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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29일생 님의 서재입니다.

잊혀진 자의 이야기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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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29일생
작품등록일 :
2023.01.06 17:04
최근연재일 :
2024.01.05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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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5,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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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28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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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누군가의 의지 - 13

DUMMY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는 골목 구석에서 서지터는 투구와 갑옷을 모조리 벗어버렸다. 일단 위기는 모면했으니 한숨 돌릴 시간이 필요했다.


“후아, 덥다. 살다 살다 이런 위기의 순간은 또 처음이네. 한스 자식한테 빨리 재료 구해오라 해. 이거 불안해서 더 못 해 먹겠다.”


“의외네. 강심장인 네가 무서워하는 사람도 있고.”


“무서운 걸 떠나서 경기장 안에서 내 정체가 들키기라도 하면 임무는 둘째치고 진짜 엉망진창 개판 된다니까.”


“노리스 영감님이 기다리실 텐데 천막으로 안 돌아가도 돼?”


“몰라. 하도 긴장했더니 지금은 배고파 돌아가시기 직전이야. 갑옷은 윈드테일에 실어서 보내면 되니까 일단 밥부터 먹자.”


서지터는 벗어둔 갑옷을 윈드테일의 등에 올리고는 다정하게 말을 걸었다.


“너 우리가 지내던 천막 알지? 먼저 돌아가 있어. 오늘 정말 잘했다. 내가 다녀와서 너 목욕도 시키고 맛있는 거 챙겨 줄게.”


- 푸르릉.


“그래, 그래. 갑옷이랑 투구 안 떨어지게 달리지 말고 천천히 돌아가.”


윈드테일의 튼실한 엉덩이를 토닥거리며 서지터는 미소를 지었다. 자신은 랜스를 들고 상대를 맞추기만 했을 뿐, 오늘 승리의 모든 공은 윈드테일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주인의 말을 제대로 알아들었는지 윈드테일은 말발굽을 따각거리며 천막 쪽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진짜 너랑 윈드테일이랑 의사소통이 되는 거 같네.”


“같은 게 아니라 진짜 의사소통이 되는 거야. 그냥 저 녀석 투레질이랑 눈망울만 봐도 무슨 생각하는지 다 아니까. 쟤도 내 말을 다 알아들을 정도로 똑똑하고. 그나저나 이것들은 아직도 재료 구하는 중인 거냐?”


“빨리도 물어보네. 시내 곳곳을 다 뒤져도 못 구했나 봐. 오늘은 아예 들판으로 나갔어. 조금 일찍 핀 흰민들레꽃이 있을 수도 있다고.”


여전히 흰민들레꽃을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는 네 사람이었다. 오늘 서지터의 32강 경기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보다도 중요한 게 얼굴을 바꿔줄 재료가 급선무였다.


“카렌에 이어서 국왕 폐하까지 관심을 줘서 진짜 그거 없으면 큰일 나는 것만 알아둬라. 대충 둘러대긴 했는데 우승하고 난 뒤에도 투구 안 벗고 버틸 용기는 없다. 반항했다간 우승 트로피고 뭐고 바로 교수형 당할걸?”


“당연히 앞으로 남은 경기에서 너한테 관심이 집중되겠지. 조용히 우승했으면 좋았을 텐데. 너는 가는 곳마다 이목을 안 끌면 안 되나 봐.”


“맞죠? 카데스님? 하하하! 혹시나 했는데 정말 주인님 말씀이 맞았군요.”


카데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골목 어귀에서 건장한 사내 하나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카데스를 부른 자는 다름 아닌 겨울 동안 함께 지냈던 할슈타인 공작의 수하 라니안이었다. 하필 이 상황에서 서지터가 아닌 자신이 이목을 끌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카데스는 라니안의 목소리를 알아듣고는 곧장 서지터를 등 뒤로 숨기고 어색한 웃음으로 그를 맞았다.


“라니안님, 이런 곳에서 만나는군요. 수도로 올라오신 겁니까?”


“네, 주인님과 돌아온 지 열흘 정도 됩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만날 줄은 몰랐습니다. 혹시 뒤에 계신 분이 이번 마상창시합에서 대단한 활약 중인 도노프리오 가문의 자제분?”


이미 라니안은 경기장 안에서 카데스가 서지터의 시종 역할을 하는 걸 목격했다. 왜 카데스가 저곳에 있는지 반신반의했지만 할슈타인 공작은 한눈에 카데스임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둘이 서둘러 경기장을 빠져나갈 때 그의 지시로 뒤를 밟아 후미진 골목까지 따라온 것이었다.


라니안을 믿고 있긴 해도 갑작스레 서지터의 정체가 발각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카데스는 어설프게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무, 무슨 말씀이신지? 그런 사람이 왜 여기에······.”


“경기장에서 봤는데 아닙니까? 주인님께서 어찌 된 영문인지 알아보라 지시를 하셔서 이렇게 따라왔습니다만.”


“그러게요. 어찌 된 영문일까요?”


당황한 카데스가 횡설수설하자 등 뒤에 몸을 숨기고 있던 서지터가 능숙하게 거짓말을 했다.


“저기요?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방금 경기를 마친 도노프리오 가문의 체이스 맞습니다. 죄송한데 절 봤다고 딴 데 가서 소문내지 마셨으면 합니다. 사실 햇빛 알레르기가 있어서 얼굴을 막 내놓고 다니면 안 되거든요. 그리고 카데스와는 예전부터 친구 사이라서 부득이하게 제 일을 봐주고 있는 겁니다.”


“아아! 그런 사연이 있으셨군요. 정말 좋은 친구분을 두셨습니다. 보통은 시종이 그런 일을 도맡아 하는데 말이죠. 카데스님이 귀족의 신분임에도 이렇게 나서서 도와드리다니 진정한 우정입니다.”


“물론이죠. 정말 좋은 친구입니다. 딱히 시종을 둘 형편도 안 되고 제 할아버지는 몸이 불편하셔서 카데스가 이렇게 도와주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숙소로 돌아가지 않고 왜 밖으로 나오셨는지?”


“카데스랑 함께 자축하러 나왔죠. 오늘 경기 이겼잖아요. 우리 할아버지가 해주는 음식은 도무지 입에 맞질 않아서요.”


“그렇다면 제가 한턱 내겠습니다.”


“아뇨! 아뇨! 안 그러셔도 되는데!”


“사양하지 마십시오. 카데스님께 신세 진 것도 있고 오늘 멋진 경기를 보여주신 것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하십시오. 하하하!”


난감한 상황이었다. 여기서 극구 라니안의 호의를 거절하는 것도 모양새가 이상하게 보일 것이 뻔했다. 물론 어느 정도 눈치가 있는 사람이라면 지금까지의 상황만 보아도 아주 이상하게 보일 법했다. 둘은 서로 눈으로 대화를 나누다 어쩔 수 없이 라니안에 끌려가기로 했다.


#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임에도 서지터와 카데스, 두 사람은 주린 배를 채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팔라쥬르 국왕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긴장이 풀린 서지터는 허겁지겁 고기를 뜯었고, 원체 음식 앞에서만큼은 다른 인격이 되는 카데스 앞에는 빈 그릇이 늘어나고 있었다.


“하하! 카데스님 식성은 여전하시군요. 그리고 체이스님 역시 만만치 않은 식성이십니다.”


입안 가득한 음식물을 단번에 삼킨 서지터는 목이 메는지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는 감사의 표시를 했다.


“후아아, 숨 막혀 죽을 뻔. 음식 대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우리 카데스랑은 어떻게 아시는 사이신지?”


“카데스님의 고향인 라인스노우에서 만났습니다. 그곳의 영주님을 보좌하는 라니안이라는 기사입니다. 다시 한번 만나서 반갑습니다.”


누군지도 모른 채 따라와 베푸는 호의를 감사히 받아 부지런히 식사하긴 했지만, 라인스노우의 영주라는 말이 라니안의 입에서 나오자 서지터는 잠시 카데스를 쳐다보았다.


“어어, 저번에 얘기했었지? 겨울 동안 내 대련 상대가 되어주신 분이야. 실력도 출중하셔서 많은 도움을 받았어.”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도움을 받았습니다. 대단한 용병단 출신의 카데스님을 만나 정말 큰 자극이 되었답니다. 혹시 그때 종종 말씀하시던 더 뛰어난 실력의 친구분이 체이스님이 맞나요?”


라니안의 말에 서지터는 잠시 당황했다. 딱히 잘 알지도 않고 더군다나 오랜 시간 알고 지낸 사이도 아닌 사람에게 개인적인 이야기를 늘어놓은 친구가 낯설었다. 사실 카데스는 고향에 머물면서 그 어느 때보다 마음이 편안하고 즐거웠다. 평소 차갑고 말수가 적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카데스는 그제야 지난겨울 동안 너무 쓸데없는 말을 많이 한 것을 깨닫고 서둘러 서지터에게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 그게 그냥 내 실력으로는 도저히 쫓아갈 수 없는 친구가 있다고 말한 게 전부야.”


“맞습니다. 두 번의 마상창시합을 보며 느꼈습니다. 그쪽은 전문가 수준까지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 보는 눈이 있지요. 참가자 그 누구보다 몇 수 위의 실력이신 걸 보니 검술 또한 보통 실력이 아닐 것 같군요. 언제 시간이 되면 한 수 배워보고 싶습니다.”


“정 원하신다면 대련 정도는 해드릴 수 있는데 지금은 상황이 여의치 않네요.”


“물론입니다. 지금은 마상창시합에 집중하셔야지요. 나중에 기회가 되면 부탁드립니다.”


어느 정도 배를 채운 서지터는 눈치 빠르게 라니안의 의도를 꿰뚫어 보았다. 단순히 대련을 부탁하기 위해 뒤를 쫓아오기엔 무리가 있어 보였으니 말이다. 어떤 식으로 말을 할까 고민하던 서지터는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내 라니안을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그런데 친분이 있는 카데스가 예상하지 못한 장소에서 엉뚱한 일을 하고 있으니 이상하셨나 봐요. 거기다 같이 있는 제가 국왕 폐하 앞에까지 불려가니 영주님께서 궁금해하셨겠네요.”


줄곧 예의 바르고 차분하게 말을 하던 라니안의 얼굴이 벌게져 말을 더듬었다.


“어, 그, 그게. 그게 말입니다.”


“의도야 어떻든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사주시니 감사하죠. 히히.”


상대를 들었다 놨다 하는 서지터다운 발언이었다. 라니안의 반응을 보고 반가운 마음에 따라오진 않았을 거라는 추측은 정확했다. 정신이 딴 데 팔려있긴 했어도 서지터는 카데스와 리벨드 부인의 대화를 흘려듣지 않았다. 라니안이 모시는 할슈타인 공작에 관해 기억하고 있었다. 그만큼 할슈타인 공작이 치밀하고 영리한 자라면 분명 다른 의도가 있어 접근했으리라는 것이 서지터의 생각이었다.


“카데스가 자기보다 더 뛰어난 실력을 지닌 친구가 있다고 말했다면 제 출신도 대강 파악하고 계시겠네요?”


“아, 네에. 어느 정도는······.”


그의 말처럼 라니안은 서지터가 카데스와 같은 켈베로스 용병단 출신임을 예상했다. 조금 더 나아가 마상창시합을 보며 돌격대에 몸담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도 조심스레 하고 있었다.


“제 출신을 어디까지 예상하고 계시는지 모르겠지만 딱히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걸 원치 않아서요. 괜한 걱정일 수도 있는데 소문내고 다니지 말았으면 하고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경기에 집중해서 국왕 폐하의 기대에 부응해야 하거든요.”


서지터는 딱 잘라 선을 그어버렸다. 더는 떠보려고 쓸데없는 질문은 하지 말아라. 그리고 자신의 뒤에는 할슈타인 공작보다 더 위인 팔라쥬르 국왕이 있으니 까불지 말아라. 라는 의도가 다분히 담긴 친절한 협박이었다.


그렇게 식사 자리는 어색하게 끝이 나고 어두워질 때까지 잠시 쉬기 위해 두 사람은 일행이 머무는 여관으로 향했다. 여관으로 가는 도중 카데스가 먼저 말을 꺼냈다.


“혹시 화났어?”


“뭐가? 왜?”


“아니, 네 얘기를 한 것 때문에.”


“화는 무슨. 실력 있는 친구가 있다라는 말밖에 안 했다며?”


“응.”


“그런데 왜 화가 나. 암살자 놈들 때문에 너에 관해 물어봤으니 용병단 출신임을 말했을 거고 그럼 자연스레 나도 같은 곳 출신인 걸 예상했겠지. 이렇게 따라온 걸 보면 마상창시합에서 보여준 모습 때문에 돌격대 출신인 것까지 아마 예상했을걸? 상대가 똑똑한 건데 무슨 수로 막아. 네가 일이 이렇게 될 줄 알고 말했던 것도 아니잖아. 문제는 저쪽에서 무슨 의도를 가지고 떠보기 위해 접근을 했냐는 거야. 단순한 호기심일지, 아니면 다른 꿍꿍이가 있을지 모르잖아. 이건 리벨드 부인한테 얘기해둬야겠다. 중요한 자리에 있는 사람이니 어쩌면 계속 부딪힐 수도 있겠어. 조만간 공작을 만나본다고 하셨으니 확실하게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는 게 낫겠지. 네가 말한 것보다 훨씬 더 영리한 사람 같아.”


“용병단 출신인 걸 숨겼어야 했는데 고향에 돌아가니 들떠서 나답지 않게 실언한 것 같아.”


“풉! 실언은 무슨? 그리고 그게 뭐 그리 숨길 일이라고. 자랑스럽게 떠들고 다녀도 될 일인데?”


“너는 검은 늑대 출신인 걸 밝히기 싫어하잖아.”


“그건 그냥 귀찮아질 일이 많아질 테니까 그런 거지. 나도 잘 몰랐는데 이번 겨울에 돌아다니면서 보니까 모험가나 용병들 사이에선 우리 검은 늑대가 거의 신격화되었더라. 기가 차서.”


“신격화될 만하지. 그 지옥 같은 곳에서 우린 하루도 간신히 버텼는데 검은 늑대는 1주일이나 버텨냈잖아.”


서지터는 카데스를 바라보며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 얘기는 그만하자. 일단 따뜻한 물에 목욕도 좀 하고 푹신한 내 침대에서 한숨 자고 새벽에 천막으로 돌아가야겠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많은 피드백과 충고, 오타 지적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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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 7화 커져가는 불씨 - 1 23.08.28 33 1 12쪽
162 6화 누군가의 의지 - 33 23.08.25 33 1 14쪽
161 6화 누군가의 의지 - 32 23.08.24 28 1 12쪽
160 6화 누군가의 의지 - 31 23.08.23 29 1 16쪽
159 6화 누군가의 의지 - 30 23.08.22 35 1 14쪽
158 6화 누군가의 의지 - 29 23.08.21 28 1 14쪽
157 6화 누군가의 의지 - 28 23.08.18 32 1 17쪽
156 6화 누군가의 의지 - 27 23.08.17 33 1 15쪽
155 6화 누군가의 의지 - 26 23.08.16 28 1 14쪽
154 6화 누군가의 의지 - 25 23.08.15 25 1 13쪽
153 6화 누군가의 의지 - 24 23.08.14 29 1 12쪽
152 6화 누군가의 의지 - 23 23.08.11 34 1 16쪽
151 6화 누군가의 의지 - 22 23.08.10 30 1 16쪽
150 6화 누군가의 의지 - 21 23.08.09 27 1 12쪽
149 6화 누군가의 의지 - 20 23.08.08 31 1 16쪽
148 6화 누군가의 의지 - 19 23.08.07 29 1 12쪽
147 6화 누군가의 의지 - 18 23.08.04 32 1 12쪽
146 6화 누군가의 의지 - 17 23.08.03 31 2 14쪽
145 6화 누군가의 의지 - 16 23.08.02 28 1 17쪽
144 6화 누군가의 의지 - 15 23.08.01 30 2 17쪽
143 6화 누군가의 의지 - 14 23.07.31 37 2 12쪽
» 6화 누군가의 의지 - 13 23.07.28 29 1 12쪽
141 6화 누군가의 의지 - 12 23.07.27 27 1 12쪽
140 6화 누군가의 의지 - 11 23.07.26 29 1 13쪽
139 6화 누군가의 의지 - 10 23.07.25 25 1 12쪽
138 6화 누군가의 의지 - 9 23.07.24 27 2 12쪽
137 6화 누군가의 의지 - 8 23.07.21 29 2 13쪽
136 6화 누군가의 의지 - 7 23.07.20 28 2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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