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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문수 님의 서재입니다.

아르마노 기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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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문수
작품등록일 :
2022.08.17 19:05
최근연재일 :
2024.06.07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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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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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9,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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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25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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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7쪽

불꽃의 노래 (1)

DUMMY

불꽃의 노래


---


우리는 얼마나 많은 짐을 짊어졌는가?


피 고인 손으로 돌을 움켜쥐고, 갈라진 목소리로 절규하는 이들이여. 왜 고통받는가?

누구를 위해서인가? 자신인가? 늙은 부모인가? 아니면 갓난아이인가? 정말 그들을 위해 고통을 감내하는 것인가?


남쪽의 인간들을 봐라. 그들은 우리를 보며 깨끗한 손으로 어깨를 털어내고, 기름진 목소리로 비웃고 있다


우리를 비웃는 이들을 봐라. 그리고 자신을 봐라. 우리는 누구 때문에 고통받는가?


우리가 짊어져야 할 건 없다. 짐을 내려놓아라. 저 악마들은 비웃을 자격이 없다. 자격은 우리에게 있으니.

우리가 짊어야 할 건 아무것도 없다.


죽음 앞에서 모두가 평등하다고 말하지만, 평등은 죽은 자의 몫이 아니다.

죽어서 얻는 평등이 산 사람에게 무슨 가치가 있는가?


피 고인 손을 보라! 그 손으로 칼과 창을 쥐어라! 저들이 빼앗은 자유를 직접 쟁취하라!


-지원병을 모집하는 론드군 지휘관의 연설 中-


---


“망할 감자, 망할 빵부스러기, 망할 수프, 망할 잡초··· 젠장, 흙까지 주워 먹으면 뱃속에 농사도 짓겠어. 망할 감자···“



얀은 카일처럼 무분별하게 욕설을 내뱉기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카일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 보름간 기사단에서 제공된 식사라고는 조금의 빵과 망할 감자죽이 전부였다.



경작지를 가로지르는 좁은 길가에 아무렇게나 앉은 브라우버 기사단과 수행원들은 형편없는 음식을 향해 경멸의 눈빛을 쏘아댔지만, 그렇다고 입에 쑤셔 넣어야 한다는 현실에서 벗어날 순 없었다. 행군길에 굶는 것은 음식을 차린 수행원들에게 무례한 짓이었고, 본인에게도 그리 좋은 처사가 아니었다. 카일이 불만을 표할 수 있던 것도 그가 기사단 내 최고 선임자에 속했기에 가능했다.



검은 연기가 피어오른다. 불탄 울타리, 잿더미 가득한 길··· 종일 반복되는 풍경에 검게 그을린 대지가 구름 낀 하늘보다도 더 넓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정말이지 모든 게 칙칙하구먼··· 여긴 벌써 한바탕 한 건가? 아니면 습격?”



검은 수염 뮬러가 가느다란 연기의 꼬리를 바라보며 물었다. 대답할 가치가 없는 건지, 이유를 모르는 건지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싸운 것 같진 않은데.”



이윽고 얀이 무심히 대답했다.



“싸운 흔적도 없고, 론드군이 이런 개활지에서 싸울 이유도 없고. 일부러 태운 것 같은데.”



“어째서?“



뮬러가 은근히 반가운 기색으로 물었다.



“어차피 전쟁 때문에 수확하기 힘들 테고, 론드 애들에게 뺏길 바에는 태워버리는 게 낫다고 본 거지.”



“이해가 안 되는데.”



길옆에 조그맣게 모닥불을 피워놓고 누워있던 기사단원 크로머가 불쑥 말했다.



“론드 등신 놈들에게 빼앗겨? 싸워서 지키면 되잖아?”



“모든 사람이 너처럼 용맹하진 않아. 페사로 사람들이 마을을 두고 떠난 것도 마찬가지고 말이야.“



“그렇다는 말은... 이곳에 먹을 게 있었다는 거잖아? 좀 뒤져볼까? 씹을 게 남았을 수 있잖아?”



카일이 말했다.



“그러지 않는 게 좋겠는데요.”



에탄의 아들 녹크 닐프리크가 잿더미를 유심히 살피며 말했다.



“여기 감자밭이에요. 그것도 엄청나게 큰 감자밭. 구운 감자가 먹고 싶진 않을 것 아니에요?”



“에라이 썅!”



카일이 치를 떨었다.



행군길 생활은 순탄한 편이었다. 그을린 대지 사이로 뻗은 길은 평탄했고, 서늘한 날씨가 이어진 덕에 무리 없이 걷기 좋았다. 무엇보다도 모두가 우려한 습격도 없었다. 얀은 혼자 다닐 때보다 더 안정적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인정했다.



그러나 얀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어두운 안색이 그리 이상한 건 아니었다. 행군길에 선 모두가 매한가지였다. 보름 전, 습격에 동료를 잃은 병사들이 유쾌할 리 만무했다. 어찌 보면 가진 것이라고는 선물 받은 검이 전부인 얀 트로엘만이 잃은 것 없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얀은 침몰하는 배처럼 가라앉는 기운이 어쩌면 기사단 내부에 두텁게 내려앉은 우울함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젠장! 도저히 못 먹겠네. 보드카 좀 줘봐.“



카일이 결국 남은 감자죽을 감자밭으로 돌려보내는 결단을(혹은 실수를) 선보며 말했다.



“이러다 입속에 감자가 자라겠어. 염병할 씹을 게 필요하다고.”



“풀이라도 구해올까요? 아니면 나무껍질이라도.“



녹크 닐프리크가 보드카 주머니를 건네며 물었다.



“젠장 내가 무슨 루치인 줄 알아? 풀떼기나 씹어먹게?”



카일이 그의 애마인 암말 루치를 흘겨보며 말했다. 루치는 먹을 게 없어서 그런지 콧김을 내뿜으며 흙바닥을 문질러대고 있었다.



“우리 아가씨가 먹을 것도 없구먼.”



“그럼 말고기는 어때요?”



“뭐?”



카일이 금방이라도 욕설을 쏟아낼 것처럼 노려보았지만 녹크는 순박한 얼굴로 싱긋 웃기만 했다. 카일이 다시 암말 루치를 바라보았다.



“나쁘지 않지.”



루치가 검은 눈으로 카일을 보더니 고개를 휙휙 내저으며 짜증을 냈다.



“이 아가씨도 참··· 쓸데없이 귀는 밝아서는···”



“물고기”



크로머가 대뜸 꿈꾸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라고?”



“물고기도 좋은데. 송어나··· 송어나··· 송어···”



“넌 송어밖에 모르냐?”



“송어가 왜요? 맛있잖아요. 선배는 먹고 싶은 거 없어요?”



크로머가 얼굴에 덮어두었던 모포를 치우며 물었다.



“뭐 먹고 싶냐고? 음··· 도미랑 정어리··· 그리고 상어고기가 그렇게 맛있다던데.”



“도미요? 웬 바닷물고기예요? 바다가 어디 있다고. 그리고 상어는 또 뭐예요?”



“바닷물고기든 하늘물고기든 뭔 상관이야? 그리고 상어도 물고기는 물고기잖아, 인마.”



카일이 보드카를 들이켜다가 기침을 쏟아냈다.



“젠장, 말로만 떠드니 배고파 죽겠네. 뭐 좀 먹어야 술도 들어가겠는데.”



“그럼 잡으면 되죠. 물고기.”



크로머가 말했다.



“어디서?”



“근처에 냇가가 있어요. 아까 봐두었죠.”



“감자밭 너머에 있는 거요? 무슨 오줌 줄기처럼 생겼던데.”



막내 녹크가 말했다.



“물 흐르는 곳에는 물고기가 살기 마련이란다, 애송아. 그곳이 오줌길이라도 말이야. 자! 그만 떠들고 얼른 갔다 오죠! 이러다 어두워지겠어요.”



크로머가 소리쳤다.



“먹을 만한 게 있으면 좋겠는데.”



물고기 생각에 힘이 나는지 얼른 일어난 카일이 얀과 뮬러를 보곤 눈살을 찌푸렸다.



“거시기들. 뭐 해? 안 갈 거야?”



얀이 고개를 내젓자 뮬러가 입을 열었다.



“저도 좀 쉬렵니다.”



“쉰다고? 쉬긴 뭘 쉬어? 안 따라오면 생선 가시도 구경 못 해.”



크로머가 꼬드겼지만 뮬러는 완고했다.



“이 녀석 감자죽만 먹더니 머리가 어떻게 됐나? 그럼 모닥불 안 꺼지게 잘하고 있어. 다시 피우기 귀찮으니까.”



“해가 지기 전에 오기나 해.”



“같이 가요!”



아가씨 루치를 돌보던 녹크가 뒤늦게 카일과 크로머를 쫓았다. 물고기 사냥에 나선 셋이 모든 만물 소음의 주인이었던 건지 주변이 금세 조용해졌다. 얀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이따금 하품 소리와 피곤함을 달래는 코골이가 들려올 따름이었다. 얀은 코골이 소리가 잘 조율된 현악기 소리처럼 부드럽고 우아하게 들렸다. 현악기는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자장가를 선보였다. 얀은 언제라도 잠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의식이 수면의 밑바닥에 닿으려는 순간이었다. 평화롭게 울려 퍼지던 현악기 소리가 점점 작아지더니 묘하게 거슬리는 불협화음을 내었다. 그 소리가 무척 작아 마치 이명과 비슷했는데, 작은 소리답지 않게 이명이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다. 얀은 이명을 의식 너머로 치우려 했지만 그것은 한껏 반항하며 눈꺼풀에 실을 묶고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실은 눈동자를 이리저리 건드리며 가지고 놀았고, 불쌍한 눈동자는 의지와 상관없이 이리저리 치이며 굴러다녔다. 이윽고 이명이 얀의 손길을 피해 아주 높은 곳으로 도망갔다. 얀은 작은 실에 의지한 채 공중에 위태롭게 매달린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얀은 거짓된 감각일 뿐이라고 되뇌며 생각의 끈을 잘라내려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지난 보름이 그랬듯이 말이다.



얀은 눈을 떴고, 세상의 빛과 함께 현실로 돌아왔다. 어찌나 피곤한지 눈 밑에 자물쇠라도 걸어 놓은 기분이었지만, 자야겠다는 의지는 다시 생기지 않았다.



“안 자?”



뮬러가 다가와 물었다. 얀은 ‘마음처럼 안 된다’라고 말하는 대신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줄 알았어.”



뮬러가 잠시 망설이다가 이윽고 다시 입을 열었다.



“감자죽 안 질려?”



“질리지. 물고기도 먹고 싶고.”



“근데 왜 안 쫓아갔어?”



“그냥. 조용히 있고 싶어서.”



“그래?”



뮬러는 머쓱해져서 다시 입을 다물었다. 이번에는 얀이 입을 열었다.



“뭔데?”



“아니··· 별 건 아닌데.”



뮬러가 안쪽 주머니에서 꼬깃꼬깃 구겨진 종이를 꺼내며 말했다.



“너, 글 읽을 줄 알지?”



“글?”



“에탄 어르신께서 집에서 온 편지라며 준건데, 글을 읽을 줄 알아야지.”



“보름 전부터 가지고 있었어? 진즉에 물어보지 그랬어?”



얀은 편지를 건네받으며 말했다.



“글 읽을 줄 아는 놈이 얼마나 된다고··· 좀 쪽팔리기도 하고. 무슨 내용인지 모르니까.”



“내가 읽는 건 괜찮고?”



뮬러가 자신도 잘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얀은 편지 내용을 쭉 훑어보곤 콧김을 길게 내쉬었다.



“어머니께서 보내신 거야.”



특별한 내용은 아니었다. 잘 지내냐는 안부 인사부터 시작해, 올해 농사는 녹록지 않아 마음 편히 피난길에 오를 예정이며, 다치지 말고 좋은 색시 좀 데려오라는 잔소리까지. 특별한 점이 있다면 손글씨가 아주 투박하고 군데군데 맞춤법이 틀렸다는 것뿐이었다.



“하다 하다 편지로 잔소리까지 듣네! 망할 할망구!”



뮬러가 화를 냈지만, 기분만큼은 한결 나아진 듯했다. 뮬러는 콧김을 훅 내쉬더니 편지를 되받아 안주머니에 대충 구겨 넣었다.



“할망구는 글은 어디서 배워와서는··· 날 완전 농락하잖아? 젠장, 나도 글 좀 배워야겠어. 근데 나같이 멍청한 놈도 글을 쓸 수 있을까?”



“그렇게 어렵진 않을 거야.”



얀이 말했다.



“어렵지 않기는 무슨. 너라서 쉬운 거겠지.”



“어렸을 때 내가 배운 것 중에 그나마 가장 덜 맞은 게 글이었어.”



얀은 옛 기억을 떠올렸다가 더 깊이 빠지기 전에 얼른 지워버렸다.



“원래 맞으면서 배우는 거라곤 하지만··· 이 나이 먹고 또 맞아야 해?”



뮬러가 말했다.



“그만큼 쉽다는 뜻이야.”



“쉬워도 맞는 건 마찬가지라는 거겠지.”



뮬러가 평소처럼 호탕하게 웃고는 계속해서 말했다.



“그래도 난 맞는 것 하난 일가견 있어. 카일 선배랑 지내다 보면 그렇게 돼. 그래서 말인데. 네가 좀 알려주면 안 돼?”



“뭐를?”



“뭐긴 뭐겠어. 당연히 글이지!”



검은 수염 위에 뜬 눈동자가 반짝였다.



“난··· 배워보기만 했지 누굴 가르쳐본 적은 없는-”



“이봐 파란 머리! 어떤 일이든 처음은 있는 법이라고. 뭣하면 내가 알려줄게. 내가 애들을 좀 가르쳐봤거든. 맞다 보면 금방 알게 될 거야.”



뮬러의 자신감 넘치는 모습에 얀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얀은 오랜만에 웃는다고 생각했지만, 웃음이 잿가루 속에 파묻힌 감자알처럼 모호해서 뮬러에게는 마치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얀이 고갤 끄덕였을 때, 뮬러는 몹시 기뻐했다.



---



“망할 보드카가 나를... 망할 보드카가”



카일이 그답지 않게 죽는 소리를 냈다.



오늘 안에 마을 리미비토에 도착할 수 있겠다는 단장 아르투르의 판단에 기사단은 행군을 재촉했다. 암말 루치의 목덜미에 널브러진 카일은 지독한 숙취 때문인지 안색이 영 좋지 않았다. 신음 소리를 내며 연신 헛구역질하던 카일은 결국 그의 소중한 아가씨의 발굽에 속을 게워 내는 지독한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튼실한 다리에 고약한 액체가 묻자 루치는 무섭게 날뛰기 시작했다. 그녀는 앞발을 힘껏 일으키더니 마구 울어대며 고개를 들썩였다. 카일은 말갈기에 몸을 딱 붙인 채 욕설 대신 구토를 뱉어냈다. 수행원들은 비명을 질렀으며, 뮬러와 크로머, 녹크을 포함한 동료들은 루치에게 다가가지도 못하고 말로만 달래려 애를 썼다. 얀은 불똥 같은 토사물이 튈세라 저만치 물러난 지 오래였다.



루치를 달랜 건 단장 아르투르였다. 그는 루치의 발길질에도 망설임 없이 다가가 목을 끌어당기더니 순식간에 검은 천으로 얼굴을 덮었다. 루치가 검은 천을 잘근잘근 씹으며 벗겨내려는 동안 단장은 암말의 귀에 무어라 속삭였다. 카일은 얼른 뛰어내려 흙바닥에 얼굴을 처박고 있는 힘껏 속을 게워 냈다. 루치가 안정을 되찾자 단장은 수행원을 불러 암말의 다리를 씻기도록 했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본래의 자리로 (행군의 선두 위치로) 돌아갔다.



“괜찮아요, 선배?”



녹크가 물었다. 카일은 후배의 도움에 의지하는 대신 허리춤에 물주머니를 낚아챘다.



“망할··· 저 말고기 새끼가··· 젠장··· 머리통이 보드카에 푹 절여진 것 같아.”



“말에 타지 말고 좀 걷는 게 좋겠어요. 자기 말에 밟혀 죽을 순 없잖아요?”



뮬러가 말했다.



“누가 죽는다고 그래?”



“그래서 말에 타겠다고요?”



“썅···”



“걷다 보면 좀 숙취가 좀 나아질 수도 있고요. 걸을 수 있죠?”



“당연하지! 망할 녀석···”



카일은 호언장담하며 힘껏 걸었지만 그리 오래 버티지 못했다. 걸음걸이가 점점 느려지더니 결국 쓰러지고 만 것이다. 카일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온몸을 떨었다.



“젠장!”



뮬러가 카일의 얼굴을 만지고는 또다시 욕을 했다.



“존나 뜨거운데? 어떡하지?”



“진짜 뜨겁네.”



녹크가 맞장구쳤다. 뮬러가 안절부절못하며 말했다.



“나 때문이야? 내가 걸으라고 해서? 그런 거야?”



“멜데씨에게 맡기는 게 좋겠어.”



얀이 말했다.



그렇게 카일은 평소 그의 표현을 빌려 ‘지리도록’ 고귀하거나, ‘재수 없게’ 고지식하거나, ‘지랄맞게’ 꾀병 부리는 놈들만 탄다는 멜데의 짐마차에 실렸다.



날이 서서히 저물고 있었다. 행군은 거대한 감자밭을 지나 진흙투성이 길을 지나고 있었다. 짐마차 뒤를 졸졸 쫓으며 걷던 얀과 동료들은 ‘재수 없게 고지식한’ 역할을 맡은 군의관 멜데가 짐마차의 포장 사이로 얼굴을 내밀자 일제히 그를 바라보았다.



“카일 이 녀석, 뭐 먹었냐?”



멜데가 물었다.



“먹기야 했죠.”



뮬러가 손톱을 잘근잘근 씹더니 혼자 깜짝 놀라 목소리를 높였다.



“보드카! 역시 보드카 때문이었어! 멜데 선생. 카일 선배가 이렇게 죽는 건가요? 없이 못 사는 보드카에 절여져서? 보드카와 결혼한 나머지 여자에게 관심조차 없는 카일 선배가? 젠장, 이걸 호사라고 불러야 하나?”



“지랄하지 마, 뮬러. 보드카 때문에 저렇게 됐겠어?”



크로머가 한숨 섞인 어조로 말했다.



“도대체 뭘 먹었는데? 제대로 말해봐!”



멜데가 말했다. 크로머가 입을 쩝쩝 다시더니 순순히 털어놓았다.



“민물조개요.”



“조개? 날 것으로?”



“생으로.”



“미친 새끼.”



멜데가 정말 뻔하다는 듯 코웃음 쳤다.



“너는 안 먹고?”



“못 먹었죠. 몇 개 되지도 않고, 조그마해서 먹을 것도 없더만.”



“그럼 물고기는? 못 먹었어?”



뮬러가 물었다.



“물고기는 무슨. 오줌 줄기에 무슨 물고기야. 젠장.”



“없어서 다행인 줄 알아, 인마.”



멜데가 말했다.



“어떻게 될 줄 알고 생으로 처먹냐. 익혀 먹는 게 상식이잖아?”



“생으로 먹는 게 맛있다는데 어떡합니까?”



“얼씨구. 감자도 생으로 씹어먹지 그러냐?”



“그놈에 개 같은 감자는 썅···”



포장 안에서 카일의 힘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선배는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뮬러가 물었다.



“어떻게 되긴? 한동안 고생 좀 해야지. 따듯한 포도주 좀 먹고 푹 쉬면 괜찮아져.”



“포도주··· 존나 부럽네.”



크로머가 중얼거렸다.



“정찰단이다!”



행군의 앞쪽에서 누군가 갑자기 외쳤다.



“정찰단! 일단 대기!”



얀과 동료들은 짐마차 뒤에서 빠져나와 앞쪽을 내다보았다. 멀리서 네 명의 말을 탄 정찰단이 다가오고 있었다. 녹크가 정찰단의 깃발을 유심히 살피더니 입을 열었다.



“기사단이네요. 붉은 깃발의 드가프 기사단. 백작령의 진짜 기사단이에요.”



“그럼 우린 가짜라는 거야?”



크로머가 녹크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그런 뜻이 아니라··· 규모가 크다는 거죠. 근데 저기 깃발이 하나 더 있는데요?”



“저거 이테르넬 표시 아니야?”



“뭐라고?!”



포장 안에서 카일이 창백한 얼굴을 불쑥 내밀며 외쳤다.



“네? 아 네··· 백작령··· 드가프 기사단이라고 진짜 기사- 아니, 규모가 큰 기사단인데-”



“야! 닥쳐봐. 얀 좀 잡아!”



카일이 쥐어짜는 목소리로 힘겹게 말했다. 얀을 포함해 뮬러와 크로머, 녹크 그리고 멜데까지 무슨 소린가 싶어 카일을 빤히 쳐다보고만 있자, 결국 카일이 욕설을 토해냈다.



“씹할! 빨리 잡으라고, 개자식들아! 이테르넬이라고. 이테르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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