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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없는데 말입니다

죽고 나니 마왕이 되어 있었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Testable
그림/삽화
Zig
작품등록일 :
2019.02.24 00:11
최근연재일 :
2024.06.22 21:55
연재수 :
308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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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3,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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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22 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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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서로의 요구

DUMMY

“굳이 그걸 지금 여기서 토론할 필요가 있나.”


나는 레야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 했다.


“전 마왕군이 진 이유는 전략이 전무했기 때문이다. 역대 인마대전을 기록한 서적에도 전부 나와 있어.”


레야는 미소를 그대로 유지하며 다음 말을 재촉하듯 나를 바라보았다.


“자만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 마족이 인간에 가지는 신체적인 우월성만을 맹신했기 때문에 졌다. 체계적인 통솔이 잡히지 않았다는 건 끝까지 전쟁을 전쟁답게 대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반면 인간은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고. 더 이야기할 필요는 없겠지.”


내가 딱 잘라 말하자 레야가 깊게 숨을 들이마시더니 짧게 내뱉었다.


“맞는 말씀이죠. 하지만 그런 허점을 가지고도 마왕군은 항상 승리의 문턱까지는 도달했습니다.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전략으로도 말이에요. 그런데도 어째서 패배했는가, 라고 누가 묻는다면 저는 다른 쪽을 한번 보라고 해주고 싶네요.”

“다른 쪽, 이라.”


내가 레야가 사용한 단어를 반복하자 스키잔이 대화에 참여했다.


“레야 장로. 마왕님께서는 바쁜 일정 중에도 일부러 시간을 내어 여기까지 오신 것입니다. 수수께끼를 풀러 오신 게 아니니 돌려 말하는 건 삼가는 게 어떨까요.”


질책하는 스키잔의 어투에도 불구하고 레야는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마왕님께서는 이미 정답을 찾으신 것 같네요, 스키잔.”


헷갈릴 여지는 없었다.


전쟁을 전쟁답게 하는 것이 아니지만 매 대전마다 승리에 영향을 끼친 것. 그런 불합리한 요소라고 한다면 하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마왕에 대적하는 인간의 선봉이라고 할 수 있는 것.


“용사.”


나는 소파에 상체를 묻은 채 중얼거렸다.


“너는 용사의 존재를 말하고 있는 것이군.”

“그렇습니다, 마왕님. 역시 이해가 빠르시네요.”


레야는 만족감을 숨기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일정 주기를 두고 마족의 왕이 강림하고, 인간과 마족들이 대립해서 싸우는 건 태초의 대전 이래 정착된 이 세계의 법칙입니다. 하지만 매번 마왕이 모습을 나타낼 때마다 반대편에도 그만큼 강력한 적이 인류의 편을 들었죠.”

“용사 하나에게 마왕군이 스러졌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너는.”

“과장이라고 들릴 수도 있겠지만 틀리지 않아요. 전쟁 말미에 승패를 가른 것은 용사였으니까요. 승리를 목전에 둔 마왕을 쓰러뜨린 건 언제나 그런 불합리적인 존재였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방학을 즐기려던 와중에 책상 구석 있는 방학숙제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나는 못마땅한 눈길을 레야에게 주었다.


“그래서. 용사 대책을 세우자는 건가. 허나 쉬운 이야기가 아니다. 마왕과 마찬가지로 용사의 능력도 대전마다 달라져. 일말의 정보라도 있다면 모를까, 미지의 것을 두려워하는 것만큼 원초적이고 낭비적인 건 없다.”

“제 특기는 점이라서요, 완벽하지는 않지만 다른 이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볼 수 있죠. 400살. 장로에 앉기에는 조금 이른 나이에 이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도 이것 덕분일까요.”


레야는 갑자기 생뚱맞은 얘기를 하나 싶더니 눈빛이 달라졌다. 내 뒤에 다른 것을 보는 것처럼. 에메랄드 색 눈동자가 순간 살짝 빛난 것 같았다.


“아무래도 마왕님은 이미 그 용사와 만난 것 같네요.”


마치 내 눈도 가늘어졌다.


“아직 마왕군을 제대로 움직이지도 않은 지금?”

“예, 저는 이런 걸로 틀려본 적은 없답니다. 이번 대전의 마왕과 용사는 이미 서로 얼굴을 마주했어요. 짐작가는 인물은 없나요?”


잠시 눈을 감아 짧았던 이세계에서의 생활을 돌이켜보던 나는 따지듯 물었다.


“있다고 한들, 그에 대한 대책을 정하는 건 나 아닌가? 너희들이 그걸 알아서 뭘 할 수 있지?”

“노여움을 살 각오를 하고 말씀드리는 것이지만... 마왕님, 저는 어중간한 각오로 하이엘프를 마왕군에 넣으려는 것이 아니랍니다.”


조금 당돌하게 들릴 수도 있는 레야의 말에 여태 잠자코 있던 카니앗이 눈살을 찌푸렸다.


“저희는 이전처럼 패배할 전쟁에 참가할 생각은 없습니다. 승리를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을 준비는 되어있어요. 그러니 저희 하이엘프가 참전한다고 한다면 우선 약속을 해주셔야 하겠네요.”


레야의 녹색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용사를 중대한 위협으로 보고, 확실하게 처리하실 건가요?”

“... 마치 그러지 않는다면 패배는 정해져있다는 것처럼 들리는군.”


말은 나긋나긋하게 하고 있지만 이것만큼은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각오가 느껴졌다. 작은 회의장에 불편한 공기가 흘렀다.


“약속하지.”


그렇기에 내가 레야의 제안을 받아들인 건 스키잔에게도 무척 놀라운 일이었는지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이쪽은 상대를 고려할 필요 없이 그저 힘으로 밀어붙이면 되는 마당이니 특히나 더.


물론 나라고 해서 당돌하게 요구해온 것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레야가 말한 것처럼 용사라는 위협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변수였다. 이 전쟁을 이기기 위해서 모든 수단을 동원할 것이라 맹세한 이상 그것으로부터 고개를 돌릴 수는 없었다.


게다가 이곳에서 무력으로 하이엘프들을 짓밟는다 해도 마왕군의 전력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인간들이 연합할 것이 뻔한 이상, 우리도 그에 상응하는 연합을 조직할 필요가 있었다. 처음부터 교섭을 염두에 두고 방문한 것이기에 레야의 말을 굳이 거절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럼 이것으로 정해졌네요.”

“자, 잠깐만 기다려주시길.”


이야기가 다 끝난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하이엘프를 스키잔이 멈춰 세웠다.


“하이엘프가 마왕님을 직접 보기를 고집하던 이유는 이것뿐입니까? 분명 좀 더 다른 요구사항이 있을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요.”


레야는 무슨 마음으로 스키잔이 그런 질문을 한 건지 전부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쉽게 승낙해줘서 오히려 미심쩍다, 는 말을 재치 있게 돌려서 말하셨네요. 그런 기분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죠. 먼 길을 오시게 억지를 부린 건 저희들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제가 직접 듣고 싶었던 말은 방금 마왕님께서 해주신 게 전부예요.”

“그럴 거면 저를 통해서ㅡ”

“얼굴을 마주보고 나누는 언약이라는 건 무시할 수 없어요, 정령. 아무리 많은 대화가 오간다고 해도 상대가 무슨 표정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알지 못하면 그건 속이 텅텅 빈 껍데기에 불과하답니다.”


단칼에 스키잔의 반박을 막아버린 레야는 더 질문이 있냐는 것처럼 우리 쪽을 보았다. 물론 없을 리가 없다.


“세계수 위그드라실. 그 잔재를 너희 하이엘프가 보호하고 있다고 들었다. 거기에 깃든 고대의 마법도 포함해서 말이지.”

“예, 맞습니다.”


레야는 시원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저희 하이엘프는 마족들 사이에서도 마법에 대한 재능이 탁월하니까요. 그 위대한 유산은 하이엘프, 나아가서 분명 마왕군의 힘이 되어줄 테지요.”

“그걸 지금부터 사용해서 마왕군의 전력 증강에 사용하고 싶다만.”


레야는 조금 난감한 얼굴을 했다.


“위그드라실. 그건 아홉 개의 세계를 홀로 떠받치고 있던 거대한 나무이자, 대전쟁 라그나로크와 함께 몰락할 뻔 했던 보배입니다. 그걸 어떻게든 존속시킨 것이 저희의 머나먼 조상이고요.”


세계수의 이름을 담는 그녀는 무척이나 조심스러운 태도였다. 무척이나 유서 깊은 것의 이름에 행여나 먹칠을 하지 않을까 두려운 것 같았다.


“위그드라실에 담긴 마법은 물론, 그 잔재 자체도 저희 하이엘프들에게는 무척이나 신성한 것입니다. 세계수의 긍지를 이어받은 유일한 종족이라는 자부심이 강하니까요. 저희들의 이 땅에서도 그 주제를 깊게 파고드는 건 금기시 되어 있어요.”

“네 종족 전체에서 빼놓을 수 없는 구심점이란 소리군.”

“바로 그렇습니다.”


내가 가만히 보고만 있자 레야가 말을 이어갔다.


“그걸 사용하신다니 구체적인 내용을 듣지 않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만.”

“간단하다.”


나는 레야가 조심스럽게 설명한 위그드라실의 무게를 전부 못 들은 것마냥 가볍게 말했다.


“그 나무에 담긴 너희들의 선조의 마법을 일부 병사들의 마력을 증강시키는데 사용하자는 것이지.”

“마력 증강... 인가요.”


레야의 얼굴에서 은은한 미소가 사라져있었다.


“분명 그 나무에 깃든 마법은 강력합니다. 세계들이 멸망하고 새로 태어난 지금 이 세계에 자리 잡은 힘의 판도를 한 번에 뒤집을 수 있을 정도의 것이죠. 하지만 그렇게 쉽게 사용할 물건이 아닙니다. 너무나도 강대한 힘은 단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세계에 파멸을 불러올 수 있어요.”

“하지만 잘 사용하기만 한다면 우리에게 승리를 이끌어줄 수 있지.”


레야는 고개를 작게 저었다.


“어째서 저희가 이 작은 섬에서 나오지 않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단지 은둔 생활을 즐기기 위해서? 그건 사실과는 매우 동 떨어져 있어요. 저희가 단절된 생활을 계속해오는 것은 세계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함입니다.”


나는 작은 한숨을 쉬었다.


“직설적으로 말해주지. 너희들의 의견이 어떻든 간에 내 생각은 바뀌지 않는다. 하이엘프의 조력과 위그드라실에 담긴 태초의 마법. 그 두 가지를 놓고 저울질했을 때 역시 후자를 포기하는 것은 내 계획에 없어.”

“저희가 거절할 경우 강제로라도 빼앗으시겠다는 것인가요.”

“바로 그렇다.”


레야는 난처한 것처럼 곰방대를 두드렸다.


“그것은 원시마법의 아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옛 것이에요. 부적합자가 사용한다면 아마 높은 확률로 목숨을 잃게 된답니다. 간단하게 사용자의 마력을 올려줄 물건은 결코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을 정도죠.”

“하지만.”


나는 작게 웃으며 말했다. 가브리엘에게서 전해들은 사전 정보가 도움이 되는 순간이었다.


“과거 그 마법을 함께 공유했던 종족이 아직 지상에 남아있지 않은가. 한때 하나였고 지금은 둘로 갈라진지 오래인 종족이.”


레야의 눈이 바로 카니앗을 향했다.


“... 꽤나 오래전 이야기를 꺼내시는군요.”

“다크엘프와 하이엘프는 원래 하나의 종족. 엘프라고 불리는 종이었다. 같은 곳에 살며, 같은 마법을 사용하던 존재였지. 기본적으로 순수혈통을 고집하는 너희들이 이제 와서 마법의 적성에 크게 차이가 날 거라고는 전혀 생각이 안 드는데, 틀렸나?”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칭찬인지 비꼼인지 모를 말을 레야가 중얼거렸다.


“알겠습니다, 보고 얘기하는 게 빠를 것 같네요. 우선 장소를 옮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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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어딘가 수상한 나들이 계획 +1 19.12.18 303 8 9쪽
94 위화감 +1 19.12.14 314 12 11쪽
93 천재 드워프 소녀 +1 19.12.11 330 7 11쪽
92 천벽인광 +1 19.12.08 344 8 11쪽
91 섬광의 리우 에스타 +1 19.12.05 335 9 12쪽
90 첫 번째 마무리 +1 19.12.01 330 10 10쪽
89 뜻밖의 개입 +2 19.11.28 386 10 11쪽
88 인간 대 지옥개 +1 19.11.24 342 9 10쪽
87 난투 +2 19.11.21 332 10 9쪽
86 임박하는 갈등 +1 19.11.17 342 11 10쪽
85 왕국의 사절 +1 19.11.14 339 9 12쪽
84 천천히 흘러가는 밤 +1 19.11.10 334 10 10쪽
83 사소한 충돌 +2 19.11.07 348 11 11쪽
82 엘프와 술 +1 19.11.03 384 10 10쪽
81 마력 증강 +1 19.10.31 379 11 11쪽
80 포로의 결정 +1 19.10.27 384 11 11쪽
79 돌이킬 수 없는 선택 +2 19.10.24 391 13 10쪽
78 바르포르도 +1 19.10.20 388 13 10쪽
77 승전국의 대위 +1 19.10.17 406 10 10쪽
76 자격의 증명 +1 19.10.13 481 11 10쪽
75 세계수 +1 19.10.10 416 12 11쪽
74 에델가르드 토벌 +1 19.10.06 411 12 11쪽
73 빙결의 마수 +1 19.10.03 410 11 11쪽
72 설원 +1 19.09.29 436 11 11쪽
71 류아 +2 19.09.26 468 11 11쪽
» 서로의 요구 +2 19.09.22 452 13 11쪽
69 대화의 시작 +1 19.09.19 449 12 10쪽
68 해제 +1 19.09.15 446 12 7쪽
67 장로회의 +1 19.09.12 467 10 9쪽
66 항구도시 프냐르 +1 19.09.09 482 11 11쪽
65 짧은 여정의 출발 +1 19.09.08 510 11 9쪽
64 하이엘프 +1 19.09.04 553 12 9쪽
63 사전 준비 +3 19.09.01 542 15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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