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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치 님의 서재입니다.

변신한 짐승이 당신 옆사람이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공포·미스테리

완결

신성치
작품등록일 :
2023.12.26 13:10
최근연재일 :
2024.06.13 11:35
연재수 :
100 회
조회수 :
2,679
추천수 :
307
글자수 :
597,391

작성
24.02.07 18:55
조회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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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2쪽

한(恨)이 꼭 예술이 되진 않아

DUMMY

염소는 울타리를 뛰어넘어 죽어라 도망쳤다.

죽도록 달릴 수밖에 없었다. 잡히면 진짜 죽는 거니까.


뒤에서 염소를 부르는 화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얌마, 너 거기 안 서! 어디 가! 염소 새끼야!”


아주 간혹, 닭한테도 이름을 붙여주는 사람이 있기는 하다. 기르는 닭이 소수일 때, 유희정신이 두드러진 닭 소유주가 그런 행동을 하곤 한다.


“음··· 꼬순아. 오늘은 백숙이 된 너를 만나니 기분이 색다르구나.”

뭐 이런 식으로 대접할 수도 있다.

흑염소의 경우 닭보다는 안면 인식 등을 통해 각각 구분하기 용이할 것이다. 그러나 염소의 개성을 인정할 정도로 한가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달아나던 흑염소도 그 순간 자신이 존중받는 정도를 깨달았다.

주인 인간은 마당에서 키우는 개의 경우에는 각자에게 이름을 부여했었다.

‘누렁이가 새끼를 낳았네. 어라, 한집 사는 흰둥이 새끼들이 아닌가? 까만 놈들이 왜 있어?’


그러면서 곧 남에게 나눠 줄 어린 강아지들한테도 가는 날까지 이름을 불러줬다. ‘뽀삐는 이장님 댁에 드리고 쫑은 부녀회장님네, 쿠키는 청년회장한테 갖다 줘.’ 이런 식이었다.


그런데 나한테는 이름을 붙이지 않았었구나. 그냥 ‘야, 너, 염소 새끼’로 부르면 그만이구나.

어차피 기분 나쁘면 잡아 죽여서 음식으로 만들면 그만이니까.


훗날 염소준 씨가 되는 염소는 죽음의 위기를 만나면서 그 동안 전혀 모르고 살던 것을 알게 됐다. 비교와 질투와 분노 같은 것들.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판단하기 나름이지만 산비탈과 풀밭에 동화돼 천진난만하게 살던 크리처creature가 자아가 생기기 시작한 거다.


농장에서 제법 멀리 떨어진 산 속까지 도망치고 나서 흑염소는 풀을 뜯으면서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종이 때문에 한 순간에 돌변한 인간에 대해 생각했다.


‘그 인간 놈은 종이를 써서 없애는 게 일이었어. 제 놈은 멋대로 종이를 낭비하면서 그깟 종이 좀 먹었다고 죽이려고 들어?’


흑염소는 자기를 배신한 작가 놈보다 강해지고 싶었다. 어떤 식으로든 이기고 싶었다.

키우던 짐승 따위 기분 내키면 잡아 먹을 수 있는 최종 포식자 인간이 되어서 뭔가 보여주고 싶었다.


‘그까짓 종이 같은 거 한정 없이 찍어내는 강력한 존재가 되고 싶어.’


한이랄까 염원이랄까 흑염소의 간절한 마음이 녀석을 인간화로 이끌었고, 인간이 되는 숙업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염소준 씨로 변신이 일어나는 순간 전설의 고향 성우 비슷한 목소리는 인간화 조건을 이와 같이 들려줬다.


“네가 완전한 인간이 되려면 너를 죽이려던 작가보다 두 배의 책을 찍어 내어라.”



그렇게 염소준 씨는 인간이 된 것이고, 소설가로 성공할 꿈을 꾸기 시작했다.

그가 목표를 세웠을 때는 아직 20세기였고 적잖이 팔리는 종이책 중에 소설의 비중이 매우 크던 시절이었다.


그는 출판사에서 일하면서 열심히 책을 읽고 글을 썼다.

여러 해 공을 들인 결과 드디어 그의 첫 소설이 출간됐다. 믿었던 인간들에게 살해당할 뻔 했던 기억이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스토리.

양반집 서방님이 자신을 사랑하는 줄만 알았던 씨받이가 이용만 당하고, 아이를 빼앗기고 암살까지 당하는···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조선시대의 슬픈 이야기.


‘마지막 날까지 사랑인 줄 알았어요.’


초판 5,000부를 찍은 게 끝이었다.

더 이상의 수요가 없었기 때문에 인쇄소를 더 가동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후로 책을 한 권도 낼 수가 없었다. 문학이, 소설이라는 게 만만한 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자비 출판으로 권수를 채우는 건 반칙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흑염소 시절 염소준 씨를 잡아 먹으려 했던 인간은 총 몇십 만 권을 찍어낸 유명 작가로 성장했다. 그 인간의 두 배나 되는 책을 찍어낸다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완전한 인간이 못 된다는 아쉬움, 미련, 불안 때문에 여러 번 다시 책 쓰기에 도전하고 또 실패했다. 남몰래 출판사에서 나온 파지들을 씹어먹으면서 스트레스를 달래곤 했다.

그러다가 복수심 또는 열등감을 동기로 소설을 쓰려는 건 올바른 생각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누구한테 자존심이 상했다고, 그자가 인간답지 못한 자라고 해서 문학을 복수의 도구로 삼으면 안 된다.

문학이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니었다.


울적한 마음에 뒷산 산책을 하던 어느날 나무한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죽이려는 놈한테는 한이 맺혔으면서 나 때문에 잘려나간 나무 생각은 전혀 안 하고 살았구나.’


인간화의 동기를 제공했던 작가에 비하면 미미한 양의 책을 찍은 건 맞았다. 잘 나가는 작가들이 식목일에 묘목을 기증했다는 얘기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래도··· 착해지기라도 해야지. 몇 권 팔아먹지도 못 했지만, 그놈들보다 내가 나은 것도 없으니··· 나무들한테라도 미안해 해야지.’


그러다가 ‘나무를 심은 사람’이란 책을 봤다. 황무지를 생명이 숨 쉬는 아름다운 숲으로 일구어 낸 말 없는 한 사람의 감동적인 이야기.

그 책을 읽고 나니 그 동안 나무를 베게 한 게 더욱 미안해졌다. 본인 책 때문에 잘려나간 나무는 그리 많지 않았지만 직장이 출판사였으니까 뭐···


그리하여 염소준 작가는 월급을 아껴 모은 돈으로 버려진 민둥산을 사서 나무를 심었다.

‘나무를 심은 사람’의 주인공처럼 많이 심지는 못했다. 그런데 그 산 밑으로 도로가 나고 인터체인지가 생기고 휴게소가 생겼다. 그래서 제법 푸릇푸릇해진 산을 팔았다.

뭐 그 산에 나무를 더 심을 필요는 없었으니까.


결과적으로 나무를 심으려던 마음 덕분에 큰 돈을 벌었다. 책으로도 나무로도 돈을 번 게 아니라 부동산으로 돈을 번 거다.


한데 돈이 많아지니까 그걸 뜯어먹으려는 놈들이 생겼다.

어느 날 자신을 이용해 먹으려는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스트레스를 받아서 지폐를 몇 장 씹어먹었다. 흑염소 시절에 많이 먹었고 출판사 근무 중에도 종종 종이를 먹었었지만 돈은 좀 달랐다. 특수 재질 종이라 그런지 영 맛이 없었다. 심히 질겼고.

그런데 그게 화제가 됐다.


‘돈을 씹어 먹는 놈’

주변 사람들이나 좀 알겠거니 하고 방심했는데··· 그 이후로 이상한 놈들이 꼬이기 시작했다.


* * * * * * * * * * * * * * * * * * *


“음··· 그리고 나서 협박범이 찾아왔나 보죠?”

한참 염선생의 과거 이야기를 들었다.

듣는 나는 지루하지는 않았는데 오히려 말하는 염선생은 재미없는 이야기라며 미안해 했다.


참으로 마음 약하고 선량한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을 괴롭히는 협박범은 당연히 혼쭐을 내줘야 한다.

문제는 공개적으로 수사하고 기소하는 걸 피해자가 원하지 않는다는 거지만···


“네. 소문이란 게 무섭더군요. 아무리 스트레스를 받아도 함부로 버릇을 드러내지 말았어야 했는데···”

“선생님 잘못이 아닙니다. 협박한 놈들이 나쁜 놈이지 피해자 탓이 아닙니다.”


당연한 얘기를 했는데도 염선생은 감격한 눈치였다.

중간자가 아닌 오리지널 인간한테 처음 정체성을 고백하고 인정받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좋게 생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리지널··· 원주민 중에도 이해심 있는 분이 계시니 다행이네요.”


감사를 표하면서도 경계심을 완전히 풀지는 못 하는 눈치였다. 아무리 중간자 친구들이 좋게 소개해 줬어도 나를 믿기는 쉽지 않을 것 같았다.


“대략 얼마 정도 갈취를 당하셨어요?”

“일 억이 조금 넘을 겁니다.”


이런 썩을 놈들. 내가 숨만 쉬면서 2년 동안 월급을 몽땅 모아도 못 만들 거금을···


“어떤 식으로 얘기를 하던가요?”


휴우~ 아픈 기억을 떠올리니 한숨이 나오는 모양이었다. 염선생은 잠시 천장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40대로 보이는 남자와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찾아왔다고 했다.

20대 후반의 남자는 상스럽게 행동하면서 겁을 주다가 40대가 눈짓을 하자 자리를 떴다고 했다. 중간자라는 정체성에 대해 언급하면서 구체적인 협박을 한 건 40대였다고 했다.


“생긴 거나 분위기 말투 같은 거, 생각나는 대로 얘기해 주실래요?”


두목 같아 보이는 40대는 겉보기에는 전혀 범죄자 같지 않았다고 했다. 얼핏 봐선 아주 평범하고 차분한 인상이었다는 거다.


“그냥 학교 선생이나 사무직 공무원 같은 느낌이었다고 할까요? 그러면서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아우라 같은 게 느껴졌어요. 보통 사람은 넘을 수 없는 선을 넘은 자라고 할까요? 뭔가 잔혹함을 속에 담고 있는 존재 같았죠.”


왕년의 소설가라 그런지 말하는 게 뭔가 문학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어떤 식으로 협박을 하던가요?”

“당신 정체를 알고 왔다. 우리 입에 종이돈을 물려주면 입이 가벼워지지 않을 거다. 그 말 듣자마자 알았죠. 아, 다 알고 왔구나. 큰일 났다. 중간자들 정보를 아는 악당이 있구나.”


놈은 차분하다는 인상 그대로 조용조용 염선생을 협박했다고 했다.


“우리하고 의견 차이를 못 좁히다가 염소준 씨가 사망해도 별일 없을 거예요. 수사도 안 하겠죠. 왜 주택가에 흑염소 사체가 있지? 이런 의문만 남겠죠. 이웃 사람 몇몇 정도 궁금해 할 거예요.”


그리고 놈은 염선생 한 명이 아니라 그의 친구들을 언급하기 시작했단다.

“일대 혼란에 빠지겠지요. 염선생이 아는 중간자들 커뮤니티가 말입니다.”


악당은 주변 사람들을 생각하는 염선생의 착한 심성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걸 이용해서 협박을 이어갔다.

“흑염소 사체만 나오는 게 아닐 거예요. 염선생께서 협조를 안 해 주셔서 우리 애들이 흥분하면 자주 만나시는 술친구 양박사는 꼬치구이 되는 거고, 포장마차하는 마종대는 말고기가 되겠죠.”


그런 말을 들으면 신고할 데도 없는 마음 약한 중간자 입장에서 돈을 줄 수밖에 없었을 거다.

염선생은 거액을 뜯겨서 괴로운 입장이면서도 다른 중간자들을 걱정했다.


“내가 돈을 준 게 오히려 놈들의 기를 살려준 게 아닐까? 나한테 뜯어내는 데 성공했으니까 다른 친구들까지 괴롭히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되더라고요.”


역시 착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내 질문에도 최대한 꼼꼼히 답하려고 애썼다.


“또 한 놈 20대로 보였다는 놈은 어땠어요?”

“인상이 안 좋았죠. 일단 험상궂고 눈도 삐딱하게 뜨고. 그리고··· 말을 이상하게 했어요. 쌍욕하고 그러는 건 깡패니까 당연하겠지만. 뭔가 너무 짜증나게 말한다고 할까? 협박을 하고 겁을 주면서도 앞에 하는 말하고 뒤에 하는 말이 죄다 안 맞아 떨어졌어요.”


어이쿠, 이거 우와 캐피탈! 늑대파가 악의 본진 맞는 듯!

왜냐고? 염선생 말씀에서 당연히 빡대가 떠올랐으니까.

나는 기철이 형한테 전송받았던 빡대의 사진을 휴대폰으로 염선생한테 보여 줬다. 아직 쌍수하기 전, 수염 기르기 전, 그러니까 염선생이 봤던 시절 얼굴일 거다.


“어! 비슷해요. 이 사람 맞는 거 같아요!”


우와! 우와 캐피탈 이놈 시키들! 쫌만 기다려라.

수사를 어떻게 할지, 공식적으로 잡아들여도 될지, 정하진 않았지만 뭔가 큰 그림이 보이는 느낌이었다.

악의 무리들에게 정의의 펀치를 날릴 시간이 도래하고 있도다!


그리고··· 그 펀치를 날리러 오라고 전화가 왔다. 기철이 형이었다.

“주성아! 빡대 찾았다! 얼른 일로 와!”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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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4

  • 작성자
    Lv.5 ki****
    작성일
    24.02.08 11:56
    No. 1

    재미있다....
    작가님 설 잘 보내시고, 복도 많이 받으시고, 잼난 글도 많이 올려주세요!

    찬성: 1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2 신성치
    작성일
    24.02.08 13:43
    No. 2

    내일모레면 진짜 용띠 해네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십쇼!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5 sa*****
    작성일
    24.02.13 05:53
    No. 3

    무릇 글쟁이라면 원고지를 보고 구름을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고...
    염소준! 크게 될 작가네요. ㅎㅎ

    찬성: 1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2 신성치
    작성일
    24.02.13 07:06
    No. 4

    긍정적으로 봐주는 독자께서 진정 챔피언이십니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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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개를 데리고 걷는 여자 24.04.05 10 2 13쪽
62 축소된 말의 귀 +2 24.04.05 13 3 12쪽
61 밴이 찾아왔다. +1 24.04.03 15 3 12쪽
60 아내가 있는 방 +3 24.04.01 14 3 12쪽
59 아이 없는 숨바꼭질 +2 24.03.29 18 3 12쪽
58 베타 테스트 +4 24.03.27 16 3 12쪽
57 두 개의 그린Green +2 24.03.26 13 4 13쪽
56 아빠의 눈물 +2 24.03.22 19 4 14쪽
55 멀더와 스컬리 +2 24.03.20 13 3 13쪽
54 사슴 소녀의 그림자 24.03.20 12 3 12쪽
53 가녀린 목소리 +2 24.03.19 12 3 13쪽
52 몬순 monsoon 바뀌는 풍향 +2 24.03.15 17 3 13쪽
51 밝은 밤, 어두운 밤 24.03.14 15 3 12쪽
50 사랑과 재채기, 그리고 +2 24.03.12 20 3 15쪽
49 텅 빈 집, 꽉 찬 집 24.03.12 14 3 14쪽
48 무지개 뜬 날 +2 24.03.07 13 3 13쪽
47 내 꿈 꾸지? 24.03.07 14 3 12쪽
46 다시 생각해 +4 24.03.05 21 3 13쪽
45 후폭풍 24.03.04 12 3 12쪽
44 작은 뿔의 종결 24.02.29 16 3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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