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심문수 님의 서재입니다.

아르마노 기사단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심문수
작품등록일 :
2022.08.17 19:05
최근연재일 :
2024.03.30 15:57
연재수 :
40 회
조회수 :
970
추천수 :
47
글자수 :
327,857

작성
22.11.26 15:51
조회
21
추천
1
글자
20쪽

곰과 여우 (3)

DUMMY

아래턱을 노린 정확한 타격이었다. 얀은 강렬한 불빛과 종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추락하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얀은 추락 끝에 테이블을 붙잡고 쓰러졌다.



“일어나. 이제 시작이라고.”



카일의 목소리가 아주 멀리서 들려오는 듯했다. 얀은 본능적으로 팔을 들어 올렸지만, 카일은 머리가 아닌 복부를 노렸다. 얀은 신음을 토하며 나동그라졌다. 창자가 이리저리 꼬이고 뒤틀렸다.



“빌어먹을 놈! 어서 덤벼!”



카일이 멱살을 붙들고 주먹을 내지르는데도, 얀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강렬한 충격이 온몸을 옭아매고 정신을 앗아갔다. 귀에서 이상한 소리가 새어 나갔다. 카일이 침을 튀기며 계속해서 소리쳤다.



“개만도 못한 마녀 자식! 우릴 속일 수 있을 줄 알았어? 우리가 만만해? 건방진 녀석! 어디 그 잘난 마법을 써 보던가!“



이성의 끈이 이리저리 뒤엉키는 통에 얀은 순간적으로 가슴이 뜨거웠다. 급격히 솟구치는 아드레날린에 속이 울렁거릴 지경이었다. 얀의 주황빛 눈동자에 뜨겁게 들끓었다. 이성의 조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얀은 고함을 내지르며 카일의 뒷덜미를 잡아 힘껏 머리를 박았다. 카일이 욕설을 내뱉더니 매부리코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카일은 코를 쓱 닦고는 입꼬리를 올리며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다야?”



카일이 똑같이 머리를 박았다. 눈앞에 수백 개의 별이 폭발했다.



얀은 다리와 무릎을 이용해 기술 좋게 상대를 넘어뜨리고 입을 노려 가격했다. 그러나 노린 곳에 정확히 맞지 않았다. 카일이 어떻게든 거리를 벌리며 허벅지를 걷어차려 했는데, 얀이 몸을 아끼지 않고 달려들어 걷어차기는커녕 서로 뒤엉켜 넘어지고 말았다.



먼지와 지푸라기가 함박눈처럼 쏟아졌다. 주먹을 내지를수록 눈앞이 점점 붉어졌다. 입속이 축축해지고 머리가 폭발할 것처럼 타올랐다. 분노와 혐오만이 가득한 순간이 끝없이 물고 늘어지고 있었다. 어쩌면 영원히 이어질지도 몰랐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저 녀석을 불태울 수만 있다면. 부숴버릴 수만 있다면...



"개자식!"



“당장 멈추지 못해!”



웬 남자가 방 안으로 박차고 들어와 얀을 붙잡았다. 남자가 소리쳤다.



“그만해! 이 멍청하고 지긋지긋하고 저급한··· 이 머저리들!”



카일이 얼른 벽에 등을 붙이며 물러섰다. 얀이 몸을 던져 발길질을 날렸으나 남자가 방해하는 바람에 헛발질에 그치고 말았다.



“그만 하래두!”



“저 개자식이···! 개자식이-”



“아니까 가만히 있어!”



남자가 억센 팔로 얀을 끌어당기며 소리쳤다. 얀이 남자를 노려보았다.



“씨발! 알긴 뭘 알아?!”



“내가 이런 개 같은 일을 하루 이틀 겪는 줄 알아?”



“저라고 좋아서 이랬겠습니까, 멜데 선생님?”



카일이 조금 휜 듯한 매부리코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이 개자식이!”



얀이 멜데라 불린 남자에게 붙들린 채 으르렁거렸다.



“이봐. 누가 좋아서 이런 일을 하겠어? 나도 목숨 걸고 한 일이야. 이거 미친 사람 취급하네.”



“그럼 네 녀석이 정상이라는 거냐? 미쳐도 단단히 미쳤지! 망할 개자식! 도대체 머리통에 뭐가 들었는지!”



멜데는 목에 핏대가 바짝 오르고 목덜미부터 정수리까지 울긋불긋했다. 얀 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화난 것처럼 보였다.



그때 얀은 느닷없이 뜨거운 무언가가 부풀어 오른 관자놀이와 미간을 타고 흐르는 것을 느꼈다. 멜데가 경악을 금치 못하고 또 소리쳤다.



“젠장! 조금만 늦었어도 머리통이 깨졌겠네!”



“부술 생각이었으면 부수고도 남았죠. 근데 저 녀석은 진심으로 날 죽이려 했다고요.”



“그래서 누가 이겼냐?”



복도 쪽에서 누군가 불쑥 말했다. 얀은 그제야 그들을 향해 쏟아지는 시선들을 눈치챘다. 복도에 몇 병사(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기사)들이 호기 어린 시선을 보냈다. 그들은 서로 무어라 속삭이며 웃기도 하고, 사뭇 진지한 얼굴로 방안을 훑기도 했다. 멜데의 얼굴이 당장에라도 폭발할 것만 같았다.



“이 개자식들! 지금 구경났어? 그놈의 기사도는 얻다가 팔아먹은 거야? 무식한 놈들이라고! 당장 꺼져! 꺼지라고!”



---



얀은 휘어진 바늘과 의료용 실로 이마를 다섯 바늘이나 꿰매야 했다. 그래야만 흉터 없이 빨리 낫는다는 게 군의관 멜데의 소견이었다.



멜데는 솜씨가 좋은 의사였다. 얀은 그를 능력적으로 신뢰할 만한 사람이라고 판단했다. 카일은 왼쪽 어깨를 부목으로 고정하고 붕대로 감았는데, 이렇게까지 해야 하냐며 투덜거리다가 멜데에게 욕설 세례를 들어야 했다. 생전 처음 듣는 욕설에 지켜보는 얀의 정신이 아찔해질 지경이었다.



“짐승 새끼들도 엿 같아서 피해 갈 개 같은 놈들! 말로만 기사이니 뭐니 떠들어대지!”



멜데가 얀의 꿰맨 이마를 소독하며 짓씹듯 말했다.



“내가 십여 년간 수많은 환자를 돌봐왔지만 네 놈처럼 무식하고 야만적인 놈들은 처음이야. 그것도 자칭 기사라는 놈들이 말이야. 지켜보는 내가 부끄러울 지경이라고. 알아듣겠냐, 카일?”



“알다마다요.”



카일이 붕대를 만지작거리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안다는 새끼가 하는 짓거리하고는··· 지난주에는 네 명이나 실려 왔잖냐! 그것도 죄다 얻어터져서는 말이야. 네놈들 학습이라는 걸 하긴 하냐? 그딴 지능으로 도대체 어떻게 살아왔어? 젠장! 내가 이 일을 때려치우든가 해야지.”



“안 때려치울 거 다 압니다요.”



“말이 그렇다는 거지!”



멜데가 버럭 소리치며 바구니에 소독약을 던져넣었다.



“젠장··· 저 개자식 때문에 내 정신만 사나워진다니까··· 얀 트로엘이라고 했나? 이런 예의 없는 것들을 대신해서 사과하마. 편히 쉬어. 칼은 침대 밑에 두었으니 알아서 가져가고. 그렇다고 저 녀석을 찌르지는 마.”



얀은 대답 대신 허공에 눈동자를 굴렸고, 카일은 별 관심 없다는 듯 간이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연고를 줄 테니 아침저녁으로 꼼꼼히 발라라.”



얀은 이번에도 끄덕이는 것으로 대신 대답했다. 멜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십니까?”



카일이 물었다.



“내가 어딜 가든 뭔 참견이냐? 또 무슨 짓을 하려고?”



“그냥 궁금해서 그렇죠.”



“단장 만나러 간다! 앞으로 이딴 일로 다치는 녀석이 단 한 명이라도 더 나오면 군의관이고 뭐고 당장 때려치울 거라고 말이야!”



“어차피 안 때려치울-”



“닥쳐!”



멜데가 간이 의무실이 된 가정집 밖으로 나서려다 말고 카일을 향해 덧붙여 말했다.



“허튼짓할 생각 말고 가만히 누워 있어. 금방 돌아올 테니까.”



“그럼요. 그래야죠.”



당연한 일처럼 말했지만, 카일의 행동은 그렇지 못했다. 그는 멜데가 자리를 뜨기 무섭게 벌떡 일어서더니 붕대를 풀어버리고 부목을 치워버렸다.



“어이. 파란 머리. 좀 살만해?”



카일이 어깨를 빙글빙글 돌리며 물었다.



“아직도 안 끝났어?”



얀이 경계하는 눈초리로 쏘아보았다.



“안 끝나다니?”



“또 마녀라고 들쑤실··· 젠장, 이게 뭐라고 설명하는 건지···”



“내가 이 말을 몇 번이나 하는지 모르겠는데, 나도 별수 없었다고.”



“무슨 말인들 못 하겠어.”



얀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카일은 딱히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오해가 있었을 뿐이지. 누구라도 오해했을 거라고. 그렇지 않아, 파란 머리?”



“그래. 그럴 수 있지. 이번이 처음도 아니고. 그런데 이렇게 기분 나쁜 경험은 난생처음인걸.”



“난생은 무슨. 살면 얼마나 살았다고. 그리고 어디 귀족 집 자식이야? 곱게 자랐나 봐? 원래 사내자식들은 주먹질로 친해지는 법이야. 가장 빠르고, 좋은 방법이라고.”



“넌 어디서 막 자란 모양이야.”



“내가 좀 막 자라긴 했지. 개 같은 아버지가 날 단 70셀에 용병단에 팔아버렸거든. 당시에 돼짓값이 80셀이었지. 젠장. 언젠가 찾아가서 족치고 싶은데 이젠 얼굴도 가물가물하네.”



카일이 코밑에 핏자국을 문질러 닦고는 말을 이었다.



“이 정도면 오해를 풀었다고 생각하는데, 맞나?”



“모르겠는데.”



얀이 말했다. 카일이 헛웃음을 터뜨리더니 얀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대뜸 얀의 칼을 챙겨 들고는 방을 나서려 했다. 어찌나 자연스러운지 얀이 뒤늦게 알아차릴 정도였다.



“무슨 짓이야?”



얀이 칼자루를 얼른 붙잡으며 말했다.



“무슨 짓이긴? 술 마시러 가지.”



“내 칼은 왜 가져가?”



“그래야 네가 따라올 것 아니냐.”



얀이 어이가 없어 빤히 쳐다보고만 있자 카일이 계속해서 말했다.



“왜? 불안해? 아까처럼 갑자기 달려들까 봐? 이봐 파란 머리. 아까는 이유가 있었지만 지금은··· 젠장, 계집처럼 굴지 말고 그냥 따라오기나 해.”



얀은 칼을 획 낚아채고, 한술 더 떠 면상에 주먹을 내지르고픈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얀은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카일의 뻔뻔스럽기 그지없는 제안을 받아들였다.



술이 너무나도 간절했다.



---



아무리 둘러보아도 기사라고 보기 어려운 브라우버 기사단원들은 싸움질에 환장한 녀석들만 모아둔 집단인 게 틀림없다고 얀은 생각했다.



페사로의 작디작은 광장에 싸움질이 한창이었다. 맨손으로 벌이는 작은 투기장. 검은 수염의 단원의 주먹이 광대가 튀어나온 단원의 얼굴에 제대로 박히자 구경꾼들이 쇠 방패를 두들기며 환호했다.



얀은 싸움질을 지켜보며 주변을 경계하고 또 경계했다. 웃고 떠드는 기사단원들이 금세 돌변해 달려들 것만 같아 손이 칼자루 주변을 계속 맴돌았다. 맥주에 독이 들어있지 않을까 걱정까지 했는데, 꼬리에 꼬리를 물던 의심은 맥주 한 모금에 마법처럼 사라졌다. 그만큼 맥주는 아주 훌륭한 음료였다.



“무슨 축젯날인가?”



얀이 삶은 감자를 조심스럽게 베어 물었다.



“비슷하지! 남작님께서 마음껏 즐기라고 하셨거든!”



옆자리에서 카일이 말했다.



“왜지? 전쟁 중이라면서?”



“그러니까 이러지! 언제 또 이런 날이 오겠어?”



카일은 그렇게 말하고는 보드카를 한껏 들이켰다.



검은 수염 남자가 아래턱을 얻어맞고 다른 자리를 엎어버리자 분위기는 최고조에 달했다. 검은 수염은 바닥에 드러누운 채로 실소를 터뜨렸다. 견딜 수 없이 즐거워 보였다. 드디어 싸움질이 끝난 모양새였다.



“진짜 전쟁이 터지긴 했나 보군··· 그러지 않고서야 저렇게 미치진 않겠지.”



얀이 중얼거렸다.



광대가 튀어나온 남자가 검은 수염을 일으켜 세웠다. 서로 수고했다며 끌어안자 박수가 쏟아졌다. 둘이 환대받으며 얀과 카일이 있는 자리로 돌아오자 곧장 다른 두 남자가 그들의 빈 자리를 채웠다.



“끝내주는 밤이야!”



검은 수염 뮬러가 잘 떠지지도 않는 눈을 번뜩이며 외쳤다.



“카일! 여기 내 이빨 좀 봐주세요. 어금니가 잘 있는지 말이에요.”



“제대로 벌려봐··· 잠깐, 안쪽에 하나가 없는데? 여기 왼쪽. 어디 갔냐. 삼켰냐?”



“이거 지난주에 빠진 겁니다. 문제없네요.”



뮬러가 씩 웃으며 말하고는 얀에게 시선을 보냈다.



“파란 머리! 한 게임 할래? 아무나 골라 봐! 죽이지만 않으면 돼.”



얀은 가운뎃손가락으로 명확히 대답했다. 뮬러는 무안한 듯 어깨를 으쓱이고는 곧바로 주제를 바꾸었다.



“이야··· 근데 어떻게 저렇게 파랄 수 있지? 뭐로 물들인 거야?”



“어떤 미친놈이 머리를 파랗게 물들이겠어?”



얀이 대답했다.



“진짜 네 머리라고? 그럼 그 개자식이 날 속인 거야?”



“개자식?”



광대가 튀어나온 남자 크로머가 코맹맹이 소리로 묻더니 흥 하고 시뻘건 코딱지를 빼냈다.



“아버지가 그랬다고. 파란 머리는 개 같은 마녀들이라고! 씨발! 그 새끼 때문에 평생을 속았잖아!”



“난 이미 알고 있었지. 옐사렘에서 검은 머리 마녀가 잡혔다고 했거든.”



크로머가 말했다.



“검은 머리라고? 마녀가? 젠장, 도대체 뭐가 뭔지···. 어이! 하비에르! 나도 맥주 한 잔 줘 봐. 그나저나 빨리 말해봐. 누가 이겼어? 카일 선배? 아니면 여기 파란 머리?”



“내가 이겼지! 저기 이마 안 보여? 저 녀석 다섯 바늘이나 뀄다니까?”



카일의 말에 탁자를 둘러싼 모두가 사실을 확인하듯 얀을 쳐다보았다. 얀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맥주를 홀짝였다.



“근데 좀 멀쩡하지 않아?”



얘기를 엿듣던 다른 단원이 불쑥 말했다.



“선배가 선빵 쳤을 거 아닙니까? 그럼 족쳐서 침대에 눕혀놔야 하지 않아요?”



“그러네. 제대로 한 거 맞아요? 이 친구 여기서 술 마시고 있으면 안 되잖아?”



“왜 나한테 지랄이야? 그렇게 불만이면 네놈들이 하지 그랬어?”



“뭐 이런 황당한 경우가 다 있담.”



얀이 무식하기 짝이 없는 싸움질을 지켜보다 말고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애들 장난처럼 저질러 놓고 무슨 말들이 이렇게도 많은지.”



“애들 장난? 이건 아주 신성한 일이라고!”



뮬러가 당당하다 못해 격정적으로 소리쳤다.



“신성해?”



“신성하지! 끝내주게 화끈하잖아? 게다가 아주 고귀한 희생정신도 필요하단 말이여!”



“내가 너희들 마음가짐 같은 게 궁금한 줄 알아? 내가 궁금한 건 왜 이런 짓을 벌이냐는 거야. 목숨을 건다는 말도 웃긴데,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있을 것 아니야?”



“뭐긴 뭐겠어?”



난데없이 나타난 한 남자가 탁자에 모인 이들의 시선을 끌어모았다. 취한 기색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남자였는데, 최근에 싸움질했던 건지 머리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그는 얀과 마주 앉아서는 포크로 삶은 감자를 꾹꾹 찌르며 입을 열었다.



“감자가 잘 익었나 한 번 찔러본 거지.”



“뭐?”



“감자라고. 이 감자야.”



남자가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더니 장갑 낀 손으로 감자 한 알을 집어 들었다.



“감자가 덜 익었다면, 포크로 찔러도 잘 들어가지 않겠지. 그럼 마녀는 어떨까? 젠장, 이 감자는 마녀인가 보네. 이것 봐. 겉은 불을 내뿜을 것처럼 뜨거운데 속은 안 익었다고. 찔러보기 전에는 모르잖아?”



남자가 허공에 눈동자를 굴리나 싶더니 대뜸 얀을 향해 감자를 힘껏 던졌다. 감자가 얀의 머리칼을 스쳐 지나쳤다. 얀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남자의 뒤틀린 눈을 주시했다. 얀은 남자가 감자를 던질 걸 알고 있었고, 자신을 맞추지 않을 것도 알고 있었다. 뒤에서 누군가 뜨겁다고 욕하는 소리가 들렸다.



“만약 네가 마녀라면, 마법을 써서 정체를 드러낼 거라고 이 양반들은 생각한 거야. 염병할 마녀가 이상한 짓이라도 하면 안 되니까. 여럿이 피해 보는 것보다 한 명이 희생하자는 거지. 그러니까 목숨을 걸었다는 거고 말이야. 안 그렇습니까, 카일 선배?”



“콘베르소. 너 취했어?”



카일이 사뭇 무거운 목소리로 물었다.



“취해요? 제가? 그럴 리 있겠습니까? 한 모금도 하지 않았습니다. 당신들이 이러고 있는 꼴을 보니 걱정돼서 술이 들어가야 말이죠.”



콘베르소라 불린 남자가 머리에 감은 붕대를 긁적이더니 갑자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생각 좀 해보세요, 선배님. 이런 식으로는 절대로 마녀를 찾을 수 없어요. 망할 마녀가 감자처럼 단순할 것 같아요?”



“그 입 닥쳐. 정신 좀 차리고.”



카일이 무섭게 말했지만, 콘베르소는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콘베르소가 얀에게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



“정신 차려야 하는 건 선배죠! 아니, 전부다! 눈이 있으면 똑바로 봐! 제기랄! 여태껏 저렇게 파란 머리 본 적 있어? 응?”



“그래서? 바라는 게 뭔데? 내가 마녀가 아니라는 걸 증명해야 하나?”



얀이 숨을 차분히 몰아쉬며 물었다.



“증명? 뭣 하러? 당장 눈앞에서 사라지면 그만이잖아? 당장 멱을 따버려도 좋지!”



“콘베르소. 자리 좀 망치지 마. 나랑 가자.”



피딱지를 모두 뱉어낸 크로머가 얼른 일어나 콘베르소를 끌고 가기 시작했다. 광장 옆에 펼쳐진 간이 술집에 싸움질은 여전했고, 갖가지 소음도 여전했다. 얀은 어깨너머로 감자에 맞은 남자를 슬쩍 보았다. 남자는 날아온 감자를 먹으며 주사위를 굴리고 있었다. 한 짐꾼이 남자의 빈 잔에 맥주를 채워주는 것을 보고는 얀도 얼른 잔을 비우고 새 잔을 요구했다.



“파란 머리. 깡다구 하나는 끝내주는구만?”



검은 수염 뮬러가 얀을 툭 치고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콘베르소 저 녀석은 그날 이후로 정신을 통 못 차리네. 머리가 어떻게 됐나?”



“지난주에 그 일?”



이름 모를 병사가 옆에서 물었다.



“그래. 그 백발의 남자.”



“뭐야. 무슨 일인데? 누가 설명 좀 해봐.”



또 다른 병사가 묻자 뮬러가 코를 훌쩍이고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너 순찰 갔었냐? 헤네타 지역에서 어떤 남자를 만났었잖아. 새하얀 백발의 남자 말이야. 우리가 그 남자를 알아내려고 그거 뭐냐, 그···. 신성한 싸움을 붙였다고. 콘베르소가 말이야. 근데... 자리를 만들고 한 30분 정도 지났나?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 거야. 그래서 다 같이 방에 들어갔는데-”



“콘베르소 그 녀석. 완전히 뻗어 있었지.”



카일이 보드카를 홀짝이며 대신 말했다.



“30분 넘게 그러고 있던 거야. 게다가 그 백발의 남자, 졸고 있었다고. 그것도 코까지 골면서.”



“그래서 우리가 달려들었단 말이지. 셋이서 한꺼번에! 근데 아무것도 못 했어! 진짜 아무것도! 엄청 빨랐다고! 내가 그 셋 중 한 명이었거든! 그때 이빨이 빠진 거야!”



뮬러가 마치 명예로운 훈장이라도 되는 양 말했다.



“그날 이후로 콘베르소 그 녀석, 그 남자에게 집착하더군. 자기는 마법에 당했다면서 말이야.”



카일이 말했다.



“진짜 마법은 아니었고?”



얀이 물었다.



“우리가 무슨 바보도 아니고. 딱 보면 알지. 그냥 얻어터진 거야. 그러고 보니 그 남자, 남작님께서 따로 불러내서 뭐라 한 것 같더만.”



갈색 수염에 맥주를 잔뜩 묻힌 한 병사가 쩝쩝거리며 말했다.



“뭐라 하셨는데?”



카일이 물었다.



“저야 모르죠? 따로 부른 거니까.”



“당연히 당장 꺼지라고 했겠야. 다들 남작님 성격 알잖냐.”



모두가 카일의 말에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술 취한 단원들의 눈빛 곳곳에서 남작을 향한 신뢰와 존경이 묻어났다. 얀은 이 상황이 몹시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했다.



“하여튼 그 남자... 진짜 존나 멋졌는데··· 슉슉 움직여서 팍!...... 근데 3소대가 좀 늦는 것 같지 않아요? 지금쯤이면 돌아와야 하지 않나?”



“저기···”



뮬러가 말을 마치기 무섭게 한 어린 수행원이 단원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말을 걸었다. 어찌나 절묘한 순간이었는지,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한꺼번에 쏟아졌다. 수행원이 당황해서 몸을 한껏 움츠렸다.



“무슨 일이야, 식칼?”



뮬러가 묻자 식칼이라 불린 수행원이 입술을 핥고는 ‘심부름’이라고 기죽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심부름? 이 시간에?”



이번에는 카일이 물었다. 그리 위협적인 목소리가 아니었는데도, 수행원은 겁을 잔뜩 집어먹은 얼굴이었다.



환호가 터져 나왔다. 싸움질이 끝난 모양이었다. 얀은 한결 여유로워진 마음으로 맥주잔을 홀짝이며 수행원을 빤히 쳐다보았다. 왠지 어디선가 본 듯한 기분이었다. 망설임 끝에 수행원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남작님께서 트로엘 씨를 찾으셔서···”



“뭐라고?”



수행원이 말을 끝맺기도 전에 주변이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싸움질이 다시 시작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얀은 누군지 모를 사람에게 잔을 빼앗기는 것도 모자라 짐짝처럼 내팽개쳐졌다. 수행원도 마찬가지였다. 병사들이 얼른 가라며 손짓하는 것을 보고 나서야 얀은 무슨 상황인지 이해했다. 얀은 병사들 사이를 애처롭게 바라보았다.



"아... 내 맥주."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아르마노 기사단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40 형제와 작은 스승 (3) 24.03.30 4 1 21쪽
39 형제와 작은 스승 (2) 24.03.22 4 0 18쪽
38 형제와 작은 스승 (1) 24.03.02 7 1 19쪽
37 얀의 안식처 (6) 24.02.04 11 1 26쪽
36 얀의 안식처 (5) 24.01.20 11 1 16쪽
35 얀의 안식처 (4) 24.01.06 8 0 15쪽
34 얀의 안식처 (3) 23.12.25 7 0 17쪽
33 얀의 안식처 (2) 23.12.03 8 0 22쪽
32 얀의 안식처 (1) 23.11.05 9 1 18쪽
31 불꽃의 노래 (12) 23.10.21 9 1 27쪽
30 불꽃의 노래 (11) 23.10.07 10 1 25쪽
29 불꽃의 노래 (10) 23.09.17 15 1 20쪽
28 불꽃의 노래 (9) 23.08.28 13 1 18쪽
27 불꽃의 노래 (8) 23.07.28 15 1 16쪽
26 불꽃의 노래 (7) 23.07.17 11 1 20쪽
25 불꽃의 노래 (6) 23.07.08 10 1 16쪽
24 불꽃의 노래 (5) 23.06.04 12 1 19쪽
23 불꽃의 노래 (4) 23.05.14 13 1 17쪽
22 불꽃의 노래 (3) 23.05.06 10 1 19쪽
21 불꽃의 노래 (2) 23.04.23 15 1 18쪽
20 불꽃의 노래 (1) +1 23.03.25 19 1 17쪽
19 곰과 여우 (5) 23.02.05 21 1 21쪽
18 곰과 여우 (4) 22.12.10 18 1 18쪽
» 곰과 여우 (3) 22.11.26 22 1 20쪽
16 곰과 여우 (2) 22.11.12 19 1 15쪽
15 곰과 여우 (1) 22.10.26 21 1 18쪽
14 아이의 꿈 (6) 22.10.23 20 1 20쪽
13 아이의 꿈 (5) 22.10.22 21 1 16쪽
12 아이의 꿈 (4) 22.10.19 19 1 15쪽
11 아이의 꿈 (3) 22.10.16 23 1 18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