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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문수 님의 서재입니다.

아르마노 기사단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심문수
작품등록일 :
2022.08.17 19:05
최근연재일 :
2024.06.07 16:49
연재수 :
4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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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9,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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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7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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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형제와 작은 스승 (4)

DUMMY

선선한 바람이 불었지만 부단장 페트루스는 민머리에서 흘러내리는 땀을 연신 훔쳐내느라 바빴다. 부단장은 에시어를 보며 다시 말했다.



"빌레나탈에는 무슨 일로 오셨냐고 물었습니다."



"그냥 내 친구들 보러 가는 길인데."



"친구요? 잠시만요... 어떻게 알고 오신 겁니까?"



"......알고 오다니? 뭐를?"



둘은 빌레나탈 관문으로 이어지는 외곽 도로를 걷다 말고 서로를 바보처럼 쳐다보았다.



빌레나탈은 높은 성벽이 내외 구역을 나누는 도시였다. 외곽에는 도토리같이 둥근 집들이, 성벽 위로는 뾰족한 지붕들이 즐비한 밝은 도시. 밖은 굶주림에 칭얼거리는 아이의 목소리가, 안은 마녀사냥을 외치는 선교사들의 목소리가 울리는 시끄러운 도시. 흙먼지와 오물, 향수 그리고 쓰레기가 한껏 어우러진 향기로운 도시. 에시어는 고향의 기운을 만끽하다 말고 코를 움켜쥐어야 했다.



"도시! 내가 사랑하는 도시!"



델피누스는 사랑이 넘치는 예술가였다. 그는 목가적인 자연만큼 구조적인 도시를 사랑했다. 물웅덩이를 밟으며 노는 아이만큼 몸매 좋은 여자를 사랑했다. 델피누스는 끓어 넘치는 흥분을 숨기지 않고 도시의 거리를 내달렸다. 그의 목적은 분명해 보였다.



"기사단 재편이 있었습니다. 빌레나탈에서 출정을 준비하던 중이었어요."



페트루스가 군수품을 정리하는 병사들을 돌아보며 계속해서 말했다.



"출정 준비에 다들... 민감해요. 새내기 병사부터 지휘관까지 모두가 말입니다. 몇몇은 음식을 제대로 넘기지도 못하더군요. 그런 시기에 군수품을 도둑맞은 겁니다. 알테이렉 님께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군수품을 되찾고 도적들을 죽이라고 명하셨습니다. 기사단이 고작 이런 일에 흔들리면 시민들이 우리를 믿고 안심하겠냐면서 말이죠. 하지만 네오님포스 님께서는...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에시어는 허공에 눈동자를 굴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페트루스의 말을 흘려듣던 얀은 문득 병사들이 모여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다. '되찾아서 망정이지... 하마터면 전장이 아니라 단장님의 손에 죽을 뻔했잖아.'



"이쪽은 동료인가요?"



페트루스가 얀을 바라보며 물었다. 에시어가 끄덕였다.



"우리 아르마노 기사단 첫 번째 단원이지!"



"아하하... 기사단이군요... 에시어 님 답네요."



페트루스가 어색하게 웃더니 얀을 쳐다보았다.



"얀 트로엘이었나요? 전 페트루스 에녹입니다."



얀은 페트루스를 쳐다보기만 할 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페트루스는 코를 훌쩍이더니 얀에게 조용히 물었다.



"아르마노 기사단이요. 그거 조합에 등록은 한 건가요?"



얀은 고갤 내저었다. 페트루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입술을 씰룩이며 민머리를 만지작거렸다.



"트로엘 씨? 일정 없으면 저와 함께 가시죠. 에시어 님을 기다리는 분들이 계시거든요. 제가 안내를 하겠습니다."



"어디로 안내한다는 거지?"



얀이 물었다.



"에시어 씨를 찾는 분들이 계시거든요. 그분들께서 트로엘 씨를 궁금해하실 것 같아서요."



"어째서?"



페트루스는 뭐라 말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겨우 대답했다.



"그야... 에시어 씨의 동료니까요?"



"얀! 너무 걱정 마! 나만 믿으라고! 여긴 내 고향이니까!"



에시어가 자신 있게 외쳤다. 얀은 그를 조금도 믿지 않았지만, 어차피 갈 곳도 없으니 함께 가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도시의 벽과 목조건물과 시끄러운 거리를 지났다. 가판대와 공방은 행인들의 발길을 잡으려 애썼고, 술집은 대낮부터 술잔 깨지는 소리로 가득했다. 마녀의 위험을 알리는 연설꾼 건너편에는 마녀의 사악한 마법으로부터 보호해 준다는 목걸이가 비싼 값에 팔았고, 약초를 파는 할머니는 망토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뒤짚어쓴 수상한 거동자에게 반강제로 쫓겨났다.



대로변을 지나고 거리가 한적해지자 어디선가 피아노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근처에 악기 상점이 있었지만 피아노 소리는 그보다 더 멀리서 들려왔다. 머지않아 페트루스가 3층 석조 건물 앞에 멈춰 섰다. 건물은 담쟁이덩굴이 벽을 덮다시피 했고 테라스에 대리석 탁자와 의자 그리고 화초가 가꾸어져 있었다. 피아노 소리는 그 집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페트루스는 노크도 없이 문을 열었다. 피아노 소리가 일순 커지더니 현관 옆 응접실에서 붉은색 밤스 차림의 남자가 나와 페트루스를 맞이했다. 남자가 지친 목소리로 물었다.



"보급품은 되찾았습니까, 부단장님?"



"찾았네, 귀니치."



"반가운 소식이군요. 곧 출정할 수 있겠어요."



"그건 아직 모르겠군."



남자는 대답 없이 관자놀이를 붙잡으며 한숨만 내쉬었다.



응접실을 지나쳐 피아노 소리가 들려오는 거실로 들어선 얀은 피아노 옆에 델피누스를 보곤 조금 놀랐다. 그의 목적은 전혀 다른 곳에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에시어! 얀! 여긴 웬일이야? 너희도 피아노 소리를 따라온 거야?"



델피누스는 그렇게 말하면서 에시어와 얀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의 관심은 오로지 연주자에게 쏠려있었다. 아름다운 선율을 뽐내는 연주자는 일곱 살은 되었을까 싶은 앳된 소녀였다. 델피누스는 흥분한 얼굴로 소녀의 손끝을 지켜보았다.



"이 아이는 천재야. 천재라고!"



"제 딸이에요. 소피아죠. 당신 말대로 이 아이는 천재입니다. 천재!"



거실 구석에서 한 남자가 불쑥 끼어들었다.



"나도 천재요!"



델피누스가 제 가슴을 치며 말했다. 페트루스가 2층으로 향하는 사이에 델피누스가 계속해서 말했다.



"난 음악뿐만 아니라 그림과 이야기의 천재요! 그리고 천재는 천재를 알아보는 법이지! 소피아의 연주를 들으니 내 가슴에 불이 붙는 것 같소! 이 아이는 천재요!"



"맞아요! 내 아이는 천재예요! 벌써 작곡도 한다니까요? 소피아는 나와 달라요!"



델피누스와 남자는 서로 얼싸안고 좋아라 했다. 어찌나 요란한지 소피아가 연주를 멈추고 둘을 째려보았다. '역시 도시에는 미친 놈들이 많아' 얀은 생각했다.



"안녕, 소피아?"



에시어가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아이는 에시어를 아는 눈치였다.



"에시어 아저씨!"



"그래. 예니 언니도 여기 있니?"



"예나 언니는 왜요? 언니는 없어요. 공터에 있을 거예요. 왜냐하면 언니는 항상 공터에 있으니까요. 조슈아 오빠랑 같이요."



소피아는 그녀의 아빠와 델피누스에게 조용히 하라며 핀잔을 주더니 다시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에시어 님, 트로엘 씨. 따라오시죠."



페트루스가 계단참에서 말했다. 에시어와 얀은 피아노를 지나쳐 페트루스를 좇았다. 그는 2층의 어느 방으로 안내했는데, 원탁과 의자 외에는 텅 비어있었다. 옆 방에서 두 남자가 열띤 어조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무슨 얘기를 나누는지는 잘 들리지 않았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단장님을 모셔 오겠습니다."



페트루스가 떠나고, 에시어와 얀 둘만 남았다. 얀은 왠지 지금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기분 나쁜 기억이 떠오른 것이다.



"여긴 마치 감옥 같군... 에시어.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갑자기 달려들 생각은 아니지?"



"누가?"



에시어가 담뱃대에 불을 붙이려다 말고 물었다.



"아니라면 됐어."



"달려든다고 하니까 뭐라고 할까... 맥주가 먹고 싶은데? 예전에 맥주를 준다고 해놓고 대뜸 달려드는 놈들을 만났었걸랑. 용병단 같았는데. 자기를 기사단이라고 부르더라. 이상한 놈들이야."



"꼭 우리 같군."



"응? 그게 무슨 말이야?"



"몰라도 돼."



그때 누군가 방문을 열었다. 파발꾼이었다. 그는 여전히 얼굴을 복면으로 가리고 있었다.



"도망간 줄 알았는데."



얀이 말했다.



"제 발이 저려서 다시 찾아왔답니다."



"어떻게 알고 찾아왔지?"



"귀를 기울이면 무엇이든 알 수 있는 법이죠."



파발꾼이 얀을 빤히 쳐다보더니 옆자리를 차지했다. 그가 조용히 말했다.



"저는 귀가 아주 좋답니다. 무엇이든 알 수 있죠. 중요한 정보를 가져왔어요. 얀 씨에게 필요한 정보를 말이에요."



"관심 없는데."



"분명 관심이 갈 겁니다."



에시어는 담배만 뻑뻑 피우며 천장에 붙은 벌레에 관심이 쏠려있었다. 파발꾼이 에시어를 힐끗 보고는 조용히 속삭였다.



"옆 방에 목소리 들립니까? 두 남자의 목소리 말입니다. 저들이 뭔가 꾸미고 있습니다. 위험한 일을 말입니다..."



"관심 없어."



"저들은... 지금 독살을 준비하고 있어요. 에시어 씨를..."



얀은 한껏 찌푸린 눈으로 파발꾼을 쳐다보았다.



"그걸 왜 나한테 말하는 거지? 에시어에게 직접-"



"에시어 씨는 절대로 믿지 않을 겁니다."



"왜 나는 믿을 거라고-"



대뜸 방문이 덜컥 열리더니 두 남자가 들어왔다. 한 명은 검은 머리에 덩치가 컸고, 다른 한 명은 금발에 키가 컸다. 덩치가 큰 남자가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갑자기 에시어의 어깨에 힘껏 내려쳤다.



"이제야 왔군."



에시어가 인상을 구기며 욕설을 중얼거렸다. 덩치 큰 남자가 강압적인 어조로 계속해서 말했다.



"어딨었지? 설마 도망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여긴 내 발로 찾아왔어. 누가 들으면 잡혀 온 줄 알겠네."



"닥쳐."



덩치 큰 남자가 가죽 장갑 낀 손으로 에시어의 어깨를 짓누르는 동안 금발의 남자가 빈자리에 앉아 얀을 빤히 쳐다보았다. 얀은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간다고 생각했다. 짜맞춰진 인형극에 끌려온 인형, 혹은 올가미 아래로 제 발로 찾아간 쥐가 된 기분이었다. 작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볕도,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피아노 소리도 모두 연극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얀은 에시어를 쳐다보았다. 그는 늘 그렇듯 아무 생각 없어 보였다.



"하! 파란 머리라니! 에시어 드라키에... 정말 너다운 짓이야."



덩치 큰 남자가 얀을 보곤 소리쳤다.



"왜? 무슨 문제라도?"



얀이 남자에게 말했다.



"지금 문제라고 했나? 에시어, 저 친구는 아무것도 모르나 보군."



"뭘 알아야 해?"



에시어가 순진하게 물었다.



"몰라도 상관없지."



"뭘 몰라도 상관없는데?"



"젠장, 에시어. 넌 정말... 아무 상관 없는 거냐? 우리가 널 찾으려고 얼마나 개고생했는지도... 그래. 네 녀석은 옛날부터 그랬지. 개자식."



덩치 큰 남자가 에시어에게 잔을 건네더니 얀을 바라보았다.



"너도 마실 거냐?"



남자의 목소리에 짜증 어린 기색이 느껴졌다. 얀은 숨을 크게 들이켜며 고갤 내저었다. 남자가 콧김을 승 내쉬었다.



"제가 당신이라면..."



옆에서 파발꾼이 얀에게 겨우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제가 당신이라면 저 잔을 못 마시게 할 겁니다."



"이상한 소리 마."



"믿는 게 좋을 겁니다."



"허튼소리."



"이대로 둘 겁니까?"



"나와 상관없잖아."



얀은 입술을 깨물며 눈을 감아버렸다.



"...정말이요?"



"왜 나한테 이런...... 젠장."



결국 얀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얀은 속으로 욕설을 지껄이며, 벌떡 일어나 에시어의 잔을 빼앗아 버렸다. 에시어가 동그랗게 뜬 눈으로 얀을 쳐다보았다. 그 모습이 어찌나 멍청해 보이는지, 정신 차리라며 한 대 후려치고 싶었다.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이지?"



덩치 큰 남자가 어이없다는 듯 얀을 노려보았다.



"잔에 무얼 넣었을 줄 알고 마시려는 거야?"



"글쎄? 홉맥주 아닐까?"



에시어는 음료가 무엇인지 정말로 맞히려는 모양새였다. 금발의 남자가 재밌다는 듯 피식 웃었다. 덩치 큰 남자가 어금니를 꽉 물고 말했다.



"설마... 독이라도 넣었다고 생각하는 건가? 고작 계집들이나 쓰는 무기를?"



"계집처럼 굴어서 부끄러운가?"



"개자식!"



덩치 큰 남자가 얀에게 성큼 다가와 매서운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얀이 지지 않고 노려보자, 남자가 순식간에 얀의 손에서 잔을 거칠게 낚아챘다. 그는 잔에 담긴 음료를 단숨에 들이켰다. 얀은 당황한 나머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남자는 텅 빈 잔을 탁자에 거칠게 올려놓으며 얀을 쏘아보았다.



"내가 명예도 모르는 얼간이로 보이나? 나는 프레이네 4대대 기사단장 알테이렉 마노다! 멍청한 녀석!"



"진정해, 알테이렉. 에시어를 걱정해서 그런 거잖아."



금발의 남자가 달랬지만, 그다지 도움 되지 않아 보였다. 4대대 기사단장 알테이렉 마노는 목을 부러뜨리겠다며 불같이 화를 냈다. 이번만큼 당황스러운 일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놀란 나머지 얀은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다.



방 안에 웃음소리가 한가득 울려 퍼진 건 그때였다. 파발꾼이 방 전체가 떠나가도록 웃어대기 시작했다. 얀은 충격에 휩싸인 얼굴로 파발꾼을 쳐다보았다. 파발꾼의 모습이 꼭 악마처럼 보였다.



얀은 악마에게 속았다는 걸 눈치챘다. 얀은 욕설을 퍼부으며 파발꾼을 붙잡아 당겼지만, 놈은 여전히 복면이 펄럭거릴 정도로 웃어대기만 했다. 망할 얼굴을 가린 망할 복면이 끔찍하리만치 거슬렸다. 얀은 파발꾼의 복면을 벗겨버렸다.



"안녕? 잘 지냈냐?"



파발꾼의 미소는 악마의 것과 거리가 멀었다. 예상외로 부드러웠고, 익숙했다. 아주 익숙했다. 얀은 깜짝 놀라 화내던 것도 잊고 파발꾼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어찌나 당황했는지 자기 눈을 믿을 수 없었다. 꽤 오랫동안 말문이 막혔던 얀은 끝내 헛웃음과 함께 나직이 한마디 꺼냈다.



"움브라...?"



---



"상상 이상으로 미친놈이었군."



프레이네 기사단의 4대대 기사단장 알테이렉 마노가 창밖을 내다보며 중얼거렸다. 파발꾼 움브라 마키넬리와 얀 트로엘이 집을 나서고 있었다. 알테이렉은 흥미롭다는 듯 짧게 웃고는 에시어의 옆으로 돌아갔다.



"친구 한 명 골탕 먹이겠다고 날 이용해 먹다니. 개자식."



"누가 널 대신해서 허락해 준 건 아닐 텐데, 알테이렉."



금발에 키가 큰 프레이네 기사단의 1대대 기사단장 네오님포스 헤레이스가 턱을 괸 채 말했다. 알테이렉이 콧김을 내쉬었다.



"능력 없는 머저리였으면 그 자리에서 부숴버렸을 거야."



"부숴? 뭘 부수는데?"



에시어가 새로 받은 맥주를 홀짝이며 물었다.



"진짜 독을 먹였으면 이딴 멍청한 질문을 들을 일이 없을 텐데."



알테이렉이 빈자리를 차지하며 말했다.



"그래도 파란 머리가 널 아끼는 모양이야. 그 녀석, 칼을 뽑을 기세던데."



네오님포스가 말했다.



"아끼면 뭐 하나. 지 머리처럼 새파랗게 어린 애송이인데."



"어리니까 그럴 수 있는 거야."



네오님포스가 팔짱을 끼더니 계속해서 말했다.



"그나저나 웬일로 동료를 구한 거야? 넌 항상 혼자 다녔잖아."



"글쎄? 그냥?"



에시어가 순진하게 대답했다. 네오님포스가 씁쓸한 미소를 짓더니 이윽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당연히 모르겠지."



"난 왠지 알 것 같은데 말이야."



알테이렉이 에시어의 어깨를 붙잡으며 말했다.



"네가 파란 머리를 동료로 받아들인 건 그저 우연이 아닌 것 같은데. 옛 기억에 심취해서 그런 거 아니야?"



"심취해? 내가?"



에시어의 반응에 알테이렉이 짜증 어린 한숨을 내쉬었다. 알테이렉이 한마디 거들려하자 네오님포스가 얼른 끼어들었다.



"알테이렉. 그만둬."



"그만두라니? 그냥 모른 척하라고?"



"에시어가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두라는 거야."



"젠장. 어떻게 하고 싶은 대로만 하면서 살 수 있겠어?"



"하고 싶은 대로 살 수 있다면 그러는 편이 좋으니까. 굳이 참견할 일이 아니잖아."



다툴 일이 아닌 것 같은데 에시어는 분위기가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하긴 옛날부터 그랬지. 옛날부터 둘은 하루가 멀다 하고 다투었으니, 그에 비하면 이번은 꽤 점잖은 편이었다. 그래도 에시어는 두 친구 사이에 껴서 눈치를 살피는 신세가 되는 걸 원치 않았다. 침묵이 길어지자 결국 에시어가 말문을 열었다.



"이러는 거 재미없다. 오랜만에 보는데 이래야겠냐?"



"너나 오랜만이지, 나와 이 녀석은 하루도 빠짐없이 부딪힌다고. 정말이지 지겨워 죽겠네."



알테이렉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누가 기사단장을 그만두지 않는 이상, 앞으로도 변치 않을 것 같군."



네오님포스가 양손을 포개어 탁자 위에 올리며 말했다.



"오늘도 몇 번을 부딪쳤는지 몰라. 특히 군수품을 훔쳤던 도적놈들 때문에 얼마나 골머리를 썩였는지..."



"페트루스 말로는 에시어, 네가 해결했다는데. 한 명은 생포하고, 다른 한 명은 죽였다면서."



"죽인 게 아니라 사고였어."



에시어가 얼른 말했다.



"마차가 나무에 부딪혀서 마부가 떨어졌어. 놀란 말이 마부를 짓밟았다고. 그건 어쩔 수 없는 사고였어."



"잘했어, 에시어. 네가 놈을 죽였기 때문에 군수품을 되찾을 수 있던 거야. 군수품을 되찾지 못했다면 출정을 하기도 전부터 부정 탔겠지."



알테이렉이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죽인 게 아니라 사고였다고."



"그래도 살렸다면 더 나았겠지. 그 사람도 나이폴의 시민이잖아."



이번에는 네오님포스가 진중한 어조로 말했다. 알테이렉이 입술을 비죽이며 대답했다.



"시민 좋아하시네. 제대로 된 사람은 도적질 따위 하지 않아, 이 멍청한 놈아. 죽어 마땅한 놈들이라고."



"무엇이 그들을 범죄자의 길로 이끌었겠나? 우리에게 책임이 없을까? 오히려 클 수도 있어. 우린 기사단장이니까."



"젠장! 네오님포스! 기사단장으로서 네 본분이나 챙겨! 우리의 역할은 이 나라와 선량한 시민을 지키는 거야! 그리고 범죄자는 범죄자일 뿐이지!"



"처벌만이 정답이 되지 않아. 예방책을 세워야 해. 그러려면 범죄자를 이해해야 하고 말이야. 우린 그들을 이해해야 해."



"우리에게 그럴 시간이 있을 것 같아? 전방에 병사들이 계속 죽어가고 있잖아! 우린 전쟁 중이고, 출정을 앞두고 있다고! 이건 전쟁놀이가 아니야!"



“그만!”



에시어가 결국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젠장! 사고였다고! 죽였냐 살렸냐 이런 게 아니라 사고!"



"알았어, 에시어. 그건 사고였어."



알테이렉이 순순하게 인정하나 싶더니 한마디 덧붙였다.



"하지만 그건 네 주장일 뿐이잖아. 병사들과 시민들은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냥 넘어갈 수 없어."



"남이 뭐라 생각하든 그게 왜 중요해? 나한테는 너희들이 더 중요해!"



알테이렉과 네오님포스는 할 말을 잃었다. 그들은 에시어처럼 생각하지 않은 지 너무 오래된 것이다. 그렇다. 너무 오래돼서 문제였다. 알테이렉은 에시어의 반응을 공감하지 못했고, 네오님포스는 공감하지만 이해하지 못했다. 물론 에시어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두 친구를 공감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했다.



에시어에게 알테이렉과 네오님포스는 어릴 적부터 함께 지내온 소꿉친구들이었다. 늘 한 몸처럼 붙어 다녔고, 심지어 네오님포스는 한집에 같이 지내기도 했다. 30년 가까운 인생에 수많은 순간을 공유하고 개입해 온 친구들. 부모보다도 가까운 형제였다.



에시어는 반가워야 할 친구들이 이름 모를 귀족들처럼 낯설게 느껴졌다. 아주 끔찍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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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얀의 안식처 (3) 23.12.25 7 0 17쪽
33 얀의 안식처 (2) 23.12.03 10 0 22쪽
32 얀의 안식처 (1) 23.11.05 9 1 18쪽
31 불꽃의 노래 (12) 23.10.21 10 1 27쪽
30 불꽃의 노래 (11) 23.10.07 11 1 25쪽
29 불꽃의 노래 (10) 23.09.17 15 1 20쪽
28 불꽃의 노래 (9) 23.08.28 15 1 18쪽
27 불꽃의 노래 (8) 23.07.28 15 1 16쪽
26 불꽃의 노래 (7) 23.07.17 11 1 20쪽
25 불꽃의 노래 (6) 23.07.08 12 1 16쪽
24 불꽃의 노래 (5) 23.06.04 12 1 19쪽
23 불꽃의 노래 (4) 23.05.14 13 1 17쪽
22 불꽃의 노래 (3) 23.05.06 10 1 19쪽
21 불꽃의 노래 (2) 23.04.23 16 1 18쪽
20 불꽃의 노래 (1) +1 23.03.25 20 1 17쪽
19 곰과 여우 (5) 23.02.05 22 1 21쪽
18 곰과 여우 (4) 22.12.10 20 1 18쪽
17 곰과 여우 (3) 22.11.26 22 1 20쪽
16 곰과 여우 (2) 22.11.12 19 1 15쪽
15 곰과 여우 (1) 22.10.26 21 1 18쪽
14 아이의 꿈 (6) 22.10.23 23 1 24쪽
13 아이의 꿈 (5) 22.10.22 21 1 16쪽
12 아이의 꿈 (4) 22.10.19 20 1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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