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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치 님의 서재입니다.

변신한 짐승이 당신 옆사람이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공포·미스테리

완결

신성치
작품등록일 :
2023.12.26 13:10
최근연재일 :
2024.06.13 11:35
연재수 :
100 회
조회수 :
2,682
추천수 :
307
글자수 :
597,391

작성
24.04.01 18:25
조회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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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글자
12쪽

아내가 있는 방

DUMMY

나는 다시 급하게 청소 도구함 안으로 몸을 숨겼다.

놀라서 허겁지겁 움직였지만 다행히 별 소리는 나지 않았다. 신속한 동작이 몸에 뱄으니까.


그렇게 날렵하게 쪼그려 앉은 다음 도구함의 좁은 문틈으로 다가오는 중간자를 지켜봤다.

은테 안경에 차분한 셔츠를 입은 30대. 연구원이나 의사의 하얀 가운이 어울려 보이는 왠지 공부 잘 하게 생긴 남자가 돌아오고 있었다. 비밀의 방 안에 깜빡하고 뭔가 놔두고 간 것 같았다.


다행히도 그는 청소 도구함 안에 도구가 들었는지 사람이 들었는지 신경 쓰지 않았다. 책꽂이 앞에 선 그는 위쪽 한 칸의 책들을 옆으로 밀어놓았다.

그러자 책꽂이의 칸막이 옆면에 붙은 번호키가 나왔다. 문틈으로 보니 남자의 뒤통수와 손에 가려서 번호키가 정확히 인식되지는 않았다.


“삑삑삐빅삑.”

남자는 다섯 번을 눌렀다.

나는 위험을 무릅쓰고 청소 도구함의 열린 위쪽 공간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하지만 어느 번호를 누르는지까지 볼 수는 없었다.

왼쪽 위, 왼쪽 아래, 오른쪽 아래, 오른쪽 위, 왼쪽 아래. 내가 보기엔 그랬다. 그렇게 다섯 개 번호를 누르니까 책장이 아까처럼 미닫이 문으로 변신했다.


옛날 만화가게나 도서대여점 책꽂이처럼 옆으로 주르륵 밀리는 책장.

그 뒤로는 뻥 뚫린 문틀이 있었고, 문이 열리자 센서등이 자동으로 켜졌다. 나는 문 열리는 소리와 동시에 다시 쪼그려 앉아서 몸을 숨겼다.

그리고 일 분도 안 돼서 공부 잘하게 생긴 남자가 다시 책장 뒤 비밀의 방에서 나왔다. 손에는 태블릿을 들고서.

‘저걸 놓고 가는 바람에 다시 왔었구나. 땡큐! 태블릿.’


감지기가 떨기를 멈추고 실험실 문 닫는 소리가 들려오자마자 나는 쪼그렸던 몸을 일으켰다.

빨리 움직여야 했다. 적진에 뛰어든 스파이 신세니까. 누가 오기 전에 비밀의 방에 뭐가 있는지 살피고 빠져나와야 된다!


나는 태블릿을 챙겨간 남자의 손이 움직였던 궤적에 따라 책장의 번호키를 눌러봤다. 왼쪽 위 1, 아래 7, 오른쪽 아래 9, 오른쪽 위 3, 다시 왼쪽 아래 7. 삑! 틀렸다는 경고음이 울렸다. 휴··· 잘못 본 거였나?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다시 한 번 머릿속으로 방금 전 출입자의 손놀림을 떠올려 봤다. 두 번째 터치 때 손가락이 많이 내려가지 않은 것 같았다. 그렇다면··· 1, 5, 9, 3, 7··· 맞나? 신호가 왔다. 삑! 역시 마찬가지로 오류 경고음이었다.


‘아, 이러면 안 되는데. 여러 번 연속으로 잘못 찍으면 아예 잠길 텐데. 아니면 경보가 울리거나···’

꿀꺽 긴장으로 침을 삼키고 다시 시도했다. 그렇다고 여기까지 와서 안 눌러볼 수는 없으니까.


1, 7, 9, 3··· 그 다음엔, 첫 시도 때 마지막에 9를 눌렀었는데··· 태블릿을 챙긴 남자가 마지막에 왼쪽 아래를 누른 건 맞으니까···

맨 아랫줄에는 *, 0, #이 왼쪽부터 위치해 있었다. 그렇다면 별*이다! 1, 7, 9, 3, *, 판단한 대로 재빨리 눌렀다.

그러자, 뾰로롱! 애니메이션에서 요술봉을 휘저어 뭔가 작동시킬 때를 닮은 경쾌한 신호음! 그리고 책장이 옆으로 죽 밀려 나갔다.

‘오케이! 성공!’


책장 뒤 비밀의 방은 어두운 범죄 아지트 같은 분위기가 아니었다.

어떤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위해서 깔끔하게 정리된 모습이었다. 한쪽 벽에는 OHP 영상을 시청할 수 있는 법랑 재질 화이트보드가 설치돼 있고, 옆으로는 컴퓨터가 놓인 책상들이 배치돼 있고, 중앙에는 회의용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내가 들어왔던 뒤쪽을 돌아보니 책장 출입문 위쪽 벽에는 영화의 한 컷을 담은 패널이 걸려 있었다. 내가 초딩이 될 때쯤 개봉했던 영화 ‘박하사탕.’


‘설마 여기 숨어서 영화 토론회 같은 걸 하진 않을 텐데···’

부릅뜬 눈의 한 남자가 양팔을 활짝 펼치고 찢어져라 입을 벌리고 있는 사진. 잠입 수사중인 민완형사로서 나는 사진을 분석해 추리를 시작했다.

‘저 사람이··· 아, 주인공 설경구 배우였어. 기억난다. 망가진 중년 아저씨가 철교 위에서 목이 터져라 절규하는 장면.’


“나, 다시 돌아 갈래!”

영화의 시그니처라 할 수 있는 유명한 대사가 나오고, 그 아저씨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안 보여줬던 것 같다. 다음 장면부터 절규했던 아저씨 인생의 시간이 거꾸로 흘러갔었다.


왜 박하사탕, 왜 철교 위, 왜 '돌아갈래' 사진인가?

현대사의 아픔을 다룬 영화와 중간자 동물들이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10초쯤 머릿속에 왜? 왜? 왜?가 맴돌았다.

그리고는 명석하고 기특하게도 쾌속 작동한 두뇌! 멀더와 스컬리가 했던 얘기가 떠올랐다.


‘중간자들은 다시 돌아가려 한다.’

과거에 살던 자연 속으로 귀환하는 것만이 아니다. 본모습이었던 야생동물의 몸으로 돌아가려는 이들도 많다고 했다.

인간사회에 적응을 못 해서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려는 이도 있고, 자연 공간을 언제든 숨을 수 있는 곳으로 이용하려는 범죄자도 있다고 했다. 자연 공간 속에 확실하게 숨으려면 인간의 몸이 아니라, 야생동물의 몸뚱이로 돌아가는 게 좋겠지.


그렇다면 여기는 다시 짐승으로 돌아가는 방법 연구실?

‘나 다시 돌아갈래.’ 사진 말고 또 뭐가 있나 신속히 고개를 돌려봤다. 회의 테이블 위에는 문서와 자료들을 모아 놓은 파일 홀더가 있었다. 투명 비닐 안에 담긴 종이들을 잽싸게 넘기면서 확인했다.


프로젝트 NDR 시간 계획, 이 프로젝트가 시작된 지는 두 달쯤 된 것 같았다.

표와 그래프는 향후 1년 내에 이 프로젝트를 완료할 계획임을 보여줬다. 그리고 참여 인원 현황이라는 파일이 있었다. 기부자 숫자, 기부금 액수, 희망 대기자 숫자가 표시된 그래프와 목록들이었다.


그 다음에는 밤에 찍은 산 사진이 있었다.

특이한 모양의 우리나라 산, 말의 두 귀를 닮은 마이산이었다. 두 봉우리 사이 검은 하늘에 보름달이 선명하게 떠 있었다. 독특한 산의 이미지가 신비로운 느낌을 주는 사진이었다.


‘여기는, 이 산은 대체 뭐지? 왜 이 사진이 있는 거지?’

곧바로 추리가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오래 들여다 보고 있을 순 없었다.

일단 넘겨 봤다. 간략하게 그간의 연구를 요약한 보고서가 있었다. 「결국 핵심은 ‘교신과 소통’이다.」라는 제목. ‘1. 다른 세계와의 교신, 2. 차원을 넘어서는 소통, 3. 서로의 니즈Needs를 충족하는 (역)변신’이라는 항목 아래 작성자가 요약한 견해가 적혀 있었다.


‘변신!’

멀더와 스컬리의 얘기가 맞았다. 이들은 다시 돌아가는 방법. 역변신을 연구하고 있다!

나는 또 기특하게도 천연호 씨가 동물들이 중간자로 변하는 과정을 말해줬던 걸 떠올렸다. 미랑과 묘화가 싸우는 걸 목격하고 내가 중간자에 대해 물어보러 갔을 때 연호 씨는 변신하는 장소가 있다고 말했었다.


“우리나라의 특정 자연공간이 보름달 뜰 때 다른 차원과 시공간이 겹쳐요.”

거기가 어디냐고 물었을 때 연호 씨는 가르쳐주지 않았다. 연호 씨가 숨겼던 그곳이 바로 마이산이었던 거다!


“평행 우주처럼 다른 차원에도 지구의 대한민국을 빼다 박은 세상이 있어요. 보름달이 뜰 때 거기가 우리나라 어느 산 속 공간과 겹치죠. 그리고 그쪽 세상엔 인간의 몸을 버리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연호 씨는 변신의 원리에 대해서도 간략히 설명했었다.

지구를 빼닮은 평행 우주 공간에는 인간의 몸을 버리고 짐승이 되길 원하는 이상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과 일대일로 몸뚱이를 교환하는 거다, 라고.


“다른 존재로 변신하고픈 인간도 존재할 수 있어요. 그쪽 세상은 우리 세계가 아니라 정확하게는 모르지만요. 두 공간의 강한 염원이 보름달 빛 아래서 크로스가 된다. 다른 차원에서 살던 사람의 몸에 여기 사는 동물들의 혼이 입혀지는 거예요.”


이곳, 그린 플리즈의 비밀의 방에서는 중간자가 된 존재들이 역순의 변신을 통해 다시 동물이 되는 연구를 한 거다!

‘아, 이 골치 아픈 존재들! 한 번 왔으면 그만이지 그걸 또 무르려고 하나?’


나는 엄청난 일거리를 떠안았음을 직감했다.

예측을 뛰어넘어 기하급수로 부풀어 오르는 미션들이 연속 출연하는 게··· 지주성의 인생 또는 운명인 거다.


그렇다고 한숨 쉬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인생에 대한 성찰은 나중에 하고 일단은 잠입한 언더커버로서 신속하게 움직여야 한다! 구석구석을 살피는 내 눈에 화면 보호기가 작동중인 모니터 한 대가 들어왔다. 누군가 조금 전에 컴퓨터를 끄지 않고 나간 거였다.


후다닥 다가가 마우스를 클릭해 봤다.

모니터 바탕화면에 사진이 깔려 있었다. 이 방의 연구원들과 후원자들로 보이는 이들의 사진.


아까 태블릿을 찾아간 은테 안경의 남자는 사진에서도 태블릿을 들고 있었다. ‘나돌래 프로젝트 성공 기원’이란 문자가 떠 있는 태블릿.

아! 프로젝트 NDR이 ‘나Na돌Dol(아갈)래Rae’의 약자였구나. 중간자 과학자들의 참으로 소박한 언어 능력에 놀라다가 나는 입이 떡 벌어졌다.


진짜 놀랄 일은 따로 있었다. 사진의 맨 끝, 덩치 큰 사람과 겹쳐서 얼굴이 반만 보이는 여자! 옛날 스파이, 간첩 같은 커다란 썬글래스를 쓴 여자!


미랑이었다.

나는 모니터에 눈을 갖다 대고 사진을 꼼꼼히 확인했다. 미랑이 맞았다. 미랑은 왼손에 결혼반지도 끼고 있었다. 나랑 결혼한 다음에 짐승으로 돌아가는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거다.

어떻게, 어떻게 이런 일이···


멘붕에 빠지려는 순간 주머니의 감지기가 진동했다.

반사적으로 출입문 쪽을 돌아봤지만 아무런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실험실 쪽에서도 들려오는 소리가 없었다.

5미터 이내에선 콘크리트 벽 너머의 중간자도 감지할 수 있다던 멀더의 말이 기억났다. 아마 실험실 앞쪽 복도로 지나간 중간자에 대한 반응이었을 거다.


‘언제 누가 들어올지 몰라. 빨리 나가야 돼.’

충격받은 남편의 감정을 달랠 여유가 없었다. 나는 동영상 촬영 모드로 맞춘 휴대폰에 비밀의 방의 모습을 담았다.

미랑이 나온 모니터 화면과, 역변신 계획서가 담긴 파일들까지 촬영을 마치고 곧바로 책장 뒤에 숨은 방을 빠져나왔다.



시청각실에는 아직 그린 플리즈 홍보 다큐가 상영되고 있었다.

나를 뺀 나머지 신입 회원들은 영상에 집중하느라고 나갔다 들어온 나를 의식 못 하는 것 같았다.


나는 얼마 남지 않은 다큐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놀란 가슴과 급한 걸음 때문에 두근거리는 가슴을 심호흡으로 진정시켰다. 일단은 아무 생각을 말자, 마음만 가라앉히자는 판단으로 눈을 감았다.

하지만 의도대로 잘 되지는 않았다. 처음에 눈을 감았을 때는 칠흑 같은 어둠뿐이었지만 얼마 되지 않아, 비밀의 방에서 봤던 모니터 바탕 화면이 떠올랐다.

결혼 반지를 낀 미랑의 모습이.


휴우~ 긴 한숨을 내쉴 때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영상이 멈추고 실내에 불이 켜졌다. 눈을 뜨자 그린 플리즈의 환경 운동 이력에 감동해서 박수를 치는 신규 회원들이 보였다. 그들은 순수한 마음에서 찬사를 보내는 것 같았다.


다른 회원들과 달리 씁쓸한 기분으로 자리에서 일어날 때, 주머니의 감지기가 진동했다. 시청각실로 들어선 황대호가 내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얼굴 가득 환한 미소를 머금고서.

그는 나를 다른 신규 회원들보다 신경 쓰는 티를 냈다.


“구미랑 씨 남편이시라고요.”

아··· 이 순간에는 이 멘트가 반갑지 않은데···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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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한 짐승이 당신 옆사람이다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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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왕따는 선량한가? 24.04.18 10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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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다가오는 용의자 24.04.16 15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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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당신이 왜 그자와 +2 24.04.11 13 2 13쪽
64 두 가지 대답 24.04.10 12 2 12쪽
63 개를 데리고 걷는 여자 24.04.05 10 2 13쪽
62 축소된 말의 귀 +2 24.04.05 13 3 12쪽
61 밴이 찾아왔다. +1 24.04.03 15 3 12쪽
» 아내가 있는 방 +3 24.04.01 15 3 12쪽
59 아이 없는 숨바꼭질 +2 24.03.29 18 3 12쪽
58 베타 테스트 +4 24.03.27 16 3 12쪽
57 두 개의 그린Green +2 24.03.26 13 4 13쪽
56 아빠의 눈물 +2 24.03.22 19 4 14쪽
55 멀더와 스컬리 +2 24.03.20 13 3 13쪽
54 사슴 소녀의 그림자 24.03.20 12 3 12쪽
53 가녀린 목소리 +2 24.03.19 12 3 13쪽
52 몬순 monsoon 바뀌는 풍향 +2 24.03.15 17 3 13쪽
51 밝은 밤, 어두운 밤 24.03.14 15 3 12쪽
50 사랑과 재채기, 그리고 +2 24.03.12 20 3 15쪽
49 텅 빈 집, 꽉 찬 집 24.03.12 14 3 14쪽
48 무지개 뜬 날 +2 24.03.07 13 3 13쪽
47 내 꿈 꾸지? 24.03.07 14 3 12쪽
46 다시 생각해 +4 24.03.05 21 3 13쪽
45 후폭풍 24.03.04 13 3 12쪽
44 작은 뿔의 종결 24.02.29 16 3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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