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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마노 기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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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문수
작품등록일 :
2022.08.17 19:05
최근연재일 :
2024.03.30 15:57
연재수 :
40 회
조회수 :
981
추천수 :
47
글자수 :
327,857

작성
22.08.17 21:52
조회
174
추천
6
글자
5쪽

Prologue

DUMMY

찬 바닥에 들러붙은 그림자는 짙고 무거웠다. 소년은 떨리는 손을 움켜쥐었다.



냉기가 뼛속까지 파고들고 거무죽죽한 어둠이 어깨를 짓눌렀지만 소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저 움켜쥔 손을 굽어보며 신에게 기도할 뿐이었다. ‘제발 한 번만 도와주세요’.



소년은 신의 이름을 몰랐다.



호수에 비친 달빛처럼 창백한 입술 아래로 여린 목에 핏줄이 도드라져 울긋불긋했다. 깍지 낀 손가락 사이로 비릿한 향이 흘러내렸다. 긁히고 찢어진 손바닥 위로 검붉은 방울이 선을 남기며 떨어졌다.



딱딱했다. 두꺼운 커튼도, 굳어버린 촛농도, 나무 썩는 냄새가 나는 탁자도. 문틈 사이로 들어온 빛은 바닥에 희미한 선만 긋고 사라졌다.



문이 열렸다. 쏟아지는 불빛이 소년을 덮치더니 그림자가 맑은 하늘처럼 푸른 소년의 머리칼을 검게 물들였다. 소년은 깜짝 놀라 숨을 훅 들이켰다. 그러나 고개를 들진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들지 못했다.



남자가 무어라 말했다. 소년은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무얼 요구하는지는 알았다. 소년은 양손을 펼치며 손끝에 집중했다. 소년의 뺨이 경련을 일으켰다. 소년은 이제껏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기운을 끌어내려 애쓰고 있었다. 실패할 것을 알고도 그랬다. 늘 그랬듯이.



늘 그랬듯이 신은 소년을 도와주지 않았다.



무거운 침묵이 소년을 짓눌렀다. 소년은 퉁퉁 부은 얼굴을 들었다. 일말의 기대조차 없는 눈동자가 소년을 굽어보고 있었다. 까만 눈동자. 까마귀의 것처럼 새까만 눈동자.



소년이 헐떡이며 남자의 다리를 붙잡으려 했다. 한 번만 더 기회를···! 소년은 자기 목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기는 했는지 의구심이 들었다. 남자는 발길을 돌렸다. 그림자가 멀어지고, 문이 닫혔다.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군.


쫓아낼 셈인가요?


평범한 인간이잖아.


하루도 버티지 못할 거예요.


상관없지. 재능이 없어.


하지만 파란 머리잖아요.


싹을 잘라내야 해.


가혹한 처사예요.


인간이 우리를 대하는 것만 할까?



좁은 문틈을 비집는 여러 목소리가 소년의 귀 끝에서 부서졌다. 분노한 목소리, 두려움이 담긴 목소리, 까마귀 우는 소리.



빛줄기가 스멀스멀 기어오른다. 소년은 빛줄기를 바라보다가 고갤 돌렸다. 커튼 한쪽이 둥둥 떠 있었다. 볕을 등진 아이들의 시선이 소년에게 박혔다. 아이들의 파란 머리카락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저 멀리, 지붕 너머 하늘보다도 더 푸르렀다.



아직도 저러고 있어.


저 얼굴, 도살장에서 본 적 있는데.


돼지들이 꼭 저런 표정이라고.


돼지는 맛이라도 있잖아?


뭐라고? 그만두라고?


어차피 쫓겨날 텐데 뭔 상관이야?



목소리가 멀어졌다. 소년의 축 처진 어깨를 따라 늘어진 얼굴이 시선을 바닥에 들러붙게 했다. 뺨이 따가웠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열린 문으로 소음이 밀려들었다. 소년은 쏟아지는 시선을 고스란히 느꼈다. 쪼아먹을 것을 고대하는 부리들. 셈을 헤아리는 새까만 눈동자.



누군가 소년을 끌어안았다.



“괜찮니, 얀?”



이그니스가 소년의 뺨을 어루만지며 눈을 마주했다. 얇지만 짙은 눈썹 아래로 붉은색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렸다. 소년은 고갤 끄덕였다.



“얀. 누나 말 잘 들어. 이제 마법 같은 건 잊어버리렴. 이제 애쓰지 않아도 돼. 알겠니? 대신에··· 강해지는 법을 배워야 해. 자신을 지킬 수 있도록. 혼자서··· 누구나 이런 순간이 온단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얀에게 조금 일찍 찾아왔을 뿐이야··· 할 수 있지, 아가?”



무슨 말인지도 모르면서 소년은 고갤 끄덕였다. 이그니스의 온기는 여운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방문 앞에서 남자가 이그니스에게 말했다.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군.”



“다나의 아들이에요.”



“버린 아들이지.”



“······말조심하세요, 야글로스.”



침묵과 어둠은 익숙했다. 조그마한 탁자와 딱딱하게 굳은 촛농, 건조한 먼지 냄새, 두꺼운 회색 커튼, 아주 멀리서 들려오는 까마귀 소리. 얀은 검은 천장을 올려다보며 얼굴 없는 어머니를 생각했다.



오랫동안, 아주 오랫동안.




-아르마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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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불꽃의 노래 (2) 23.04.23 16 1 18쪽
20 불꽃의 노래 (1) +1 23.03.25 19 1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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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곰과 여우 (4) 22.12.10 18 1 18쪽
17 곰과 여우 (3) 22.11.26 22 1 20쪽
16 곰과 여우 (2) 22.11.12 19 1 15쪽
15 곰과 여우 (1) 22.10.26 21 1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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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아이의 꿈 (5) 22.10.22 21 1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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