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심문수 님의 서재입니다.

아르마노 기사단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심문수
작품등록일 :
2022.08.17 19:05
최근연재일 :
2024.03.30 15:57
연재수 :
40 회
조회수 :
994
추천수 :
47
글자수 :
328,320

작성
23.02.05 15:26
조회
21
추천
1
글자
21쪽

곰과 여우 (5)

DUMMY

숲의 머리가 연기 기둥으로 자욱했다.



연기 기둥 아래를 떠도는 사내들이 길 잃은 아이처럼 보이는 건 그저 착각일까. 아이가 소리 지른다. 욕설과 비명 사이 어딘가에 놓인 소음. 말에 올라타려다 자꾸 떨어지는 사내 옆으로 서둘러 짐을 챙기는 소년들이, 그 뒤로는 칼 없는 칼집을 꼭 움켜쥔 어린아이가 웅크리고 있다. 철갑을 두른 아이는 어떤 단어를 주문이라도 되는 양 연신 중얼거리고 있었다. 우리의 명예···. 내 명예···.



장막이 드리운 숲속으로 검은 형체와 불꽃들이 이리저리 떠다닌다. 얀은 검은 숲을 흐릿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장막 너머로 어느 익숙한 집 안 풍경이 꿈틀거렸다. 작은 불빛과 그림자, 두툼한 커튼, 가느다랗게 휜 눈동자, 그리고 파란 머리의 마법사들. 얀은 페사로의 작은 광장을 뒤로하고 낮은 울타리를 넘었다. 그는 숲으로, 검은 연기 기둥으로 들어갔다.



검은 기마대가 마구 날뛴다. 흐릿한 형체들이 무서운 속도로 달리며 엇갈렸다. 쇠붙이가 쨍하며 부딪치고, 방패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쾅! 굉음과 함께 거대한 전나무가 말과 기사들을 덮쳤다. 어머니! 한 기사단원이 절망스럽게 소리쳤다. 엄마!



어머니. 엄마.



얀은 질주했다. 정처 없는 정신과 달리 얀의 발걸음은 목적지가 분명해 보였다. 반대편에서 어두운 갈색 외투를 걸친 론드 병사가 얀을 향해 석궁을 겨누었다. 얀이 나무 뒤로 몸을 숨기며 화살을 피하자, 검은 수염 뮬러가 말을 타고 론드 병사를 향해 질주했다. 번쩍이는 칼날에 붙어있던 것이 잘려 나갔다. 론드 병사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어둠 속에서 화살이 휙휙 소리를 낸다. 파란 머리! 얀에게 멈추라며 욕설을 내뱉는 카일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얀은 멈추지 않았다. 화살이 어깨를 스치고 등 뒤로 나무가 부러져 쓰러지는데도 계속해서 달렸다.



한 론드 병사가 날 끝이 휘어진 칼을 들고 막아선다. 얀은 멈출 수밖에 없었다. 늘씬하고 키가 아주 큰 론드 병사는 귀를 덮는 가죽 모자에 뺨 아래로 두건을 두르고 있어 얇은 눈매밖에 보이지 않았다. 얀이 잠시 망설이는 찰나에 론드 병사가 소리를 지르며 칼을 휘둘렀다. 얀은 칼을 피하며 칼자루로 병사의 머리를 후려쳤다. 론드 병사는 크게 휘청이며 무릎 꿇었다.



얀은 론드 병사에게 칼을 겨누었지만, 이성적이지도, 그렇다고 감정적이지도 못했다. 그저 바보처럼 또다시 망설이고 말았다.



론드 병사가 단숨에 칼을 쳐들었다. 얀이 자신의 실수를 깨닫기에는 너무나 짧은 순간이었다. 날카롭게 벼려낸 칼날이 순식간에 살갗을 베며 팔이 잘려 나가는 기분을 느꼈다.



만약 운이 따르지 않았다면 기분에서 그치지 않았을 것이다. 론드 병사가 반격을 나서기 직전에 검은 깃 화살이 병사의 가슴을 꿰뚫었다. 얀은 보름달처럼 커진 병사의 초록빛 눈동자를 보았다. 머리를 맞았을 때 모자가 벗겨졌는지 은회색 머리칼이 비현실적인 감각을 일으키며 번들거렸다. 머리칼 사이로 뾰족한 귀가 툭 튀어나와 있었다.


론드 병사는 순식간에 무너졌다.



“개자식!”



누군가 얀을 끌어당기며 소리쳤다. 머리에 붕대를 감은 사내 콘베르소였다. 그는 론드 병사의 가슴에서 화살을 뽑으며 또다시 외쳤다.



“더러운 귀쟁이 새끼! 야! 넋 놓고 있지 말고 움직여! 지랄 맞게 굴면 네 머리통을 박살 낼 줄 알아!”



콘베르소는 주변을 둘러보고는 또다시 욕설을 짓씹었다. 검은 철갑을 두른 브라우버 기사단장 위더스푼이 검은 수말을 힘차게 몰며 거대한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어깨에 화살이 박혀 있었지만, 문제가 되기는커녕 오히려 섬뜩한 장식처럼 단장을 돋보이게 했다. 그의 칼끝에서 론드 병사의 끔찍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콘베르소가 곧장 기사단장을 도우러 달려갔다.



얀은 콘베르소와 반대 방향으로 달렸다. 자신이 어디로 향하는지 얀은 여전히 몰랐다. 누군가를 만나야 한다고 느낄 뿐이었다. 그 누군가가 누구인지 역시 얀은 알지 못했다.



싸움질하며 바보처럼 웃는 게 인상적이던 사내가 배 아래에 박힌 화살을 움켜쥔 채 숨을 헐떡인다. 카일이 동료의 복수를 하듯 키 작은 론드 병사에게 일격을 가했다. 가슴부터 배 아래까지 베인 론드 병사는 자신의 쏟아지는 내장을 보곤 비명을 질렀다. 밤바람이 검은 숲 곳곳을 누비며 휘몰아쳤다.



끔찍한 굉음이 터져 나왔다. 잠든 병사들을 깨웠던 바로 그 굉음이었다. 강력한 돌풍이 폭발하듯 쏟아지더니 순식간에 거목 하나를 쓰러뜨렸다. 얀은 갑작스러운 돌풍에 밀려 뒤로 넘어졌지만 겨우 거목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배 아래에 화살이 박힌 사내는 별도리가 없었다.



얀은 일순 온몸에 피가 감도는 것을 느꼈다. 마법이야. 마법사가 있어. 얀은 돌풍이 쏟아진 곳을 향해 이끌리듯 달렸다. 이따금 굉음과 함께 돌풍이 몰아치며 나뭇잎을 흩뿌리고 나뭇가지와 줄기를 쏟아냈다. 얀은 인위적이고 낯선 돌풍에 익숙함을 느꼈다.



이윽고 얀은 우수수 넘어진 나무 잔해 너머로 양팔을 앞으로 뻗은 남자를 발견했다. 다른 론드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녹색 가죽옷을 입었지만, 그가 마법사라는 사실을 알아채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이를 앙다문 입술 위로 코피를 흘리지 않더라도 말이다. 길게 기른 머리카락이 바람을 타고 휘날렸기 때문이었다. 파란색이었다.



마법사는 한껏 일그러진 눈으로 나무 잔해를 내다보며, 마치 대지가 흔들리기라도 하듯 다리를 떨었다. 꽉 깨문 어금니에서 굳은 의지가 엿보였지만, 마법사는 지치고 겁에 질렸다는 사실조차 감출 수 없었다. 이윽고 마법사는 결심한 듯 손을 꽉 움켜쥐더니 커다랗게 고함을 내질렀다. 안돼! 얀은 어떻게든 마법사를 막으려 내달렸다. 그를 붙잡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이미 늦었을지라도.



거리가 너무 멀었고 얀은 늦었다. 그러나 늦은 건 마법사 또한 마찬가지였다. 얀의 머리 위로 날아가는 화살이 마법사의 골반을 관통한 것이다. 마법사는 찢어지듯 신음을 토해냈다.



대지를 향해 무너지는 마법사를 보며, 얀의 가슴 속에 무언가도 함께 무너져 내렸다. 얀이 나무 잔해를 뛰어넘으며 마법사에게 도달했을 때, 마법사는 붉게 젖은 대지에 새파란 머리카락을 처박고 물 밖으로 나온 물고기처럼 힘겹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마법사는 공기가 새는 목소리로 누군가를 부르고 있었다.



“트로엘···. 트로엘을···.”



심장이 풀무질하듯 강렬하게 뛰어대기 시작했다. 심장 소리에는 고통과 두려움,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희열이 깃들어 있었다. 얀은 마법사를 거칠게 끌어당기며 소리쳤다.



“날 알아? 응? 날 알아?!”



허공을 힘없이 떠돌던 마법사의 눈빛이 언뜻 얀에게 닿은 듯했다. 눈이 살짝 커진 것 같기도 했다. 마법사가 얀의 팔을 더듬으며 중얼거렸다.



“살려줘···.”



“너 누구야!”



마법사는 좀 더 또렷해진 눈으로 얀을 바라보았고, 무어라 말하려 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파란 머리칼이 거칠게 흔들리더니, 검붉은 피가 손을 타고 흘러내렸다. 얀은 마법사의 얼굴을 굽어보았다. 정확히는 붉게 젖은 눈동자와 목을 비집고 나온 화살을 보았다.



눈앞이 번쩍이더니 통증이 머리를 꿰뚫었다. 얀은 몸을 가누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졌다. 뿌연 안개가 뒤덮이며 흐릿한 시선 너머로 어떤 형체가 다가와 얀을 굽어보았다. 형체가 길쭉한 활로 얀의 가슴을 짓누르며 욕설을 내뱉었다. 콘베르소였다.



콘베르소는 활을 쳐들어 다시 한번 얀의 머리를 후려쳤다. 수만 개의 별이 폭발하며 시야를 가득 채웠다. 검은 안개가 물밀듯 들이닥쳤다. 얀은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도저히 저항할 수 없었다. 콘베르소가 얀을 거칠게 끌어당기며 소리쳤다.



“개자식! 이 마녀랑 무슨 얘길 나누었어? 말해! 말하라고!”



얀은 진실을 말하지도, 핑계를 둘러대지도 못했다. 폭풍우 치는 생각의 항아리 속에서 허우적거리느라 콘베르소가 무어라 외치는지 알아듣지도 못했다. 그가 위협을 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뿐이었다. 더 중요한 것이 생각의 항아리 속에 있었다. 그렇다고 느꼈다. 콘베르소의 눈에는 그저 바보 같은 얼굴로 자신을 무시하는 마녀로 보일 뿐이었지만.



콘베르소의 목소리가 분노로 파르르 떨렸다.



“말해, 이 개자식아!”



“콘베르소.”



얀은 소용돌이와 검은 안개 속에서 또 다른 거대한 형체가 콘베르소를 붙잡는 것을 보았다.



“단장...님?”



“움직일 수 있으면 가서 카일을 도와라. 부상자를 옮기고 도망치는 놈들을 잡아.”



콘베르소가 크게 심호흡을 하더니, 단장 위더스푼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건 중요한 일입니다, 단장님. 이 마녀를 처리해야 합니다.”



“너의 남은 임무에 충실해라, 콘베르소. 네가 할 일은 그것뿐이다.”



“하지만-”



“명령은 한 번뿐이다.”



단장이 깊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결국 콘베르소가 물러섰다. 단장이 얀에게 다가왔다. 정확히는 그런 기척을 느꼈다. 얀은 기척 속에서 단장의 목소리를 들었다. 뭐라고?



검은 안개가 눈과 귀 위에 빠르게 쌓여갔다. 얀은 급격히 어두워지는 생각의 소용돌이 속에서 단장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내려 애썼다. 뭐라고?



어딜? 어떻게? 어째서? 어···. 어머니? 엄마?



---



마른 지푸라기 냄새가 자욱한 곳에서 얀은 눈을 떴다. 천장을 가로지르는 건 검은 연기가 아닌 거미가 곳곳에 집을 튼 들보였다. 얀은 들보 구석에 자리 잡은 큼지막한 거미줄을 맥없이 노려보다가 깜짝 놀라 숨을 훅 들이켰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내뱉었다. 숨이 빠져나가는 만큼, 얀은 자신의 처지를 깨달아갔다.



지푸라기 냄새로 가득한 방은 다친 병사들로 가득했다. 코끝을 찌르는 소독 냄새에 부목과 붕대로 곳곳을 감아 편히 눕지도 못하는 병사들이 퀭한 눈으로 아무 곳이나 응시하고 있었다. 방은 어두웠지만, 창끝에 아침 햇살이 매달려있었다.



“이대로 두면 안 돼요!”



방 밖에서 콘베르소의 목소리가 들렸다. 얀은 왠지 자신이 검은 안개 속에 갇혀있는 동안에도 그의 분노에 찬 목소리를 들은 기분이었다.



“젠장, 결국 깼구만.”



누군가 얀에게 다가와 욕설을 중얼거렸다. 군의관 멜데였다. 그는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며 얀 옆에 앉았다. 그제야 얀은 자신도 다른 이들처럼 집단에 누워있다는 것을 자각했다. 활에 얻어맞은 관자놀이가 욱신거렸다.



“내가 떠들지 말라고 그렇게 주의를 주었는데···. 내 말을 귓등으로도 안 처먹는 망할 놈이라고···. 얀 트로엘? 머리는 좀 어때? 네가 기절했던 건 기억해?”



“기억...합니다. 활에 머리를 맞아서···.”



얀은 속이 울렁거려 얼른 입을 꾹 다물었다.



“기억난다고? 너 진짜 어마어마한... 돌대가리구나? 누가 그랬는지도 알고?”



“예···. 콘베르소가···.”



“그래? 의외로 침착하네? 카일은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더니.”



얀은 아무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도 이유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의심이 깊으면 눈이 멀기 마련일세, 콘베르소.”



문 너머로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멜데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하긴. 넌 에탄 어르신에 비하면 침착하다 말하기도 뭣하지. 침착함이 도움이 되는지는 잘 모르겠다만.”



에탄의 말에 맞장구치듯 콘베르소가 소리쳤다.



“가르치려 들지 마세요, 어르신! 당신이 알던 동네 꼬맹이가 아니니까!”



콘베르소가 잠시 숨을 돌리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어르신마저 왜 그러십니까? 제가 봤다고요! 그 녀석이 죽어가는 마녀랑 쑥덕이는걸요!”



“나도 보았네.”



에탄이 나직이 대답했다. 짧은 침묵이 흐르고 콘베르소가 서둘러 말을 쏟아냈다.



“그, 그럼 절 도와주셔야죠! 심지어 그 녀석은 파란 머리잖아요! 어째서 직접 보고도 외면하시는 겁니까?”



콘베르소의 목소리에는 분노와 원망으로 가득했다. 이번에는 에탄이 침묵했다.



“아쉬운 일이지.”



이윽고 노인이 입을 열었다.



“마법사라면 뭔가 좀 아는 게 있었을 텐데. 론드군이 어떻게 여기까지 올 수 있었는지 알아낼 유일한 방법이었을지도 몰라.”



콘베르소가 숨을 훅 들이켰다.



“지금··· 제가 잘못했다는 겁니까? 마녀를 죽이면 안 되었다고요? 살려두어야 했다고요? 그 마녀 때문에 얼마나 많은···.”



“전투 중에는 어떤 일이든 일어나는 법일세. 자넨 최선을 다했어, 콘베르소. 그러니 이제 좀 쉬게나. 앞으로 피곤할 일이 많을 테니 말이야.”



콘베르소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숨을 거칠게 헐떡이더니 이내 한숨을 토해냈다. 할 말을 잃어 목소리를 잃어버린 한숨이었다.



“이제야 끝난 모양이구만. 난 이제 가보마. 푹 쉬어둬. 될 수 있으면 좀 자고.”



멜데가 지친 목소리로 말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그가 방을 나서자 열린 문으로 노인 에탄이 자연스레 들어왔다. 에탄의 그늘진 눈빛이 집단에 누운 병사들을 유심히 살피더니 얀에게 멈추었다. 그는 천천히 걸어와 멜데가 앉았던 자리를 차지했다.



“다 들었나?”



노인이 문 쪽을 힐끗 쳐다보며 물었다. 얀은 고갤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노인은 잠시 생각에 잠겨 허공에 눈동자를 굴리다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여기 애들 대부분이 전투를 처음 경험했다더군. 함께 웃고 떠들던 동료들을 잃은 게 오늘이 처음인 셈이야. 심지어 정찰에 나섰던 동료들은 일방적으로 학살당했어. 누구든 죽을 수 있는 곳에서 살아남았다는 건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니지. 콘베르소도 마찬가지일세. 그는 지금 버거워하고 있어. 누군가를 탓하고 싶을 만큼. 자넨 괜찮나?”



현실은 급작스럽게 돌아와 기절하기 직전의 전장을 떠올리게 했다. 잉크 빛으로 점점 밝아지는 새벽녘 아래, 메케한 연기 속을 헤매는 병사들. 그들은 장비를 챙기는 대신, 죽어가는 론드 병사들을 짓밟고 있었다. 얀이 숨을 짧게 뱉어내고는 입을 열었다.



“전 괜찮습니다. 이 전쟁은 저와 상관없으니까요.”



“그것참 좋겠구먼.”



에탄이 얀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자네 안색이 어떤지 아나? 밥그릇을 잃어버린 우리 집 리틀을 보는 것 같아. 혹은 신에게 버림받은 사제 같기도 하고.”



“제가 잃은 건 아무것도 없어요. 의구심만 얻었을 뿐이죠.”



에탄은 얀이 갖게 된 의구심을 굳이 묻지 않았다. 덕분에 얀은 마음의 준비를 할 충분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얀은 전장에서 얻은 의구심이 아닌 다른 질문을 꺼냈다.



“남작님께 얘길 들었습니다. 저에 대해 좋게 말해주셨다고요. 왜 제게 친절을 베푸신 거죠?”



“나도 모르겠네.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노인이 주름진 양 뺨을 문지르며 말했다.



“제가 안쓰럽습니까?”



“그래. 발버둥 치는 자네 모습이 안쓰러워.”



“발버둥이요?”



얀이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을 보냈다. 노인 에탄은 그런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차분한 표정으로 얀을 굽어보았다.



“내 집에 작은 수호자이자, 우리 손녀딸의 소중한 친구 리틀을 기억하는가? 리틀은 길 잃고 헤매는 강아지였다네. 그 아이와 처음 만났을 때는 오래 굶주려서 쓰러지기 직전이었지. 그런데도 날 의심의 눈초리로 쏘아보며 으르렁대더군. 하지만 내게 다가오기를 멈추지 않았어. 내가 손길을 내밀자 아이는 안심하며 나를 믿어주었네. 이 늙은이의 작은 손길조차 간절했던 거야. 마음이 좋지 않구나, 얀.”



잠시 침묵이 찾아왔다. 병자가 고통에 신음하는 소리, 짐짝을 질질 끄는 소리, 말발굽 소리, 욕하는 소리, 까마귀 소리.



“마법사가 제 이름을 불렀습니다.”



이윽고 얀이 지저분한 침묵을 깨뜨렸다.



“제 이름을 불렀습니다. 저보고 살려달라더군요. 근데 전 마법사를 모릅니다.”



“그랬구먼.”



에탄이 한숨을 내쉬었다.



“뭐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마법사가 어떻게 나를 아는지, 죽어가면서 내 이름은 왜 부른 건지···. 나는 왜 론드로 가려는 건지···. 그러니 알려주시면 안 됩니까?”



“무엇을 말인가?”



“제가 론드로 가는 이유를... 말입니다. 어르신은 아시지 않습니까.”



“안다기보다는 그저 짐작할 뿐이네.”



에탄이 창으로 조그맣게 보이는 하늘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어르신, 전 짐작조차 할 수 없습니다.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그러니 알려주세요. 짐작한 거라도. 더는 못 견디겠습니다.”



에탄은 침묵했다. 새벽녘 하늘에 붉은빛이 스며들 때까지. 붉은빛이 허공에서 미끄러져 방바닥에 눌어붙을 때까지.



“안식이 있을 것이라 믿기 때문이네. 자네 같은 젊은이들이 대부분 그러듯이 말일세.”



“안식···. 저 같은··· 사람 말입니까?”



“국경 지대에 지내다 보면 자네 같은 젊은이를 종종 만나게 되네. 꿈처럼 포근하고 달콤한 안식을, 남들은 모두 가졌지만 나만 가지지 못한 안식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된 젊은이들 말일세.”



“안식 따위 바란 적 없습니다.”



“안식이 뭐라고 생각하는가?”



노인이 낮지만 견고한 목소리로 물었다.



“안식은 뭐지?”



“안식은... 편안함이지 않습니까?”



“단순히 편한 것이라 결론짓지 말게. 안락한 벨벳 의자에 몸을 파묻는 것만으로는 안식을 정의할 수 없어. 안식은 삶의 이유일세. 세상 사람 모두가 안식을 얻으려 나름의 삶을 사는 거야. 자네라고 다를 것 없어.”



“그러니까 어르신께서는, 제가 안식을 얻으려고 론드로 가고 있다는 겁니까? 척박하고 괴물로 가득한 론드로?”



“그렇다네.”



“저를 뭐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어르신?”



얀은 노인의 말이 허무맹랑하게만 느껴졌다. 고생길이라는 걸 알면서도 걸어간 이유가 겨우 안식 때문이라니. 너무 유치했다. 유치해서 무시당하는 기분마저 들었다. 결국 얀은 답답한 마음에 부탁한 것도 잊고 짜증을 내고 말았다.



“어르신께서 잘못 판단하신 겁니다. 고작 안식 따위에 제가 이런 위협에 무릅쓸 리 없어요.”



“나도 부디 그러길 바라네.”



에탄은 얀의 태도에 화를 내거나 주의를 주지 않았다. 아주 당연한 일인 양 부드러운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런 노인을 바라보며, 얀은 자신이 마치 어른의 탈을 쓴 소년이 된 기분을 느꼈다.



마법사들 사이에서 자신을 증명해야만 했던 시절의 소년이 문득 떠올랐다. 그리고 얀은 혼란스러워졌다. 지금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사람이라면 모두 겪는 건지, 자신이 특별한 상황에 놓여 피어난 하나뿐인 감정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어른의 탈을 계속 쓰고 있어야 할지, 벗어야 하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가지 말라고 해도 자네는 기어코 가겠지. 국경 너머, 화살이 빗발치고 괴물이 들끓는 론드로 말일세. 당장은 의미 없더라도 말하겠네. 론드에는 자네를 위한 보물 같은 건 없네. 그건 나이폴에도 마찬가지야. 이 세상 어디에도 없어.”



얀은 노인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고, 그의 심정은 표정과 눈빛에 숨김없이 드러났다. 에탄은 여전히 차분했다. 에탄이 입을 열었다.



“에르빈 남작님은 욕심이 아주 많네. 특히 인재를 가지려는 욕심이 강하지. 능력이 있는 이라면 누구든 곁에 두고 싶어 안달이야. 겉으로는 그렇게 보이지 않아도 속으로는 그렇다는 뜻일세. 게다가 남작님은 자신만의 확고한 철학과 가치관을 가졌다네. 그것이 남작님의 안식이자 보물이지. 비록 그의 안식이 육체를 갉아 먹고 있지만.”



에탄이 목을 가다듬고는 계속해서 말했다.



“일단 론드로 가보게. 그곳에 가면 결국 자신이 어떤 보물을 원했는지 알게 될 거야. 에르빈 남작을 이용하면 더 수월하겠지. 자넨 남작님이 탐낼 만한 재능을 가지고 있으니까.”



“하지만 전쟁에 참여하고 싶지-”



“곰과 함께 지낸다고 같이 곰이 될 필요는 없네.”



에탄이 말을 자르더니,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정직한 것도 좋지만, 지혜로워질 줄도 알아야지. 여우처럼 말일세.”



에탄이 천천히 일어나 처음 방에 들어왔을 때처럼 병자들을 둘러보았다. 날이 완전히 밝아 방이 좀 더 환해진 것 외에는 모든 게 그대로였다. 모두가 뜬 눈으로 짧은 새벽을 뛰어넘고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 노인은 애정 어린 손길로 얀의 파란 머리를 흩트려 놓았다. 거칠면서도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울고 싶으면 울어도 되네, 젊은이. 마음껏 울게.”



아침 하늘이 푸른빛 물결로 넘실거렸다. 얀은 평소 그렇게 지긋지긋하던 푸른빛의 하늘에 벨벳처럼 부드러운 질감을 느꼈다.



얀은 자신의 감각이 이상하고 생각했다. 노인이 떠나기 전에 남긴 말만큼. 갑자기 흘러내리는 눈물만큼.



모든 게 알 수 없는 것투성이였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아르마노 기사단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40 형제와 작은 스승 (3) 24.03.30 5 1 22쪽
39 형제와 작은 스승 (2) 24.03.22 5 0 18쪽
38 형제와 작은 스승 (1) 24.03.02 7 1 19쪽
37 얀의 안식처 (6) 24.02.04 11 1 26쪽
36 얀의 안식처 (5) 24.01.20 11 1 16쪽
35 얀의 안식처 (4) 24.01.06 8 0 15쪽
34 얀의 안식처 (3) 23.12.25 7 0 17쪽
33 얀의 안식처 (2) 23.12.03 8 0 22쪽
32 얀의 안식처 (1) 23.11.05 9 1 18쪽
31 불꽃의 노래 (12) 23.10.21 9 1 27쪽
30 불꽃의 노래 (11) 23.10.07 11 1 25쪽
29 불꽃의 노래 (10) 23.09.17 15 1 20쪽
28 불꽃의 노래 (9) 23.08.28 14 1 18쪽
27 불꽃의 노래 (8) 23.07.28 15 1 16쪽
26 불꽃의 노래 (7) 23.07.17 11 1 20쪽
25 불꽃의 노래 (6) 23.07.08 11 1 16쪽
24 불꽃의 노래 (5) 23.06.04 12 1 19쪽
23 불꽃의 노래 (4) 23.05.14 13 1 17쪽
22 불꽃의 노래 (3) 23.05.06 10 1 19쪽
21 불꽃의 노래 (2) 23.04.23 16 1 18쪽
20 불꽃의 노래 (1) +1 23.03.25 19 1 17쪽
» 곰과 여우 (5) 23.02.05 22 1 21쪽
18 곰과 여우 (4) 22.12.10 19 1 18쪽
17 곰과 여우 (3) 22.11.26 22 1 20쪽
16 곰과 여우 (2) 22.11.12 19 1 15쪽
15 곰과 여우 (1) 22.10.26 21 1 18쪽
14 아이의 꿈 (6) 22.10.23 21 1 20쪽
13 아이의 꿈 (5) 22.10.22 21 1 16쪽
12 아이의 꿈 (4) 22.10.19 19 1 15쪽
11 아이의 꿈 (3) 22.10.16 23 1 18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