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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치 님의 서재입니다.

변신한 짐승이 당신 옆사람이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공포·미스테리

완결

신성치
작품등록일 :
2023.12.26 13:10
최근연재일 :
2024.06.13 11:35
연재수 :
100 회
조회수 :
2,689
추천수 :
307
글자수 :
597,391

작성
24.03.07 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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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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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3쪽

무지개 뜬 날

DUMMY

나는 잠시 퍼즈 Pause 상태였다.

누군가 내 생각과 행동에 일시 정지 버튼을 누른 것 같았다. 삶의 거대한 사건이 쿵! 내 속으로 떨어지는 엄청난 충격! 놀람이나 기쁨이나 감격 같은 한 단어로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순식간에 밀려 들어왔다.


진공 상태였던 공간에 구멍이 뚫려 한 순간에 공기가 꽉 차버리는 느낌. 처음 경험하는 마음의 한 색깔이 밀도 있게 내 속을 채우는 기분. 나 자체가 뭔가 달라진 것 같았고 나를 둘러싼 세상도 조금은 변한 것 같았다.

콕 집어 어떤 차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내 오감과 맞닿은 시공간의 이미지는 무언가 선명해진 듯했다.


그렇게, 속으로는 크나큰 파장을 느끼면서도 겉으로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자 미랑이 나한테 다가섰다. 내 팔목을 잡고 살짝 흔들면서,


“뭐야? 못 알아들은 거야? 아직도?”

“아니. 알아들었어. 어떻게 못 알아들어요.”

“근데 왜 반응이 없어요? 싫은 거야?”


나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싫다니. 절대로 아니다.


“잠깐··· 다 잊어버린 거예요. 기쁜 게, 좋아하는 게 어떻게 하는 건지··· 심정지가 아니라 뇌정지, 감정 정지···”

“그만 정지하고 돌아와!”


미랑은 두 손으로 내 두 팔을 잡고 힘차게 흔들었다.

앞뒤로 흔들린 게 효과가 있었나 보다. 명랑과 환희란 감정이 이런 거였지! 껐다 켠 전자제품이 갑자기 살아나듯이 가슴 속에서 시원한 바람이 확 솟구쳤다.


“오오우케이!”

내 고함 소리에 놀라 미랑이 움찔 뒤로 물러섰다. 내가 누군가? 샤우팅 일인자 옥,희의 아빠씨 아닌가!


“와우!!”

나는 허공에 주먹을 날리며 점프했다.

내 평생의 서전트 점프 중 최고 기록이었을 거다. 미랑은 나의 엄청난 순발력에 감탄했다. (물론 여우 중간자로 변신했을 때 미랑의 신체 능력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이지만···)

착지하자마자 나는 미랑을 끌어안고 들어올렸다가 아차, 조심해야지! 천천히 살포시 다시 내려놓았다.


그리고 우리는 손을 잡은 채 재빨리 장례식장 건물을 빠져나왔다.

비록 주변에 사람이 없는 곳에서 좋아서 팔짝 뛴 거지만, 망자를 애도하는 것만큼 잉태를 축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장례식장에서 너무 좋은 티를 내는 건 미안해서였다.


병원 현관 앞에서 우리는 들뜬 마음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문상하러 들어가야 되기 때문에 시간이 많지는 않았다. 돌이켜 보면 대단한 내용의 대화를 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짧은 동안 나눈 이야기와 떠올린 생각들은 소중한 의미로 각인됐다.


아빠가 된다니··· 아빠가 된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잉태의 소식을 들은 지금도 전에 없던 감정을 느끼는데 실제로 아기를 보게 되면 어떨까?

물론··· 법적으로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는 이미 아빠였다. 아빠씨랑 무지막지하게 친한 옥,희가 있으니까.

하지만 생물학적으로 말하자면 나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2세는 처음 태어나는 거다. 미랑과 나를 닮은 아이는 과연 어떤 아이일까?


옥,희가 아기 동생을 데리고 노는 모습도 정말 귀여울 것 같았다.

다만 늘 긴장을 놓치 않고 가까이에서 주시해야 될 것 같기는 했다. 먼저 태어난 두 아이가 무지무지하게 터프한 인생 선배이기 때문에! 같이 신나게 놀자는 취지에서 무심코 한 장난이 엄청난 결과를 나을 수도 있기 때문에!

항상 몸을 날릴 각오를 하면서 주변을 떠나지 않아야 될 거라고 예상했다.


이런 저런 상상들을 말하면서 우리는 짧은 시간 동안 많이 웃었다.

미랑도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결혼해서 아이 셋을 낳아야 완전한 인간이 된다는 숙업이 어쩌면 이번의 출산으로 완성될 수도 있었다. 한 남자와 셋을 낳아야 되는 게 아니라 단순하게 세 명을 낳는 것이 조건일 수도 있으니까.

우리는 직접 숙업에 대해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심전심 같은 기대를 품고 있는 걸 서로 알았다. 그렇게만 되면, 더 이상 걱정할 게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우리가 희망에 부풀었던 그 타이밍에,


* * * * * * * * * * * * * * * * * * *


분노인지 흥분인지 열정인지 모를 열기에 싸여 눈싸움을 벌이다가 멈춘 백형사와 묘화. 그들이 앉은 테이블로 세 친구가 다가왔다.


“어떻게 두 분이 같이 계시네.”

염선생이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아, 예··· 지형사랑 반장님이 같이 있었는데···”

굳이 안 해도 될 설명을 부자연스럽게 백형사가 했다.


“두 분 소주도 한 잔 하셨나봐.”

“어, 딱 한 잔.”

두 사람 앞에 놓인 종이 소주잔을 연호가 지적하자, 별 거 아니라는 듯 묘화가 대꾸했다.


“그런데 백형사님 얼굴이 왜 그렇게 빨개지셨어요?”

눈싸움의 열기에다 갑자기 세 친구를 만난 당혹감이 더해져서 뺨이 더 화끈해진 백형사. 실제로 그는 얼굴 가득 홍조를 띠고 있었다.


“어··· 소주를 좀 마셨더니···”

“이상하네요. 주성 씨 얘기로는 백형사님 말술이라고 하던데. 통화하면서 우리끼리 회식 한 번 하자고 했었거든요.”

“아, 그러셨어요. 모이면 좋죠. 기도원 파이터스 회식···”

라고 백형사가 동의하자,

“괜찮겠다···”

괜히 쑥스러워서 화제를 돌리려는 묘화도 맞장구쳤다.


“그런데요··· 언제 할지 모르는 회식으로 화제전환 마시고요. 말술 백형사님 얼굴이 빨개지신 이유 답변은 안 하시나요?”

진정 말술인 마종대가 능글맞게 물었다. 백형사가 살짝 열 받을 뻔 했는데,


“자꾸 따지지 마. 처녀 총각끼리 한 잔 할 수도 있는 거지. 그러다 보면 얼굴도 빨개지고.”

연호의 너스레에 차마 화를 못 냈다. 나중에 온 셋은 오래 친하게 지내서 그런가, 몰아가는 빌드업에 손발이 척척 맞았다.


“나도 총각이라서 이해해요. 좀 오래 된 총각이지만···”

염선생의 싱거운 개그에도 연호와 종대는 웃음으로 화답했고, 백형사와 묘화는 미소 비슷하게 얼굴을 찡그렸다. 그리고,


“초상집인데 그런 얘긴 그만 하시는 게···”

백형사의 호소는 간단히 무시됐다.

“아니에요. 그런 얘기 해도 되는 게 우리 민족 고유의 장례 전통이랍니다.”


염선생의 말을 듣고 출구가 막힌 듯한 갑갑함에 얼굴이 더 화끈거리는 백형사.

세 사람은 흘겨보듯 눈을 가늘게 뜨고 백형사를 관찰했다. 백형사는 심문을 당하는 것 같았다. 범죄 혐의라도 되는 것처럼 연애 감정을 캐내려는 중간자 세 형사들한테.


‘진짜 동물적 감각인가? 냄새를 너무 잘 맡네. 이 자들···’


* * * * * * * * * * * * * * * * * * *


문상을 다녀온 다음날 미랑은 산부인과에 가서 임신 진단을 받았다. 이제 7주를 살짝 넘겼다고 했다.

나는 다시 한 번 기뻤고 이 소식을 세계 만방에 알리고 싶었으나 미랑은 조심스러워 했다. 시끄러워지는 게 불안한지 호들갑을 떨다 부정탈까 걱정인지 일단 조용히 있자고 했다.

체조 교실에만 조용히 얘기해서 휴직을 하기로 했다.


“언제까지 비밀로 하려고요?”

“자연스럽게 알게 될 텐데, 동네방네 떠들면 쑥스러워서 그래요.”


미랑의 친구들은 ‘아이 셋’이라는 미션을 알고 있으니까 임신 사실이 알려지면 관심의 대상이 될 게 확실했다. 그러므로 미랑으로선 알려지는 게 부담스러울 수 있었다.


“알게 되면 아는 거지만··· 3개월 지나서 안정되면 공식 선언해요.”

“오케이. 공식 선언이라니까 뭔가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데요. 잠깐, 그러면 우리의 라우드 스피커. 옥,희도 몰라야 할 텐데···”


두 아이가 인지하는 순간 앞뒤옆집 사람들, 유치원 모든 관련자들한테 알려질 건 너무나도 뻔한 일이었다.


“일단··· 있어 보자고요. 아이들 때문에 힘들거나 너무 조심스러워지면 말해요.”


사실 옥희가 워낙 시끄럽게 놀아서 그렇지 손이 많이 가는 편은 아니었다. 어른들이 안 도와줘도 알아서 노는 데 일가견이 있으니까.

그렇게 정리를 하고 있었는데, 매우 중요한 분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그랜파. 내 할아버지이자 옥,희의 왕할아버지. (정확히는 증조할아버지)


“앗! 그랜파! 어쩐 일이세요?”

“연락 없어도 너 살아 있는 건 내 알고 있었다.”

어이쿠. 롱 타임 노 안부에 삐지신 건 아닌가?


“황공하옵나이다. 제가 전화 드렸어야 되는데.”

“옥,희 엄마는 다친 데 없느냐?”

아니 이 어찌 된 멘트인가? 뭘 알고 계시는 거지?


“그랜파. 그 말씀은 서울에서의 사건을 인지하셨다는 뜻 같은데요···”

“이 산골에도 인터넷의 혜택이 미치고 있다는 걸 잊었느냐?”


그랜파는 대한민국이 IT 강국임을 다시금 일깨워 주시고는 당신께서 알아낸 것을 말해 주셨다.

TV 뉴스를 통해 기도원 늑대 사건을 접한 그랜파. 뭔가 불길한 느낌을 받음과 동시에 스쳐 지나간 화면 속 인물이 왠지 낯이 익어 보이셨단다.


그래서 곧바로 네티즌 수사대로서 활약을 시작하셨고 인터넷 기사들, 유튜버들의 동영상들, 기자들의 SNS까지 넘나들며 추적을 이어갔다고 했다. 그러다가 말 많은 한 방송기자의 인싸그램 사진의 뒷배경에서 나를 닮은 형사의 모습을 발견했다는 거다.


“딱 보니까 삼각산 경찰서, 너랑 니네 과 수사관들 같더라.”

“대단하십니다. 그랜파.”

“그리고 뉴스에서 납치 피해자 친구들이 경찰과 같이 싸웠다던데. 그게 옥,희 엄마랑 친구들 아니냐?”

“예. 걱정하실까 봐 말씀 안 드렸었습니다.”

“모르는 게 약인지는 모르겠는데 자꾸 알게 되는구나. 납치범들이 먼저 유치원생 둘을 유괴하려다가 실패했다는데 그게 혹시 옥,희였냐?”


맞다고 말씀드리자 그랜파는 안도의 한숨을 쉬셨다.

대범한 분이지만 어린 증손녀들의 안위는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나 보다. 괜찮다고 아이들과 애 엄마 모두 건강하다고 말씀드렸는데, 덧붙이고 싶은 얘기가 있어서 입이 심히 근질거렸다.


“그렇게 위험한 일 겪은 게 꼭 나쁜 건 아니죠? 액땜이 되는 거겠죠?”

“내가 액땜 같은 샤머니즘 스타일 지식은 별로 없는데··· 어쨌거나 사건이 잘 마무리되면 큰 걱정은 없겠지···”

“그 나쁜 경험 같은 게 기억에 남아서 자기 건강이나··· 아무튼 몸을 해롭게 하지는 않겠죠?”

“그거야 니가 옆에서 보면 더 잘 알겠지. 옥,희나 옥,희 엄마 마음이 튼튼한지 아닌지.”

“그건 그런데 옥,희 엄마가 아무래도 젊은 여자다 보니까··· 좋은 거만 보고 좋은 것만 먹어야 되는데···”


말하고 싶어서 온몸이 근질거리고 있었다.

일단 떠들지 말자고 미랑이 그랬기 때문에 나는 그랜파가 눈치 채주기를 바라고 있던 거다. 그 결과 불호령을 자초한 셈이 됐다.


“뭐야 이놈아! 말 돌리지 말어! 노인네 승질 테스트하지 말고 얼른 불어!”


그래서 효자, 아니 효손인 나는 할아버지 분부하신 대로 사실을 밝혀버렸다. 증손주가 하나 늘게 됐다고.

그러자 전화기를 통해 어제의 나 못지 않은 환호성이 들려왔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그랜파가 사과하는 소리도 들려왔다.


“할아버지. 지금 어디신 거예요?”

“내가 선견지명이 있나 보다. 안 그래도 큰일 치른 너네 주려고 먹을 걸 좀 싸갖고 상경 중이다. 고속버스 터미널로 얼른 나와라.”


다행히 그랜파는 산모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 모르는 약초 같은 게 아니라 손수 재배한 더덕과 버섯을 싸들고 상경중이셨다.

나는 먼저 그랜파에게 옥,희한테는 아직 임신 사실을 말하지 말아 달라 부탁한 다음 터미널 도착시간 확인 후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미랑에게 ‘정말 어쩔 수 없이’ 할아버지께 임신 사실을 밝혔음을 전하고, 옥,희한테 왕할아버지 왕림을 예고했다.


“나도 나도!”

“우리도 마중 갈거다요!”

아이고 이런 기특한 강아지들. 그래서 나는 뒷좌석 카시트에 쌍둥이를 태우고 터미널로 향했다.


그런데 휴일 백주대낮에! 대중이 활보하는 사거리에! 기철이 형이 보이는 거였다.

그게 왜 놀랄 일이냐고? 백기철 씨 옆에 바짝 붙어서서 분명한 동행인으로서 걷고 있는 사람이 우리 건물주였으니까! 황묘화!


저 둘은 지금 형사와 피의자 입장이 분명 아닐 거다! 공동 작전 수행중은 더욱 아닐 거다!

나는 브레이크를 밟으며 차를 길가에 댔다. 뒷좌석 카시트의 재옥이가 팔을 뻗어서 창문을 먼저 내리고 있었다.


“기철이 아저씨!”

“땡구 아빠!”

“묘화 이모!”

“아빠씨! 아저씨랑 이모랑 데이트 한다요!”

“사귀는 거다요!”


하, 하하, 하하하··· 매우 어색하게 성인 남녀가 두 유치원생을 보며 웃고 있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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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당신이 왜 그자와 +2 24.04.11 13 2 13쪽
64 두 가지 대답 24.04.10 12 2 12쪽
63 개를 데리고 걷는 여자 24.04.05 10 2 13쪽
62 축소된 말의 귀 +2 24.04.05 13 3 12쪽
61 밴이 찾아왔다. +1 24.04.03 15 3 12쪽
60 아내가 있는 방 +3 24.04.01 15 3 12쪽
59 아이 없는 숨바꼭질 +2 24.03.29 18 3 12쪽
58 베타 테스트 +4 24.03.27 16 3 12쪽
57 두 개의 그린Green +2 24.03.26 13 4 13쪽
56 아빠의 눈물 +2 24.03.22 19 4 14쪽
55 멀더와 스컬리 +2 24.03.20 14 3 13쪽
54 사슴 소녀의 그림자 24.03.20 12 3 12쪽
53 가녀린 목소리 +2 24.03.19 12 3 13쪽
52 몬순 monsoon 바뀌는 풍향 +2 24.03.15 17 3 13쪽
51 밝은 밤, 어두운 밤 24.03.14 15 3 12쪽
50 사랑과 재채기, 그리고 +2 24.03.12 20 3 15쪽
49 텅 빈 집, 꽉 찬 집 24.03.12 14 3 14쪽
» 무지개 뜬 날 +2 24.03.07 14 3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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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다시 생각해 +4 24.03.05 22 3 13쪽
45 후폭풍 24.03.04 13 3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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