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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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 똑.
빗물이 고여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
“그러니까.....”
한참을 고민하던 내가 말했다.
“이 게임이 정말로 존재하고 있는 세상이라는 말인가?”
“정확하게 말하자면, 하나의 세상을 통채로 복제해서 가상의 공간에 구현한 시뮬레이터인 셈이죠.”
우아한 손짓으로 찻잔을 기울인 그녀가 대꾸했다.
“우리는 이 시뮬레이터를 통해 쏠쏠한 이득을 거두고 있고, 그 원본이 되는 세상이 멸망해서 표본수집이 멈추는 일을 바라지 않아요. 그렇기 때문에 당신처럼 이 시뮬레이터에 몰두했던 전문가들이 순차적으로 작전에 발탁되고 있습니다.”
“.....그렇군. 이해했어.”
지적할 부분이 한두가지가 아닌, 말도 안되는 개소리였지만 나는 수긍했다.
게임에 접속한것도 아니었는데 현실에서 느닷없이 게임 속에 끌려들어와 있다면, 그 누구라도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을것이다.
축축한 냄새가 풍기는 동굴. 이끼가 잔뜩 낀 돌벽과 그 사이 걸려있는 수많은 촛등. 밖에 내리는 비현실적인 녹색의 빗방울까지.
한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잠들었던 내 눈앞에, 내가 플레이하던 주술사 캐릭터가 거주하는 대수림이 펼쳐져있다.
틀림없다. 이곳은 내가 최근 몇년동안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플레이했던 1인칭 RPG 게임 ‘엘스노지아’ 였다.
“왜 나였지? 내 입으로 말하기도 그렇지만, 난 그렇게 실력있는 플레이어는 아니었는데.”
엘스노지아는 엘라지아라는 거대한 대륙을 배경으로 진행되는 싱글 시나리오 RPG다.
얼핏 보기에는 다른 게임과 별반 다르지 않은 그래픽을 가진 이 게임은 멀티플레이를 지원하지 않는데도 몇년동안이나 꾸준한 인기를 누려왔는데, 그 이유는 바로 시나리오를 중심으로 파생되는 무한한 자유도에 있었다.
일명 ‘메인스트림’이라 불리는 행성 전체의 명운을 결정하는 거대한 이야기가 시간선을 따라 진행되는 것과는 별개로, 플레이어는 재능과 시간이 허락하는 선에서 어떤 행동이든 가능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단순히 한번 플레이하고 끝나는것이 아니라 회차를 거듭할때마다 다양한 시나리오들이 순서를 바꿔가며 랜덤으로 튀어나오는만큼, 다회차 플레이를 하면서도 쉽게 질리지 않는다는 장점은 수많은 플레이어들을 아직까지 이 세상에 잡아두고 있었다.
“나보다 게임을 더 잘하는 플레이어는 수두룩할거야. 나는, 굳이 말하자면....”
메인스트림을 건드리는 대신 애매하고 까다로운 직업군을 골라 곁다리만 빙빙 도는 플레이를 탐닉하던 나는 냉정하게 말해 개발진의 의도에 부합하는 플레이어는 아니었다.
안정적이고 고성능의 스펙을 가진 스타팅에 매달리는 대신, 이 게임에 어디까지 개발자들의 손길이 닿아있는지를 궁금해서 아직까지 게임을 붙잡고 있는 부류.
“오히려 자유도란 시스템에 매달려 게임의 한계를 실험하는 미친놈이었지.”
대륙 최남단에 위치한 무한의 대수림은 인간이 살 수 없는 악랄한 환경을 자랑하지만, 그만큼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한가지에 몰두하기 좋은 장소다.
주술사를 플레이한 이후 나는 게임 안에서 진행되는 모든 시나리오를 싸그리 무시하고 주술 스킬을 연구하는일에 빠져들었으며, 꼬박 반년을 넘게 플레이한 끝에 최근에는 꽤나 재밌는 성과도 얻어낸 참이었다.
수백번 넘는 회차를 플레이한 지금에 와서 엘스노지아의 메인스트림은 내 관심사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게임의 원본이 되는 세상을 구해야 하는데 나같은 후보를 먼저 고려하는 미친놈은 없을것이다.
내 말에 여자가 입꼬리가 말려올라갔다.
“잘 아는군요.”
“.......”
“솔직히 말해 저 역시 당신이 이 위업에 적합한 존재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그렇다면?”
“다만 쓸만한 적합자라고 생각했던 후보들이 버러지처럼 무너지는 모습을 수천 수만번씩 보고나면, 때론 전혀 다른 가능성에 기대를 걸어보고 싶어지는 법이죠.”
권태로움이 감도는 나른한 어조.
그러나 그 안에 담긴 끝을 알 수 없는 한기에 나는 등골이 싸늘해지는 감각을 감출 수 없었다.
그녀는 그런 내 얼굴을 보고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차갑게 웃었다.
“그래요. 그냥 변덕이라고 생각해도 좋습니다. 아주 희박한 우연이 겹쳐서 당신같은 이들에게까지 기회가 주어졌다고, 그렇게 믿어도 괜찮아요.”
“......”
“당신은 그냥 보여주기만 하면 됩니다.”
“대가는?”
“대가?”
코웃음을 친 그녀가 말했다.
“그런 뻔한 질문을 할때는 반대로 생각해보는게 어떤가요?”
똑, 똑.
물방울 소리가 점점 커져간다.
흐릿해져가는 시야 속에서 그녀의 마지막 말만이 귓가에 맴돌았다.
“우리가 당신에게 줄 수 없는것이 있기는 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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