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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문수 님의 서재입니다.

아르마노 기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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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문수
작품등록일 :
2022.08.17 19:05
최근연재일 :
2024.03.30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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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03 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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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쪽

얀의 안식처 (2)

DUMMY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었다. 얀은 알 수 있었다. 끔찍한 두통이 조금씩 그러나 분명히 얀을 망가뜨리고 있었다. 두통뿐만이 아니었다. 온몸을 짓누르는 피로도 점점 무거워졌다. 보이지 않는 것에서 소리가 들리기도 하고, 들리지 않는 것에서 냄새가 났으며, 보이면 안 될 것이 보이기도 했다. 얀은 알고 있었다. 피로가 그를 무너뜨리고 있었다.



이제 와서 불면증이 얼마나 오래되었는지는 무의미했다. 얀은 더 이상 불면증을 이겨내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로, 잠들지 않으려 애썼다. 끔찍한 두통보다도 더한 고통이 도사리고 있기라도 하듯, 얀은 반사적으로 꿈을 거부했다.



얀은 정상이 아니었다. 오랜 통증에 감각이 무뎌진 나머지 맛조차 느낄 수 없었다. 맛이 느껴지지 않으니 식욕이 생기질 않았다. 얀은 그저 살기 위해 먹었다. 근데 왜 살아야 하지? 얀은 목표를 생각했다. ‘론드로 가야 해.’ 이유는 없었다. 불면증이 익숙해져 버린 것처럼 목표도 익숙해져 버렸다. 형체 없는 목표를 좇다 보니 얀은 어느새 ‘불면증’과 ‘론드’를 하나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론드로 갈 수만 있다면 끔찍한 꿈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얀은 믿었다.



그런 얀이 지금껏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동반자가 된 루치 덕이 컸다. 루치는 얀의 짐뿐만 아니라 마음마저 거들어주는 이해심이 많은 암말이었다. 그녀는 지쳐버린 얀의 곁을 말없이 지켜주었고, 먼저 등을 내어주기도 했다. 얀이 아무 말이나 지껄여도 루치는 묵묵히 들어주었다. 얀은 루치의 눈에서 그녀의 배려심을 볼 수 있었다. 얀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루치에게 몸과 마음을 의지하기 시작했다.



루치 덕분에 얀은 불안정한 와중에도 자신의 처지만큼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돈으로 갈 수 없는 곳은 없다’는 오래된 격언만 알면 됐다. 문제는 혐오를 연료 삼아 타오르기 시작한 나이폴 - 론드 전쟁 때문에 리아강을 건너는 비용이 몹시 비싸졌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얀은 이제 혼자가 아니었다. 루치를 데려가려면 큰 배를 구해야 했고, 더 많은 돈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게다가 그동안 고생한 루치를 생각해 마구간에 맡긴 바람에 추가적인 비용을 감수해야 했다.



돈. 결국 돈이 필요해. 그것도 아주 많이. 얀은 흐려지는 정신에 채찍질했다. 돈을 벌어야 해. 돈을 벌려면 북쪽으로 가야지. 북쪽으로 가서 문제를 해결해야 해. 문제가··· 산적이었나? 그래. 산적을 잡으면 돈이 생길 거야. 돈이···



또다시 두통이 얀을 짓눌렀다. 얀은 무너지지 않으려 무의식적으로 루치를 찾았다. 그녀를 마구간에 맡겼다는 것을 그새 잊고 루치를 불렀다. 뒤늦게 의지할 친구가 없다는 걸 깨달은 얀은 자신의 목표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무너지지 않으려는 발버둥. 아무도 없는 황야에서 비웃음이 들리고, 비좁은 골목이 이상하게 겹쳐 보여도 얀은 잘 버텼다. 그러나 벌레만큼은 도무지 참을 수 없었다. 무수히 많은 다리가 팔을 타고 기었다. 그것이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알았지만, 안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얀은 벌레를 떼어내려 했고, 역시나 벌레는 떨어지지 않았다.



얀은 급격히 무너졌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다리가 불타는 듯했고, 머리는 쇳덩이를 짊어진 것처럼 무거워졌다. 고개를 들고 싶었지만 도무지 힘이 나질 않았다. 이윽고 다리가 고장 난 것처럼 멈추었다. 정신을 몰아세워도 소용없었다. 얀은 한계에 달했음을 직감했다.



땅속에서, 하늘에서, 거짓들 속에서 벌레들이 기어 나왔다. 견딜 수 없이 간지러웠다. 벌레들은 순식간에 목 아래까지 뒤덮더니 곧 얼굴까지 기어올랐다. 입과 코, 귀 할 것 없이 끊임없이 밀려들었다. 얀은 움직일 수 없었다.



---



웃고 있다. 웃음소리가 들린다. 실실 웃는 목소리에는 영혼이 없다. 살아있지 않은 무언가가 웃고 있다.



꿈틀거린다. 움켜쥔 무언가가 움직인다. 무언가가 경련을 일으킨다.



눈을 뜬다. 거대한 벌레. 딱딱한 껍데기에 박힌 벌레의 눈은 텅 비었다. 손아귀에 길쭉한 더듬이가 들어있다.



'벌레를 죽여'



귀를 사로잡는 목소리. 칼을 움켜쥔다.



벌레는 웃고 있다.



얀은 칼을 휘둘렀다.



---



얀을 깨운 것은 공포와 메스꺼움이었다. 벌레가 아른거렸다. 얀은 공포에 몸서리를 치고 나서야 자신이 악몽을 꾸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 사실이 정신을 들게 했다. 속을 게워 내고 싶었지만 묽은 침과 기침만 겨우 나왔다. 어지럽게 흔들리는 세계 속에서 얀은 가느다란 쇠창살과 나뭇잎, 곁가지 그리고 푸른 하늘을 보았다. 하늘이 갇혀있네.



시간이 조금 지나고 얀은 겨우 안정을 찾았지만 몸은 여전히 말을 듣질 않았다. 그제야 얀은 몸이 꽁꽁 묶여있다는 것과 쇠창살에 갇힌 것은 하늘이 아닌 자신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살아있소?”



누군가 쩍쩍 갈라지는 목소리로 물었다. 얀은 끔찍한 두통에 고개를 휙휙 내저었다.



“괜한 걸 물었구먼.”



같은 야외 쇠창살 안에 갇힌 남자는 잔뜩 구겨진 모자를 겨우 머리에 걸치고 수염도 헝클어져 있었다. 얀은 몸을 비틀며 겨우 몸을 일으켰다.



“여기, 어디죠?”



“지옥이겠죠. 아마도.”



남자가 시름시름 앓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들의 지옥은 숲 언저리, 거친 진흙과 잡초로 무성한 곳이었다. 얀은 지옥치고는 생기가 넘치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주변을 둘러보던 얀은 그들의 지옥에 한 명이 더 있다는 걸 뒤늦게 파악했다.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이었는데, 손이 뒤로 묶인 채 미동도 없이 축 늘어져 있었다.



“저기 죽은 겁니까?”



“글쎄요··· 알고 싶지 않은데···”



남자가 훌쩍이며 대답했다.



그때 창살 밖 숲 쪽에서 누군가가 다가와 쇠창살을 톡톡 두드렸다.



“일어나셨구먼”



억양이 특이한 남자였다. 낡은 사냥꾼 가죽옷을 입은 남자가 물주머니를 건넸다. 남자는 론드인이었다.



“마시겠나?”



“글쎄. 손이 이래서.”



얀이 뒤로 묶인 손을 보여주었다.



“싫음 말고.”



남자는 물통을 치우고는 창살 앞에 쪼그려 앉아 얀을 빤히 쳐다보았다. 얀은 목이 말랐다.



“너, 마법사냐?”



“그건 왜?”



“왜냐고? 네 머리를 봐. 안 묻고 배기겠나?”



“내가 마법사로 보여?”



“아니라는 거지? 역시! 그럴 줄 알았어! 가르! 내가 맞았어! 내가 맞았다고! 등신! 돈 가져와!”



남자는 딱 소리가 나도록 손을 퉁기더니 어딘가를 돌아보았다. 그곳에 여섯의 남자들이 모닥불 주변으로 둘러앉아 있었다. 그들은 작은 나무줄기를 다듬어 만든 나무막대기를 가지고 놀고 있었다. 가르라고 불린 남자가 성큼성큼 걸어왔다.



“마법사가 아니라고? 지 입으로 아니래? 당연히 거짓말이겠지, 고라츠! 파란 머리가 마법사가 아니면 도대체 뭐야? 무슨 잡종이야?”



“파란 머리 중에서도 마법을 못 쓰는 부류가 있다고, 이 머저리야. 그리고 여긴 나이폴이잖아?”



“너 진짜 마법사 아니야?”



가르가 창살을 흔들며 물었다. 얀은 대답 대신 가르를 쏘아보았다.



“시발. 눈빛 한 번 마음에 드는구만.”



가르가 으르렁거렸다. 고라츠라 불린 남자가 실실 웃으며 말했다.



“어떤 마법사가 벌건 대낮에 혼자 널브러져 있겠나? 마법사들은 철두철미하고 자존심 강해서 차라리 죽고 말걸? 이봐 파란 머리. 우리가 너 살려준 거야. 하마터면 산짐승들에게 먹힐 뻔했다니까?”



“이렇게 고마울 수가. 이 빚을 어떻게 갚아야 할지 벌써 걱정이군.”



“네가 마법사였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을 텐데.”



가르가 고라츠에게 동전을 건네며 불만스레 중얼거렸다.



“마법사였다면 적어도 세 배는 더 받았을 거야. 이거 완전 쪽박이잖아.”



“우릴 어쩔 셈이지?”



얀이 물었다.



“어쩌다니? 너희를? 나이폴 놈들은 모르나?”



가르가 코웃음 치더니 계속해서 말했다.



“너희들은 이제 론드로 갈 거야.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거지. 새로운 주인과 함께.”



“노예가 되라는 말이요?”



수염이 헝클어진 남자가 불쑥 물었다.



“생긴 거랑 다르게 이해가 빠른 놈이네. 그래도 똑똑하진 않은가 봐? 나라면 나팔 소리가 들리자마자 내륙으로 냅다 도망갔을 거야. 여기처럼 국경과 가까운 곳이라면 더더욱 말이야.”



“그럼 내 아들은? 내 아들도 론드로 끌고 갔소? 그런 거요?”



남자가 창살에 얼굴을 끼워넣으며 소리쳤다.



“미치겠네. 우린 네 아들을 모른다니까? 제발 그만 좀 물어봐.”



“젠장! 똑바로 말해! 내 아들 어디 있어?!”



“이 개새끼가!”



가르가 버럭 소리치며 창살 사이로 더러운 부츠를 힘껏 뻗었다.



“분수도 모르고 말이야! 개 같은 자식! 하여튼 나이폴 개자식들은! 예의를 새로 가르쳐야 해! 시발!”



“그만둬. 이러다 상하겠어.”



고라츠가 동료를 달래며 창살에서 떼어냈다. 그는 겁에 질려 비명을 지르는 남자에게 인내심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봐. 우리가 왜 거짓말하겠어? 우린 사람을 놓치지 않아. 죽이지도 않는다고. 그건 돈을 걷어차는 짓이잖아? 게다가 어린아이는 너보다 훨씬 비싸. 우리가 봤다면 분명 이 창살 안에 함께 있었겠지. 알겠어?”



“이번에는 돈을 걷어찼나 보군. 노인은 값이 싸서 죽게 내버려둔 건가?”



얀이 축 늘어진 노인에게 눈길을 보냈다. 가르가 콧김을 거칠게 내쉬더니 노인을 향해 다시 발길질을 날렸다. 노인은 맥없이 진흙 바닥에 널브러졌다. 코 고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네 눈에는 이게 죽은 것처럼 보여? 그만 좀 쳐 자라!”



진흙에 얼굴을 처박은 노인은 도무지 깰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잠이 오다니. 얀은 속으로 생각했다. 정말 부럽네.



고라츠가 쭉 스트레칭하며 말했다.



“여긴 조용해서 좋네. 론드는 항상 시끄럽단 말이지. 우린 며칠 더 머물다가 동쪽 바다로 갈 거다. 너희를 론드로 보내줄 배가 기다리고 있거든. 긴 항해가 기다리고 있으니까 아프지 않게 잘 있으라고. 저 녀석처럼 잠이라도 자던가.”



---



미구엘은 찬 바람에 몸을 떨었다. 어떻게든 눈을 붙이려 모포를 덮었지만, 도무지 잠이 오질 않았다. 도무지 잘 수가 없었다.



아들 생각이 났다. 방앗간지기인 미구엘은 겨우 6살 된 코흘리개 아들 녀석이 사라진 이후로 불면증에 시달렸다. 이부자리에 눕기만 해도 후회의 물결이 밀려들었기 때문이었다. 아들 녀석이 어딨는지도 모르는데 잠을 잔다고? 그날 내가 일을 쉬었다면 이렇게 되지 않았겠지. 평소에 좀 더 주의를 주었다면... 조금만 더 신경 썼더라면···



후회를 바로잡으려고 마을을 나온 것도 있지만, 용기에 속은 것도 있었다. 손에 쥔 도끼가 미구엘에게 용기를 속삭였다. 아들을 되찾을 수만 있다면 산적이든 늑대무리든 모두 상대할 수 있다고.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용감하게 북쪽으로 나아가던 미구엘은 무장한 론드 노예 사냥꾼들을 본 순간, 허무하게도 용기와 도끼를 모두 잃고 말았다.



도망치지 않았다면 마음이 조금이라도 편했을지도 몰라. 아무도 비난하지 않건만, 미구엘은 너무 부끄러운 나머지 차라리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미구엘은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래서 잠들 수 없었다.



불면증에 시달리는 건 얀도 매한가지였다. 얀은 이마를 짓누르는 고통을 억누르며 생각했다. 이대로 갇혀있는 게 나쁘지 않을 수도 있겠어. 론드로 보내준다니까 차라리 잘 된 걸지도··· 아, 루치를 두고 갈 순 없는데. 칼도 루치에게 있잖아··· 젠장.



잠 못 이루는 두 사람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건지 노인이 갑자기 코를 삼키며 일어났다. 노인은 늘어지게 하품하더니 코를 훌쩍였다.



“아. 춥네. 지금 몇 시지?”



노인이 비교적 젊고 기운이 넘치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마··· 9시쯤 되지 않았을까···”



미구엘이 맥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런. 늦었잖아.”



노인은 우유처럼 하얀 백발을 휙 흔들더니, 덜 깬 눈으로 주변을 휘둘러보았다. 그는 쇠창살과 맞닿는 흙바닥을 주의 깊게 살펴보다가 얀을 발견하고는 빤히 쳐다보았다.



“오. 너는···”



얀은 그제야 상대가 노인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는 우유처럼 하얀 백발을 가졌을 뿐, 30대 남짓의 남자였다.



“반갑네. 친구.”



남자가 얀에게 말을 걸었다. 얀은 이상한 기분이 들어 눈살을 찌푸렸다.



“한가롭게 인사나 나눌 때가 아닌 것 같은데.”



얀이 말했다.



“그런가?”



남자는 마치 숙소에서 막 깨어난 사람처럼 한가로웠다. 얀은 남자가 미친 게 아닐지 생각했다. 그가 계속해서 말했다.



“근데 내 동료는 못 봤나?”



“동료요?”



미구엘이 되물었다.



“아 못 봤나? 그런 놈 있어. 미친놈이지.”



미친놈이 미친놈을 찾는군. 얀은 한숨을 내쉬었다.



“동료 찾을 때가 아닌 것 같은데요. 우리 지금 갇혀있는 건 알죠?”



미구엘이 말했다.



“당연히 알지. 음··· 그 녀석, 그냥 두고 가면 분명 지랄할 텐데.”



“어딜 가려고요?”



미구엘이 물었다.



“궨디렌으로 갈 거야. 친구들하고 만나기로 했거든. 그 녀석도 데려가야 해.”



미쳐도 단단히 미쳤군. 얀은 생각했다.



“누가 오는데?”



노예 사냥꾼 중 하나가 황야의 한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멀리서 불빛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 저기 오는군.”



백발의 남자가 갑자기 일어나 소리쳤다.



“어이. 돈 자루가 걸어온다. 다들 준비해.”



노예 사냥꾼들은 능숙하게 칼과 밧줄을 챙기기 시작했다. 가르가 버클을 조이며 말했다.



“먼저 가서 잡자.”



“기다려. 나이폴 병사일 수도 있어.”



고라츠가 말했다.



“이런 변두리에 무슨. 서두르자고.”



가르는 세 명의 동료를 데리고 횃불도 없이 불빛으로 향했다. 발소리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능숙한 움직임이었다. 고라츠와 한 명의 노예 사냥꾼은 자리에 남아 상황을 지켜보았다.



“이제 가볼까?”



백발의 남자가 말했다. 미구엘이 긴장해서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남자를 쳐다보았다.



“간다고요?”



“왜? 여기 계속 있으려고?”



“아니··· 그건 아니지만···”



백발의 남자가 어느샌가 얀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얀을 향해 여유로이 웃어 보이더니 쭈그리고 앉아 쇠창살 아랫부분을 움켜잡았다. 얀은 그때까지 그가 언제 밧줄을 푼 건지, 왜 이상한 자세를 취하는지 알 수 없었다.



겉머리가 하얀 만큼 머릿속도 새하얀가 싶은 순간이었다. 쇠창살이 파르르 떨리더니 통째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광경이 어찌나 비현실적인지 얀과 미구엘은 자기가 어느새 잠들어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바닥이 없는 쇠창살 감옥이 순식간에 넘어가더니 큰 소리를 내며 거친 진흙에 파묻혔다.



당연히 꿈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만 얀은 여전히 비현실적인 감각과 싸워야 했다. 밧줄을 어떻게 푼 건지는 둘째치더라도, 성인 남자 넷은 있어야 겨우 옮길 법한 야외 쇠창살을 단숨에 넘기는 모습은 그 누구라도 눈을 의심할 판이었다.



“뭐-뭐야!”



고라츠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노예 사냥 전문가답게 빠르게 대응했다. 고라츠는 백발의 남자가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도록 칼로 위협하며 제압하려 했다.



하지만 고라츠는 자신의 의도를 조금도 실행할 수 없었다. 남자가 눈 깜짝할 새에 달려들더니 순식간에 고라츠의 얼굴을 내지른 것이다. 고라츠는 번쩍이는 불빛과 함께 검은 밤하늘이 자신을 굽어보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대로 진흙에 처박혔다.



백발의 남자가 고라츠의 칼을 집어 얀을 향해 던졌다. 칼날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와 얀의 다리 앞에 푹 박혔다. 얀은 칼날로 밧줄을 풀고는 칼을 집어 들었다. 백발의 남자는 여유 넘치는 모습으로 무장한 노예 사냥꾼을 상대하고 있었다.



“이-이 개자식이!”



노예 사냥꾼이 고함을 내지르며 칼을 휘둘렀지만, 백발의 남자가 훨씬 빨랐다. 그는 사냥꾼의 품 안으로 파고들며 가볍게 넘겨버렸다.



노예 사냥꾼은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명확히 알지 못했다. 그저 진흙에 처박혀 욕설을 내뱉을 뿐이었다. 사냥꾼은 무기도 없는 노예에게 당할 수만은 없다고 생각하며 다시금 칼을 집어 들었다.



사냥꾼은 상대를 목소리로 제압하고자 고함을 내질렀다. 하지만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그는 자기 가슴을, 가슴을 뚫고 나온 차가운 칼날을 보았다. 뒤늦게 등과 가슴 사이로 차가운 날붙이가 느껴졌다. 노예 사냥꾼은 보이지 않는 손이 무릎을 앗아가기라도 한 것처럼 그대로 쓰러졌다.



무언가 잘못된 것을 보기라도 한 것처럼 백발의 남자는 얀과 칼을 번갈아 보았다. 남자의 얼굴이 차갑게 일그러지더니 갑자기 얀의 멱살을 붙잡아 당겼다.



“이게 무슨 짓이야?”



“무슨 짓이라니?”



“지금 사람을 죽였잖아!”



“사람? 벌레를 죽였을 뿐이야.”



“이게 벌레로 보여?”



“그럼 뭔데?”



백발의 남자는 말문이 막혀 얀을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이윽고 그가 나직이 말했다.



“너도 미친놈이구나?”



“마르시 살려!”



멀지 않은 곳에서 아름다운 목소리가 들렸다. 화가 델피누스 카르손이었다. 그는 노예 사냥꾼들에게 붙들린 채 질질 끌려오고 있었다.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노예 사냥꾼들이 빠르게 달려오고 있었다. 백발의 남자가 얀에게 말했다.



“파란 머리! 아무도 죽이지 마라. 알겠어?”



“왜?”



“묻지 말고 그렇게 해!”



백발의 남자가 노예 사냥꾼들이 장난삼아 만든 기다란 나무막대기를 가져와 얀에게 건넸다. 얀은 칼자루를 꽉 움켜쥐었다. 백발의 남자가 말했다.



“대신 이걸 써.”



“이 칼은 내꺼야.”



“네가 이렇게 쉽게 사람을 죽일 줄 알았다면 그 칼을 주지도 않았을 거야. 당장 이리 내놔!”



“내 몸은 내가 지키겠어.”



얀은 칼을 들어 백발의 남자를 겨냥했다. 남자가 어이없는지 양팔을 들어 보였다.



“진짜 고집불통이네!”



“누가 할 소리.”



“에시어! 얀! 살려줘!”



델피누스의 목소리는 정말이지 상황에 맞지 않게 아주 아름다웠다. 노예 사냥꾼 가르가 거친 목소리로 외쳤다.



“시발! 어떻게 나온 거야? 고라츠! 도대체 왜··· 시발!”



가르와 노예 사냥꾼들이 순식간에 얀과 백발의 남자를 둘러쌌다. 얀은 칼끝을 노예 사냥꾼들에게 돌렸다.



“노예 새끼들··· 이런 짓을 벌이고 용서받을 거라 생각 마라!”



가르가 크게 분노하며 소리쳤다.



이런데도 죽이지 말라고? 겨우 벌레일 뿐이잖아. 입속으로 욕설을 짓씹던 얀은 문득 발아래가 서서히 꺼지는 듯한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젠장, 또 시작이군.



그때 미구엘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미구엘은 완전히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지르며 얀과 백발의 남자 사이를 앞지르더니 노예 사냥꾼들을 지나쳐 내달렸다. 미구엘을 붙잡으려던 가르도 무언가를 보더니 안색이 시퍼렇게 질렸다.



"야... 저거..."



그리고 무언가가 울부짖었다.



가래가 들끓는 듯한 울부짖음에 얀은 반사적으로 숲 쪽을 돌아보았다. 그것은 생전 처음 보는 생명체였다. 1미터 남짓의 놀라울 정도로 깡마른 그것들은 얇고 길쭉한 팔다리에, 두 눈은 황금빛으로 이글거렸으며, 길게 찢어진 입은 뾰족한 어금니를 한가득 담고 있었다. 갈고리 모양의 투박한 손톱으로 거친 진흙을 파헤치는 그것들은 슉슉거리고 앵앵거리는 소리를 냈다.



“구울... 구울이야! 시이발! 도망쳐!”



가르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그것들이 울부짖으며 달려들기 시작했다. 아니, 도약하며 돌진했다. 구울들은 머리 위로 2미터는 넘게 뛰어올라 순식간에 그들을 덮쳤다.



얀과 노예 사냥꾼들은 일제히 칼을 휘둘렀고, 피와 울부짖음이 흩날렸다. 얀이 휘두른 칼에 뼈마디가 툭 튀어나온 괴물의 앞발이 잘려 나갔다. 팔이 잘린 괴물은 그대로 한 노예 사냥꾼에 매달려 옆구리를 물었다. 사냥꾼은 끔찍한 비명을 내질렀다. 다른 사냥꾼은 구울을 머리에 매단 채 이리저리 날뛰었다. 또 다른 사냥꾼은 겁에 질려 물러서다가 동료의 팔을 밟고 넘어져 허우적거렸다. 그는 자기 다리가 잘려 나간 줄도 모른 채 도망가려 애썼다. 부채꼴을 그리는 핏속에 비명이 짙게 묻어났다.



“젠장! 여긴 나이폴이잖아! 여긴 나이폴이잖아!”



가르가 소리쳤다. 그는 괴물 하나의 팔을 겨우 베어내고는 죽어라 내달렸다.



“숙여!”



백발의 남자 에시어가 외쳤다. 얀이 턱을 가슴에 붙이자 나무막대기가 붕 소리를 내며 머리 위를 스쳤다. 두개골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빌어먹을···!”



얀은 어떻게든 침착함을 유지하며 애썼지만, 생전 처음 보는 살인 괴물 앞에서 공포를 억누르는 건 쉽지 않았다. 얀은 자신의 마음과 감각이 지쳐서 한계에 달한 것을 느꼈다. 괴물 두 녀석이 메뚜기처럼 풀쩍거리며 달려들자, 에시어가 막대기로 내리쳤다. 한 놈은 아래턱이 부러져 경련을 일으켰고, 다른 한 놈은 옆구리가 반으로 접힌 채 저 멀리 날아갔다.



“아아아아! 도와주어어어!”



델피누스가 몸을 납작 엎드린 채 울부짖었다. 이번만큼은 진짜 비명 같았다.



“델피누스를 지켜!”



에시어가 소리쳤다. 얀은 또다시 발아래가 꺼지는 느낌을 받았다. 내 몸이 또 나를 속이려 하잖아. 하필이면... 얀은 델피누스를 억지로 일으켜 세우며 생각했다. 잘못된 생각이었다.



거친 진흙이 푹 꺼지더니 기형적으로 꺾인 손이 솟구쳐 올라 얀의 발목을 움켜쥐었다. 황금빛으로 이글거리는 눈이 진흙 속에서 번득였다. 뾰족한 어금니가 번쩍일 때까지도 얀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눈치채지 못했다. 구울의 머리가 허벅지에 달라붙었다. 이빨은 뜨거웠고, 피는 검었다.



얀은 비명을 내질렀지만, 자기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세상이 옆으로 기울어지고, 갑자기 어두워졌다. 모든 게 조용했다.



얀은 정적 속에 끝을 알 수 없는 추락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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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형제와 작은 스승 (3) 24.03.30 5 1 22쪽
39 형제와 작은 스승 (2) 24.03.22 5 0 18쪽
38 형제와 작은 스승 (1) 24.03.02 7 1 19쪽
37 얀의 안식처 (6) 24.02.04 11 1 26쪽
36 얀의 안식처 (5) 24.01.20 11 1 16쪽
35 얀의 안식처 (4) 24.01.06 8 0 15쪽
34 얀의 안식처 (3) 23.12.25 7 0 17쪽
» 얀의 안식처 (2) 23.12.03 9 0 22쪽
32 얀의 안식처 (1) 23.11.05 9 1 18쪽
31 불꽃의 노래 (12) 23.10.21 9 1 27쪽
30 불꽃의 노래 (11) 23.10.07 11 1 25쪽
29 불꽃의 노래 (10) 23.09.17 15 1 20쪽
28 불꽃의 노래 (9) 23.08.28 14 1 18쪽
27 불꽃의 노래 (8) 23.07.28 15 1 16쪽
26 불꽃의 노래 (7) 23.07.17 11 1 20쪽
25 불꽃의 노래 (6) 23.07.08 11 1 16쪽
24 불꽃의 노래 (5) 23.06.04 12 1 19쪽
23 불꽃의 노래 (4) 23.05.14 13 1 17쪽
22 불꽃의 노래 (3) 23.05.06 10 1 19쪽
21 불꽃의 노래 (2) 23.04.23 16 1 18쪽
20 불꽃의 노래 (1) +1 23.03.25 19 1 17쪽
19 곰과 여우 (5) 23.02.05 22 1 21쪽
18 곰과 여우 (4) 22.12.10 19 1 18쪽
17 곰과 여우 (3) 22.11.26 22 1 20쪽
16 곰과 여우 (2) 22.11.12 19 1 15쪽
15 곰과 여우 (1) 22.10.26 21 1 18쪽
14 아이의 꿈 (6) 22.10.23 21 1 20쪽
13 아이의 꿈 (5) 22.10.22 21 1 16쪽
12 아이의 꿈 (4) 22.10.19 19 1 15쪽
11 아이의 꿈 (3) 22.10.16 23 1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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