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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문수 님의 서재입니다.

아르마노 기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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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문수
작품등록일 :
2022.08.17 19:05
최근연재일 :
2024.06.07 16:49
연재수 :
4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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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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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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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9,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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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17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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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쪽

불꽃의 노래 (10)

DUMMY

시브니 백작령의 숙소에 도착했을 때, 2층 여사제의 방 창문은 저녁놀에 붉게 물들어 있었다. 가지를 뻗은 가로수도, 담벼락에 고양이도, 숙소 문지기도, 모두가 평화롭기만 했다. 얀만이 그들의 평화에 어울리지 못했다.



백작령 문지기인 드가프 가사단원이 얀에게 말했다.



“진정해. 모든 게 평화롭잖아? 그 시끄러운 촌장만 아니라면 말이야. 날이 저물고 있으니까 내일 다시 찾아와.”



“내일까지 기다릴 수 없어요.”



“개인적인 일?”



기사단원이 들창코를 문지르며 귀찮다는 듯 물었다.



“네?”



“도디 님을 왜 찾냐고. 개인적인 일이야? 설마 고백할 생각은 아니지? 그런 거라면 내가 경고하는데, 헛짓거리 말고 꺼져. 도디 씨는 백작님의 시종 외에 유일한 여자야. 우리 기사단 내부에서도 도디 씨에게 사랑을 맹세하지 않는다고.”



“그런 거 아니에요.”



“퍽이나 아니겠군!”



기사단원이 들창코를 들썩이며 계속해서 말했다.



“그러면 너희 기사단 일로 왔나? 겨우 남작이 이끄는 시꺼먼 기사단? 그럼 전할 말을 남겨. 대신 전해줄 테니까.”



“직접 해야 해요.”



“같잖게 굴지 마. 믿는 구석이라도 있어?”



“도디를 꼭 만나야 해요!”



얀이 문지기에게 성큼 다가가 말했다. 문지기가 코웃음 쳤다.



“별 등신 같은 놈을 다 보네. 이상한 짓 마라. 야고프! 이 녀석 좀 도디 님께 데려가 봐!”



얀은 야고프라고 불린 남자에게 안내와 감시를 받으며 곧장 2층으로 올랐다. 야고프가 도디의 방문을 두드렸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사제님. 손님이 찾아왔는데요.”



“죄송해요. 오늘은 쉬게 해주세요.”



문 너머로 도디의 목소리가 들렸다. 야고프가 얀을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사제님이 혼자 있고 싶다는데?”



“그럼 제가 말을 좀-”



“이봐!”



야고프가 말을 끊고 얀을 위협적으로 쏘아보았다.



“이제 그만하지? 남작 따위에게 배운 게 없나? 여긴 네 집 앞마당이 아니야. 예의 좀 차려. 얼마나 더 무례하게 굴 생각이야? 그냥 좀 꺼지라고.”



결국 얀은 도로 밖으로 나와야 했다. 문지기가 얀을 보고 들창코를 들썩였다.



“보아하니 좋은 시간을 보낸 것 같군.”



얀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도디를 만나야 한다는 생각에 몰두해서 어떤 소리도 듣지 못했다. 창을 통해서라도 만나야겠다는 생각에 도달해 방 창문을 올려다본 얀은 깜짝 놀라 숨을 들이켰다. 창문이 활짝 열려 내부 천장이 보였다. 얀은 백작령 숙소에 도착했을 때처럼 거리를 내달리기 시작했다.


문지기가 코웃음 쳤다.



“등신 새끼.”



---



“얀! 이보게나!”



누군가 앞길을 가로막는 바람에 얀은 멈춰야 했다. 촌장 루벤스가 얀의 팔을 붙들더니 조용히 속삭였다.



“도대체 뭐하고 돌아다니는 거여? 응?”



“그게 무슨 말입니까?”



얀이 다급히 되물었다. 촌장이 답답한지 인상을 잔뜩 구겼다.



“어떻게 돌아가고 있냐는 거여! 젠장, 그만 돌려 말해! 자네가 조사하고 있다는 걸 난 아니께!”



“어떻게든 되고 있어요. 곧 해결될 거예요.”



얀이 촌장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애쓰며 말했다.



“그려? 믿어도 되는 겨?”



“저 지금 급하니까 얘기는 나중에-”



“급하다고? 어딜 가는 중인디?”



“방앗간! 방앗간이요!”



얀이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방앗간? 이번 일하고 관련된 겨? 그런겨?”



“나중에 말해요! 나중에!”



“나중은 무슨! 나도 같이 가세!”



---



알토는 나뭇가지로 그린 여자의 뒤태를 보며 감탄했다. 마음에 드는 작품이었다. 그래서 더 아쉬움이 짙었다. 종이에 그렸으면 좋았을 텐데.



“알토! 알토!”



알토는 욕설을 중얼거리며 거리를 내다보았다가 깜짝 놀라 나뭇가지를 얼른 집어치웠다. 멀리서 촌장과 한 남자가 달려오고 있었다. 촌장님이 그림을 보면 화낼까? 젠장! 당연하잖아! 잠시 내적 갈등에 빠졌던 알토는 끝내 그림을 지우지 못하고 몸으로 가리기로 했다.



“무슨 일입니까, 촌장님?”



알토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여기 지나간 놈 있으야?”



“언제 말입니까?”



“언제긴 언제여! 당연히 오늘이제!”



촌장의 고함에 알토가 깜짝 말을 더듬었다.



“어··· 한 명 있는데 어차피 방앗간지기라서 없는 거나 마찬가지랄까···”



“있는겨 없는겨!”



“어,없습니다!”



그때 방앗간지기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알토가 깜짝 놀라 움츠러드는 사이에 촌장과 남자가 곧장 방앗간으로 달려갔다. 알토는 놀란 가슴을 추스르며 촌장이 떠난 사실에 감사했다. 그러나 알토는 곧 방앗간지기처럼 비명을 지를 뻔했다. 놀라서 뒷걸음질한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그림은 이미 망가져 있었다.



---



“씨발!”



방앗간지기 멜라는 뜨거워진 머리를 붙잡고 비명 같은 욕설을 내뱉었다. 모자를 벗어봤지만, 머리가 식기는커녕 오히려 화로 속에 넣은 것처럼 뜨거웠다. 뱃속 깊은 곳부터 뜨거운 무언가가 끓어올랐다.



멜라는 도무지 믿기지 않아 두 눈을 비볐다. 부디 이 일이 꿈이길 바랐다. 하지만 두 눈을 감아도 알 수 있었다.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몽둥이를 집어 들었다.



“시발···”



오두막 바닥이 피로 물들어 갔다.



방앗간지기는 오두막 안을 가로지르는 한 울타리 앞에 멈추었다. 송아지가 누워있었다. 허약하게 태어나 어미에게 버림받은, 자신과 닮은 송아지였다. 송아지가 벌떡 일어나 얼굴을 핥아줄 것 같았다. 대신 잘린 목으로 피를 쏟아낼 뿐이었다.



멜라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눈물 흘리는 남자는 멍청한 마마보이라며 늘 떠들어댔건만, 이대로라면 자기 얼굴에 침 뱉는 꼴이 될 판이었다.



“이름이라도 지어줄걸.”



엊그제도 직접 우유를 먹였는데. 멜라는 반쯤 넋 나간 얼굴로 송아지를 굽어보았다. 송아지 옆으로는 수퇘지가, 그 건너편에는 염소가, 양옆으로는 암소가, 그 외에 온갖 가축들이 임시 거처지를 천천히 물들였다.



피비린내에 익숙해지자 멜라는 차분해졌다. 화가 나는데 무얼 해야 할지 몰랐다. 누구에게 화를 내지? 답을 찾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자 점점 조급해졌다. 멜라는 뭐라도 찾으려 사체들 사이를 휘둘러보기 시작했다. 때마침 그는 건초 사이로 반쯤 묻힌 양피지를 발견했다. 하얗게 뜬 양피지였다. 서류를 언제 흘린 거지? 이러면 계산에 차질이··· 이런 와중에도 계산 걱정이라니··· 한심한 놈.



멜라는 문득 자기가 쓰는 양피지와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글을 읽기 시작했다. 자유와 평등으로 만들어진··· 화합을 위한 작은 분열을··· 가축을 죽여 경고··· 누구? 멜라는 눈을 번뜩였다.



“도대체 무슨 일이여!”



오두막으로 루벤스와 두건 쓴 남자가 뛰어 들어왔다.



“아니··· 이게··· 언제 이런···”



멜라는 말 없이 루벤스에게 양피지를 건넸다. 그러고는 대뜸 두건 쓴 남자를 향해 몽둥이를 힘껏 휘둘렀다. 남자는 쥐새끼처럼 몽둥질을 피하며 뒤로 물러섰다. 멜라가 고성을 지르며 달려들자 루벤스가 그를 막아섰다.



“시발! 개새끼! 네 녀석 창자를 모두 뽑아다 씹어먹을 거여!”



“왜 그려! 왜 그러는 거여! 무슨 일이여!”



루벤스가 소리쳤다. 멜라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남자의 얼굴에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내가 처음부터 말했지! 저 개자식이 수상하다고 말이여!”



“갑자기 왜 이러는 거여?!”



“젠장! 그걸 읽어 보라고!”



“알았어! 읽어볼 테니께 가만히 있어봐! 제발!”



“씨발!”



멜라는 들끓는 분노를 겨우 억누르며 친구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대신 빙 돌아서 하나뿐인 입구를 막아섰다. 루벤스가 멜라를 곁눈질하며 양피지를 소리 내 읽기 시작했다.



“마녀 협회를 위해 앞선에서 힘쓰는 동지에게 전한다. 우리 마녀 협회는 역사적인 화합을 위한 작은 희생을 지속하기로 결정했다. 가축을 죽여 경고하고 이틀 내로 인간을 살해하라. 어린아이가 효과적이다. 얀, 두건 쓴 사내여. 편지를 받는 즉시 움직여라. 그대의 노력과 희생에 감사를 표하며. 협회에서 보냄···”



루벤스가 말을 마치기 무섭게 얀을 쳐다보았다. 얀은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편지를 빼앗아 읽었다. 멜라가 말했다.



“이제 됐나, 루벤스? 저 마녀가 모든 일의 원흉이야! 저 개자식을 잡아! 저 개자식이 벌인 일이라고! 저 개자식이 제발 죽여달라고 빌게 해야 해!”



얀이 양피지에서 눈을 떼더니 시선으로 허공을 헤집기 시작했다. 얀은 이를 꽉 깨물었다.



“젠장···”



얀은 루벤스와 멜라를 밀치고 밖으로 내달렸다.



“젠장! 거기 안 서?!”



“마녀가 도망가잖아! 너 때문이야, 루벤스! 개새끼! 얼른 잡아!”



---



알토는 땀방울이 신경 쓰였다. 벌레처럼 정수리에서 기어 나와 미간과 콧방울을 간지럽히는 땀방울을 얼른 훔쳐내고 싶었다. 물론 그럴 수 있었다면 애초에 땀방울 따위 신경 쓰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럴 수 없었기에 알토는 의지도 없는 벌레를 내버려둘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알토에게 그림은 소중했다.



알토는 그림을 향한 열정 하나로는 도무지 벌어먹을 수 없다는 현실에 좌절할 새도 없이 마을 경비병이 되었다. 여동생의 결혼자금이 필요했다. 순찰과 훈련, 개인 정비, 경계가 전부인 수레바퀴 같은 삶이었지만, 마을 경비병이 된 건 나름 행운이었다. 때마침 일어난 전쟁에 위험한 전방으로 끌려가지 않아도 되었다. 부모는 알토가 리미비토 마을에 머물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했고, 여동생은 자기 덕분에 목숨을 구했다며 생색냈다. 친오빠 덕분에 결혼한 건 잊은 모양이다.



행복한 일이다. 또래 남자들은 모두 징병 되었고, 돈이 없어 결혼하지 못하는 집안도 수두룩했다. 불평은 오만한 짓이었다. 알토는 오만해지고 싶지 않았다.



정말로 오만해지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알토는 토해내지 못한 열정이 가슴을 갉아 먹는 걸 부정할 수 없었다.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일상이 타오르는 열정에 부채질했다. 그런 알토에게 흙 그림은 열정을 토해낼 작은 창구였다.



입술까지 내려온 땀방울을 핥아먹고 나서야 알토는 흡족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나무줄기에 기대어 선 나체의 여성. 어깨 아래까지 내려오는 머리칼과 날 선 턱선, 허리부터 발끝까지 매끈하게 떨어지는 라인까지. 이번 그림은 아주 마음에 들었다. 아니, 인생 최고의 걸작이었다. 흙으로 빚어낸 여인에게 애정을 느낄 정도였다.



알토의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자신의 역작이 결국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사실에 걱정이 앞섰다. 그는 작은 바람에도 조바심을 느꼈다. 조금이라도 더 오래 지키고 싶었다. 마음 같아서는 영원히 지키고 싶었다.



그때 마을 밖에서 달음박질하는 소리가 들렸다. 알토는 그림이 망가지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며 사람을 멈춰 세우려 했다. 가능하면 그림을 자랑할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상대는 곧장 관문을 가로질렀고, 알토는 떠밀리고 말았다. 알토는 흩날리는 흙먼지에 기침을 쏟아내다가 비명을 내질렀다.



“씨발!”



크게 아파본 적은 없지만 알토는 피를 토하는 심정이었다. 그는 망가진 자기 작품을 앞에 두고 끔찍한 상실감과 싸워야 했다. 남자는 분노에 휩싸인 얼굴로 관문을 지나친 남자를 바라보았다. 저 멍청한 뒤통수를 부수어 버리고픈 충동이 일었다. 문지기 일 따위 내버리고 남자를 쫓질 못하는 자신이 한스럽기만 했다. 알토는 분노와 절망에 몸을 떨었다.



“알토! 뛰어!”



“예?”



난데없는 촌장의 외침에 알토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바보처럼 되물었다. 그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가서 잡으라고!”



“가라고요? 여길 안 지켜도 돼요? 잠깐! 밟지 마요!”



“멍청아! 뛰기나 해!”



방앗간지기 멜라가 버럭 소리치며 이미 망가진 그림을 짓밟았다. 촌장도 마찬가지였다. 알토는 분노의 욕설을 내뱉으며 달려 나갔다.



---



론드와 기뉴강 사이에 끼어있는 야누보 지역에서 리미비토는 가장 활기찬 마을이라고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목소릴 높이며 호객행위를 하는 상인들, 조금이라도 가격을 깎아보려는 용병들, 시끄러운 외지인이 너무 많아졌다며 불평하는 마을 주민들, 그러거나 말거나 뛰고 뒹굴며 옷을 더럽히기 바쁜 아이들, 그런 모두가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는 백작의 수하들. 리미비토의 저녁은 활기찼다.



각자의 이야기를 펼치는 사람들 속을 지나던 얀은 그들의 목소리가 전부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형체 없는 목소리가 조금씩, 그러나 분명하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얀은 자신이 다시 망가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다 얀은 넘어지고 말았다. 얀은 자신이 정신적으로 망가지다 못해 몸조차 가누질 못하는 건가 싶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누군가 뒤에서 얀을 붙잡았다.



“잡았다! 망할 마녀 새끼!”



마을 경비병이 소리치더니 얼굴을 내리쳤다. 얀은 저항할 수 없었다.



“내 그림을 망가뜨려? 씨발! 넌 좀 맞아야 해!”



얀이 경비병의 옷소매를 잡아끌자 경비병은 얀의 팔을 옭아매며 포박했다.



“알토! 그 녀석 잘 잡고 있어! 저주에 걸리지 않게 조심해!”



뒤늦게 쫓아온 방앗간지기가 소리쳤다.



“괜찮아요! 아무것도 못 하게-”



“야아아아아아아!”



어디선가 갑자기 뮬러가 소리 지르며 달려들었다. 뮬러는 몸으로 부딪쳐 경비병 알토를 쓰러뜨리더니 그와 함께 길바닥을 나뒹굴었다. 알토가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소란스러운 소리를 듣고 다른 경비병이 뒤늦게 달려왔다. 그러자 이번에는 크로머와 녹크가 그들 앞을 막아섰다.



“우리 이래도 돼요?”



녹크가 우는 소리를 내며 경비병과 방앗간지기를 붙잡았다.



“등신아! 생각이라는 걸 하지 마!”



크로머가 두 경비병의 팔에 매달린 채 소리쳤다.



말 그대로 난장판이었다. 빵을 파는 아낙네가 놀라서 가판대를 엎어버리고, 난리를 구경하던 남자가 가판대에 깔려 넘어지고, 떨어진 빵을 훔쳐 달아나는 고양이를 잡으려던 아낙네가 경비병과 부딪혀 넘어지고, 경비병은 아낙네의 숄더가 눈을 가리는 바람에 지나가는 행인을 밀쳐버리고, 행인은 경비병이 시비를 건 줄 알고 멱살을 잡고... 뒤늦게 온 경비병들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난데없이 벌어진 온갖 상황에 당황한 것은 얀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게 놀라웠지만 그는 동료들이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건지가 가장 놀라웠다. 게다가 얀은 동료들 중 한 사람을 보고 자기 눈을 의심하기까지 했다.



“콘베르소?”



“경비병에게 쫓기는 건 무슨 이유가 있는 거겠지.”



콘베르소가 부러진 코를 씰룩이며 얀을 일으켜 세웠다.



“별다른 이유도 없는 거면 내가 네 코뼈를 직접 부러뜨릴 줄 알아.”



콘베르소가 얀을 등 떠밀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경비병을 막아섰다. 얀은 불면증이 그려낸 환상치고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



저녁놀 바람이 달콤한 향을 담은 잔디와 잡초, 그리고 풀싹을 밀고 넘어뜨리며 다시 일으켜 세웠다. 야트막한 언덕을 따라 펼쳐진 목초지와 텅 빈 축사, 오래된 생울타리, 그리고 오렌지빛으로 물든 숲은 목가적인 감상에 젖게 만들기 충분했다. 하지만 얀에게 감상에 젖을 여유 따위 없었다.



얀은 지나치게 어두운 하늘과 요란한 바람 소리에 감각이 점점 무뎌졌다고 확신했다. 얀은 자신이 마녀로 몰린 것 이상으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휴식이 필요했다. 잘 수 없더라도 쉬어야 했다. 얀은 자신에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얀은 멈추지 않았다. 몸이 망가지더라도 알아야 할 것이 있었다.



축사 앞에 그녀가 있었다.



“도디!”



도디가 돌아보았다. 검은색 남자 더블릿을 입고 두건을 두른 그녀는 브라우버 기사단원을, 특히 얀을 닮아 있었다. 그녀는 놀란 것 같기도 하고 웃는 것 같기도 한 아리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안녕, 얀! 여긴 무슨 일이야?”



도디가 쾌활한 목소리로 물었다.



“널 찾았어.”



“나를?”



그녀는 웃고 있었다.



“날 찾으려 여기까지 왔니? 얀, 정말 고마워. 하지만 난 지금 무척 바빠. 할 일이 있거든.”



도디는 얀에게 양손을 펼쳤다. 한 손에는 양피지가, 다른 한 손에는 조개껍데기가 들려 있었다.



“난 네가 마법사라는 걸 알아.”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사라졌다.



“네가 무슨 일을 하려는지도 알아. 날 마녀로 몰고 사냥하겠지. 무얼 위해 이러지 모르지만, 이제 그만둬. 그리고 얘기 좀 해.”



도디가 고개를 내저었다.



“너 혼자 왔어?”



“너와 둘이서 얘길 나눠야 해.”



“그래?”



도디가 호로로 한숨을 내쉬더니 희미하게 웃었다.



“얀. 나는 이번 일을 안타깝게 생각해. 널 이렇게 보내야 해서 참 아쉬워. 네가 마음에 들었거든. 하지만 어쩔 수 없어. 해야 하는 일은 반드시 해야 해”



도디가 숨결이 느껴질 만큼 얀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얀의 주머니에 조개를 넣고 손에 양피지를 쥐여주었다.



“얀. 나를 봐. 내 눈을 봐. 잠깐이면 돼. 그래. 잘하고 있어.”



얀은 본능적으로 도디를 보면 안 된다는 걸 알았지만 이미 늦었다. 눈 주변이 차가워지더니 도디의 얼굴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너는 마녀야.’



도디의 목소리가 머리를 울렸다.



‘너는 네 예리한 칼로 가축들을 죽였어. 마녀 협회에서 지령받아 벌인 일이야. 넌 장난기로 가득했지만 네가 믿는 신념을 실현하겠다는 그럴싸한 말로 자신을 속였어. 넌 가축을 죽인 범인을 잡으려 애쓰는 촌장과 몇몇 사람들을 뒤에서 지켜보는 걸 즐겼어. 심지어 넌 다음 표적인 어린아이를 죽일 생각에 신났지. 하지만 안타깝게도 넌 너무 자만했고, 꼬리를 밟혔어. 현장에서 지령을 흘리고 만 거야. 넌 도망치려 했지만, 숙소에서 마을 경비병에게 붙잡히고 말아. 그리고 마을 광장에서 손가락질당하며 산채로 불타게 돼. 자. 그럼 넌 지금 뭘 해야 하지?’



얀은 입을 꾹 다물려 했지만 의지와 상관없이 입이 움직였다.



“숙소로··· 돌아가야 해···”



‘왜 숙소로 돌아가야 하지?’



“경비병에게··· 붙잡혀야···”



“그래.”



질긴 그물이 정신을 옭아매고 있었다. 얀은 그물에 뒤엉켜 의지를 몸으로 옮길 수 없었다. 의지를 잃은 육체에 보이지 않는 손이 얀의 다리를 억지로 움직이게 했다. 얀은 발을 질질 끌었다.



“자. 얼른 가야지? 너의 운명이 기다리고 있잖아.”



얀은 어떻게든 정신을 붙잡으려 속으로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이건 마법이야. 이건 환각을 일으키는 마법이야. 마법사가 날 속이고 있어. 하지만 정신을 붙잡으려 할수록 그물은 더욱 촘촘해졌고 더 강하게 쥐어짰다. 의지가 억지로 뜯기고 거짓이 빈자리를 채워갔다. 나는 마녀··· 집에 가야··· 얀은 울부짖고 싶었지만 입이 움직이질 않았다. 어금니를 잘근잘근 씹을 뿐이었다.



익숙한 냄새가 났다. 사과와 먼지와 흙냄새. 사과? 배신당한 눈빛? 리프와 보아레스? 잊을 수 없는 개자식들. 파란 머리. 까마귀 같은 눈. 비웃음 소리. 보고 싶은 친구. 움브라.



이건 속임수야. 얀은 의지를 쏟아부었다. 이건 내 눈을 어지럽게 만드는 속임수야. 야바위꾼이 날 속이고 있어.



의지가 거짓을 밀어내고 얀의 정신을 다시 채워갔다. 의지가 그물 구멍을 파고들며 억지로 벌리기 시작했다. 그물 사이가 점점 넓어지고 벌어졌다. 얀은 그물 구멍 너머로 팔을 뻗었다.



“어떻게···!”



도디가 비명을 질렀다. 얀은 눈을 떴다. 그의 손이 도디의 더블릿을 잡고 있었다. 얀은 더블릿을 힘겹게 끌어당겼다. 그의 입이 멋대로 움직였다.



“난··· 마법사가··· 아니었어···”



꽉 깨문 이빨 사이로 거친 숨이 떠돌았고, 팔이 파르르 떨렸다. 눈물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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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곰과 여우 (5) 23.02.05 22 1 21쪽
18 곰과 여우 (4) 22.12.10 20 1 18쪽
17 곰과 여우 (3) 22.11.26 22 1 20쪽
16 곰과 여우 (2) 22.11.12 19 1 15쪽
15 곰과 여우 (1) 22.10.26 21 1 18쪽
14 아이의 꿈 (6) 22.10.23 23 1 24쪽
13 아이의 꿈 (5) 22.10.22 21 1 16쪽
12 아이의 꿈 (4) 22.10.19 20 1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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