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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문수 님의 서재입니다.

아르마노 기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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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문수
작품등록일 :
2022.08.17 19:05
최근연재일 :
2024.03.30 15:57
연재수 :
4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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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7,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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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28 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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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쪽

불꽃의 노래 (9)

DUMMY

카일은 침대에서 얀을 맞이했다.



얀은 벨벳으로 덮은 의자에 앉아 은촛대와 작은 접시 그리고 기도문이 놓인 탁상을 바라보았다. 카일은 얀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은 척 딴청을 부렸다. 얀은 그가 약한 모습을 숨기려 애쓰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그런 카일의 모습은 확실히 어색했다.



정말 어색했다. 칙칙한 흙빛 반소매 옷 아래로 드러난 팔은 뼈마디가 툭 튀어나올 정도로 야위었고, 핏기 없는 해쓱한 몰골은 브라우버 기사단의 막무가내 고참보다는 수의를 입힌 시체에 더 가까워 보였다. 얀은 나흘이 채 안 되는 사이에 사람이 이토록 변하는 것을 옐사렘의 마약중독자 외에는 본 적이 없었다.



“그만 좀 쳐다봐라.”



카일이 이불을 걷어치우며 말했다.



“젠장, 나라고 이렇게 되고 싶겠냐? 맨날 포리지랑 오줌 맛 포도주만 준다고. 고기가 먹고 싶어.”



“물고기 먹고 그렇게 됐는데도 먹고 싶어?”



얀이 벨벳 의자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물고기가 아니고 조개였어. 그것도 어마무시한 마녀가 손댄 조개였다고.“



카일은 제 입으로 말하면서도 지겨운지 인상을 잔뜩 구겼다.



“그러게 조심 좀-”



”잔소리꾼은 의사 양반 한 명이면 족해.“



카일이 한숨을 내쉬더니 계속해서 말했다.



“젠장, 지루해 죽겠네. 밖에 나가지도 못하게 해. 운동도 못하고 변소 갈 때도 허락받아야 한다고. 게다가 여기 애들은 재미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 싸움질은 그렇다 치더라도, 카드게임과 주사위도 안 해. 영혼이 하지 말라나 뭐라나··· 교리인지 기도인지 이상한 말만 지껄인다고. 젠장···”



”그러니까 카드와 주사위를 못 해서 그렇게 야위었다는 말이지?“



얀이 물었다.



“할 수 있었다면 훨씬 나았겠지!“



“멜데 씨랑 하지 그래?”



“그 잔소리꾼이랑 하긴 뭘 해? 욕만 안 처먹으면 다행이지··· 크로머랑 뮬러는 어딨어?“



”물고기 잡으러 갔어. 병든 물고기를 잡겠대.“



”물고기? 내가 여기 갇혀 있는데 지들끼리 놀러 간 거야? 젠장! 근데 왜 하필 병든 물고기야?“



”콘베르소를 먹이겠다는데?“



얀은 이전에 있었던 일을 차근차근 말해줬다. 진흙을 씻어내느라 고생한 일, 싸우는 소리를 엿듣다가 촌장에게 들킨 일, 촌장에게 음식을 얻어먹은 일(이때 카일은 욕설로 짙은 아쉬움을 표했다), 가축을 죽이고 다니는 범인을 잡아달라는 촌장의 부탁을 거절한 일(남작과의 약속으로 얀은 이 일을 비밀로 했다)··· 흥미에 동한 눈빛으로 이야기를 듣던 카일은 얀 본인이 콘베르소와 싸움질했다는 소식에 ‘하!’하고 웃더니 애정 어린 손길로 얀의 어깨를 때렸다.



“이 녀석! 고지식한 등신인 줄 알았더니!”



“나도 왜 그랬는지 몰라.”



“모르긴 뭘 몰라! 몸이 근질거렸나 보지! 그동안 어떻게 참았어? 때마침 콘베르소가 자리 좀 깔아줬나?”



“나도 몰라. 아무튼 그 일로 콘베르소가 좀 다쳤는데-”



“다쳤다고? 네가 박살 냈어?”



“아니, 그렇다기보다는-”



“겸손 떨지 말고 말해. 꼴 보기 싫으니까.”



카일이 질린다는 듯 혀를 끌끌 차더니 이어 말했다.



“대충 무슨 일인지 알겠고만. 콘베르소가 너랑 싸움질하면서 이상한 짓을 한 거야. 그래서 아주 화가 난 거지. 그래서 두들겨 팬 거고. 근데 너뿐만 아니라 크로머와 뮬러도 화가 난 거야. 왜냐하면 콘베르소가 이상한 짓을 했으니까! 그 둘도 콘베르소를 두들겨 패고 싶었지만 다쳐서 멜데랑 같이 있으니까 직접 건드릴 수 없던 거야. 그래서 병든 물고기를 먹이는 걸로 화를 풀 생각인 거야. 내 말 맞지?”



카일은 얀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멋대로 결론을 내렸다.



“그럼. 그렇겠지. 내가 여기 지내면서 생각이란 것을 좀 해봤거든. 예를 들면 ‘말고기는 돼지고기보다 맛있지 않을까?’ 같은 거 말이야. 머리가 좋아진 것 같아.”



“다행이네.”



얀은 대꾸하기 귀찮아졌다.



“지금까지 말한 게 전부야. 넌 어떻게 지냈어?”



“보면 몰라?”



카일이 방을 휘둘러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뭐라도 했을 것 아니야.”



얀이 끈질기게 물었다. 대답하는 것보다는 대답을 듣는 게 더 편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카일이 입을 열었다.



“하긴 했지. 매일 다른 사제가 들어와서 세 번씩 기도해. 어떤 사제는 내게 기도를 시키기도 하더라. 영혼을 다스리는 우리 아버지 이테르넬 신이시여. 부디 내 나약한 영혼을 불쌍히 여기시어 영혼에 충만을 주소서··· 젠장, 뭐가 아버지라는 거야? 원래 아버지라는 놈들은 자식을 가지고 놀음이나 하는 개자식들인가 봐? 광대 짓이나 시켜 놀다가 쓸모없어지면 돈이나 받고 팔아버리는 거야. 그런데도 뭔 아버지라면서 떠받드는지 알 수가 없네. 그렇게 대단한 놈이면 버리지 말고 잘 좀 챙겨주면 되잖아? 내가 봤을 때 그 이테르넬이라는 신은 형편없는 개자식이야. 여기 사제들은 죄다 미친놈들이고.”



“카일. 내 눈에는 네가 더 미친 것처럼 보여. 여긴 사제 숙소라고. 그런 말은 밖에 나가서 해.”



얀이 괜스레 문 쪽을 힐끗거리며 말했다.



“남이사, 내가 뭐라 하든 뭔 상관이야?”



카일이 자신 있게 말했다가 곧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래. 네 말이 맞아. 여기서는 조심해야지. 날 마녀로 만들어 버릴지도 몰라. 개자식들.”



얀이 복도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은 걸 확인하고 입을 열었다.



“사제들이 그렇게 싫어?”



“어떻게 좋아할 수 있겠어? 여기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내 영혼이라도 팔겠어.”



“일부러 사제들이 싫어할 말만 골라서 하는 거야?”



“내가 그랬나? 그랬다면 말하고 보니까 그들이 싫어하는 말인 거겠지.”



“정말로 안 맞나 보네. 네가 사제를 싫어하면 안 좋은 소식이 있는데.”



얀이 팔짱을 끼고는 말을 이었다.



“자르베 사제가 브라우버 기사단에 사제 한 명을 끼워 넣겠다더군.”



“뭐? 누구 마음대로?”



카일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잔뜩 좁혔다.



“저들 마음이지. 우리 의견은 애초에 묻지도 않더라고. 남작님께 통보하라더라.”



“이런 창자를 씹어먹을 놈들!”



카일이 버럭 욕설을 내뱉었다. 간만에 생기 넘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카일은 금세 흥분을 가라앉히고 문 쪽을 힐끗거렸다.



“누가 오는지 알아? 그 사제 말이야.“



카일이 물었다.



”나야 모르지. 아직 정하지 않은 것 같던데.“



”그러냐? 아, 온다면 그분이 좋겠는데.“



”누구?“



카일이 잠시 망설이더니 곧 입을 열었다.



”이곳에 유일한 여사제가 있어. 작고 아담한데 아주 당돌한 여사제 말이야. 누군가 꼭 와야 한다면 그분이 왔으면 좋겠어.”



“뭐라고?”



“여사제 말이야. 마치 기름을 바른 것처럼 윤이 나는 흑갈색 머리에, 피부는 나랑 다르게 얇고 반짝여서 놀라울 정도야. 그녀는 아름다워. 젠장, 내가 미쳤지. 머리가 어떻게 된 게 분명해. 근데 시발 존나 아름다워. 무엇보다도 존나 친절해. 살면서 내게 그렇게 친절한 사람은 없었다고.”



난데없는 고백에 얀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어찌 반응해야 하는지 몰라 한참을 망설이던 얀은 긴장한 카일의 얼굴을 발견하고는 겨우 입을 열었다.



“······도디를 좋아해?”



“도디를 알아?”



얀과 카일은 서로 당황스럽다는 듯 쳐다보았다. 짧은 정적 끝에 얀이 말했다.



“카일!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 건 축하할 일이지만... 걘 사제잖아?”



“누가 뭐 어쨌다고 그러냐? 그냥 친절한 사람이 오면 좋겠다고!”



카일이 벌게진 얼굴로 쏘아보며 소리쳤다.



“시발 존나 아름답다며?”



“그야 당연히···!”



카일이 잠시 말을 멈추더니, 힘없이 중얼거렸다.



“나도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내가 미쳤지. 싸움광 주제에 누굴 좋아하는지··· 근데 어떡하냐? 그녀를 위해서라면 나의 루치를 줄 수도 있어.”



“보통 이럴 때는 말이 아니라 영혼이나 심장을 줄 수 있다고 하지 않나?”



얀이 말했다.



”그게 무슨 상관이야? 루치는 내게 심장만큼 중요한 친구야. 그리고 영혼 얘기는 제발 그만해.“



”그랬어?“



“그래! 젠장···”



카일이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얀, 방금 한 말, 누구에게도 말하지 마. 뮬러와 크로머는 물론 단장님과 남작님께도··· 알겠어?“



“뭘 말하면 안 돼요?”



누군가 불쑥 문을 열고 물었다. 카일이 저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었다. 도디였다.



”뭘 말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네? 뭘 말하면 안 돼?“



카일을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져서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카일이 대답을 않자 도디가 이번에는 얀을 쳐다보며 되물었다. 얀은 치뜬 눈으로 눈치를 주는 카일을 보곤 겨우 입을 열었다.



”살 빠진 거 동료들에게 말하지 말래. 쪽팔린다고.“



”그게 왜 쪽팔려요, 카일 씨! 아프면 살이 빠지는 건 당연한 거예요! 다 나으면 금방 돌아오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알겠죠?“



”그럼요··· 그래야죠···“



한없이 작아지는 카일의 모습에 얀은 실소가 터지는 걸 겨우 참았다. 그러나 얀은 자신에게 이어지는 도디의 말에 당황한 나머지 웃음을 참을 필요가 없어졌다.



”얀, 근데 너 대머리야?“



”뭐라고?“



”왜 하루 종일 두건을 쓰고 다녀? 대머리라 부끄러워서 그런 거야?“



”하! 대머리!“



카일이 얼굴이 빨개진 것도 잊고 저항 없이 웃었다.



“머리숱이 없긴 하지!”



“그게 대머리잖아?“



도디가 순박하게 웃었다. 얀은 대답할 길을 잃고 말았다. 파란 머리를 숨기려 두건을 썼다고는 절대 말할 수 없었다. 특히 그 대상이 마녀사냥꾼 사제라면 더욱 그랬다. 도디가 힘내라는 듯 코를 찡긋거렸다. 어이없는 나머지 얀은 피식 웃고 말았다.



“자! 잡담은 여기까지! 이제 기도 해야죠? 얀? 볼 일 다 봤으면 나가줄래?“



---



기도를 마친 도디와 점심을 먹으며 얀은 그녀가 도움 된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와 함께라면 모래주머니를 풀어버린 것처럼 한없이 가볍게 느껴졌다. 얀은 피로와 불안이 주는 고통으로부터 잠깐이나마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지만, 동시에 걱정이 되기도 했다. 도디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도디가 쓴 글은 끝내 병든 물고기를 잡지 못한 뮬러에게 갔다. 뮬러는 도디의 글 내용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유와 평등’은 얀에게도 어려운 주제였다. 얀은 묘한 기시감을 떨쳐내려 애쓰며 뮬러에게 글을 따라 쓰도록 했다.



얀은 이테르넬 사제의 통보를 남작에게 전달했다. 통보를 들은 에르빈 남작은 늘 그랬듯 어떠한 감정도 읽을 수 없는 차가운 얼굴이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없었다. 또한 남작은 얀의 마법사 수색에 대해서도 어떠한 보고도 받지 않았다. 어떻게 알아보고 있는지, 진전은 있는지, 진전이 없었다면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지 따위를 물을 수 있을 텐데 조금의 반응조차 없었다. 관심이 전혀 없나 싶을 정도였다.



얀과 달리 군의관 멜데는 에르빈 남작의 관심을 끌어내는 데에 성공한 모양이었다. 콘베르소의 부러진 코뼈에 분노한 멜데는 ‘싸움질을 막지 않으면 일을 그만두겠다’며 강경하게 나왔고, 결국 남작은 싸움질을 전면금지시켰다. ‘쥐구멍’의 넓은 앞마당이 장점을 잃는 순간이었다. 낙담한 단원들은 술과 함께 이번 사태를 벌인 얀과 콘배르소 그리고 멜데를 뇌까렸다. 싸움질을 기대했던 마을 사람은 주사위 굴리는 소리에 실망하고 돌아가야 했다.



“얀, 이거 어떻게 읽는 거지? 괴몬? 괴멍? 괴물을 잘못 쓴 건가?“



이전보다는 조용해진 ‘쥐구멍’의 앞마당에서 뮬러가 도디의 양피지에 한 단어를 가리키며 물었다. 뮬러는 나름대로 노력했지만 도디의 양피지를 베껴 쓰기는커녕 읽는 것조차 버거워했다.



”계몽.“



”계몽? 그게 뭐여?“



”글쎄. 뭔가 가르치는 걸 말하는데 확실한 뜻은 몰라.“



”젠장. 고양이는 고양이이고, 구름은 구름이야. 가르치는 건 가르치는 거고, 개 같은 건 개 같은 거라고. 그런 것들은 모두 확실하잖아. 근데 이건 확실하지 않다고? 허점투성이고만. 쓸데없는 단어인 게 분명해.“



“세상에는 오묘한 단어도 많아.”



얀이 교조적인 어조로 말했다.



“아아 그런 건 재미없다고.”



뮬러는 슬슬 흥미를 잃었는지 흑연필을 툭 던지고는 도디의 양피지를 대충 집어 들어 들여다보았다.



“누구 보고 이딴 걸 읽으라는 거야? 이런 걸 좋아하는 사람도 있어?”



“있을 수 있지. 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잖아.”



“젠장, 세상에 이렇게 미친놈이 많을 줄이야.”



뮬러가 마치 더러운 것을 만지듯 집게손가락으로 양피지를 집어 들었다.



”근데 더 거지 같은 게 뭔지 알아? 이게 어딘지 모르게 익숙하다는 거야.“



“익숙하기는. 다 썼어?”



“당연하지.”



얀은 도디의 양피지와 뮬러의 손 글씨를 자기 앞으로 가져왔다. 얀이 눈살을 찌푸렸다.



“너··· 글씨가 왜 이러냐?”



“글씨가 왜?”



뮬러가 되물었다.



“글씨가 바뀌었잖아. 이것 봐. 분명 다르다고.”



얀이 뮬러의 다른 손 글씨를 찾아 보여주었다.



“나도 몰라. 그냥 똑같이 베껴 썼어.”



얀은 도디의 양피지와 뮬러의 손글씨를 대조해 보고 나서야 뮬러의 말을 이해했다. 그는 도디가 쓴 내용뿐만 아니라 글씨체까지 똑같이 베끼고 있었다. 각지고 끝을 살짝 올려 쓰는 모음이 특히 두드러졌다. 그 기이한 글씨를 들여다보던 얀은 강렬한 기시감을 느끼고는 미간을 좁혔다.



도디의 양피지를 들여다보며 한참을 생각하던 얀은 이윽고 옷 안쪽에서 편지를 꺼내 양피지 옆에 펼쳤다. 얀과 뮬러는 편지와 양피지를 번갈아 읽기 시작했다.



“야. 이거··· 그거 아니야?”



뮬러가 편지를 들여다보며 물었다. 얀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이윽고 얀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뮬러는 깜짝 놀라 얀을 붙잡으려 했다. 왜 그래? 어딜 가려고? 하지만 뮬러는 얀을 붙잡지도, 말을 걸지도 못했다.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얀의 얼굴에 진득하게 묻어나오는 감정의 덩어리들이 뮬러를 꼼짝 못 하게 만들었다. 얀의 감정은 무엇 하나 확실하지 않고 복잡했다. 분노와 공포, 슬픔과 기대감 그리고 뮬러로서는 결코 알 수 없는 모호한 감정들이 뒤죽박죽 섞여 있었다.



뮬러는 얀이 자리를 떠나 거리 너머로 사라지자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뮬러는 직감적으로 위험을 감지했다.



---



“똑똑, 밤이 되었구나.”



도디는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과 바람결에 흔들리는 나뭇잎을 감상했다. 그녀는 사제복을 벗었다.



"이제 밤하늘을 밝힐 시간이야."



얇고 투명해서 낙엽이 스쳐도 찢어질 것만 같은 그녀의 속살이 찬 공기에 부르르 떨었다. 도디의 손이 무언가를 찾듯 천천히 가녀린 팔뚝을 타고 내렸다. 왼쪽 팔꿈치 위에 하나, 배꼽 아래에 짧게 하나, 오른쪽 겨드랑이 아래에 길게 하나, 오른 허벅지에 둘, 왼쪽 가슴 위에 길게 하나. 검게 죽은 살갗이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희생 없이 얻는 건 없지. 누군가는 반드시 희생해야 해."



도디는 검은 더블릿과 정강이를 덮는 부츠를 챙겨 입고는 마지막으로 두건을 머리에 휘둘러 썼다. 생각보다 불편하네. 도디는 두건 안으로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얀을 생각했다. 그 애는 대머리가 아닐지도 몰라. 도디는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원해서 이러는 건 아니야. 난 아무것도 원하지 않아. 하지만 멈출 수 없어."



도디는 방문 쪽을 슬쩍 돌아보고는 책상에 나무토막과 가죽, 양피지 따위를 쌓기 시작했다. 그 두께가 한 뼘 정도가 되자, 검지와 중지를 붙여 세워 그 위로 가져갔다. 손가락이 움직이자 겹겹이 쌓인 것들이 베이기 시작했다. 어찌나 예리한지 베이는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누군가는 해야 해. 대의를 위해서. 그래. 이건 대의를 위한 일이야. 어쩔 수 없어."



도디는 이어서 엄지와 검지를 이용해 작은 구멍을 만들었다. 그녀는 작은 구멍을 통해 막무가내로 쌓은 것들을 바라보았다. 짧게 숨을 뱉어내자 순식간에 구멍이 생겼다. 사선으로 뚫린 구멍은 쌓아 만든 것들뿐만 아니라 책상까지 뚫고 바닥에 흠집을 남겼다. 도디는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검지 손톱이 반쯤 사라지고 팔뚝 안쪽으로 동그란 상처가 나 피가 흘러내렸다. 도디는 피를 닦아내고 붕대를 감았다. 얀의 상처 난 손을 감고 남은 붕대였다.



"그리고 이건... 복수야. 불꽃에서 시작된 복수. 불꽃이 이어가는 복수. 그래. 불꽃은 공평해야지."



도디는 이어서 잠긴 문을 확인했다. 누구도 문을 억지로 열지 않을 거라 확신했지만, 도디는 철저하게 준비했다. 그녀는 손바닥 크기의 소라를 꺼내 입에 가져갔다.



“이건 모두를 위한 일이야.”



“이건 모두를 위한 일이야.”



“이건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일이야.”



“이건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일이야.”



“이건 어머니를 위한 일이야.”



“이건 어머니를 위한 일이야.”



“이건 다나 언니를...”



“이건 다나 언니를.”



도디는 ‘콘차루마’라고 불리는 소라 모양의 음성 전달 도구에 만족했다. 다시 창가로 향한 그녀는 이번엔 하늘이 아닌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담벼락에 고양이 한 마리만이 적막한 거리를 지키고 있었다.



창문이 열리고 도디는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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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불꽃의 노래 (7) 23.07.17 11 1 20쪽
25 불꽃의 노래 (6) 23.07.08 11 1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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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불꽃의 노래 (4) 23.05.14 13 1 17쪽
22 불꽃의 노래 (3) 23.05.06 10 1 19쪽
21 불꽃의 노래 (2) 23.04.23 16 1 18쪽
20 불꽃의 노래 (1) +1 23.03.25 19 1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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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곰과 여우 (4) 22.12.10 18 1 18쪽
17 곰과 여우 (3) 22.11.26 22 1 20쪽
16 곰과 여우 (2) 22.11.12 19 1 15쪽
15 곰과 여우 (1) 22.10.26 21 1 18쪽
14 아이의 꿈 (6) 22.10.23 21 1 20쪽
13 아이의 꿈 (5) 22.10.22 21 1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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