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필더 님의 서재입니다.

테르센트 연대기 ~ 순백의 장군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필더
작품등록일 :
2015.04.20 11:44
최근연재일 :
2015.09.16 00:51
연재수 :
17 회
조회수 :
3,218
추천수 :
17
글자수 :
89,102

작성
15.06.10 08:48
조회
162
추천
1
글자
21쪽

10화. 호르리텐시아 수비전 -2

DUMMY

리커트는 둘째형 린드블름과 비슷한 점이 있었지만 분명 다른 점이 있었다. 린드블름은 극단적인 쾌락주의자로 물욕이나 명예욕보다는 당장의 본능을 더 중시했는데, 그는 최소한의 지성이 있다는 점에서 리커트보다 나았다.


린드블름은 검술 실력이 뛰어났고, 전술과 병법에 문외한은 아니었다. 행정이나 경제에 대한 상식도 있었다. 하지만 리커트는 그런 기본 소양이 아무 것도 없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는 어릴 때부터 대책없이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지 않으면 발버둥을 치는 성격이었던 것이다.


그는 8살 때 처음 사람을 칼로 찔렀다. 저녁 식사를 하던 중에 나이프로 손을 베자 분풀이를 하기 위해 하녀에게 칼을 휘두른 것이다. 최소한 그 때의 리커트는 칼에 찔려 창백해져가는 하녀에게 사과할 정도의순수함은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다음 해에 그는 도시의 불량배들과 함께 거리의 부랑자들을 몽둥이로 두들기며 낄낄댔고, 역사를 담당하던 젊은 가정교사를 폭행하려다가 힘에 밀리자 즉시 칼을 뽑아 들어 옷을 찢어버렸다.


어리다는 이유로 방임되던 리커트는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날뛰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런 그의 곁에 있으려 하지 않았겠지만 그런 그의 단순한 성격을 이용하려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의 나이 많은 친구들은 그의 비위를 맞추면 원하는 것이 모두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고난 다음 그의 곁에 모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곧 그의 패거리는 유명한 깡패가 되었고, 북랑시에 도성을 휩쓸고 다니며 온갖 문제를 도맡아 일으켰다. 자신의 막내동생을 견딜 수 없던 다리오는 결국 본인이 왕위에 오르자마자 리커트와 그의 패거리를 동 랑시에로 쫓아버렸다.


동랑시에로 쫒겨온 리커트는 분노했다. 그는 자신의 형이 자신을 꺼리는 이유를 상상하지 못했다. 권력이 있는 자가 권력을 휘두르는 것은 당연하다고 믿고 있었기에 자신의 잘못에 대해 한번도 생각해본 일이 없었다. 어쩌면 그는 좋은 부모가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혼자 곰곰이 생각하다가 어처구니 없는 망상을 하기 시작했다.


'다리오 형이 날 두려워 하고 있는 거다. 내가 왕좌를 차지할 거라고 생각한다. 나의 잠재능력에 공포를 느끼고 있다.'


리커트는 깡패들을 긁어모았다. 필요하면 해적이나 산적도 대상이 되었다. 돈은 얼마든지 있었다. 다리오는 무능한 동생에게 위로금 명목으로 무한에 가까운 돈을 내주라 지시했던 것이다. 리커드의 주변 사람들은 돈의 매력에 빠져 감언이설로 그를 부추겨댔다.


"리커트님은 이런 변방땅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왕에 어울리는 영웅이지요."


리커트의 가장 큰 단점은 -그의 성격이 매우 나쁘다는 것보다도- 귀가 얇다는 데에 있었다. 그는 정말 그 취객이 한 말을 믿어버리고 전쟁을 일으킬 정도로 강성한 세력을 만들어냈다. 이 세력은 군대라 부르기에는 너무 조잡했지만, 아무튼 숫자는 많았다. 왕위를 탈취하기 위한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하던 참에 그는 발라의 거병 소식을 듣게된다. 한주가 지날때마다 그의 형제들은 패배를 반복했다. 리커트는 낄낄대며 간드러지게 웃었다.


"역시 내가 직접 하지 않으면 안 되는군! 다리오 형님으로는 무리야! 내 오른 손에 발라의 목을 들고 북랑시에로 가서 왕좌를 얻어내는 것은 천운인 것이다!"


리커트는 드롤이 호르리텐시아를 빼앗기자 그에게 재출격을 진언하며 거들먹거렸다.


"저도 즉시 군대를 모아 형님을 돕겠습니다. 동 랑시에의 전권을 맡겨주십시오."


드롤은 그의 막내동생의 말 따위는 진지하게 듣지 않았다. 좋을 대로 하라고 말하고 본인은 발라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재출격해버렸지만, 리커트는 이것을 기회라 여겼다.


"동랑시에의 전권을 얻었다! 이제 왕좌에 오를 시간이다!"


리커트는 즉시 징병권을 활용하여 민병대를 조직하게 하고 자신을 따르던 깡패들을 대장으로 삼아 출격시켰다.


"내가 이 전쟁에서 승리하여 왕이 되면 너희 모두에게 대공의 작위를 내리겠노라!"


그의 호언장담에 부하들은 환호했다. 청년은 물론 아이와 노인을 합쳐 병수는 어느새 십만을 헤아리고 있었다. 대부분 무기도 없었고, 갑옷도 없었으며, 싸울 의지도 없었다.


강제로 끌려온 시민들이 군기라는 명목하에 병사라는 명칭으로 바뀐 것이다. 도망치던 병사 한 무리는 모두가 보는 앞에 매달려 채찍질 당해 죽었다. 마지막 병사의 목이 채찍에 맞아 부러지는 것을 본 시민들은 공포에 떨었다. 마치 거대한 감옥이 되어버린 것이지만 리커트는 재밌어할 뿐이었다.


"군대라는 것이 별 거 없군. 발라는 2년간 3천명의 병사를 길러냈다던데, 날 봐라. 2년간 십만을 만들어냈으니 이것이 나의 유능함을 증명하는 것이 아닌가!"


그의 부하들은 리커트를 칭송하였다. 다시 왕위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다. 리커트는 기고만장하여 전 병력의 출격을 명령했으니 이는 1028년 5주 6일이었다. 열흘간의 행군으로 거의 1만의 이탈자가 나왔지만 그는 태연했다.


"그래도 우리는 적보다 열 배 이상이 많지 않은가!"


리커트의 말에 부하들은 그에게 혜안이라며 입바른 소리를 했다. 그의 이런 움직임은 어린애 장난과 같은 발상에서 시작된 것이지만, 엄청난 변수로 작용하고 말았다. 먼저 진을 치고 있던 드롤조차도 이 대군에 깜짝 놀랐다.


"리커트? 그 리커트의 군대란 말이냐?"


스몰우드의 패배로 퇴각을 고민하던 드롤에게 이 엄청난 수의 원군은 뜻밖의 희소식이었다. 그는 즉시 리커트의 행군에 맞춰 출격을 준비하고 호르리텐시아를 한번에 정벌할 준비를 했다.




늦은 밤, 발라의 막사에 온 정찰병들은 깨지는 목소리로 보고했다.


"발라님... 적은... 아직 정확하진 않습니다만... 십 만에 이를 것 같습니다. 삼일이면 이곳에 이를 것입니다."


바실리오와 드롤을 잡을 방법을 논하던 발라는 깜짝 놀라 되물었다.


"대장이 누군가?"


"처음 보는 대장기였습니다. 사열하는 것을 보았습니다만 리커트 모다스 이외에 다른 이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바실리오는 치미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이를 갈며 말했다.


"리커트가 이 정도 대군을 운영할 리 없습니다. 그는 무고한 시민들을 끌어들인 겁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시민들을 방패로 삼으려 하는 건가요?"


세실리아가 눈물을 글썽였다. 발라는 충격에 털썩 주저 앉아 중얼거렸다.


"호르리텐시아의 시민들을 버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호르리텐시아를 지켜야 해요."


"하지만 적은 시민들입니다. 그들을 공격할 수 없어요."


세실리아가 안타까운 목소리를 냈다. 발라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더 이상 말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뭔가 수를 생각해 내야 합니다만, 차선책은 그들과 맞서는 것입니다. 호르리텐시아는 요지입니다. 백성을 위한다 해도 우리가 이곳에서 물러날 수는 없습니다."


바실리오는 침울한 소리로 조언했다.


"아직 시간은 있습니다, 바실리오 장군. 잠시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발라는 중얼거리듯 대답하고 자리에 바로 앉았다. 그는 다갈색 눈을 깜빡이며 오랜 시간 고민했지만 결국 답을 얻어낼 수 없었다.



-------------------



돈 라마네의 이야기를 들은 미첼은 누구도 책망하지 않았다. 그녀는 눈을 감고 탄식했다.


"안젤이 숲을 헤메고 있는 꿈을 꿨어."


그녀의 목소리는 울음이 맺혀 갈라졌다.


"그녀는 날 찾고 있는데, 난 대답할 수 없는거야. 그녀의 모습은 여전히 총명해보였어. 조금... 웃고 있는 것 같기도 했지."


돈 라마네는 그저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정해져 있어."


미첼은 그녀의 충성스런 부하에게 몇 마디 지시를 하고, "난... 곧 나가겠어."라고 말했다. 돈 라마네는 그의 상관에게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 막사를 나왔다. 늦은 밤 하늘에서 미첼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대치 상태가 3일이 지나자 맥크로스 모다스는 초조해졌다. 안젤레스를 납치하여 미첼을 조종할 때까지만 해도 그는 자신의 책략의 성공을 자축하고 있었다. 하지만 미첼이 움직인 것도 잠시. 발라가 언급한 데이멋 장군의 '남 랑시에의 불꽃'은 맥크로스의 작전을 말 그대로 "보류"상태로 만들어버렸다.


"도대체 그건 뭐지?"


미첼은 하루 세번 회의에 참가하지만 그녀도 그럴싸한 수를 내지 못한다. 그녀는 매번 같은 말로 입을 다물었다.


"남 랑시에 불꽃은 우리를 괴멸시키기 위한 최선의 전술입니다. 지금 우리가 움직이는 것이야 말로 적이 원하는 거에요."


아무리 애가 탄다해도 '남 랑시에의 불꽃'을 도통 알 수가 없는 맥크로스에게는 아무런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는 자신이 실패하지 않았다고 믿고 있었다.


"그래, 그래, 안젤레스를 데리고 있으니까... 미첼은 나의 뜻을 거스를 수 없어."


설령 안젤레스가 팔 다리 하나쯤 없어졌다해도, 살아만 있다면 미첼에게는 절대적인 카드가 된다. 두 사람의 관계를 주목하고 있던 맥크로스에게는 최고의 패. 여차하면 발라의 책략이 뭐든간에 돌격을 명령할 수도 있을 것이다. 미첼에게는 거부권은 없으니까.


그가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의 막사에서 웃음을 흘리고 있을 때, 막사의 천막 안으로 몸이 드러나는 철판을 댄 가죽 갑옷을 입은 건장한 청년이 달려들어왔다. 게다가 그를 따라 들어온 십수명의 병사는 막사에서 맥크로스를 향해 창을 겨누었다. 맥크로스는 당황하였지만 당당히 외쳤다.


"무례한 놈! 이 곳이 어딘지 알고 감히! 썩 무기를 거두고 무릎을 꿇지 못할까!"


하지만 돈 라마네는 길게 대화할 의지가 없었다. 그가 한번 손짓하자 병사들은 기합소리와 함께 맥크로스를 찌르니, 그는 제대로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숨이 끊어져버렸다.


돈 라마네는 교활한 책략가의 목을 베어 막대에 걸게 한다음 레네이네에게 전령을 보내 미첼의 뜻을 전했다.


"즉시 전 병력을 이끌고 호르리텐시아로 향한다. 우리는 발라 모다스를 위해 싸운다!"


군대를 움직일 준비가 끝난 돈 라마네는 발라에게 항복과 전투 호응의 약조를 하는 밀서를 보내니 이는 5주 15일의 일이었다.




리커드의 민병을 막을 걱정에 잠을 이루지 못하던 발라는 결국 호르리텐시아로 전 병력을 되돌렸다. 발라는 페르미오의 공을 치하하고, 수비를 단단히 굳힐 것을 지시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이것은 최선책이 아니었다. 이대로 막는 것은 아군과 적군 양쪽의 희생이 너무나 컸기 때문이다. 얼마 안 있어 호르리텐시아 동부평야에는 수천, 수만단위의 대군이 기치를 펼치기 시작했다.


"수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는 정예중의 정예입니다. 적의 본진을 노리고 돌격함은 어떠합니까? 적장의 목을 베면 적들은 더 이상 싸우지 않을 것입니다."


페르미오가 조심스럽게 의견을 내자 발라는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적의 본진으로 들어가기 위해 우리는 백성을 학살해야합니다. 난전이 시작되면 전투 의지가 없던 적 병사도 싸울 수 밖에 없으니, 그리 되면 우리 역시 견딜 수 없을 것입니다. 피해를 최소로 만들어야 하오. 리커드는 틀림없이 백성들을 방패로 쓸거에요."


"하지만 이대로는 더 많은 피해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페르미오가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발라는 그의 의견에 동의하면서도 선뜻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자신의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은 것이 이렇게 안타까울 수 없었다. 전장을 압도할 무장이 없는 발라에게는, 어떤 계책을 세워도 수행하는 것이 쉽지 않았던 것이다.


돈 라마네의 밀사가 도착한 것은 바로 그때 였다. 밀서에는 항복과 전투 호응에 대한 이야기 뿐만 아니라 안젤레스를 납치하여 전쟁을 강제하게 한 것, 안젤레스가 탈출중에 사망한 것이 모두 적혀 있었다.


"미첼 장군이 우리를 도와준다면 반드시 이길 수 있다. 리커트와 드롤을 모두 사로잡아보겠다."


발라는 손뼉을 치며 기뻐하고 즉시 계책을 짜서 전하게 하였다.




이튿날 예정되어있던 전투가 시작되었다. 드롤은 리커트와 말머리를 나란히 두고 앞으로 나와 호르리텐시아 성벽을 향해 외쳤다.


"발라 모다스, 네 놈은 나의 형 다리오 폐하의 은덕을 입었음에도 배신하고, 주제에 맞지 않게도 먼저 공격했다. 이 나라의 평화를 짖밟는 네 놈을 용서하지 않는 것은 이미 하늘의 뜻이고 백성의 뜻이니, 여기에 나와 즉시 항복하라!"


드롤이 그럴싸한 문장을 읽어내려갔지만 호르리텐시아에서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소리를 질러대도 발라는 꼼짝도 하지 않으니 리커트가 드롤에게 말했다.


"저들이 항복할 리 없습니다. 즉시 병사를 풀어 호르리텐시아를 포위하게 하고 공성전을 시작하도록 하죠. 나의 병사는 발라의 병사보다 10배나 많으니, 승리는 당연한 것입니다.


드롤은 그의 막내 동생의 말을 그럴싸하게 듣고, "적들의 성곽은 높지 않으니 반나절이면 발라를 사로잡을만 할 것이다."라 말하고, 직접 병사를 이끌고 지휘를 맡았다.


리커트는 병사를 풀어 호르리텐시아로 통하는 길을 모두 막게 한다음, 자신을 따르는 무리에게 지휘권을 맡겨 성을 공략하게 하였다. 이에 발라는 페르미오에게 동쪽을, 바실리오에게 남쪽을 맡기고, 세실리아에게 서쪽 성탑에 궁수를 지휘하게 한다음 스스로 중군을 이끌어 빈 곳을 메울 준비를 하였다. 그 다음 발라가 내린 명령은 수성(守城)의 상궤(常軌)와는 거리가 멀었다.


"성문을 열어 적들이 들어올 길을 만들라!"


그 명령을 듣자마자 페르미오는 손벽을 치며 감탄했다.


"성문을 닫아놓으면 성벽을 노릴터, 성벽이 무너지면 적의 파상공격을 막을 수 없다. 차라리 성문을 열면 적은 병력을 집중할 것이니, 우리에게도 승산이 있다. 이것이 그분의 전술이니 어찌 적들에게 패할 수 있겠느냐!"


과연 성문이 열리자마자 드롤은 코웃음을 치며 명령했다.


"적들은 수성의 기본도 모르는가! 원하는대로 성 안으로 들어가라! 한 시간 내에 성을 얻어내고 발라의 목을 베어 내 앞에 가져와라!"


하지만 발라의 타누아스와 리커트의 민병대의 차이는 하늘의 달과 땅의 진흙, 그 이상의 차이였다. 성문을 돌파하려는 적군은 타누아스에게 일방적으로 학살당하고 세실리아의 정확한 궁병대의 사격으로 진입하는 적을 갈라놓으니, 아무리 성문으로 달려들어가도 시체의 산의 일부가 될 뿐이었다.


공성의 선봉을 담당하던 장수들의 패배에 리커트는 분노하여 호되게 질책했지만, 애초에 건달 출신인 그들에게 전술이 있을리 없었다. 부하들에게 돌진을 강요하니, 겁먹은 병사들은 틈을 보아 도망치거나 아예 항복을 해버리는 일이 줄을 이었다. 해가 뜰 때부터 이튿날 해가 뜰때까지 가혹한 전투가 이어졌지만, 드롤은 발라의 목은 커녕 발라의 부하 한명조차 죽이지 못했다.


"적이 이토록 단단하니 우리가 어찌 성과를 낼 수 있는가! 도대체 어찌 해야 하는건가!"


드롤이 한탄하자 리커트는 태연하게 말했다.


"적은 수가 적고 우리는 많습니다. 형님, 우리가 할 일은 계속하여 공격하는 것입니다. 적의 피로가 한계에 올 때, 그들은 한번에 무너질 것입니다."


리커트의 말대로 발라는 점점 피로가 눈에 띄기 시작했다. 아무리 잘 단련된 병사라 하더라도 무한히 전투를 반복할 수는 없었다. 수십시간의 사투로 그들은 정신과 신체가 깎여가고 있던 것이다. 이를 염려한 바실리오는 병사들의 휴식을 권유했지만 발라는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지금 모든 병사가 싸워도 수가 모자라니 어쩔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쳐보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적에게 빈틈을 보이지 않으면 안됩니다. 아주 값비싼 미끼를 흔든다면 해가 지기 전에 승부가 날 것이니 조금만 더 견디도록 독려해주세요."


바실리오는 주군의 말에 고개를 숙이고 명령에 따랐다. 바실리오에 비하면 발라는 전장의 경험이 압도적으로 부족했다. 하지만 지난 몇주간 발라가 보여준 전략은 바실리오로 하여금 확고한 신뢰로써 그를 따르게 하였다.


"승리를 기다리겠습니다."


발라는 끄덕이며 웃어보였다.




해가 질 무렵 리커트가 적진을 살피니, 적들은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였다. 일부는 창을 거꾸로 잡고 벽에 기대어 있었고, 또 일부는 자리에 주저앉았는데, 하나같이 지쳐보이기 그지없었다.


"이제 슬슬 적들은 싸울 수 없을 것입니다."


리커트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남은 것은 승리를 얻는 것 뿐이지요."


드롤은 자신의 막내동생을 칭찬하며 최후의 전투를 준비하게 하였다. 그때 병사들이 외쳤다.


"발라 모다스가 직접 나오고 있습니다!"


형제가 깜짝 놀라 적진문을 보니 과연 발라가 말도 타지 않고 갑옷도 입지 않고 걸어나오고 있었다.


"저게 무엇을 꾀하는 거냐?"


발라에게 계속 속아넘어갔던 드롤이 묻자 리커트가 알은 체하며 대답했다.


"저것은 필히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항복하는 것입니다. 아마 자신의 목숨을 걸고 부하와 아내를 살려주길 바라는 거겠지요."


드롤은 껄껄 웃으며 직접 말을 앞세워 진앞으로 나섰다. 리커트도 이 때만은 뭐에 홀렸는지 드롤의 옆으로 말을 몰았다. 그는 발라 모다스를 굴복시켰다는 자부심에 한껏 목소리를 높였다.


"이걸로 영웅이 탄생하는 것이다! 나, 리커트 모다스의 이름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그의 목소리에 응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의 멍청한 부하들조차도 눈 앞에서 일어난 일을 믿지 못하기에 환호 대신 침묵을 지켰다. 무서울 정도로 조용한 저녁노을 아래에 발라는 조용히 서서 드롤과 리커트가 다가오는 것을 기다렸다.


"내가 무지했습니다, 친족을 생각해주신다면 모쪼록 제 부하들의 목숨만은 살려주십시오."


발라가 외치자 드롤과 리커트는 마주보며 박장대소하고 말을 달려 앞서 나갔다. 두 사람은 발라를 향해 당장이라도 검을 휘두를 수 있는 위치까지 나아가 발라에게 외쳤다.


"네가 드디어 항복을 청하는구나! 그 동안의 정을 보아 네 뜻을 들어줄 수도 있으니, 즉시 성안의 모든 병사에게 무기와 갑주를 벗게하여 나오라 하라!"


드롤이 거들먹거리며 명령하자 발라는 겨우 미소지었다.


"어째서 네가 감히 웃느냐!"


리커트가 일갈하자 발라는 마치 티파티를 즐기는 것처럼 평온한 목소리로, "드디어 앞으로 나섰군.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얼굴도 못 볼걸 알고 있었소."라고 말하며 환하게 웃었다.


그의 의미심장한 어투에 놀라기도 전에 바람을 찢는 소리가 고요한 진형을 가로질렀다.


"커헉!"


리커트의 배에서 쇠붙이가 튀어나왔다. 드롤이 바라보는 앞에서 리커트는 바닥에 곤두박질쳤다. 그의 등을 꿰뚫은 화살깃은 비웃는 것처럼 진동하고 있었다.


"이 비열한 놈...!"


발라를 매도하며 드롤은 고삐를 당겨 말을 돌렸다. 발라는 지체없이 손을 들어올리며 외쳤다.


"적을 섬멸하라!"


성에서 이 때만을 기다리고 있던 그의 병사들은 최후의 힘을 짜내어 달려나왔다. 전장을 울리는 강렬한 포효는 단번에 멈춰있던 시간을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동시에 무수한 화살이 드롤의 군대를 향해 쏟아져 내렸다.


"악을 섬멸하라!"


"발라 만세!"


"기꺼이 선두에 서리라!"


모든 상장들은 자신들이 믿던 리커트가 피를 거꾸로 쏟으며 죽는 것을 보자마자 갑옷을 벗어던지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리커트를 노린 화살을 날린 것은 두말 할 것도 없이 미첼이었다. 발라의 편지를 받고 미첼은 소수의 호위대만을 이끌고 몰래 합류해 있던 것이다. 깜짝 놀란 드롤은 말을 돌려 달아났으나 그 역시 멀리 가지 못하였다. 돈 라마네와 레네이네가 이끈 미첼군의 본대가 퇴로를 끊어둔 것을 그들은 알지 못했다.


억울하게 끌려온 병사들은 즉시 무기를 내버리고 발라를 향해 고개를 숙여 항복을 청했다. '모두의 시선이 모여있는 곳에서 리커트를 처치하는 것'만이 적을 와해시키는 거라 믿었던 발라의 계책이 정확히 맞아 떨어지는 것을 보며 미첼은 탄식했다.


"네가 했던 말이 옳구나. 저 사람을 좀 더 빨리 알았다면 안젤레스, 널 구할 수 있었을 터인데..."


그 와중에 리커트의 본진은 철저하게 약탈당했으니, 죽은 리커트의 시신을 회수했을 때 손가락이 하나도 없을 정도였다. 그가 평소에 끼고 있던 보석반지들을 눈여겨본 그의 친구들이 한 짓이었다. 밧줄에 묶여 끌려나가는 리커트의 시체를 보며 페르미오가 비웃었다.


"지옥에 가면 여태까지 네가 굶긴 사람들 대신 굶게 생겼군, 리커트."


작가의말

이계의 악마가 라빈그라나드를 점령했을 때 리베리아 제국의 주력 군대가 무너진 후에도 항전은 계속되었습니다. 여신의 재림이라 불리는 엘츠 에일린 테르센트 황제가 남아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테르센트 연대기 ~ 순백의 장군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7 16화. 세만 요새 공성전 -3 15.09.16 92 1 8쪽
16 15화. 세만 요새 공성전 -2 15.09.14 152 0 9쪽
15 14화. 여신을 따르는 부족 15.08.19 148 1 13쪽
14 13화. 마후라나 15.08.17 196 1 14쪽
13 언젠가의 이야기 15.08.12 194 1 22쪽
12 12화. 세만 요새 공성전 -1 15.06.29 174 1 12쪽
11 11화. 호르리텐시아 수비전 -3 15.06.12 159 1 7쪽
» 10화. 호르리텐시아 수비전 -2 15.06.10 163 1 21쪽
9 9화. 호르리텐시아 수비전 -1 15.06.08 265 1 10쪽
8 8화. 실패 -2 15.06.05 176 1 8쪽
7 7화. 실패 -1 15.06.01 176 1 6쪽
6 6화. 남 랑시에의 불꽃 작전 15.05.15 178 1 9쪽
5 5화. 탈출 15.05.01 199 1 11쪽
4 4화. 미첼 아델라이다 15.04.22 159 1 9쪽
3 3화. 발라를 좇는 자 15.04.20 217 1 11쪽
2 2화. 호르리텐시아 공략전 15.04.20 184 1 15쪽
1 1화. 순백의 장군 +4 15.04.20 387 2 15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