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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문수 님의 서재입니다.

아르마노 기사단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심문수
작품등록일 :
2022.08.17 19:05
최근연재일 :
2024.03.30 15:57
연재수 :
4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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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글자수 :
327,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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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10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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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쪽

곰과 여우 (4)

DUMMY

공작이나 자작이 국왕 폐하께 개인 영토를 하사받거나 재판권과 군사권, 조세권을 부여받아 국가적으로 인정받는 것과 달리, 남작은 인정받지 못하는 계급이었다. 영주보다는 우두머리라는 표현에 더 가까운, 사실상 명예 칭호나 다름없었다. 국왕 폐하나 영주에게 칭호와 봉급을 하사받는 기사보다도 낮은 취급을 받는 게 현실이었다.



그러나 에르빈은 작은 마을 페사로와 헤네타 곡창지대의 일부 지역을 소유한 데다가 (명예롭지 못하지만 아무튼) 기사단까지 보유한 남작이었다. 그의 재산과 영향력은 놀랍다 못해 위험해 보이기까지 했다. 불법 행위를 넘어 반역자로 찍힐 수도 있었다. 얀은 마을 페사로를 소유하고, 기사단을 이끌며, 구성원들에게 존경까지 받는 남작 에르빈이 어떤 사람인지 점점 궁금해지던 참이었다. 물론 남겨두고 온 맥주는 한없이 아쉬웠지만 말이다.



‘하얀 까마귀’ 1층에서 조용히 얘길 나누던 위더스푼 기사단장과 에탄 어르신을 지나쳐 곧장 2층으로 올랐다. 어린 수행원이 첫 번째 방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기다리라는 중후한 목소리가 들렸다. ‘부탁드린다’는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렸다. 문 앞에는 가죽 제복을 차려입은, 낯빛이 어두운 사내가 서 있었다. 사내가 방을 빠져나오고 얀은 수행원과 함께 방 안으로 들어섰다.



남작 에르빈은 약간 마른 체형에 키가 훤칠한, 수려한 용모의 미남이었다. 날카로운 인상을 풍기는 은발에 회청색 눈동자는 감정이 메마른 것처럼 보였지만, 그렇다고 잘생긴 얼굴을 가리지는 못했다. 간편한 갈색 가죽옷을 입은 남작의 행동 하나하나에 설명하기 힘든 고귀한 분위기가 풍겼다. 남작의 고귀한 모습에 얀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기다리게 했군. 벨로이, 10분 후에 에탄 어르신을 데려오너라.”



“10분··· 이요?”



벨로이라 불린 수행원이 눈을 끔벅였다.



“어르신께 10분 뒤에 오라고 전하면 돼.”



어린 수행원이 어색한 동작으로 인사를 올리며 물러섰다. 에르빈은 짧게 기침을 했다.



“애들과 한잔 마신 모양이군. 여기 앉게나.”



얀은 숨을 고르며 자리에 앉았다.



“다행이군. 여기서도 대접하면 좋겠지만 멜데가 입에 술을 대지 말라더군. 이해하게나.”



얀은 잠시 고민하다가 적당한 대답을 찾아냈다.



“말씀만으로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나저나 정말 놀랍군. 머리말일세.”



“흔치 않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고생 좀 했겠군.”



“오늘이 수많은 하루 중 특히 고생스러웠습니다.”



얀이 꿰맨 이마와 부은 얼굴로 숨김없이 말했다.



“그래. 그랬겠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아네. 오늘 일은 사과하마. 나쁜 뜻은 없었다는 걸 알아주었으면 하네.”



에르빈이 속을 알 수 없는 무표정한 얼굴로, 작은 반지를 낀 오른손을 보이며 미안하다는 뜻을 내비쳤다. 얀은 의아한 나머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어찌 남작님께서 사과하십니까? 일을 벌인 사람은 병사들이지 않습니까? 심지어 그들조차도 제게 사과하지 않았습니다. 군의관 멜데 씨를 제하면 말입니다.”



“단원들을 말하는 건가? 이번에는 카일 패닝이었지? 카일은 우리 기사단에서 가장 경험이 많고 정도 많네. 그를 미워하지 말게.”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그에게 잘못이 없다는 말씀입니까?”



“카일은 시킨 일을 했을 뿐이네. 그리고 내가 시킨 일이지. 그래서 사과하는 걸세.”



에르빈의 감정이 결여된 듯한 목소리에 얀은 뒤늦게 남작의 말을 이해하고 당황했다. 얀이 차분히 숨을 고르며 다음에 할 말을 찾았다.



“그렇다는 말은··· 제가 마녀인지 아닌지 확인한 게 사실이라는 겁니까?”



“자네는 잘 증명했네.”



얀은 다시 말문이 막혀 에르빈을 빤히 쳐다보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이제 확신이 생긴 겁니까? 다른 방법은 없었습니까? 말로 해결할 수도 있지 않았습니까? 마녀가 아니라는 걸 꼭 이런 식으로 확인할 필요는-”



“자네가 마녀가 아니라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네.”



에르빈이 얀의 말을 날카롭게 잘랐다. 화난 표정도 아니었고, 탐탁잖은 표정도 아니었다. 틀에 박힌 것처럼 어떠한 표정 변화도 없었다.



“에탄에게 들었네. 자네는 좋은 청년이라 하더군.”



“에탄 어르신이··· 그럼 어째서··· 절 시험한 이유가 뭐죠?”



얀은 가슴 속에서 꿈틀거리는 불꽃을 느꼈다. 꽉 깨문 어금니 사이로 뜨거운 숨이 쏟아졌다.



“단원들이 있잖은가?”



에르빈이 아주 당연한 얘길 하듯 말했다.



“단원들에게는 직접 알리면 되지 않습니까? 저기 저··· 파란 머리는 마녀 같은 게 아니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었다면 그랬을 걸세.”



에르빈이 가지런한 손톱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자네도 누군가에게 명령을 들어봤겠지. 부모나 형제, 그 비슷한 누군가에게 말일세. 자네는 명령을 듣고 본인 생각을 온전히 바꿀 수 있었나? 형제를 미워하지 말라는 명령에 정말로 미운 마음이 사라지냐는 걸세.”



“당연히··· 그러지 못합니다.”



얀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같은 이치일세. 자네 말처럼 난 애들에게 명령할 수 있네. ‘이 청년은 마녀가 아닌 너희와 같은 평범한 사람이다’라고. 하지만 의구심마저 없앨 수는 없어. 잠시나마 행위를 바꿀 순 있어도 생각마저 바꿀 순 없으니까. 의구심은 늘 그렇듯 이후에 행동으로 드러나 더 큰 일을 저지르고 말겠지. 듣고 있나, 젊은 친구?”



“듣고 있습니다.”



“브라우버 기사단은 내가 창설한 기사단일세. 단원을 뽑는 건 단장의 몫이지만, 구성원 대부분 괜찮은 애들이라는 걸 알지. 하지만 애석하게도 분별력이 있는 애들은 아니야. 그물 대신 바지로 물고기를 잡고, 춤추는 것보다 주먹질을 더 즐기는 애들이지. 게다가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애들이 대부분일세. 혹시 글 읽을 줄 아나?”



“네. 읽을 수 있습니다.”



“대단하군. 아무튼, 애들은 백번 설명해도 이해하지 못할 걸세. 직접 보여줘야만 하지. 내 말 이해하는가?”



얀은 남작의 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의 삶이 남작의 의견에 힘을 실어주었다. 누군가를 탓하기에는 탓할 대상이 너무나도 많았다.



“······이해합니다.”



얀이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자네는 분별력이 있는 사람 같네. 에탄 말대로.”



착잡한 마음에 얀은 눈가를 문지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모두 제 탓이군요. 파란 머리로 태어나지만 않았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세상을 탓해봐야 아무 소용없지만 그렇다고 자네에게 잘못이 있다는 뜻은 아니네. 그저 운이 나빴을 뿐이지. 어쩌다 이런 시대에 태어난 걸 말일세.”



남작이 숨을 가늘고 길게 내쉬었다. 얀은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이제 저를 부르신 이유를 알 수 있겠습니까?”



얀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자네에게 제안을 하나 하려 하네.”



남작이 물 한 모금을 마시고는 계속해서 말했다.



“툴레인 가문과 브라우버 기사단은 우리를 믿고 따르는 이들을 지키기 위해 전장으로 향하고 있네. 하지만 전투에 나서기엔 병력이 부족한 게 현실이지. 병력 하나하나가 소중한 시기야. 내가 말하는 병력은 성인 남성이 아니라 합당한 능력을 갖춘 이를 말하는 걸세. 그리고 자네는 소질이 있어 보이는군.”



“그러니까··· 병사가 되라는 말씀입니까?”



“정확히는 기사일세. 브라우버 기사단원. 보급품도 있고, 봉급도 나올 거야. 단장에게 얘기해 뒀네. 이제 자네 선택만 남았어.”



“원치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자네에게 불이익이 있는지 묻는 건가? 그런 건 없네. 다음을 기약하는 수밖에.”



에르빈은 순순히 인정하나 싶더니 나직이 말을 덧붙였다.



“브라우버 기사단이 큰 기사단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은 아닐세. 들어오고 싶다며 제 발로 찾아오는 애들도 있지. 아까 보았던 수행원이 그런 애 중 한 명일세. 라몬 벨로이라는 아이인데, 식칼을 들고 와서는 자기도 기사가 되고 싶다더군. 부모가 걱정할 테니 돌아가라고 해도 절대 그렇게는 못 한다지 뭔가. 그래서 수행원 일을 맡겼네. 칼을 쥐기에는 한참 부족한 아이거든.”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저는 전쟁에 참여하고 싶지 않습니다.”



“누가 전쟁에 참여하고 싶겠나. 나도 전쟁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아.”



에르빈이 팔짱을 끼며 말했다.



“살다 보면 원치 않는 일을 하기 마련이네. 그것도 끊임없이 말일세. 선택의 여지가 없을 때도 있지만,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현실과 타협하게 되는 순간도 있네. 내가 봤을 때 자네는 후자에 속하는 것 같네만.”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에탄의 말로는, 자네 목적지가 론드라고 하더군. 자네가 왜 론드로 가려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에탄이 좋게 말했으니 굳이 왈가왈부하지 않겠네. 내가 하고픈 말은 우리와 함께 가는 게 론드로 가는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는 걸세. 전쟁에 참여하는 것 말고는 론드로 갈 수 없으니까.”



“절대로··· 말입니까?”



“그렇게 묻는다면, 세상에 ‘절대’는 없다고 답하겠네. 그런데 그게 확률적으로 가능할진 모르겠군. 이곳 페사로 북쪽으로 온갖 군대와 각기 다른 지휘관들이 몰려올 걸세. 자네는 군대와 마주칠 때마다 자신을 증명해야 할 거야. 자네 머리카락 때문에 말일세. 어쩌면 증명할 기회조차 없을 수도 있네. 게다가 자네는 통행증도 없지 않은가?”



얀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에르빈이 계속해서 말했다.



“지난주에 좋은 인재를 놓쳤어. 이번만큼은 꼭 잡고 싶군. 내일까지 고민할 시간을 주겠네. 쉬면서 생각하게나. 즐거운 대화였네. 이만 들어가게.”



얀은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일어나 문 쪽으로 향했다. 얀이 문을 열기 전에 잠시 고민하다가 남작을 돌아보았다.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말해보게.”



얀은 남작의 차가운 눈빛을 마주하며 천천히 말했다.



“남작님께서는 제게 병사가 되라고 강요할 수 있습니다. 협박만큼 효과적인 방법도 없을 테니까요. 그런데 어째서 선택권을 주시는지 의아합니다.”



“그게 왜 궁금한지 모르겠군. 어찌 되었든 자네에게 좋은 일이지 않은가?”



“작은 마을의 촌장이나 경비원조차 자기 권위를 내세우며 원하는 걸 이루려 합니다. 모두가 그랬죠. 제게 선택권이 생길 때는 단 한 가지 경우밖에 없었습니다. 제 존재가 쓸모없어졌을 때 말입니다. 하지만 남작님께서는 제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시면서 선택권을 주시는군요. 남작님 같으신 분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조금 두렵기도 합니다. 이유를 알면 두려운 마음이 조금은 나아지지 않을까 싶어 무례하게 들릴지라도 물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남작이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가 입을 열었다.



“세상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이 있네. 그들은 모두 자신이 옳다고 믿는 일을 하며 살지.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일세.”



“단지 그것뿐입니까?”



“그 이상으로 무엇이 필요한지 잘 모르겠군.”



그때 누군가 방문을 두드리더니 말도 없이 열고 들어왔다. 에탄 어르신이었다.



“오! 젊은이도 여기 있었구먼. 몸은 어떤가? 괜찮은가?”



얀이 겪은 일을 다 아는 것처럼 에탄이 물었다.



“괜찮습니다.”



“다행이구먼. 많이 다친 것 같지도 않고 말일세.”



얀은 남작의 눈치를 살피며 고갤 끄덕였다. 남작이 자기를 앞에 두고 다른 얘길 하는 에탄에게 화낼 법했지만, 에르빈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없이 기다려주었다.



“수고 많았네, 젊은 친구. 카일 녀석이 봐준 건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잘했어. 그나저나 무슨 일로 불렀습니까, 에르빈 남작님?”



드디어 에탄이 남작을 바라보며 물었다.



“자네 집안에 대해서 할 얘기가 있네. 길진 않을 테니 얀은 잠시만 기다려주게.”



에르빈은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에탄. 자네는 중요한 인재일세. 자네만큼 경험이 많은 이는 흔치 않으니 말일세. 앞으로 우리 가문과 기사단을 이끄는 데에 자네의 도움을 많이 받을 예정이네.”



에르빈은 짧게 기침을 하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난 자네가 전쟁이 끝날 때까지 가족들을 데리고 남쪽으로 피신 가길 바라네. 곧 이곳도 위험해질 테니까. 난 자네를 잃고 싶지 않아.”



“그러면 마을은 누가 지킵니까?”



에탄이 나직이 물었다.



“마을이 망가지는 걸 두려워하지 말게. 마을은 죽지 않으니까.”



노인 에탄이 상대를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으로 남작을 빤히 쳐다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불쑥 말했다.



“제 아들이 부탁한 겁니까?”



이번에는 에르빈이 침묵했다. 특유의 무미건조한 눈빛 때문에 왠지 화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그렇다네.”



에르빈은 순순히 인정했다.



“아들 부탁 때문이라면 저는 괜찮습니다, 남작님. 산전수전 다 겪은 늙은이에게 전쟁이 무슨 대수겠습니까? 그리고 여긴 남작님의 영지이지 않습니까? 아무런 대책도 없이 마을이 망가진다면, 남작님의 명성에 영향을 줄 겁니다. 명성은 쌓기 어려우면서도 쉽게 사라지는 법입니다.”



“쉽게 사라질 명성은 애초에 쉽게 얻었기 때문일세.”



남작의 말투는 여전히 건조했지만, 고집과 기세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남작의 기침 속에서 짧은 침묵이 감돌았다. 이윽고 에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남작님. 만약 제 아들 때문에 그러시는 거라면 저는-”



“난 지금 명령하고 있는 걸세, 에탄.”



에르빈은 그렇게 말하고는 차가운 회청색 눈동자로 에탄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어떠한 몸짓도 없이. 그러나 얀은 남작의 얼굴에 아주 작은 변화를 알아챘다. 입꼬리 끝이 살짝 말려 올라간 것이다. 줄곧 무표정했던 얼굴에 처음으로 일어난 변화였다. 비록 찰나의 순간에 사라졌지만.



“그럼 어쩔 수 없군요.”



에탄이 아쉽다는 듯이 말했지만, 얀은 노인이 조금도 아쉬워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충분히 만족한 표정이었다. 남작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얀을 바라보았다.



“그럼 얀 트로엘, 하던 얘기나 계속하지. 무엇이 이해가 안 되는지 명확하게 말해보게. 내가 대답할 수 있는 한 대답해 주겠네.”



얀은 남작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괜찮습니다, 남작님. 그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정말 괜찮나?”



“네. 대답은 이미 들었습니다.”



얀은 거짓 없는 마음으로 말했다. 이제는 이해할 수 있었다. 남작이 어떻게 신뢰와 존경을 받는 남자가 되었는지를.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



잠 이룰 수 없는 밤이었다. 피곤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오랜 산행에 사냥까지 하고, 밤에는 예상치도 못한 많은 일을 겪어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지친 하루였다. 멜데의 코 고는 소리가 지독히도 괴롭혔기 때문은 아니었다. 어떤 환경 속에서도 숙면하는 법을 터득한 지는 이미 오래였다.



그런데도 얀이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이성과 감정이 망치와 모루처럼 충돌했기 때문이었다. 얀의 목표는 론드였다. 론드로 가겠다는 목표로 강을 건너고 산을 넘고 드넓은 곡창지대 헤네타를 거쳐온 얀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브라우버 기사단이라 불리는 군대에 들어가야 했다.



조국이나 국왕을 향한 충성심이 없다시피 한 얀에게 전쟁이 일어난 지금 브라우버 기사단에 들어가는 건 미친 짓이나 다름없었다. 비이성적인 데다가 감정적으로도 끌리지 않는 선택지였다. 기사단에 들어가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단 하나, 론드로 가기 위한 발판으로 이용하는 것뿐이었다.



문제는 얀 본인조차 론드로 가는 이유를 모른다는 것이었다.



강렬한 이끌림. 얀은 소용돌이처럼 휘몰아치는 감정이 어디서 오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자기 자신을 이토록 모르다니. 이성적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스스로 되뇌었지만 얀은 출처조차 모르는 감정의 강렬한 이끌림을 이겨낼 자신이 없었다.



밤새만이 우는 깊은 밤. 형체를 알 수 없는 감정의 정체를 알아내려 애쓰지만 않았더라도 잠깐이나마 눈을 붙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날 밤은 얀에게 잠깐의 졸음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고요하던 밤하늘에 갑자기 끔찍한 굉음이 폭발하더니 외마디 비명이 울려 퍼졌다. 뒤이어 북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뭐야 이거?”



간이침대에서 대(大)자로 뻗어 자던 멜데가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얀도 칼집을 움켜쥐며 일어났다. 상황을 이해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기습이야! 이 망할 굼벵이들아! 얼른 움직여!”



카일이 목청이 찢어지도록 소리치고 있었다.



“젠장, 이게 무슨 일이람.”



멜데가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



“벌써 시작이야? 걱정하지 마, 얀. 가만히 있어도 돼. 자네에게 의무 같은 건 없으니까. 여기서 기다리게. 내가 상황을 보고 올 테니까··· 얀?”



얀은 이미 부츠를 고쳐 신고 있었다. 멜데가 얼른 말을 이었다.



“이봐··· 도대체 무슨··· 끼어들 생각인 건 아니지? 그냥 도망가려는 거지? 그렇지?”



얀은 나갈 채비를 마치고, 마지막으로 허리춤에 칼을 고정했다. 불합리함을 마주한 멜데의 눈빛이 한껏 일그러졌다.



“미쳤구나···. 그냥 여기 있어, 얀. 뭣 하러 나가려는 거야?”



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전히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저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리듯 밖으로 나설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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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얀의 안식처 (3) 23.12.25 7 0 17쪽
33 얀의 안식처 (2) 23.12.03 8 0 22쪽
32 얀의 안식처 (1) 23.11.05 9 1 18쪽
31 불꽃의 노래 (12) 23.10.21 9 1 27쪽
30 불꽃의 노래 (11) 23.10.07 11 1 25쪽
29 불꽃의 노래 (10) 23.09.17 15 1 20쪽
28 불꽃의 노래 (9) 23.08.28 14 1 18쪽
27 불꽃의 노래 (8) 23.07.28 15 1 16쪽
26 불꽃의 노래 (7) 23.07.17 11 1 20쪽
25 불꽃의 노래 (6) 23.07.08 11 1 16쪽
24 불꽃의 노래 (5) 23.06.04 12 1 19쪽
23 불꽃의 노래 (4) 23.05.14 13 1 17쪽
22 불꽃의 노래 (3) 23.05.06 10 1 19쪽
21 불꽃의 노래 (2) 23.04.23 16 1 18쪽
20 불꽃의 노래 (1) +1 23.03.25 19 1 17쪽
19 곰과 여우 (5) 23.02.05 21 1 21쪽
» 곰과 여우 (4) 22.12.10 19 1 18쪽
17 곰과 여우 (3) 22.11.26 22 1 20쪽
16 곰과 여우 (2) 22.11.12 19 1 15쪽
15 곰과 여우 (1) 22.10.26 21 1 18쪽
14 아이의 꿈 (6) 22.10.23 21 1 20쪽
13 아이의 꿈 (5) 22.10.22 21 1 16쪽
12 아이의 꿈 (4) 22.10.19 19 1 15쪽
11 아이의 꿈 (3) 22.10.16 23 1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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