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심문수 님의 서재입니다.

아르마노 기사단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심문수
작품등록일 :
2022.08.17 19:05
최근연재일 :
2024.03.30 15:57
연재수 :
40 회
조회수 :
977
추천수 :
47
글자수 :
327,857

작성
23.10.07 15:32
조회
10
추천
1
글자
25쪽

불꽃의 노래 (11)

DUMMY

“난··· 마법사가··· 아니었어.”



눈물이 났다. 갑자기 눈물이 왜 흐르는지 얀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당연한 말이건만, 얀은 자신이 마법사가 아니라는 그 말이, 그 사실이 가슴을 후벼파듯 아팠다.



극심한 피로 때문이 아닐까. 얀은 불면증의 저주가 정신을 갉아먹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눈앞이 자꾸만 흐려지는 까닭에 얀은 눈에 힘주며 도디를 주시 했다. 두건 아래로 드러난 도디의 얼굴은 붉은 노을빛이 고스란히 비칠 정도로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녀는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었다.



“잠깐만··· 기다려··· 물어볼 게-”



얀이 힘겹게 말했지만, 도디는 그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았다.



무형의 무언가가 얀을 힘껏 밀쳤다. 아직 몸이 불편했던 얀은 저항 없이 뒤로 나뒹굴었다. 그래도 충격 덕분에 얀은 정신 마법에서 완전히 깨어날 수 있었다. 도디는 숲을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목초지도, 숲의 머리도, 생울타리도, 모두 오렌지빛이었다. 도디는 노을빛에 도망치듯 생울타리 속 터널로 숨었다. 얀도 곧장 뒤따랐다.



어둠이 덮쳤다. 사그락거리는 이파리 소리만이 가득한 어둠에서 얀은 거무죽죽한 늪에 빠진 기분에 사로잡혔다. 시야가 점점 흐려지고, 소리도 일그러졌다. 거짓된 환상이 다가오고 있었다. 얀은 공포와 두려움에 숨이 턱 막혔다. 이파리 소리는 곧 난잡한 소음으로 변했고, 얀은 더 깊은 늪으로 빨려 들어갔다.



넌 도움이 필요해. 남자가 말한다. 새파란 머리칼이 흔들린다. 까마귀의 새까만 눈이 반짝인다.



여자가 도망간다. 새파란 머리칼. 버리고 도망간다.



비좁은 골목이 퍽 답답하다. 새파란 머리칼. 깔깔 웃는 아이들. 어색하게 따라 웃는다. 부르튼 입술이 아프다. 피가 나는 것 같다. 더 크게 웃는다. 무서워서 웃는다.



손이 덮친다. 발버둥 친다. 새파란 머리칼. 깔깔 비웃는 아이들. 더는 웃지 못한다. 부르튼 입술이 아프다. 마음이 아프다. 아파서 운다.



여자가 달려간다. 새파란 머리칼. 점점 멀어진다. 쫓아간다.



아이들이 웃는다. 화나서 웃는다. 화가 커질수록 더 크게 웃는다. 온 세상이 아프다. 끼어들 수 없는 세상이 아프다.



이 벌레를 죽여. 까만 부리가 말한다. 쪼아먹을 것을 고대하는 부리가 칼을 물고 있다. 칼을 쥔다. 그저 벌레일 뿐이야. 없어진다고 문제 될 것 없지. 하찮은 일이지만 네게 큰 기회야. 넌 도움이 필요해. 이 벌레를 죽여.



여자가 멈춘다. 새파란 머리칼. 점점 가까워진다. 무섭다.



벌레가 웃는다. 아파서 웃는다. 아프면 아플수록 더 크게 웃는다. 뻐금거린다. 이상한 냄새가 난다. 혐오스러운 냄새. 칼을 치켜든다. 벌레를 붙잡는다.



노래를 부른다.



코를 찌르는 젖은 낙엽 냄새에 얀은 눈을 떴다. 날아오르는 산새들, 흔들리는 나뭇잎, 그림자 속으로 숨는 짐승들, 그리고 도디. 얀은 도디를 붙잡은 자신을 발견했다. 도디는 엄지와 검지로 작은 구멍을 얀에게 겨냥하고 있었다. 그런 채로 얼어붙었다. 얀과 도디, 둘 다.



“···얀?”



도디가 침묵을 깼다.



“너··· 얀 맞아?”



이상한 질문이었지만, 얀은 곧 도디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도디는 얀의 머리를 보고 있었다. 어디서 흘린 건지 두건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



얀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도디는 불안함에 떨리는 눈동자를 빠르게 굴렸다.



“젠장... 마법사였어? 그럼 왜 머리색을 바꾸질···”



도디의 눈이 깨달음으로 두 배는 커졌다.



“...젠장! 마법사가 아니야?"



“그건 내가 이미 말했어.”



얀은 켜켜이 쌓이는 피로에 짓밟히지 않으려 애쓰며 말했다.



“마법을 못 쓰는 마법사 혈통··· 젠장··· 어떻게 이런···”



도디가 어금니를 꽉 깨물더니 손금을 따라 핏자국이 담긴 양손을 굽어보았다.



“그럼 내가 지금까지 한 건... 도대체...”



“너와 할 얘기가 있어.”



얀은 더 이상 기다려 주지 않았다. 도디가 겁에 질린 얼굴로 얀을 쳐다보았다.



“할 얘기? 이제 와서? 내가 마법사여서 그래? 응?”



“그래.”



“젠장, 내가 마법사인 게 중요해? 마법사라고 모든 걸 다 아는 줄 알아? 마법이 모든 걸 알려주진 않는다고. 마법은 등가교환의 법칙으로-”



“알고 있어.”



“안다고? 마법을 배웠다 이거지? 그런데도 마법사에게 매달리고 싶어? 난 네가 원하는 답은 없으니까 꺼져!”



도디가 한숨을 내쉬더니 계속해서 말했다..



“···이제 사람들이 마녀를 찾겠지··· 먼저 널 의심하고··· 넌 나를 지목하고··· 우리는 사냥당할 거야··· 이제 갈 곳이 없어. 이런 상황에서 도대체 뭘···”



도디는 겁에 질린 나머지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듯했다. 얀은 도디의 어깨를 붙잡으며 말했다.



“그럼 같이 도망가자. 같이 론드로 가자.”



"론드로 가자고? 같이?"



도디가 놀라서 얀을 올려다보았다.



"론드로 가자."



“도대체 왜···? 나이폴을 놔두고 어째서? 아니, 됐어. 난 못 가. 아직 해야 할 일이-”



“그래서 여기 남겠다고? 네가 뭘 하려는지 모르겠지만 나중에 해도 늦지 않아.”



"그렇게 쉽게 말하지 마!"



도디가 소리쳤다.



"엄마와 아빠를 죽인 놈들이 저기 있어! 바로 앞에! 그런데도 그냥 론드로 돌아가라고?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알기나 해? 내 인생을 여기에 다 바쳤다고!"



도디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대화가 진전 없이 수레바퀴처럼 빙글빙글 돌자, 얀도 돌아버릴 것 같았다. 극심한 피로에 정신을 유지하는 것조차 힘겨웠다. 그래서 얀은 선뜻 꺼낼 수 없었던, 용기가 필요한 말을 내뱉었다.



“도디! 너 내가 누군지 알아?”



“······뭐라고?”



도디가 눈살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네가 누군지 아냐고? 그게 무슨 말이야? 네가 뭐 대단한 사람이라도 돼? 난 네가 마법사 혈통인 줄도 몰랐어. 만약 알았다면 마녀로 몰지도 않았겠지! 젠장, 생각할수록··· 네가 우리 혈통이라니···”



도디가 관자놀이를 문지르더니 갑자기 말을 쏟아냈다.



“그런 하찮은 질문으로 날 방해하지 마! 난 돌아갈 거야. 돌아가서 똑같이 불태울 거야. 마법사를 해방시킬 거야! 마법사에 마녀라는 꼬리표를 떼어낼 거야! 그걸 위해서 내 모든 걸 바친 거야! 내 모든 걸! 젠장! 네가 다 망친 거야! 마녀만 제대로 만들었으면-”



“그만! 그런 건 지금 중요하지 않아!”



도디도 뒤지지 않고 소리쳤다.



“시발! 내가 쉽게 말하지 말랬지! 그럼 뭐가 중요한데? 네가 누군지 맞추는 거? 그게 중요해? 마법사의 목숨보다도? 하! 남자들이란!”



“난 이게 내 목숨만큼이나 중요해! 심장을 바쳐서라도 알아야겠어!”



“난 널 모른다고!”



“내 말 잘 들어!”



얀이 멱살을 잡아끌며 소리쳤다.



“이거 놔!”



“잘 들어! 내 이름은 얀 트로엘이야! 트로엘! 그 이름을 알겠어?”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일그러졌던 도디의 표정이 한순간에 놀라움으로 번졌다.



“트로엘이라고? 네가? 네가 다나 언니의 아들이라고?”



도디가 말을 흐리자 얀은 도디의 옷깃을 더 세게 움켜쥐었다.



“다나? 내 엄마를 알아? 응?”



“설마 만날 생각은 아니지?”



도디는 두려워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안쓰러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얀은 점점 숨이 가빠졌다.



“어디 있어?”



“그분이 널 반가워할 것 같아?”



“어디 있는지 말해.”



“넌 저주야. 다나 언니에게 저주 같은 놈이라고!”



“말해!”



"싫어! 이거 놔! 이제 가야 겠-"



“얀! 물러서!”



사고는 순식간에 일어났다. 도디의 뒤로 콘베르소가 불쑥 나타나 그녀의 머리에 헝겊 주머니를 뒤집어씌운 것이다. 도디가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여기 마녀를 잡았다! 마녀를 잡았다!”



콘베르소의 외침에 뮬러와 크로머 그리고 녹크가 기다렸다는 듯 나타났다. 도디의 비명이 더더욱 커졌다.



“콘베르소! 뮬러! 그만둬! 크로머! 녹크!”



“손을 묶어! 손을 묶어!”



누구도 얀의 목소리를 듣지 않았다. 그들은 지난 비극적인 일에 원흉을 찾기라도 한 것처럼 복수심에 불타올랐다. 그러나 복수심만으로 마법사를 잡기 역부족이었다. 도디의 몸에서 강력한 파동이 뻗어 나가더니 사방의 모든 것을 말 그대로 날려버렸다. 강력한 파동에 숲 전체가 흔들렸다.



“씨발! 진짜 마녀야!”



뮬러가 흥분해서 소리쳤다. 도디는 헝겊 주머니를 뒤집어쓴 채로 폭주하기 시작했다. 흙무더니와 나뭇가지가 마구잡이로 날아오는 탓에 누구도 감히 접근하지 못했다. 마법에 경험이 있는 얀만이 조금씩 다가갈 뿐이었다. 얀은 도디의 헝겊 주머니가 붉게 젖어가는 것을 보았다.



“도디! 그만둬!”



파동이 약해졌다. 그러나 도디가 진정해서 그런 건 아니었다. 그녀는 목소리를 듣고 얀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 날카로운 것이 휙 하며 팔뚝을 스쳤다. 어찌나 날카로운지 스산한 느낌이 온몸을 핥더니 상처가 뒤늦게 벌어지며 피가 흘렀다. 반응하지 못했다면 팔이 잘려 나갔을 터였다.



도디는 거침없이 얀에게 달려들었다. 얀은 본능적인 움직임으로 보이지 않는 칼날을 피했다. 나무줄기와 덤불 뭉치, 돌무더기 따위가 순식간에 동강이 났다.



“도대체 저 괴물은 뭐야!”



뮬러가 소리쳤다. 도디는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뮬러 쪽으로 고갤 돌렸다. 그녀는 엄지와 검지로 구멍을 만들어 뮬러를 겨냥했다.



"뮬러!"



크로머가 뮬러를 향해 달려들었다. 도디의 팔에 피가 튀더니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순식간에 허공을 갈랐다. 크로머가 목이 찢어지도록 비명을 질렀다.



“아아악! 시발!”



“야! 도대체 이게 무슨...!”



뮬러가 노성을 내질렀다. 도디는 이번에도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도디가 뮬러를 겨냥하자 녹크가 얼른 뮬러를 넘어뜨렸다. 마법사의 팔에 피가 튀었고, 뮬러와 녹크의 머리 위로 무성히 자란 나무줄기에 구멍이 뚫렸다.



"도디! 제발 그만해!"



도디는 공포에 질려 완전히 미쳐버린 것 같았다. 그녀는 응어리진 비명을 내지르며 닥치는 대로 마법을 쏘아댔다. 사방의 나무와 덤불, 낙엽, 바위, 흙무더기에 구멍이 뻥뻥 뚫렸다. 그녀의 팔도 마찬가지였다. 양팔에 피를 쏟는 모습이 불타는 쇳물을 흘리는 불가마를 연상케 했다. 얀과 동료들은 마법을 피하느라 급급했다. 녹크는 처음 보는 마법의 위력에 겁먹어 뮬러의 몸을 붙든 채 덜덜 떨었다.



상황을 바꾼 건 이번에도 콘베르소였다. 그는 바짝 엎드려 마법사에게 접근하더니 용감하게 달려들었다. 콘베르소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거침없이 칼을 휘둘렀다. 도디의 양팔이 그녀의 마법과 함께 잘려 나갔다. 도디가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콘베르소가 검 손잡이로 머리를 거세게 내리쳤다. 도디는 무릎이 사라진 것처럼 그대로 무너졌다.



"시발··· 시발··· 아··· 개자식···!"



마법이 사라지고 바람이 잦아들자, 굉음과 이명 속에 파묻혔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크로머는 욕설을 내뱉으며 가죽 외투와 더블릿을 찢어내려 애쓰고 있었다. 뮬러가 다급히 크로머를 도왔다.



"나... 나 어때? 응?”



크로머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아. 괜찮아."



"시발··· 어떠냐고."



"괜찮아, 친구. 내가 도와줄게. 치료할 수 있어. 얀! 나 좀 도와줘! 녹크!"



크로머는 주체할 수 없이 떨리는 손으로 복부를 만지더니 힘겹게 굽어보았다. 그는 창백해진 얼굴로 소리 질렀다.



"아아! 씨발! 이게 뭐야! 이게 왜...! 어째서... 안돼... 시이발...! 왜 하필..."



"크로머. 괜찮아. 괜찮아."



"싫어... 나 갈래... 나... 집에... 집에."



"괜찮아, 크로머. 우리 할 수 있어."



뮬러는 친구의 쏟아지는 내장을 뱃속으로 억지로 집어넣으며 말했다. 흙과 낙엽들이 빠르게 젖어갔다. 녹크는 뮬러와 크로머를 지켜보기만 했다. 얀도 마찬가지였다.



"조금만 참아. 잘 되고 있어. 잘 되고 있으니까 조금만··· 크로머? 개새끼야. 왜 그래? 응?"



크로머는 침묵했다. 우수에 젖은 눈으로 친구의 어깨 너머를 바라보기만 했다. 얀은 알았다. 녹크도, 콘베르소도 알았다. 크로머는 무엇도 볼 수 없었다. 뮬러는 친구의 눈을 들여다보려 애쓰더니 뺨에 제 뺨을 갔다 댔다.



"이제 어떡하지? 응? 이제 어떡해?"



뮬러가 물었다. 모두가 침묵했다.



---



까맣게 물든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칠흑빛이었다. 작은 별 조각들이 드문드문 보여 금세 헤아릴 수 있을 듯했다. 에르빈 툴레인은 밤하늘을 훑으며 조용히 말했다.



"책임을 묻지 않겠다더군."



에르빈은 거리로 시선을 돌렸다. 거리는 수많은 조명과 횃불로 눈이 부셨다. 헤아리는 게 의미 있을까 싶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욕설과 환호로 고요한 밤하늘을 어지럽혔다.



얀은 넋 나간 얼굴로 에르빈의 은발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는 남작의 말에 집중할 수 없었다. 머리에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도무지 정신 차리지 못했다. 잠을 자는 것도 아닌데 악몽이 눈앞을 흐렸다.



악몽. 그래, 이 모든 게 악몽에 지나지 않길. 친구라 믿었던 여사제 도디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마법사였던 것도, 그녀가 자신을 마녀로 만들려 했던 것도, 그리고 그녀의 손에 동료가 죽은 것도.



얀은 극심한 불면증이 낳은 피로가 자신을 조롱하는 것이길 바랐다. 그러나 그는 아무도 자신을 조롱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모르는 척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 더 고통스러웠다. 모든 걸 포기하고 싶었다. 이제는 편해지고 싶었다.



그럴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아직 중요한 일이 남아 있었다.



"진짜 마녀였나?"



에르빈이 여전히 창밖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 얀은 눈두덩이를 문지르며 대답했다.



"예."



에르빈은 침묵했다. 거리의 소음에도 방 안은 침묵에 짓눌려 적막함이 감돌았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얀은 격심한 피로와 조바심과 격렬히 싸워야 했다.



"약속한 게 있지 않습니까, 남작님?"



흘러가는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얀이 입을 열었다.



"이미 마녀와 만나지 않았나?"



에르빈이 얀을 쳐다보았다. 표정 하나 없는 잘생긴 얼굴에 창백한 피부, 그리고 흔들림 없는 눈동자가 마치 도자기 인형 같았다. 얀은 저 인형 안에 감정이 들어있을까 문득 궁금했다.



"부족합니다. 시간이 더 필요해요."



"뭘 알아야 하지?"



"그건-"



"비밀이겠지."



에르빈이 얀의 말을 대신 끝맺었다. 이번에는 얀이 침묵했다. 에르빈은 창을 닫고는 외투를 챙기며 계속해서 말했다.



"범인을 찾거든 보고하라 했을 텐데."



"그럴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것참 아쉽군."



조금도 아쉽지 않아 보였다. 에르빈은 얀을 지나쳐 문 쪽으로 향했다.



"백작님께서 저녁 만찬에 자넬 초대했네."



"약속은 그럼-"



"함께 가지."



에르빈이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



야누보 지역이 으레 그랬듯 조용한 마을이었던 리미비토는 전쟁이 발발하면서 생기를 얻더니, 오늘은 마치 살아 숨 쉬듯 온 거리가 시끌벅적했다. 모두 비좁은 광장에 모였다. 용병들은 욕설이 섞인 노래를 불렀고, 아이들은 목청껏 울었으며, 아낙네들은 아이를 끌어안은 채 인파에 휩쓸려 다녔다. 모두 행복한 것은 아니었지만, 흔히 볼 수 없는 구경거리에 마을 사람 대부분이 흥분에 휩싸여 있었다.



얀과 에르빈 남작은 인파를 헤치며 광장에 도착했다. 광장 중심부에는 가지런히 쌓은 장작과 짚단, 냄새나는 오물들, 고래기름, 그리고 높다란 나무 기둥이 있었다. 기둥에는 피로 젖은 헝겊 주머니를 뒤집어쓴 여인이 묶여 있었다. 여인의 잘린 팔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남작님··· 이런 말은 없지 않았습니까? 이건 약속과 다르지 않습니까?"



얀이 배신감이 어린 눈으로 남작을 쳐다보았다. 남작은 말이 없었다.



"어서 오시오, 우리의 자랑스러운 영혼들이여."



사제 자르베가 공손한 어조로 얀과 남작을 맞이했다. 그는 평소보다 기쁜 것 같기도 하고, 과장해서 웃는 것 같기도 했다. 자르베 곁에는 다른 사제들과 두 명의 드가프 기사단원, 촌장 그리고 콘베르소가 함께였다. 자르베가 마치 연설하는 듯한 어조로 계속해서 말했다.



"남작, 그대의 영혼이 보여준 용기와 희생에 존경을 표하는 바요. 마녀를 잡는 건 육체와 영혼을 불살라야 할 만큼 어려운 일이오. 그대의 젊은 영혼, 크로머 켈린이 곁을 떠난 건 참 안타깝게 생각하오. 그래도 고결한 희생이었으니, 이테르넬 님께서 좋은 곳으로 인도했을 것이오."



자르베가 남작에게 말했다. 남작은 아무 말 없이 사제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리고 당신의 다른 젊은 영혼들도 칭찬받아야 마땅하오. 우선 이곳에 없는 뮬러 아르몬스와 녹크 닐프리크를 비롯해 여기 콘베르소 미뇰리는 거대한 재앙에 저항하는 큰 용기를 보여주었소. 실로 영웅이라 칭하기에 아깝지 않소. 그대의 용기는 모든 이들에게 영감이 될 것이오."



콘베르소는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그리고 우리의 젊고 현명한 영혼, 얀 트로엘은 우리 곁에 숨은 마녀를 찾아내는 정의로운 눈을 보여주었소. 작고 하찮은 태생을 극복하고 고결한 영혼을 가졌음을 보여주는 건 흔치 않소. 축하하오."



"그 말이 맞지예."



촌장이 허허 웃으며 어색하게 끼어들었다.



"가축 살해가 마녀의 장난이라는 걸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이 어떻게 알았겠으여? 이 마을 사람들을 대표해서 여기 얀과 그의 동료들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어야. 그리고 오해해서 미안혀."



"마녀를 잡으면 크고 작은 문제들도 함께 해결되는 법이오."



자르베가 목을 가다듬고는 계속해서 말했다.



"본래 마녀는 즉결 처분이요. 하지만 이번 일은 툴레인 남작과 브라우버 기사단의 영혼들에 공이 크니 마녀 처분에 대한 권한을 남작의 영혼에 맡기는 게 옳다고 생각하는 바요. 어떻소? 이 마녀를 어떡하면 좋겠소?"



남작은 광장을 둘러보았다. 화형장과 사제, 그리고 수많은 관중들. 준비된 공연장. 모든 게 불안하게 넘실거렸다.



남작 에르빈에게 보이는 것들이 얀에게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얀은 그저 남작에게 메시지를 전하려 애썼다. 도디와 얘길 나눌 수 있게 해줘요. 기회를 줘요. 그 대가로 당신의 기사단에 들어왔잖아요. 약속을 지켜요. 남작과 눈이 마주쳤다. 그의 시선이 다시 나무 기둥에 매달린 마녀를 향했다. 얀은 얼른 남작의 팔을 붙잡았다.



"남작님은 품위 있는 사람이지 않습니까? 부디 약속을 지키세요."



얀이 노골적으로 요구했다. 손에 힘이 실렸다. 남작은 얀을 쳐다보지 않았다.



"무슨 약속 말이오?"



자르베가 묻자 남작이 바로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오. 집행하시오."



"남작님!"



얀이 소리쳤다. 남작은 대꾸하지 않았다.



"내가 불과 기름을 다룰 필요는 없을 것 같소. 사제님이 대신 집행해 주시오."



"잠깐만요! 남작님! 약속을 지키세요! 남작님!"



얀이 다급히 소리쳤다.



"도대체 무슨 약속을 말하는 거야?"



한 드가프 기사단원이 짜증을 냈다. 얀이 다시 한번 남작에게 강하게 요구하려 하자, 콘베르소가 끼어들었다. 콘베르소는 얀을 붙잡아 밀며 무리에서 억지로 떼어냈다. 콘베르소가 속삭였다.



"얀. 여기서는 가만히 있는 게 현명한 거야. 사제들 눈에 밟힐 짓 하지 마. 네가 무엇을 원하든 일단 살아야지."



"이건 죽고 사는 문제보다 중요한 일이야!"



얀은 그렇게 말하고는 남작에게 돌아가려 했지만, 콘베르소는 가만두지 않았다.



"중요한 문제? 넌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마녀로 의심받았어. 조금이라도 이상한 짓을 하면 너도 저곳에 매달릴 거라고. 개죽음당하는 게 중요한 일이야? 제발 가만히 있어."



"마녀를 처형하기 전에는 연설을 하는 게 절차라오. 리미비토 마을의 어린 영혼들에게 할 말 있소?"



자르베가 툴레인 남작에게 물었다.



"없소."



"그럼 내 영혼이 대신 하겠소. 전문가답게 말이오."



자르베는 그렇게 말하고는 다른 사제들과 드가프 기사단원들에게 손짓했다. 사제와 두 명의 드가프 단원들은 기다렸다는 듯 나무 기둥과 장작들에 기름을 붓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순식간에 모여들었다. 자르베가 횃불을 들고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모았다.



"정의로운 불꽃 앞에 모인 모든 영혼이 사악함을 씻어내고 구원받을지니, 마녀는 불꽃 앞에서 쓰러질지어다!"



마을 사람들이 일제히 환호했다. 자르베가 우렁차게 목소리를 높였다.



"내 영혼에는 보인다! 사악한 영혼 앞에 겁에 질렸구나! 검은 힘을 앞세워 다가오는 적군 앞에 두려움에 떨고 있구나! 위태로운 모습을 감추려 급급하구나!


마녀의 불경하고 비도덕한 힘이 대지를 더럽히며, 선한 영혼은 대지를 잃고 불경한 힘의 잔해 속에서 태어난 괴물에게 피를 흘렸다! 사악한 마녀들이 탐욕스러운 손길로 배를 채우니, 선한 영혼은 빼앗기고도 뺏긴 줄 모르고 서로를 물어뜯고 또 물어뜯었다! 이 사악한 마녀를 보라! 이 마녀는 그들의 본성에 따라 불경한 힘으로 가축을 죽이고, 거짓된 증거로 선한 영혼을 모함해 우리의 영혼을 혼란으로 밀어 넣으려 했다!


나이폴의 아름다운 대지를 보라! 위대한 선조의 영혼이 마녀를 몰아내고 괴물을 저지하니 대지는 풍요로워지고 평화가 왔도다! 우리 선조의 노력으로 아름다워진 대지를 우리 영혼이 아니면 누가 지키겠는가?


불경한 힘을 숭배하는 론드의 사악한 영혼이 선조가 일구어낸 대지를 탐하니, 우리 영혼은 움직여야 한다! 나이폴의 영혼은 절대 굴복하지 않으리! 이테르넬 님께서는 용기 있는 자를 저버리지 않는다! 두려워 말라! 용기와 신념으로 영혼을 지켜라! 불경한 힘을 쫓아내고 마녀를 불태워라! 하늘에 알려라! 탐욕스러운 론드의 영혼과 마녀들에게 정의가 살아있음을, 불꽃과 분노로 알려라!"



불태워라! 불태워라! 환호성이 들끓었다. 모두가 열광했다.



횃불이 자르베의 손을 떠나고 순식간에 불꽃이 치솟았다. 그리고 비명이 울렸다. 불꽃이 크게 일렁일 때마다 비명도 함께 높아졌다. 밤하늘을 집어삼킬 듯 불꽃이 치솟았다.



비명 소리는 노랫가락이었다. 노랫가락에 맞춰 불꽃이 춤추었다. 불꽃이 밤하늘을 밝히며 춤추고 노래를 불렀다. 그것은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하나의 아름다운 가무였다.



얀은 고통에 몸부림치던 것도 잊고 불꽃의 가무를 넋 놓고 바라보았다. 모두가 그랬다. 콘베르소도, 엉엉 울던 아이들도, 심지어 사제 자르베조차도 이 순간을 위해 입을 다물었다. 타오르는 불꽃을, 헝겊 사이로 드러난 마녀의 얼굴을, 녹아내린 살갗 사이로 드러난 치아를, 불꽃의 가무를 모두가 홀린 듯 바라보았다. 모두가 기쁨과 슬픔과 공포와 두려움을 잊고 불꽃의 예술을 가슴에 담았다.



불꽃의 가무가 밤하늘을 장식했다.



불꽃에 푹 빠졌던 얀은 갑자기 현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남작 에르빈이 자리에서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 남작은 불꽃의 가무에 빠진 사람들을 헤치며 광장을 벗어나고 있었다.



얀은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분노가 주체할 수 없이 치솟았다. 피를 보고픈 강렬한 분노였다.



---



거리는 조용했다.



에르빈 남작은 빠른 걸음으로 빈 거리를 지났다. 거침없는 발걸음이 얀을 더 화나게 했다. 거스를 것 하나 없는 걸음걸이. 감정을 모두 저버리고, 오로지 이성만으로 움직이는 인형. 얀은 고작 인형 따위에 소중한 기회를 잃었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벌레처럼 짓밟아 죽이고플 정도로.



"툴레인!"



얀이 소리쳤다. 에르빈 남작은 듣지 못한 것처럼 계속 걷더니 갑자기 비틀거리며 멈춰 섰다. 남작이 돌담에 손을 짚고 서 있는 동안 얀은 속도를 높였다. 그리고 남작을 붙잡았다. 얀은 분노를 폭발시킬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에르빈은 돌담 아래로 구토를 쏟아내고 있었다. 뱃속에 담긴 응어리를 쏟아내듯 고통스럽게 속을 게워 내는 남작을 보며 얀은 혼란에 빠졌다. 비현실적인 감각에 꿈을 꾸는 건가 싶을 정도였다.



"못 볼 꼴을 보였군."



에르빈이 침을 뱉으며 말했다. 모든 걸 내려놓는 듯한 어조였다.



얀은 남작이 불꽃의 가무 속에서 인간의 죽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본 유일한 사람이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얀은 에르빈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 중에 가장 약한 존재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살인 충동에 휩싸였던 자신이 죽고 싶어질 정도로 부끄러워졌다.



"미안하군."



얀은 에르빈이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약속을 지키지 못한 일에 사과하고 있음을 알았다. 남작이 계속해서 말했다.



"더는 자넬 붙잡을 수 없겠군. 둘이나 잃다니···"



에르빈의 초췌한 얼굴에 허무함이 짙게 묻어났다. 그는 맥없이 웃었다.



"가기 전에... 날 좀 도와주겠나? 크로머에게 데려다주게."



얀은 고갤 끄덕였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아르마노 기사단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40 형제와 작은 스승 (3) 24.03.30 4 1 21쪽
39 형제와 작은 스승 (2) 24.03.22 4 0 18쪽
38 형제와 작은 스승 (1) 24.03.02 7 1 19쪽
37 얀의 안식처 (6) 24.02.04 11 1 26쪽
36 얀의 안식처 (5) 24.01.20 11 1 16쪽
35 얀의 안식처 (4) 24.01.06 8 0 15쪽
34 얀의 안식처 (3) 23.12.25 7 0 17쪽
33 얀의 안식처 (2) 23.12.03 8 0 22쪽
32 얀의 안식처 (1) 23.11.05 9 1 18쪽
31 불꽃의 노래 (12) 23.10.21 9 1 27쪽
» 불꽃의 노래 (11) 23.10.07 11 1 25쪽
29 불꽃의 노래 (10) 23.09.17 15 1 20쪽
28 불꽃의 노래 (9) 23.08.28 13 1 18쪽
27 불꽃의 노래 (8) 23.07.28 15 1 16쪽
26 불꽃의 노래 (7) 23.07.17 11 1 20쪽
25 불꽃의 노래 (6) 23.07.08 11 1 16쪽
24 불꽃의 노래 (5) 23.06.04 12 1 19쪽
23 불꽃의 노래 (4) 23.05.14 13 1 17쪽
22 불꽃의 노래 (3) 23.05.06 10 1 19쪽
21 불꽃의 노래 (2) 23.04.23 16 1 18쪽
20 불꽃의 노래 (1) +1 23.03.25 19 1 17쪽
19 곰과 여우 (5) 23.02.05 21 1 21쪽
18 곰과 여우 (4) 22.12.10 18 1 18쪽
17 곰과 여우 (3) 22.11.26 22 1 20쪽
16 곰과 여우 (2) 22.11.12 19 1 15쪽
15 곰과 여우 (1) 22.10.26 21 1 18쪽
14 아이의 꿈 (6) 22.10.23 21 1 20쪽
13 아이의 꿈 (5) 22.10.22 21 1 16쪽
12 아이의 꿈 (4) 22.10.19 19 1 15쪽
11 아이의 꿈 (3) 22.10.16 23 1 18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