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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29일생 님의 서재입니다.

잊혀진 자의 이야기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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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29일생
작품등록일 :
2023.01.06 17:04
최근연재일 :
2024.01.05 08:00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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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515,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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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25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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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6화 누군가의 의지 - 10

DUMMY

경기는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나버렸다. 관중석에서 들려오던 환호성도 단숨에 침묵으로 뒤바꿔놓은 한 방이었다.


“말에서 떨어진 기사 상태부터! 서둘러!”


대기하고 있던 성직자들이 쏜살같이 클레이건에게 달려 나갔다. 서지터를 첫 라운드에서 끝내겠다고 호언장담했던 클레이건이 되려 서지터의 랜스에 정확하게 머리에 적중되어 그대로 자신이 달려오던 방향으로 붕 날아올라 흙바닥에 내리꽂혔다.


말에서 떨어진 순간 경기는 바로 끝이 나 버린다. 마상창시합은 5점을 따면 이기는 방식으로 랜스가 부서지며 상대의 몸통을 가격하면 1점, 머리를 가격하면 2점, 그리고 말에서 떨어지면 바로 패배로 이어지는 규칙이다.


클레이건은 지금껏 마상창시합 도중 말 위에서 떨어져 본 적이 없는 실력자 중의 실력자였다. 그렇게 자신이 무시하고 조롱했던 도노프리오 가문의 사람에게 처음으로 말에서 떨어지는 치욕을 맛보았을 뿐 아니라 아예 바닥에 내리꽂혀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지금 이 경기를 지켜본 관중 대다수는 입이 벌어진 채 얼어버렸다. 얼어버린 관중 중에서는 로스 단장과 트리스탄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워낙에 윈드테일의 속도가 빨라 못 본 사람이 대부분이었지만 둘은 서지터가 클레이건을 공격하는 모습을 똑똑히 지켜보았다.


로스 단장이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트리스탄에게 말을 걸었다.


“자네 혹시 봤나?”


“네에······, 봤습니다.”


“기대하긴 했지만 정말 기가 차는군. 마지막에 말 위에서 엉덩이를 들고 최대한 상체를 앞으로 뻗었어. 거기다 상대 공격까지 고려해 왼쪽 어깨를 뒤로 빼버리기까지······.”


“하하, 우연이 아니고 진짜 저 친구 실력이라면 이거 결승에서 만나도 제가 이길 방법은 없겠군요.”


“그만큼 말 위에서라면 누구보다 강하다는 뜻인가. 엉덩이까지 들었음에도 전혀 흔들림 없이 머리를 정확히 가격했어. 내가 저런 기술을 쓸 수 있다 해도 안전하게 머리보단 몸통을 노렸을 거야. 말의 속도까지 감안하면 그걸로도 충분히 낙마시킬 수 있으니까. 하지만 보란 듯이 머리를 노려 첫 라운드에 바로 승부를 결정지었군.”


트리스탄은 조용히 로스 단장의 감상평을 들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단 한 번으로 실력 검증은 차고 넘칠 만큼 충분했다. 그 와중에도 그는 미소를 지으며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진심으로 박수받아 마땅한 실력이라 여겨졌다.


- 짝짝짝.


트리스탄의 박수를 시작으로 두려울 정도의 실력을 보여준 서지터의 실력에 여기저기서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사실 방금 로스 단장이 말한 기술은 서지터 자신만의 것으로 만든 지 오래되지 않은 기술이었다.


용병단 시절 수도 없이 연습하긴 했어도 말 위에서 엉덩이를 들고 랜스를 정확히 컨트롤하기 쉽지 않았다. 유일하게 안정적으로 이 기술을 쓸 수 있는 사람은 검은 늑대 부단장인 아트록스뿐. 그랬기에 압도적인 점수 차이로 항상 검은 늑대들끼리 치르는 마상창시합에서 1위를 질주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서지터는 몇 주 동안 포기하지 않고 아트록스를 들들 볶은 덕에 이 기술을 배울 수 있었고, 직접 아트록스의 지도 아래 자세 교정까지 거치며 최고의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그 성과가 바로 늑대들 사이에서 마상창시합 3위를 할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전장에서 죽을 고비를 수도 없이 넘기며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했는지 저걸로 알 수 있군. 난생처음 보는 기술이야.”


“마음가짐부터 이 대회에 참가하는 자들과 다르겠군요. 억지로 등 떠밀려 나오긴 했지만, 오락거리로 여기는 저 같은 사람은 발끝에도 미치지 못할 겁니다. 저 자신이 부끄러워집니다.”


서지터의 모습을 보며 자기반성의 시간을 갖는 트리스탄이었다.


그리고 로스 단장과는 다르게 서지터의 기술을 난생처음으로 목격하지 않은 자가 있었다. 누구보다 저 고난도의 기술을 쓰고 싶었던 한 사람. 지금은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말 위에도 오르지 못하는 노리스였다. 그는 서지터의 시합을 지켜보며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어흑, 어흐흑. 할아버님, 하늘에서 보고 계십니까? 그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하던 할아버님의 기술을 도노프리오 가문의 피를 이어받은 저 아이가 해내는 모습을 말입니다. 허으윽.”


밀려오는 감동에 지팡이를 짚고 있던 다리마저 풀리자 한스가 노리스를 부축해주었다.


“하하, 제 친구 실력 보셨죠?”


“네 친구 아니야. 내 손자야. 흐어억.”


옆에서 노리스의 말을 잠자코 듣던 레일라가 옆에 있던 파시비엔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야, 쟤가 도노프리오 가문의 피를 이어받았대. 이 정도면 진짜 중증 아니니? 본 지 며칠 안 되는 놈인데 내 손자래. 나 참, 어이가 없어서.”


“그냥 놔두십쇼. 치매에 걸리신 분 아닙니까. 치매는 신성 마법으로도 못 고칩니다.”


한편 서지터가 말 위에서 랜스를 들고 싸우는 모습을 처음 지켜본 아리엘도 가뜩이나 커다란 눈이 더 동그래진 채로 파시비엔의 옷자락을 잡아당겨 질문을 던졌다.


“파시비엔, 파시비엔. 할아버지가 말한 기술이란 게 뭐야?”


“그러게 말입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사실 저도 전장에서 서지······, 아니 체이스님이 싸우시는 걸 제대로 본 적이 거의 없습니다. 저보단 한스님이나 레일라님에게 물어보시지 말입니다.”


그녀의 질문을 둘에게 떠넘기자 두 사람 역시 어깨를 으쓱하며 잘 모른다는 대답을 해왔다. 이쪽에 관심이 많은 로스 단장이나 트리스탄처럼 전문가적이지 못했다.


“나도 실제로는 처음 보네. 노리스씨의 할아버님께서 출전한 마상창시합의 우승 트로피를 모조리 가져갔을 당시, 남들과는 다른 화려한 기술을 썼다는 이야기는 얼핏 들어본 적이 있지. 아마도 방금 말 위에서 엉덩이를 떼고 일어난 걸 말씀하시는 것 같아. 그 와중에 상대의 공격을 피하고자 상체도 자유자재로 움직였고. 역시 피는 못 속이는가 보군.”


일행의 옆에서 팔짱을 낀 채 경기를 관람하고 있던 한 중년의 기사가 대신 설명 해주었다.


“그게 엄청 대단한 기술입니까? 아! 그런데 누구십니까?”


“하하, 미안하네. 옆에 있다가 우연히 엿들었군. 나는 피에든 가문의 발리헤드라는 기사일세. 대진표를 보니 서로 이기다 보면 4강 경기에서 나와 맞붙을 걸세. 오래간만에 피가 끓어오르는 기분이야. 그냥 쉬려다가 왔는데 관람하러 오길 잘했어. 하하하.”


자신을 소개한 발리헤드란 기사가 호탕하게 웃었다. 여타 다른 기사들처럼 도노프리오 가문을 조롱하거나 놀리려는 의도는 전혀 없어 보였다. 이곳 대기석에 있는 참가자 중에 유일하게 도노프리오 가문을 무시하지 않는 사람이 바로 발리헤드란 중년 기사였다.


“노리스님, 드디어 잃어버린 가문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겠군요. 손자분의 경기 정말 잘 보았습니다.”


“어흐윽. 발리헤드, 이 사람아. 내 손자. 내 손자가 해냈다고.”


“기쁘시겠습니다.”


그는 진심으로 노리스를 축하해주고 있었다. 다행히 옆에서 다 듣지는 못했는지 서지터가 친손자가 아니라는 사실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남들과 차원이 다른 실력을 선보이며 비웃음과 조롱을 단숨에 감탄사로 바꿔놓은 서지터는 반대편 클레이건의 출발 지점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말머리를 돌려 성직자들이 치료하는 클레이건쪽으로 향했다.


“저기, 그 사람 상태 어때요?”


분주하게 치료 주문을 쓰는 성직자들에게 말을 걸자 그중 한 성직자가 심각한 표정으로 클레이건의 상태를 설명해주었다.


“살살 좀 하지 그랬나. 거품까지 물고 기절해버렸어. 거기다 목뼈까지 부러져버린 것 같아. 바닥에 떨어지면서 다른 곳도 꽤 다친 것 같고.”


“죽진 않는 거죠?”


“급하게 치료 주문을 썼으니 목숨에는 지장이 없을 걸세.”


“다행이네요. 혹시 깨어나면 꼭 전해주세요. 딱히 얼굴 마주하고 얘기하고 싶은 사람은 아니라서······.”


“뭔가?”


“다시는 말에 오를 생각 꿈에도 하지 말라고. 뭐 충격받고 쫄아서 알아서 말에 오르지 못할 수도 있겠네. 아! 그리고 상대를 존중하는 법부터 배우라고 전해주세요. 그래야 다른 사람들도 조금이나마 존중이란 걸 해준다고 말이에요.”


그 말을 끝으로 서지터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카데스가 서 있는 출발 지점으로 향했다.


“이렇게 잘할 거면서 왜 안 한다고 버틴 거야?”


“저게 자꾸 사람 속을 긁잖아. 이거나 받아.”


- 툭.


서지터는 산산조각이 난 랜스를 카데스에게 던져주었다.


“야, 빨리 천막으로 가서 투구나 벗겨줘라. 간만에 투구를 쓴데다가 작아서 머리통이 터질 거 같아.”


“그래도 여기저기서 박수 소리가 들리는데 세리머니 정도는 해줘도 괜찮잖아.”


“두 시간 전까지만 해도 야유 퍼붓던 인간들이거든? 결승도 아닌데 세리머니는 무슨?”


“그래, 가자. 그럼.”


카데스는 왼손에 부서진 랜스를, 오른손에 윈드테일의 고삐를 잡고 천막으로 걸음을 옮겼다. 카데스가 나름 시종 역할을 충실히 하는 덕분에 서지터는 윈드테일 위에서 편하게 천막까지 갈 수 있었다.


두 사람이 경기를 끝마치고 천막으로 돌아가자 응원하던 친구들과 노리스 역시 서지터를 보기 위해 서둘러 천막에 도착했지만, 안에서는 서지터의 기괴한 비명이 들려왔다.


“아아아악! 죽고 싶냐? 살살 빼라고. 크아아악! 야! 귀! 귀! 귀 걸렸어. 찢어질 거 같다고!”


“그러니까 움직이지 마.”


멋진 경기를 보여준 보답으로 칭찬하기 위해 친구들이 천막으로 들어서자 추한 꼴로 서지터는 천막의 중앙 기둥을 부여잡은 채 투구를 벗으려 기를 쓰고 있었다. 혼자서는 도저히 벗지 못할 정도였기에 카데스가 발로 허리를 숙인 서지터의 어깨까지 발로 밟고 밀어내며 낑낑거리는 중이다.


그 모습이 한심해 보였는지 레일라가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쯧쯧쯧, 너네 뭐하니? 어디 내놔도 실력으로는 안 밀리는 것들이 그깟 투구 하나 못 벗는 꼴이라니.”


“네가 써봐! 이게 그리 쉽게 벗겨지나! 아아아악! 탐모! 탐모! 머리카락 꼈어!”


“나는 머리가 작아서 너처럼 고생할 일이 없는데? 머리 큰 너 자신을 탓해.”


“내, 내가! 미친놈아! 무식하게 힘으로 잡아당기지 말라고! 잠깐만 좀! 머리가 큰 게 아니고 할아버지 머리가 작은 거거든? 머리가 큰 건 얘지. 아아아아악!”


남들보다 머리가 다분히 큰 카데스가 자신의 콤플렉스를 건드린 대가로 복수를 하기 시작했다.


- 절뚝. 절뚝.


지팡이를 짚은 노리스가 그렁그렁한 눈으로 서지터에게 다가가 투구를 잡아 오른쪽으로 살살 돌리더니 손쉽게 쏙 머리와 투구를 분리해놓았다.


“예전에 대회에서 투구가 찌그러진 적이 있어서 수리하긴 했는데 미세하게 찌그러진 부분이 남아있단다. 아이고! 내 손자 얼굴 좀 보자.”


노리스가 거친 손으로 시뻘겋게 달아올라 땀을 흘리는 서지터의 볼을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그동안 고생 많았지? 언제 그렇게 네 증조부님의 기술까지 연마하고. 흐흑. 기특하다. 기특해.”


“아, 진짜 나 할아버지 손자 아니라······! 으읍!”


치매에 걸려 제정신이 아니지만, 지금만큼은 그토록 원하던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게끔 카데스가 서지터의 입을 막아버렸다.


“으읍! 으으읍!”


“그러게요. 할아버님이 손자 하나는 정말 잘 두셨네요.”


가뜩이나 투구를 벗느라 벌게진 얼굴이 카데스가 입과 코까지 막아버리는 통에 홍당무가 되어 조만간 질식사에 처할 위기였다. 화려한 실력으로 경기장을 압도한 서지터였지만 지금은 그저 카데스에게 죽임을 당할 안타까운 운명일 뿐이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많은 피드백과 충고, 오타 지적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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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 6화 누군가의 의지 - 33 23.08.25 33 1 14쪽
161 6화 누군가의 의지 - 32 23.08.24 28 1 12쪽
160 6화 누군가의 의지 - 31 23.08.23 29 1 16쪽
159 6화 누군가의 의지 - 30 23.08.22 35 1 14쪽
158 6화 누군가의 의지 - 29 23.08.21 27 1 14쪽
157 6화 누군가의 의지 - 28 23.08.18 32 1 17쪽
156 6화 누군가의 의지 - 27 23.08.17 33 1 15쪽
155 6화 누군가의 의지 - 26 23.08.16 27 1 14쪽
154 6화 누군가의 의지 - 25 23.08.15 25 1 13쪽
153 6화 누군가의 의지 - 24 23.08.14 29 1 12쪽
152 6화 누군가의 의지 - 23 23.08.11 34 1 16쪽
151 6화 누군가의 의지 - 22 23.08.10 30 1 16쪽
150 6화 누군가의 의지 - 21 23.08.09 27 1 12쪽
149 6화 누군가의 의지 - 20 23.08.08 31 1 16쪽
148 6화 누군가의 의지 - 19 23.08.07 28 1 12쪽
147 6화 누군가의 의지 - 18 23.08.04 32 1 12쪽
146 6화 누군가의 의지 - 17 23.08.03 31 2 14쪽
145 6화 누군가의 의지 - 16 23.08.02 28 1 17쪽
144 6화 누군가의 의지 - 15 23.08.01 29 2 17쪽
143 6화 누군가의 의지 - 14 23.07.31 36 2 12쪽
142 6화 누군가의 의지 - 13 23.07.28 29 1 12쪽
141 6화 누군가의 의지 - 12 23.07.27 26 1 12쪽
140 6화 누군가의 의지 - 11 23.07.26 29 1 13쪽
» 6화 누군가의 의지 - 10 23.07.25 25 1 12쪽
138 6화 누군가의 의지 - 9 23.07.24 26 2 12쪽
137 6화 누군가의 의지 - 8 23.07.21 29 2 13쪽
136 6화 누군가의 의지 - 7 23.07.20 28 2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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