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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문수 님의 서재입니다.

아르마노 기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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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문수
작품등록일 :
2022.08.17 19:05
최근연재일 :
2024.03.30 15:57
연재수 :
4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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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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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7,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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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0.23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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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쪽

아이의 꿈 (6)

DUMMY

바닷새 우는 소리가 길게 늘어질 무렵 얀은 떠날 채비를 했다. 덜 마른 속옷은 대충 접어 모포 속에 끼워 넣고, 외투와 부츠는 끈으로 묶어 가방에 매달고, 새로 꺼낸 부츠 속에 단검을 채우고, 면도칼은 손수건으로 감싸 가방 안쪽에, 뼈로 만든 숟가락과 작은 삽은 손이 잘 닿는 곳에, 돌처럼 딱딱한 빵과 물통, 그리고 여분의 옷도 챙기고··· 물론 칼도 잊지 않았다.



더 머물러도 괜찮았다. 텃세 부리기 바쁜 장로도, 자존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시장도, 줄줄 흘러내리는 바지를 붙들고 다니는 약탈자도, 장님 행세하며 호위로 먹고산 남자도 얀에게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 갈비뼈 한두 개쯤 부러진 것은 문제도 아니었다. 적어도 글렘에서는 그랬다.


호랑지빠귀만이 우는 야밤에 마을을 떠나려는 것은 어디까지나 얀의 의지였다.



“벌써 가려고?”



떠날 채비를 모두 마치고 방을 나서자 거실에서 이그니스가 물었다. 놀란 기색은 아니었다.



“남아서 할 것도 없어.”



얀은 벽난로 앞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타닥타닥, 장작불이 조용히 타올랐다.



“이미 알겠지만 날이 어두워졌어. 오늘은 쉬고 내일 가.”



“지금 갈 거야.”



“그래?”



이그니스가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어디로 갈지는 정했니?”



“글쎄. 서쪽으로 가면 일자리가 많겠지. 기후가 좋은 남쪽이나 헤네타도 나쁘지 않고. 영 안 되면 탄광에서 일해도 될 거야. 또 북쪽으로 가면···”



얀은 말하다 말고 멍하니 벽난로를 쳐다보았다. 불꽃이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그을린 돌벽을 핥고 있었다. 불꽃의 자리는 벽난로야. 얀은 생각했다. 불꽃이 난로 밖으로 나오면, 그때부터 문제가 생기는 거야.



“나 평범해질 수 없겠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얀의 목소리가 사뭇 낮아졌다.



“평범하게 살고 싶어?”



이그니스가 물었다.



“아마도.”



얀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천천히 내쉬었다.



“길 잃은 기분이야. 내가 무얼 원하는지도 모르겠어. 어쩌면 줄곧 그랬던 것 같아. 협회를 나오면서부터. 아니, 더 오래되었을지도 몰라··· 젠장, 진짜 아는 게 하나도 없네.”



이그니스는 아무 말 없이 지켜보기만 했다. 얀이 계속해서 말했다.



“나는 애매한 사람이야. 머리는 파란 주제에 재능 따위 없는 사람. 마녀라 불리면서 마녀는 아닌 사람. 어디서도 어울릴 수 없는 그런··· 누나와는 전혀 달라. 누나는 늘 확신으로 가득했잖아. 그러니까 협회도 미련 없이 나올 수 있었겠지. 그래··· 누나가 날 자식처럼 키워주었어도, 결국 남이었던 거야. 그래서 해답을 찾을 수 없던 거야.”



이그니스가 다가와 얀의 상처투성이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은 부드럽고 따스했다. 얀은 달콤한 향수를 느꼈다.



“얀, 누나가 왜 협회를 나온 지 아니?”



얀은 이그니스를 쳐다보지도 않고 고개를 저었다. 이그니스가 잠시 망설이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도망친 거야. 자신 없어서.”



얀이 놀란 눈으로 이그니스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계속해서 말했다.



”협회에 모두가 내게 말하더라고. 마법사들의 권리를 드높여줄 인재라고. 마법사들을 해방할 구원자라고. 마법사들의 미래라고··· 그래서 그런가? 모두가 내게 너무 잘해줬어. 기대에 찬 눈빛으로 칭찬해주고, 혹여나 불편하진 않을까 아껴주었지. 내 능력 덕분에··· 근데 그게 정말 내 능력이었을까?”



이그니스가 고갤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밤새가 가늘고 길게 울었다.



“누나는 불안했어. 내가 가진 이 위험한 능력을 씻어내듯 지워버리고 싶었어. 마법사인 게 싫었고, 마법사들의 미래라고 치켜세우는 협회도 싫었어. 치가 떨리도록 말이야. 그래서 도망친 거야. 멀리. 가능하면 아주 멀리. 마법과는 인연이 없는 곳으로. 다시는 마법과 마주치지 않을 곳으로. 네겐 누나가 확신에 찬 것처럼 보였을지 몰라도··· 그렇지 않아. 오히려 난··· 네가 부러웠어. 아무것도 짊어질 필요 없는 네가··· 그저 평범해지고 싶어서. 그래서 그냥··· 도망친 거야. 누나로서 도움이 되어주지 못해 미안해. 네가 그렇게 힘들어하는 줄 몰랐어.”



타닥타닥. 장작 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작은 숨소리가 방을 떠도는 듯했다. 이그니스가 조그맣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얀, 오늘 너는 죄 없는 아이만 구한 게 아니야. 너 자신도 구한 거야. 옳다는 생각만으로 한 거잖아? 넌 누구보다도 자유로운 아이야. 그건 정말이지··· 어려운 일이야. 넌 충분히 잘하고 있어.”



“하지만 난 여전히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는걸.”



얀이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누나는 걱정하지 않아. 어디를 가든, 어떤 일을 하든, 넌 올바른 선택을 할 거니까.”



이그니스가 상냥한 눈으로 얀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이 반짝였다. 물결치는 불꽃, 장작 타는 냄새, 흘러내리는 빛줄기, 하얀 달빛, 파도 소리.



“테스가 깨어난 거 아니? 음식도 잘 먹고 건강해.”



이그니스가 말했다.



“가기 전에 만나볼래? 네게 할 말이 있다는데.”



“나한테? 날 기억해?”



이그니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벽난로 뒤편에 있는 방을 바라보았다. 얀은 이그니스의 손을 놓고 방으로 향했다.



---



방은 어두웠지만, 깔끔하다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새로 빤 이부자리 냄새 때문이었다. 테스는 침대에 앉아 이불로 다리를 덮은 채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작은 탁상에 놓인 등불 덕분에 아이가 담비 털 외투가 아닌 하얀 원피스를 입고 있다는 것을 겨우 알았다. 그래서 그런지 아이는 낮에 보았을 때보다 더 작아 보았다.



“아저씨?”



테스가 얀을 바라보더니 조금 쉰 목소리로 말했다.



“몸은 괜찮니?”



“괜찮아요···”



테스는 말끝을 흐리더니 다시 조용히 말했다.



“죄송해요···”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아저씨 말고 삼촌이라고만 불러준다면 말이야.”



얀이 조심스럽게 침대 발치 쪽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삼촌?”



“무엇이든 물어보렴.”



“왜··· 그랬어요?”



얀은 아이가 무얼 묻는지 알았지만 바로 대답할 수 없었다. 솔직해야 할지, 아이에게 도움이 되는 말을 해야 할지 고민이었다.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얀은 솔직해지기로 마음먹었다.



“그냥. 삼촌이 그러고 싶었어.”



테스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미간을 좁히더니 깊이 생각하지 않고 다시 창밖을 내다보았다. 달빛이 밝았다. 거리가 아주 환할 정도로. 호랑지빠귀가 다시 길게 울었다. 등불을 가득 채운 불꽃의 일렁거림이 들리는 듯했다.



이윽고 얀이 침묵을 깨뜨렸다.



“테스. 삼촌도 궁금한 게 있는데.”



테스가 얀을 바라보았다. 얀은 잠시 망설였고, 곧 입을 열었다.



“테스는 왜 그랬던 거야? 왜 제물이 되겠다고 했어?”



테스는 다시 고갤 돌려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소녀는 텅 빈 가슴 속을 가득 채우려는 듯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숨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엄마 보려고요.”



얀은 생각에 잠겼다. 먼 옛날의 기억이 꿈틀거리는 듯했는데, 이상하게도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희뿌연 연기가 기억을 모두 가리고 있을 뿐이었다. 얀은 자기 어깨를 쓸어내리고는 테스를 바라보았다.



“앞으로는··· 어떻게 지내게 될지 아니? 마을 사람들은 다들 네가 바다신을 만나러 간 줄 아는데···”



테스는 상처투성이 손으로 얼굴을 문질러 닦아내고는 얀을 올려다보았다.



“이그니스 아주머니께서 알려줬어요. 저는 바다신을 만나고 왔다고요. 보웬 장로님이 물고기를 잡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을 거래요. 그러면 이렇게 말해야 해요. ‘그물 구멍을 큰 걸 쓰세요. 날이 갈수록 물고기가 많이 잡힐 거예요’ 그러면 돼요. 앞으로 아주머니가 옆에서 도와주신 댔어요. 아주머니는 제게 정말 잘해주세요. 정말로요.”



"그래. 나도 안단다."



테스가 슬그머니 웃더니 창밖을 가리켰다. 밝은 달빛 아래 장로의 하얀 대머리가 반짝이며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는 엄마가 보고 싶어도 참을 거예요. 아주머니가 그래야 한대요. 누구나 그런 순간이 오는데, 제게 일찍 찾아왔을 뿐이래요. 그러니까 참을 거예요. 이제 울지 않을 거예요.”



“정말 성숙하구나···”



“삼촌이 도와줘서 그래요. 고마워요, 삼촌.”



“그래. 나도 고맙구나.”



---



“테스가 돌아온 게 사실이오? 정말? 지금 어디 있소?”



얀이 방을 나왔을 때, 보웬이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채 소리쳤다. 노인은 마치 단상 위에 선 선교자처럼 손가락을 치켜들고 있었다.



“쉬고 있어요. 많이 지쳤거든요. 쉬게 해줘야 해요.”



이그니스가 차분히 말했다.



“이럴 수가! 이건 기적이야! 어쩐지··· 이제 말이 딱 떨어지는군!”



보웬이 손뼉 치며 감탄했다.



“바다신께서 감동하신 거야! 우리 테스의 효심에! 그래서 아이를 지상으로 돌려주신 거라고! 그래! 오! 이그니스. 소식 들었소? 방금 들었는데, 테스 아범이 눈을 떴다더군! 딱 들어맞지 않소? 테스의 효심 덕분이오! 바다신께서 보우서에게 눈을 주신 거야!”



“보우서 일은 잘못 알고 계세요, 장로님.”



트로피가 현관문을 밀고 들어오더니 잔뜩 굳은 얼굴로 말했다.



“보우서는 지금껏 우리에게 거짓말을 했습니다. 애초에 맹인이 아니었어요.”



“그게 무슨 말이여?”



보웬이 물었다.



“보우서는 팔다리가 묶인 채 광장 한복판에 나뒹굴고 있었어요. 눈은 가리고 있지 않았죠. 전 알 수 있었어요. 녀석이 앞을 아주 잘 보고 있다는 걸요. 눈이 마주쳤거든요. 순순히 인정했어요. 별 이상한 헛소리를 늘어놓긴 했지만.”



얀은 트로피의 눈이 차갑게 번뜩이는 것을 보았다. 장로 보웬이 또다시 소리쳤다.



“이런! 왜 진즉에 그렇게 알려주지 않은 거냐?”



“장로님께서 보우서의 눈이 멀쩡하다는 말만 듣고 획 가버리지 않았습니까?”



“보우서 이 개자식··· 이런 망할 놈이라고! 우리가 얼마나 잘 해줬는데! 망할 사기꾼 녀석! 그 녀석을 당장··· 잠깐, 근데 누가 보우서 녀석을 처벌한 거지? 그것도 온몸을 묶어서··· 아하! 역시! 바다신께서 벌을 내리신 거야! 역시 그럴 줄 알았어!”



보웬이 또다시 요란하게 손뼉 쳤다. 노인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힘이 넘쳤다.



“대단해! 아주 대단해! 좋아··· 그럼 이제 우리가 해야 할 게 뭔가, 트로피?”



“보우서를 처벌해야겠죠.”



“그래, 그것도 해야 하지. 하지만 테스도 있지 않나? 테스를 위해 축제를 해야겠어! 지금 당장!”



“테스는 지금 많이 지쳤어요. 쉴 시간이 필요해요. 적어도 일주일은 말이에요.”



이그니스가 말했다.



“오오 그래, 이그니스. 현명해. 바다에서 돌아온 우리 테스에게 쉴 시간이 필요하겠지. 그럼 일주일 뒤에 축제를 열도록 하자고! 좋아. 그게 좋겠어!”



보웬은 그렇게 말하고는 아무런 인사도 없이 제멋대로 집을 나섰다. 문이 닫히고도 장로의 흥겨운 콧노래가 오랫동안 들려왔다.



“잠깐 나 좀 봅시다, 트로엘.”



보웬의 웃음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자 트로피가 손짓하며 현관문을 가리켰다. 이전과 다르게 힘이 실린 목소리였다.



“여보, 지금 인사를 나누시오. 지금 말고는 기회가 없을 거요.”



“갑자기 왜 그래요, 당신?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



이그니스가 물었다.



“내가 한 말을 지키려는 것뿐이오.”



트로피가 차갑게 말했다. 이그니스는 임신한 배를 잡고 조심스럽게 얀에게 다가왔다.



“어디로 갈지는 정했니?”



“북쪽. 북쪽으로 갈 거야.”



“그래. 조심히 가, 내 동생. 넌 어떤 일이든 잘 해낼 거야. 그리고··· 또 볼 수 있겠지?”



“당연하지, 누나.”



얀과 이그니스는 가볍게 포옹했다. 그들은 진심으로 서로를 이해했고, 서로를 위했다. 마치 의좋은 남매처럼. 어머니와 아들처럼.



그러나 그들은 알지 못했다. 이 순간이 지나고 나면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한다는 사실을. 뜨거운 불길이 둘을 영원히 갈라놓는다는 것을. 얀이 이 사실을 알게 되는 데에는 7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 그러니까 나이폴-론드 전쟁이 끝나고 난 직후, 되돌리기에는 너무나 늦어버린 뒤였다.



밤새가 유난히 길게 우는 밤이었다.



---



“무슨 일이죠? 이런 곳까지 와서 해야 할 말이라도 있습니까?”



마을과 그리 멀지 않은 곳, 나무가 빽빽하게 자란 작은 숲에 차가운 바람이 돌고 돌았다. 얀은 바다의 짠 냄새와 축축한 낙엽 냄새를 맡으며 트로피의 손을 주시했다. 그는 곤봉을 들고 있었다. 보우서 집에서 보았던 그 곤봉이었다.



“이게 뭔지 알아요?”



트로피가 곤봉을 내밀며 물었다.



“압니다.”



“이번만큼은 솔직하시네요. 다행히도 말이죠.”



트로피가 누군가에게 손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숲 안쪽에서 한 남자가 부스럭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남자는 자꾸 흘러내리는 바지춤을 끌어 잡고 있었다.



“맞습니다. 이 녀석이에요. 이 녀석이 축제를 망쳤어요.”



약탈자가 실실 웃으며 말했다.



“너무 앞서가지 마세요, 렘 씨. 자,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트로엘?”



얀은 트로피의 눈이 분노와 경멸로 이글거리는 것을 보았다. 눈을 깔고 다니던 이전과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축제는 잘 끝나지 않았습니까?”



“아니! 내가 똑똑히 봤어! 이 녀석이 여자아이를 바다에서-”



“우리 하나씩 합니다. 하나씩. 차근차근.”



트로피가 약탈자의 말을 잘라내더니 얀에게 한 발짝 다가왔다.



“트로엘? 축제 중에 갑자기 사라졌죠. 그때 어디 있었죠?”



“바닷가에 있었습니다.”



“거기서 무얼 했죠?”



“테스를 바다에서 데리고 나왔습니다.”



“그래! 이 녀석이 당신 마을의 축제를 망친 거야! 그 아이는 제물이었잖아? 그것도 바다신에게 바칠 제물!”



“당신 말이 맞아요, 렘. 트로엘 씨는 축제를 망쳤어요. 그것도 모두를 속이면서, 몰래 말이죠.”



“이런 놈은 죽어야 마땅해! 감히 거짓말을 하다니!”



약탈자가 얀을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



“그렇죠··· 거짓말은 안 될 짓이에요. 렘 씨, 어쩌다 트로엘씨가 아이를 구하는 모습을 보게 된 거죠?”



트로피가 곤봉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얀은 그의 인내심이 한계에 달했음을 눈치챘다.



“아까도 말하지 않았습니까. 전 상인이에요. 물건을 팔아야 먹고 살 수 있다고요. 근데 저 자식이 내 물건을 훔쳤어요. 그러니까··· 온갖 물건들을요. 그래서 녀석을 뒤쫓았던 거예요. 저 녀석이 빼앗은 것들을 되찾으려고-”



준비해 온 말이 많아 보였는데, 약탈자는 더 이상 말할 수 없었다. 트로피가 곤봉으로 약탈자의 아래턱을 날려버렸다. 약탈자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고꾸라졌다.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혓바닥이 이리저리 구르며 바보 같은 소리만 날 뿐이었다.



“개 같은 자식···”



트로피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곤봉을 힘껏 내리쳤고,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약탈자는 곤봉을 막으려 손을 들어 올렸지만, 소용없었다. 세 번째 가격에 그는 어깨와 손에 경련을 일으켰고, 네 번째 일격에는 머리가 꺾였다. 다섯 번째를 끝으로 약탈자의 머리통이 아주 부서져 버렸다. 비릿한 피 냄새가 숲 냄새를 지워버렸다.



약탈자의 앙상한 손이 움찔거렸다. 트로피가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는 얀을 쳐다보았다. 얼굴 곳곳에 튄 핏방울이 달빛에 반짝였다.



“트로엘 씨, 이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거짓말이 싫습니다. 견딜 수가 없어요. 무시당하는 기분이거든.”



트로피가 파르르 떨며 한숨을 내쉬더니 사뭇 달라진 어조로 말을 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유독 사기꾼들에게 시달렸지. 피땀 흘려가며 번 돈을 노리는 개 같은 족속들. 놈들의 사탕발림에 속아서 잃은 게 한둘이 아니야. 누구는 속은 내가 잘못이라는데. 미친 새끼.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지? 어떻게 그게 내 잘못이야? 사기꾼들이 잘못한 거잖아. 거짓말쟁이들이 문제라고. 그리고 문제는 항상 해결해야 하지. 이런 개 같은 족속들은 죽어도 싸.”



얀은 침묵했고, 트로피가 계속해서 말했다.



“그런데 너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단 말이지. 난 테스를 진심으로 걱정했거든. 진심으로. 하지만 내 힘으로는 아이를 살릴 수 없었어. 난 마을의 시장이니까. 시장은 모두가 원하는 걸 이루어줘야 하니까.”



“그래서 아이를 버렸나?”



“다시 말하지만 난 원하지 않았어. 아니고말고. 솔직한 마음으로 누군가 그 아이를 구해주길 바랐어. 어디선가 정의로운 기사가 갑자기 나타나서 말이야. 마치 동화처럼. 근데 그걸 네가 이뤄준 거야. 그래서 지금 상황이 뭐랄까··· 조금 복잡하달까.”



“뭐가 복잡하다는 거지?”



“거짓말을 했잖아. 그건 용서할 수 없어. 그래서 내 머리는 네 머리통을 날려버리라 하는데··· 내 마음은 그렇지 않단 말이지. 그래서 나름대로 해결책을 찾았어. 처벌은 하되, 좀 약하게.”



트로피가 곤봉을 쥔 채로 뒷짐을 지며 선심 쓰듯 말했다.



“얀 트로엘, 당장 이 마을에서 꺼져.”



“그럴 생각이었어.”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마. 다시는.”



“그러도록 하지.”



얀은 짐을 챙겨 돌아섰다가, 다시 트로피를 바라보았다. 가방끈을 어찌나 세게 움켜쥐었는지 얀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네가 이런 사람이라는 거··· 누나는 알아?”



“걱정 마. 내 아내는 날 속이지 않으니까.”



“거짓말하면 무슨 짓이든 할 것처럼 들리는군.”



얀이 조용하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거짓말로 나를 우롱하는 자가 있다면, 그 사람이 누구든지 간에 난 용서하지 않아.”



트로피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얀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트로피에게 다가섰다.



“트로피 파트리치오. 너의 그 망할 신념 때문에 누나가 조금이라도 다치면, 그게 어떤 이유든지 간에 널 산산조각 낼 거야. 까마귀들도 네 육체를 모두 찾을 수 없도록. 지금 이 자리에서 약속하지.”



“그럴 일은 없어. 절대로”



트로피가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쭉 편 가슴에도, 꼿꼿하게 쳐든 얼굴에도, 목소리에도, 눈빛에도 확신으로 가득했다. 위험한 눈이었다.



얀은 트로피처럼 확신할 수 없었다.



새 우는 소리가 유난히 가늘고 긴 밤이었다.



---



“레어티스? 여기서 뭐 하니? 날도 어두운데.”



“떠난다고 해서 찾아왔어요, 삼촌.”



“그렇구나. 무슨 할 말이라도 있니?”



“그냥 인사드리려고요.”



“누나가··· 그러니까 어머니께서 걱정하지 않으실까?”



“걱정하실 거예요. 하지만 삼촌에게 꼭 인사하고 싶었어요.”



“그래야만 하는 이유라도 있니?”



“삼촌은 저와 비슷한 사람 같거든요.”



“네가 날 또 놀라게 하는구나. 넌 정말 똑똑한 아이야.”



“저도 삼촌처럼 되고 싶어요. 저라면 모르는 아이를 위해 험한 바다에 뛰어들지 못할 거예요.”



“넌 그러지 않아도 된단다, 레어티스. 널 다시 볼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구나. 너에 대해서 좀 더 알고 싶거든. 오늘 하루가 너무 짧아서 아쉬울 따름이야.”



“다음에 또 만나면 되죠.”



“그래, 그러면 좋겠지··· 하지만 나는 이제 이 마을에 다시 돌아오지 못한단다. 네 아버지와 약속했거든.”



“밖에서 보면 되겠네요.”



“그래. 그러자꾸나. 레어티스? 혹시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



“어떤 부탁이요?”



“네 어머니를 지켜주겠다고 약속해 주겠니?”



“제 어머니가 위험한가요?”



“언젠가는 그런 날이 올 것 같구나. 레어티스, 이 마을에서 믿을 만한 사람이 너밖에 없네. 미안하다. 그래도 부탁할게. 힘을 기르렴. 그리고 네 어머니를 지켜주렴.”



“약속할게요.”



“고맙다, 레어티스. 또 보자꾸나.”



“잘 가세요, 얀 삼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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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불꽃의 노래 (4) 23.05.14 13 1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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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곰과 여우 (4) 22.12.10 18 1 18쪽
17 곰과 여우 (3) 22.11.26 22 1 20쪽
16 곰과 여우 (2) 22.11.12 19 1 15쪽
15 곰과 여우 (1) 22.10.26 21 1 18쪽
» 아이의 꿈 (6) 22.10.23 21 1 20쪽
13 아이의 꿈 (5) 22.10.22 21 1 16쪽
12 아이의 꿈 (4) 22.10.19 19 1 15쪽
11 아이의 꿈 (3) 22.10.16 23 1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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