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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문수 님의 서재입니다.

아르마노 기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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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문수
작품등록일 :
2022.08.17 19:05
최근연재일 :
2024.03.30 15:57
연재수 :
4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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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7,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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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08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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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쪽

불꽃의 노래 (6)

DUMMY

떨린다. 의지의 울타리를 벗어난 손이 마치 남의 것처럼 낯설다. 비릿한 피가 목 끝을 간지럽힌다.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찬 공기를 타고, 보다 더 찬 한숨 소리가 넘나든다. 기름이 떨어진다. 섞을 수 없는 것들을 억지로 섞으려 애쓴다. 양손을 꽉 움켜쥐며 신음을 내뱉는다.



누군가 목덜미를 낚아챈다. 무방비하게 넘어진다. 묽은 침과 기침이 쏟아진다. 눈물이 쉴 새 없이 흐른다. 덤덤한 모습으로 웃는다.



기쁘다. 기쁜 나머지 터질 것만 같은 눈물을 겨우 참는다. 슬프다. 두렵다. 그리고 희망이 차오른다. 소녀는 즐거워 보인다.



듣고 싶지 않다. 붙잡은 입술이 나무 의자처럼 딱딱하다. 몸을 파묻는다. 작아지고 싶다. 한없이 작아져서 사라지고 싶다.



차갑게 반짝인다. 뜨겁게 흘러내린다. 하고 싶지 않다. 배가 고프다. 행복하다.



“야!”



얀은 숨을 훅 들이켜며 눈을 떴다. 앞이 눈부시게 빛나더니 서서히 어두워졌다. 얀은 안개 속에서 빠져나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저녁 공기가 어깨를 부드럽게 눌렀고, 바람결이 주변을 겉돌았다. 뮬러가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날이 저물고 있었다. 얀은 숙소 앞 탁자에 앉아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침을 삼켰다. 어떻게 숙소까지 온 건지 헤아렸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숙소 앞은 싸움질이 한창이었다.



“얀마!”



뮬러가 또다시 소리쳤다. 얀은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뮬러를 바라보았다.



“아··· 여긴 어떻게··· 왔지?”



“뭐?”



뮬러가 어이없다는 듯이 허공에 눈동자를 굴렸다.



“어떻게 오긴 뭘 어떻게 와? 내가 먼저 있었다고! 왜 이리 정신을 못 차려?”



“글쎄.”



얀은 작은 오해 따위 신경 쓰지 않았다.



아주 긴 꿈을 꾼 기분이었다. 기분이 좋은 것 같기도 하고 나쁜 것 같기도 했다. 꿈이라는 것이 본래 안개처럼 흐릴 텐데, 얀은 꿈이 분명치 않다는 그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꿈인지조차 명확하지 않았다. 분명 꿈을 꾼 것 같은데 피곤의 무게감은 여전했다. 꿈보다는 이상한 환상을 보았다는 편이 더 그럴듯해 보였다. 얀은 어쩌면 자신이 망가지는 중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망가지는 게 당연한지도 모른다.



“멍청한 놈아! 욕을 하라고! ‘이 단어는 ‘망할’ 가족이다’, ‘이건 ‘썩을’ 형제다’ 이렇게 말이야. 근데 넌 지금 욕은커녕 벙어리마냥 아무 말도 않잖아? 얼른 내가 제대로 읽고 쓰는지 욕을 박으란 말이야!”



뮬러가 낡아서 찢어지기 직전인 양피지에 알아보기 힘든 글자들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얀은 잘하고 있다고 말했고, 뮬러는 마음에 들지 않는지 인상을 구겼다.



“뭐가 이리도 바쁜 거요?”



브라우버 기사단 동료인 자우트가 얀과 뮬러 사이에 불쑥 끼어들었다. 방금 싸움질을 마쳤는지 자우트는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오늘도 글을 배우는 거야? 이런 걸 배워서 어디에 써먹으려고? 이런다고 칼솜씨가 좋아지진 않는다고.”



“나도 알아, 새끼야. 나도 안다고. 그러니까 좀 내버려둬.”



뮬러가 양피지를 그러모으며 말했다.



“알았어. 알겠으니까 내 말 좀 들어봐, 뮬러. 지금 크로머랑 코웰이 붙고 있는데, 다음 경기에 뛸 사람이 없어.”



자우트가 뮬러의 시선을 경기장으로 끌려고 손짓했지만, 뮬러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싫어.”



“구경만이라도 하자. 너랑 제일 친한 크로머가 지금 경기 중이잖아?”



“싫어.”



“젠장.”



자우트가 엉덩이를 들이밀어 얀 옆자리를 차지했다. 편지를 베껴 쓰던 뮬러는 자우트의 눈치를 살피다가 결국 흑연필을 내려놓았다.



“도대체 뭐야? 왜 자꾸 쳐다봐? 신경 끄고 너 할 일이나 해!”



“왜? 우리 용병 출신 친구가 글 쓰는 모습이 얼마나 기특한지 아니?”



“그럼 너도 배우던가.”



“재미없는 건 딱 질색이야. 세상에 재밌는 게 얼마나 많은데? 물고기 잡기도 재밌지. 술 마시고 떠드는 것도 재밌지, 싸움질은 끝내준다고? 그러니까 우리랑 놀자. 응?”



“정말 끈질기네. 좀 꺼져!”



“끈질긴 건 너지, 이 망할 자식아! 그럼 재밌는 얘기를 하는 건 어때? 내가 해줄까?”



자우트는 뮬러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곧장 이야기를 시작했다.



“보름 전에 말이야. 론드 놈들이랑 싸우고 난 직후에 있었던 있던 일이야. 크로머랑 같이 도망가는 론드놈들을 찾고 있었는데, 한 론드 놈이 나무 밑동에서 죽어가고 있더라고. 녀석은 어깨부터 허벅지까지 크게 베여서 쏟아지는 장기를 붙잡고 있었지. 그 녀석이 죽어가면서 한 말이 뭔 줄 알아? 하이마 맘. 하이마 맘. 하이마 맘.”



자우트가 무슨 뜻인지 알아맞혀 보라는 듯 뮬러와 얀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뮬러는 호기심이 동했는지 한쪽 눈썹을 치켜뜬 채 자세를 고쳐 앉았다.



“뭔데?”



“난 그게 방언인 줄 알았거든? 근데 그게 아니더라고. 크로머가 알려주더라. 그 론드 놈, 지 엄마를 찾던 거야. 하! 이름이 하이마 맘이라니! 괴물 이름이라 해도 믿겠어! 웃기지 않아?”



자우트가 우스꽝스러운 표정으로 론드군 병사를 흉내 내며 웃음을 유도했다. 뮬러와 얀은 조금도 웃지 않았다.



“재미없어.”



“시발, 네가 더 재미없거든?”



자우트가 어이없다는 듯 책상을 가볍게 내리쳤다.



“진짜 안 할 거야? 소중한 시간을 이렇게 낭비할 거야?”



“제발 좀 꺼져!”



“사람이 이렇게 변하다니. 젠장, 녹크를 끌고 나와야 하나.”



“녹크는 내버려둬. 걘 싸움질을 싫어해.”



얘기를 조용히 듣기만 하던 얀이 불쑥 끼어들었다.



“나도 알아. 그 녀석 어제도 안 하겠다고 정색하더만. 쓸데없이 고상해서는··· 하여간 어제는 봐줬지만 오늘은 안돼. 사람이 부족하다고.”



“누굴 위한 싸움질인지는 몰라도 녹크하고는 상관없잖아?”



“왜 상관이 없어? 그 녀석도 우리 브라우버 기사단의 일원이잖아? 안 그래, 뮬러?”



“나한테 묻지 좀 마.”



“오늘따라 유독 개 같이 구네···”



자우트가 뮬러를 쏘아보더니 그 시선을 얀에게 옮겼다.



“일단 물어나 보자고. 너가 대신할 것도 아니잖아?”



“그렇게 사람이 부족해?”



“두 사람이나 필요해. 왜? 진짜 네가 하려고?”



얀은 간이경기장에 한창 싸우는 크로머와 코웰을 바라보았다. 크로머가 코웰을 붙잡아 넘어뜨리자 한껏 모여든 구경꾼들이 일제히 환호를 내질렀다. 얀은 이유도 없이 싸우고 환호하는 사람들이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자신과 아무 상관 없는 일이었다. 얀에게는 기사단에 보탬이 되어야 한다는 공동체 의식도 없었고, 자우트든 녹크든 누구에게도 잘 보이고픈 마음도 없었다. 얀이 원하는 건 달콤한 숙면과 불확실성을 채워줄 완벽한 답, 두 개가 전부였다.



의미 없는 고민을 이어가던 얀은 간이 경기장 건너편에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남자는 눈이 마주치자 싸움질을 구경하는 척했다. 어쩌면 착각일 수도 있을 텐데, 얀은 남자가 자신을 지켜보았다는 걸 확신했다. 불쑥 화가 치밀어 올랐다. 얀은 남자에게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준비해.”



“진짜?”



얀에게 되물은 건 자우트가 아닌 뮬러였다.



“진짜 하려고? 뭐 잘못 먹었어? 나 도와줘야지!”



“낙장불입이야!”



자우트가 얼른 소리쳤다.



“내뱉은 말 무르기 없어! 이미 쏟아진 물이라고! 넌 다음 경기에 무조건 나와야 해!”



“대신 상대는 내가 정해.”



얀은 박차고 일어나 경기장 반대편으로 향했다. 얀은 환호하는 관중들을 비집으며 나아가 한 남자의 어깨를 붙잡았다. 콘베르소였다.



“나와 한 번 붙지.”



“뭐?”



콘베르소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콘베르소? 얘는 안 할걸?”



자우트가 뒤쫓아와 말했다.



“이 녀석, 그 이상한 하얀 머리에게 얻어터진 이후로 싸움질은 절대 안 한다고.”



“과연 그럴까?”



얀이 자우트에게 말하곤, 콘베르소를 바라보았다.



“할 거잖아. 그렇지?”



“······내가 왜? 네가 이상한 짓을 벌일지 어떻게 알아?”



콘베르소가 불쾌한 눈빛으로 노려보며 속삭였다.



“그게 너가 원하던 거잖아? 내 정체를 밝히는 것.”



“······네가 마법도 없이 날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두고 보면 알겠지.”



콘베르소가 가늘게 뜬 눈으로 얀의 의중을 살피더니 갑자기 피식 웃었다. 콘베르소가 자우트를 향해 말했다.



“다음 경기 준비해 줘. 좋은 구경거리 만들어 줄 테니까.”



크로머와 코웰의 경기는 코웰의 관자놀이를 노린 정확한 타격으로 끝났다. 크로머는 부은 얼굴을 흙바닥에 처박은 채 실실 웃었다. 그는 진실로 즐거워 보였다. 코웰이 크로머를 일으켜 세우자, 둘은 서로 어깨를 두드리며 동료애를 과시했다. 구경꾼들이 크게 기뻐했다. 그들의 열광 어린 눈빛은 피 끓는 경기와 뜨거운 동료애에서 나오기도 했지만, 이어지는 경기에 대한 기대감 역시 내포하고 있었다. 이를 증명하듯 다음 경기는 신속하게 준비되었다.



“저 새끼들은 왜 안 하던 짓을 갑자기···”



뮬러가 글공부도 팽개치고 원형경기장 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얀과 콘베르소가 그곳에 있었다.



“저 녀석들··· 저렇게 둬도 돼?”



“안될 것 있어?”



크로머가 탁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서는 피 섞인 가래를 뱉어내며 말했다.



“불안하지 않아? 둘 사이가 좋진 않잖아.“



“누가 죽기라도 할까 봐?”



“그렇진 않겠지.”



“룰을 어기면 애들이 말릴 거야. 그나저나 내기 안 할래? 난 콘베르소에게 동화 한 닢 걸지.”



“동전 따먹기는 너 혼자 해.”



“혼자? 이걸 어떻게 혼자서 해?”



경기장을 둘러싼 구경꾼들은 흥분과 기대감으로 가득했지만, 정작 경기장 안 두 남자에게는 그런 것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경기 준비는 모두 끝났다.



“자신만만하게 떠들더니, 머리는 들키고 싶지 않나 보지?”



콘베르소가 복수심으로 타오르는 시선으로 얀의 머리를 감싼 두건을 쏘아보았다.



“몰래 뒤만 밟는 겁쟁이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경기의 시작을 알린 건 콘베르소였다. 그는 번개처럼 빨랐고, 사냥꾼처럼 과감했다. 안면을 노린 그의 움직임은 흠잡을 데가 없었지만, 얀은 순순히 사냥감이 되지 않았다. 얀은 주먹을 피하고는 곧장 상대를 붙잡아 넘어뜨렸다. 콘베르소의 욕설이 구경꾼들의 환호에 파묻혔다.



“어제부터 줄곧 내 뒤를 밟았지?”



얀이 크로머의 머리를 붙잡아 누르며 짓씹듯 속삭였다.



“오늘은 남쪽 관문까지 쫓아오고 말이야. 도망칠 때는 쪽팔리지도 않았나?”



“잘도 넘겨짚었네!”



콘베르소가 힘껏 소리치며 양다리를 이용해 기술 좋게 얀을 넘어뜨렸다. 콘베르소의 일격이 얀의 옆머리에 부딪혔다. 일순간 눈앞에 빛이 강렬히 폭발하더니 검은 안개가 물밀듯 밀려들었다. 꿈결 같은 환상이 안개 속에서 나타났다 사라졌다.



“내가 널 가만둘 줄 알았어? 망할 마녀 자식!”



“닥쳐!”



얀은 달려드는 콘베르소의 복부를 내질렀다. 콘베르소가 침을 토해내며 나뒹굴자 미친 듯한 환호성이 귀를 꿰뚫었다. 얀은 곧장 콘베르소에게 엉겨 붙었고, 둘은 나뒹굴며 쿵쿵 소리가 나도록 치고받았다.



“미쳤어! 장난 아닌데?”



자우트가 구경꾼들 사이로 풀썩이는 흙먼지 속을 주시하며 소리쳤다.



“존나 화끈해! 나도 싸우고 싶다!”



“더 심해지기 전에 말려야 해.”



뮬러가 말했다.



“저걸 어떻게 말려? 사람들 좀 봐! 다들 좋아 죽잖아!”



자우트가 몸을 들썩이며 소리쳤다. 한참을 서로 매달려 싸우던 얀과 콘베르소가 거리를 두자 구경꾼들이 참을성 없이 소리 지르며 둘을 부추겼다.



콘베르소는 쏟아지는 환호에 피가 끓었고, 들끓는 피는 그의 눈앞을 붉게 물들였다. 귀를 울리는 환호 소리가 자신이 벌인 행위의 보상처럼 느껴졌다. 그 보상은 콘베르소의 믿음에 확신을 얹어주었다. 콘베르소는 지금 기사단을 넘어 이 나라를 구하는 데에 일조하고 있었다. 콘베르소의 마음에 소속감이 뜨겁게 차올랐고, 소속감은 곧 무한한 안정과 용기로 변했다. 그는 어떤 일이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이 마녀사냥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터였다.



반면 얀은 어떠한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사방을 가득 채운 구경꾼들의 환호 소리도, 욕설을 내뱉는 콘베르소의 목소리도, 심지어 자신의 숨소리조차 들을 수 없었다. 얀은 검은 안개 속에 있었다. 어둠으로 뒤덮인 세상 속에서, 얀은 눈과 귀를 잃은 채 떠돌았다. 얀은 어둠 속에서 숨은 수많은 시선을 느꼈다. 그것은 까마귀의 눈이었다. 얀은 죽음을 기다리는 그 시선이 두려웠다. 그리고 외로웠다.



안개 속에서 빛이 번쩍이더니 누군가의 얼굴이 나타났다. 얼굴은 희미하게 일그러졌고 끊임없이 변모했다. 남자의 얼굴도 있었고, 여자의 얼굴도 있었으며, 노인도 있었고, 아이도 있었다. 마치 비웃는 것 같았다. 비웃음이 얀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었다. 얀은 무서웠다. 그리고 화가 났다.



비웃음이 성큼 다가와 손을 뻗었다. 얀은 주먹을 내질렀다. 뜨거운 감촉과 함께 비웃음이 일그러졌다. 얀은 그대로 비웃음에 일격을 가했다. 비웃음이 쓰러지자 연달아 주먹을 내리꽂았다. 얀은 울분을 토해냈다.



“야! 잠깐!”



“그만! 그만해!”



자우트와 크로머가 동시에 소리쳤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구경꾼들의 광기 어린 외침에 비해 너무 작고 초라했다. 부숴버려! 작살내! 끝장내버려! 죽여!



“비켜! 비키라고!”



뮬러가 간이 원형경기장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잔뜩 흥분한 구경꾼들이 장벽처럼 둘러서서 조금도 나아갈 수 없었다.



“얀! 그만해!”



뮬러의 외침도 얀에게 닿지 못했다. 콘베르소는 조금씩 발작을 일으킬 뿐 움직임이 없었다.



그때였다. 누군가 구경꾼들 사이에서 뛰쳐나오더니 순식간에 얀을 넘어뜨렸다. 얀이 다시 콘베르소에게 달려들자 누군가가 얀의 몸 위로 올라타려 했다. 얀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상대의 옷깃을 붙잡아 당겼다. 상대는 피하는 대신 오히려 얀을 끌어안았다.

얀은 차츰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어? 뭐야 이건?”



얀을 끌어안은 이가 몸을 일으키자 한 구경꾼이 소리쳤다.



“한창 좋았는데! 뭔데 끼어들어?”



한 사람을 두고 시작된 불만은 들판에 불길 번지듯 눈 깜짝할 새에 다른 구경꾼들에게 번졌다. 불만이 분노로 커지는 것 역시 한 순간이었다. 그들은 오로지 단 한 명 때문에 오락거리를 빼앗겼다는 생각에 빠져 있었다.



함성 소리가 하늘을 찌를 듯했다. 싸움질을 시작한 브라우버 병사들조차 구경꾼들의 분노에 짓눌린 나머지 선뜻 끼어들지 못했다. 오직 뮬러만이 경기장 안으로 쏟아지는 구경꾼들을 떼어내려 애쓸 따름이었다. 그의 행동은 분노의 불길 앞에서 한없이 작기만 했다.



“부끄러운 줄 아세요!”



그러나 싸움질을 끝낸 이는 분노의 불길 앞에서 주눅 들기는커녕 오히려 고개를 꼿꼿이 세웠다. 그가 소리쳤다.



“여긴 나이폴이잖아요! 문명화된 나라에서 이토록 야만적인 짓을 벌이다니요!”



“야만적? 지금 우리보고 야만 하다고 했어?!”



한 구경꾼이 '우리'를 강조해 소리쳤다.



“당장 물러나시죠! 그렇지 않으면 대가를 치러야 할 겁니다!”



얀은 고운 흙바닥에 누워 서로 튀어나오는 어둠과 현실을 바라보았다. 내가 뭘 하고 있었더라. 들끓던 감정이 갑자기 식으면서 극심한 메스꺼움을 밀려들었다. 구토감을 억지로 집어삼키며 얀은 누군가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오랜 친구, 움브라가 앞에 있었다. 얀은 말하고 싶었다. 반가워 친구. 보고 싶었어.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네가 준 검. 아직 잘 가지고 있어. 별로 쓰지도 않았어. 아깝잖아. 움브라가 얀을 바라보았다.



“저와 가시죠. 얀 씨.”



얀은 실망하고 말았다. 움브라가 아니었다. 여사제 도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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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얀의 안식처 (5) 24.01.20 11 1 16쪽
35 얀의 안식처 (4) 24.01.06 8 0 15쪽
34 얀의 안식처 (3) 23.12.25 7 0 17쪽
33 얀의 안식처 (2) 23.12.03 8 0 22쪽
32 얀의 안식처 (1) 23.11.05 9 1 18쪽
31 불꽃의 노래 (12) 23.10.21 9 1 27쪽
30 불꽃의 노래 (11) 23.10.07 10 1 25쪽
29 불꽃의 노래 (10) 23.09.17 15 1 20쪽
28 불꽃의 노래 (9) 23.08.28 13 1 18쪽
27 불꽃의 노래 (8) 23.07.28 15 1 16쪽
26 불꽃의 노래 (7) 23.07.17 11 1 20쪽
» 불꽃의 노래 (6) 23.07.08 11 1 16쪽
24 불꽃의 노래 (5) 23.06.04 12 1 19쪽
23 불꽃의 노래 (4) 23.05.14 13 1 17쪽
22 불꽃의 노래 (3) 23.05.06 10 1 19쪽
21 불꽃의 노래 (2) 23.04.23 15 1 18쪽
20 불꽃의 노래 (1) +1 23.03.25 19 1 17쪽
19 곰과 여우 (5) 23.02.05 21 1 21쪽
18 곰과 여우 (4) 22.12.10 18 1 18쪽
17 곰과 여우 (3) 22.11.26 22 1 20쪽
16 곰과 여우 (2) 22.11.12 19 1 15쪽
15 곰과 여우 (1) 22.10.26 21 1 18쪽
14 아이의 꿈 (6) 22.10.23 21 1 20쪽
13 아이의 꿈 (5) 22.10.22 21 1 16쪽
12 아이의 꿈 (4) 22.10.19 19 1 15쪽
11 아이의 꿈 (3) 22.10.16 23 1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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