것.”

“주민장부도 아니고 그렇게 다 일일이 기록해놓는 거냐.”


종족에 대한 천계의 판단이 걸러지지 않고 그대로 나오자 조금 질려서 말하자,


“천계는 지상의 종족을 관찰하는 게 주된 역할. 이상하지 않다.”


해야 할 일을 할 뿐이라는 가브리엘의 주장이 나왔다. 표정도 전혀 바뀌지 않고 있다.


“뭐 상관없겠지. 마법력이 뛰어나다는 종족이라는 점이 조금 마음에 걸리는데, 다크엘프와는 얼마나 차이가 있는 건가?”

“사용하는 마법의 종류가 다르다. 내재된 마력의 양이 현저히 차이난다. 개체에 따른 차이가 있지만 종족의 한계를 넘어서기는 힘들다. 다크엘프는 하이엘프의 마법에 대항할 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다.”

“고립된 채 마법만을 연구하며 살아온 엘프, 라는 거군.”


카니앗의 부족도 마법을 사용했지만 어느 쪽인지를 따지자면 신체능력이 높은 편이다.


“다크엘프는 하이엘프에서 분리되면서 그들만의 역사와 지식을 상실했다. 마족의 원천인 마법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영겁의 시간을 거치며 종족의 차이가 된 것이다.”

“그 잃어버린 마법이라는 것은 하이엘프들이 가지고 있는 건가?”

“그렇다.”


가브리엘이 긍정했다.


“어떤 형태로 현존하고 있지? 책이라든지?”

“엘프의 마법은 한때 9개의 세계를 연결했던 나무, 위그드라실에 깃들어있다. 대전으로 인해 불타버린 유그드라실의 일부가 아직 지상에 남아있다, 엘프의 수호를 받으며.”


도서관을 뒤져도 알지 못했던 정보가 튀어나오자 나는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었다.


“라그나로크가 한번 일어나고 저승을 제외한 세계들이 죄다 멸망하고 난 뒤 새롭게 탄생한 세계가 이곳. 그런데 유그드라실을 어떻게 보존했다는 거지?”

“모든 것이 대전으로 죽은 것은 아니다. 인간은 그랬을지 몰라도 상위 개체였던 엘프는 일부 살아남았다.”


린도 가름도 라그나로크 당시에 죽었으니 대전 후의 결과를 듣는 것은 처음이었다. 살아남은 신이 재기했다는 것은 머리에 못이 박히게 들었지만 서도.


“그 나무가 있으면 하이엘프의 마법력을 다크엘프에 깃들게 할 수 있겠지. 아닌가?”

“이론적으로는 가능하다.”


유그드라실의 잔재를 하이엘프들로부터 강탈하는 거야 간단하겠지만 아직 하이엘프들이 나를 전면으로 거부하겠다는 게 아니다. 이전에 스키잔이 마왕군을 편성할 때 그들의 대답은 나를 직접 보기 전까지는 판단을 유보하겠다는 것.


“직접 가서 담판을 지어야겠군.”


70년만에 새로 발발하는 인마대전이다. 역대 마왕들과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이쪽이 가진 패는 최대한 늘려둘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같은 편이 되지 않는다면, 누구든지 간에 미리 사라져 줄 필요 또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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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용의 이상향 +1 20.01.19 300 11 10쪽
102 꽃잎은 천천히 떨어진다 +1 20.01.16 296 8 12쪽
101 어쩔 수 없는 희생 +1 20.01.12 303 10 10쪽
100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1 20.01.09 303 8 9쪽
99 적발 +1 20.01.05 292 9 9쪽
98 잠입 +1 19.12.29 310 9 11쪽
97 간부 회의 +3 19.12.26 325 8 10쪽
96 침공 준비 +1 19.12.22 315 10 9쪽
95 어딘가 수상한 나들이 계획 +1 19.12.18 303 8 9쪽
94 위화감 +1 19.12.14 314 12 11쪽
93 천재 드워프 소녀 +1 19.12.11 330 7 11쪽
92 천벽인광 +1 19.12.08 344 8 11쪽
91 섬광의 리우 에스타 +1 19.12.05 335 9 12쪽
90 첫 번째 마무리 +1 19.12.01 330 10 10쪽
89 뜻밖의 개입 +2 19.11.28 386 10 11쪽
88 인간 대 지옥개 +1 19.11.24 342 9 10쪽
87 난투 +2 19.11.21 332 10 9쪽
86 임박하는 갈등 +1 19.11.17 342 11 10쪽
85 왕국의 사절 +1 19.11.14 339 9 12쪽
84 천천히 흘러가는 밤 +1 19.11.10 334 10 10쪽
83 사소한 충돌 +2 19.11.07 348 11 11쪽
82 엘프와 술 +1 19.11.03 384 10 10쪽
81 마력 증강 +1 19.10.31 379 11 11쪽
80 포로의 결정 +1 19.10.27 384 11 11쪽
79 돌이킬 수 없는 선택 +2 19.10.24 391 13 10쪽
78 바르포르도 +1 19.10.20 388 13 10쪽
77 승전국의 대위 +1 19.10.17 406 10 10쪽
76 자격의 증명 +1 19.10.13 481 11 10쪽
75 세계수 +1 19.10.10 416 12 11쪽
74 에델가르드 토벌 +1 19.10.06 411 12 11쪽
73 빙결의 마수 +1 19.10.03 410 11 11쪽
72 설원 +1 19.09.29 436 11 11쪽
71 류아 +2 19.09.26 468 11 11쪽
70 서로의 요구 +2 19.09.22 452 13 11쪽
69 대화의 시작 +1 19.09.19 449 12 10쪽
68 해제 +1 19.09.15 446 12 7쪽
67 장로회의 +1 19.09.12 467 10 9쪽
66 항구도시 프냐르 +1 19.09.09 482 11 11쪽
65 짧은 여정의 출발 +1 19.09.08 510 11 9쪽
64 하이엘프 +1 19.09.04 553 12 9쪽
» 사전 준비 +3 19.09.01 543 15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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