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신성치 님의 서재입니다.

변신한 짐승이 당신 옆사람이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공포·미스테리

완결

신성치
작품등록일 :
2023.12.26 13:10
최근연재일 :
2024.06.13 11:35
연재수 :
100 회
조회수 :
2,698
추천수 :
307
글자수 :
597,391

작성
24.02.19 18:25
조회
14
추천
3
글자
12쪽

야밤의 협상

DUMMY

휘이이이~ 길고 요염한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형사가 데려온 프렌치 불독은 꼬리를 말고 주인 뒤로 몸을 숨겼다. 겁에 질려 짖던 것마저 멈춘 상태였다.


담장 위 여인의 입술 사이에는 작은 틈새밖에 없었다. 그 사이로 묘한 바람 소리가 새나오고 있었다. 휘이이이···

얇고 부드러운 블랙 니트와 블랙 팬츠. 검은 고양이를 연상시키는 묘화는 눈을 가늘게 뜨고 백형사를 내려다 봤다. 검정과 보라가 섞인 짙은 화장 속에서 눈동자가 반짝이고 있었다.


“황묘화···”

백형사는 자기 목소리가 떨리는 걸 느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고마워라. 기억하시네요.”


그리고 검은 고양이를 닮은 여인이 사라락 담장에서 내려왔다.


“그런데 나는 그쪽 이름도 모르네요.”

“백기철.”


짧은 답을 들은 묘화는 살짝 눈을 감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기철 씨. 나랑 산책 코스가 비슷하신가 봐요.”

“담벼락 위로 산책을 한다고···?”

여전히 조금 떨리는 음성. 하지만 이번엔 분노가 섞여 있었다.


“다른 목적도 있긴 했죠.”

말을 하면서 묘화는 고개를 갸웃 옆으로 틀어 보였는데, 그 모습에 백형사는 혼란스러워졌다. 묘화의 고갯짓이 자기에 대한 조롱 같기도 하고 친근한 사이의 애교 같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뭐··· 뭔데요, 그게?”

또 떨린 대꾸. 이번에는 또 다른 이유. 거기다 존댓말까지··· 미소로 묘화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기철 씨 만나면 일종의 협상을 해봐야겠다···”

‘협상이라고···’ 만남 자체가 의외였지만 백형사에게 ‘협상’이란 단어도 뜻밖이었다.


“집도 멀지 않은 것 같은데 앞으로 동네에서 마주치기기라도 하면 어색할 테니까.”

헤어진 연인끼리 관계 정리도 아니고, 뭔 얘기지? 평소의 여유 있는 대화 스킬을 잃은 백형사의 촉은 작동하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그 협상 주제가 뭔데?”

“잊어 줘요.”

진짜로 헤어진 연인 코스프레를 하자는 건가? 여전히 페이스를 찾지 못한 백형사가 다시 질문했다.

“뭘 잊으란 거지?”


묘화는 곧바로 답을 주지 않았다.

입을 떼는 대신 지면에서 발을 뗐다. 사뿐사뿐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걸음으로 묘화는 백형사 옆으로 다가왔다.

손을 뻗지 않아도 고개만 숙이면 머리가 상대방 얼굴에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 입김이 느껴지고, 침 튀기며 말하는 사람이라면 상대방의 피부를 촉촉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 거리.


복숭아를 닮은 체취가 풍겨왔다. 백형사에게. 로션일까 향수일까 향기의 원천은 알 수 없었다. 칙투칙 cheek to cheek, 뺨과 뺨이 맞닿을 것처럼 묘화가 가까워졌다.

아슬아슬 접촉을 피하도록, 살며시 어깨를 틀면서 백형사 옆으로 미끄러져 온 묘화. 귓가에 와닿는 그녀의 호흡이 백형사를 자극했다.


“고양이 닮은 인간한테···”

귓속말처럼 스며드는 간지러운 음성. 노오란 꽃가루를 잔뜩 뒤집어쓴 것처럼 백형사는 아찔하게 달아올랐다.

“죽도록 맞았던 거. 입원하고 깁스한 거. 수사하고 복수하겠다고 결심했던 거.”


안 그래도 화끈거리던 백형사의 머리로 뜨거운 열기가 훅 올라왔다. 조금 전까지 백형사를 달아오르게 했던 것과는 종류가 다른 뜨거움이었다.

잊어버리는 거, 그건 안 될 말이니까! 그렇게 처맞고도 잊어버리라고? 일생일대의 개망신을?

백형사는 간단한 한 마디로 답을 건넸다. 남의 나라 말이지만 더 짧은 시간에 의사표현이 가능한 말.


“노.”


단호한 반대 의견에도 묘화는 동요하지 않았다. 미묘하게 태도를 변경했을 뿐이었다.

아~ 짐짓 놀란 듯 입을 벌렸다가 묘화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가만히 서 있는 백형사 주변을 맴돌면서 이야기했다.


“기철 씨는 내가 기철 씨를 공격했다고 믿고 있죠?”

“믿는 게 아니지. 사실이니까.”

묘화의 동선에 따라 눈동자와 고개를 이동시키면서 백형사가 대답했다.


“이야아~”

길게 발음하는 묘화의 감탄사가 고양이 울음처럼 들렸다. 니야아옹···

“신념이 확고한 남자네.”

묘화는 반말을 하기 시작했다. 백형사는 굳이 따지지 않았다.


“그럼 말을 바꿀게. 잊는 게 아니라 문제 삼지 말자는 거야.”

“나한텐 그래야 할 이유가 없는데?”

“미랑 언니랑 지주성 씨를 봐. 지주성 씨가 마누라 인정하고 과거 다 묻어주기로 한 다음에 미랑 언니한테 엄청 도움 받잖아.”

“거기는 부부관계니까.”

“어머어머 이 총각 좀 봐!”

묘화는 새침하게 토라진 척 표정연기를 했다.


“그럼, 나랑 타협하려면 무슨 관계가 있어야 된다는 거야? 지금 무슨 상상을 하는 거지?”

“아니···! 그게 아니잖아!”

말리고 있다는 느낌 때문에 백형사는 버럭 화를 냈다. 묘화가 백형사를 갖고 노는 형국이었다.


“어머! 발끈할 줄 아는구나.”

묘화의 손바닥이 순식간에 기철의 뺨을 훑으며 지나갔다. 때린 게 아니라 어루만지는 것에 가까운 동작이었다.

백형사에겐 모욕적이지만 피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깁스한 팔이 멀쩡했더라도 물리치기 힘든 동작이었다.


여인의 볼터치에 뚜껑이 열린 백형사! 오른손 스트레이트가 뻗어나갔다!

그러나 허리를 젖히며 피하는 묘화. 미소까지 머금은 그녀에게 더욱 빡치는 백형사! 이번에는 발이다! 몸을 돌리며 옆차기 발사!


백형사의 발바닥이 묘화의 소매를 스치기는 했다. 하지만 그뿐!

묘화는 옆으로 몸을 기울여 땅바닥에서 한 번 구르더니 재빠르게 일어났다. 민첩하게 자세를 다시 잡는 우아한 마무리.


치욕적이지만 백형사는 더 이상의 공격을 포기했다. 사실 깁스를 한 백형사는 스턴트 우먼이자 무술 배우를 이길 수 없었다.

게다가 무력 대결이란 측면에서 보면 묘화는 백형사를 봐주고 있는 셈이었다. 독한 마음을 먹고 묘화가 변신한다면 목격자나 신고자가 나타나기 전에 백형사의 생명이 위태로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때 그 고양이 닮은 괴물 인간이 지금 나온다면 기철 씨는 더 빨리 쓰러질 텐데. 아닌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꼬리를 말고 딴 데만 보고 있는 땡구도 그걸 알고 있었다. 우리 주인은 저 인간을 이길 수 없어···

“오케이. 인정.”

빠른 태세 전환. 전력차를 부인할 수 없는 백형사는 작전을 변경했다.


“내가 지난번 사건을 문제삼지 않는다면 그쪽에서 뭘 해줄 수 있지?”

“늑대 새끼들 잡는 거 도와줄게. 거기선 기철 씨하고 나하고 교집합이 있잖아.”


늑대파는 살인 집단이었다. 형사로서 직업의식이 투철한 백형사 입장에서는 솔깃한 제안이었다. 그런데,


“백형사가 고양이 인간한테 당한 거 넘어가는 게 다가 아냐. 내 정체에 대해서, 아니 미랑 언니를 비롯한 중간자들 정체에 대해서 입 다물 것. 중간자들이 스스로 공개하기 전까지 문제 삼지 않을 것.

나랑 미랑 언니가 악당으로 인정하는 중간자만 잡을 것.”


너무 어려운 얘기였다. 수사를 하다 보면 뭐가 드러날지 모르고, 어떤 대응이 필요할지 예상할 수 없다. 그런데 중간자들에 대해서는 철저히 비밀을 지켜주면서 관련된 사건을 해결한다는 건 무지하게 힘들어 보였다.

그래서 백형사는 고개를 저었다.


“안 된다고? 협상 결렬?”

이번엔 고개를 끄덕이는 백형사.


휴우~ 묘화는 한숨을 뱉었다. 그리고 어금니를 깨물면서 분노를 참아냈다.

백형사는 그런 묘화를 보면서 변명이라도 하고 싶어졌다. 평소와 다르게···


“아니, 그게 말야··· 형사 입장에서 수사를 하다 보면 공개할 수밖에 없는 부분도 생기고··· 수사 범위나 대상 같은 걸 한정하거나 지시를 받으면,”


백형사의 말이 멈췄다. 묘화의 집게손가락이 백형사의 입술을 살포시 누르고 있었다.


“그만. 여기서 더 열받고 싶지 않아. 뒷감당 못할 일 생기면 안 되니까.”

당해 봐서 아는 백형사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한 가지만 얘기해주고 갈게. 늑대는 우리 고양잇과 맹수들하고는 달라. 순발력은 떨어지지만 오래 달리고 끈질기지. 작정한 사냥감은 포기하지 않아.”


순간 백형사는 병원에 뉘어 놓은 빡대를 떠올렸다. 묘화는 분명 그놈을 언급하는 거라고 확신했다. 덜컥, 긴장감이 치솟았다.


“그놈 입원한 데는 늑대파가 모를 텐데···”

그럴까?라고 말하는 것처럼 묘화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늑대는 특이하게 일부일처제로 사는 짐승이거든. 아마 엉터리 일부일처제인 인간들보다 부부관계에 더 진심일걸? 그리고 사람이든 짐승이든 비슷한 데가 있어. 자기 사고방식에 맞춰서 남들도 평가하지. 다른 놈들도 자기들 습성이랑 비슷할 거라 여기는 거야.”


말을 마치자마자 묘화는 근린공원의 담장을 손으로 짚고서 훌쩍 뛰어넘었다.

‘뭔 소릴 한 거야?’ 백형사는 멀어져가는 묘화를 담장 틈새로 주시하면서 생각했다. 그리고 묘화의 모습이 시선에서 사라질 즈음 그녀의 말을 해석해 냈다.

‘빡대 애인!’


* * * * * * * * * * * * * * * * * * *


남편의 결심에 감동한 아내가 차려준 정성이 담긴 술상을 받아 먹어치우고, 아이들이 잠든 틈에 후끈한 부부의 애정을 확인하고, 달착지근한 피로가 몰려와서 눈을 감았는데···

말 그대로 꿀 같은 잠에 빠지자마자 휴대폰 소리가 내 귀를 잡아 비틀었다.

“아, 뭐야 쓰벌···”

발신자는 기철이 형이었다. 일 초쯤 그냥 무시할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늑대인간의 마수에서 중요한 증인이자 피의자를 구출하고 열 시간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이건 받아야 된다는 형사의 촉이 내 안에서 절규하고 있는 걸··· 결국 외면하지 못 했다.


“여보세요.”

“주성아. 빨리 와!”

‘밤늦게’라든지 ‘통화 가능해?’라든지 ‘미안’같은 말이 먼저 나오지 않는 전화였다. 그런 한가한 말이 나오는 통화였으면 오히려 짜증이 났을 거다.

나는 휴대폰을 든 채로 곧바로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로?”

“빡대 입원한 병원!”

내가 옷을 챙겨 입는 동안 미랑이 휴대폰 앱으로 택시를 불렀다. 다행히 택시는 집 앞으로 내려간 다음 일분도 안 돼서 도착했다.


“형은 지금 어디예요?”

“병원 다 와 가. 이삼 분이면 돼.”

“어떻게 된 건데요?”

“빡대 병실 지키는 애랑 통화가 안 돼. 빡대랑 걔 애인이랑 둘만 있대.”


‘일부일처 늑대들은 인간들의 남녀관계 또는 부부관계도 중요하게 생각할 거다. 그러니까 늑대파 놈들은 빡대의 애인을 주목할 거다. 그 여자의 행적을 뒤쫓아서 빡대가 있는 데를 알아낼 거다.’

기철이 형은 묘화의 말을 이렇게 풀이한 거였다. 맞는 해석이었다.


그렇게 답을 얻자마자 병원에서 빡대를 지키는 순경한테 연락을 했고, 연락이 안 되자 병원 데스크에 전화해서 박대규 보호자와 통화한 거였다. 그리고 나를 불러낸 거다.


'늑대파 킬러들이 잠시 바람 쐬러 나온 순경을 해치웠다. 그리고 빡대와 애인을 처리하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다.'

지금 기철이 형이랑 내가 해야 하는, 할 수밖에 없는 추측이었다.

아마도··· 그게 맞을 것 같았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변신한 짐승이 당신 옆사람이다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73 공무집행 방해 24.04.25 10 1 12쪽
72 사냥 중계방송 24.04.24 10 1 12쪽
71 사냥개들 24.04.23 8 1 12쪽
70 왕따는 선량한가? 24.04.18 10 1 12쪽
69 빈 책상들 24.04.18 12 2 12쪽
68 슴과 소를 지우면 +2 24.04.17 16 2 14쪽
67 다가오는 용의자 24.04.16 15 2 12쪽
66 특이한 부부싸움 24.04.12 13 2 13쪽
65 당신이 왜 그자와 +2 24.04.11 13 2 13쪽
64 두 가지 대답 24.04.10 12 2 12쪽
63 개를 데리고 걷는 여자 24.04.05 10 2 13쪽
62 축소된 말의 귀 +2 24.04.05 13 3 12쪽
61 밴이 찾아왔다. +1 24.04.03 15 3 12쪽
60 아내가 있는 방 +3 24.04.01 16 3 12쪽
59 아이 없는 숨바꼭질 +2 24.03.29 18 3 12쪽
58 베타 테스트 +4 24.03.27 16 3 12쪽
57 두 개의 그린Green +2 24.03.26 13 4 13쪽
56 아빠의 눈물 +2 24.03.22 19 4 14쪽
55 멀더와 스컬리 +2 24.03.20 14 3 13쪽
54 사슴 소녀의 그림자 24.03.20 12 3 12쪽
53 가녀린 목소리 +2 24.03.19 12 3 13쪽
52 몬순 monsoon 바뀌는 풍향 +2 24.03.15 17 3 13쪽
51 밝은 밤, 어두운 밤 24.03.14 16 3 12쪽
50 사랑과 재채기, 그리고 +2 24.03.12 20 3 15쪽
49 텅 빈 집, 꽉 찬 집 24.03.12 14 3 14쪽
48 무지개 뜬 날 +2 24.03.07 14 3 13쪽
47 내 꿈 꾸지? 24.03.07 14 3 12쪽
46 다시 생각해 +4 24.03.05 22 3 13쪽
45 후폭풍 24.03.04 13 3 12쪽
44 작은 뿔의 종결 24.02.29 17 3 14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