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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치 님의 서재입니다.

변신한 짐승이 당신 옆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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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치
작품등록일 :
2023.12.26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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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01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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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멸종된 그늘

DUMMY

미랑과 옥,희가 급하게 시골집으로 달려온 것과 온 세상을 뒤집어 놓은 시끄러운 사건이 관련돼 있느냐는 질문. 엄청난 무게로 미랑을 짓누르는 질문. 미안하고 괴롭지만 미랑이 답해야만 하는 질문.

각오하고 있었고 피할 수 없다는 걸 알았지만··· 대답하자니 가슴이 미어지는 건 미랑도 어쩔 수 없었다.


“네.”

자신 앞의 시아버지와 시할아버지를 향해서 미랑은 짧지만 분명하게 대답했다.

시아버지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눈을 감았고, 시할아버지는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성이는 형사고··· 너희 식구들은 심지어 옥,희까지··· 기도원 난리굿 때부터 이상한 짐승들이 날뛰는 판 가운데 있었다. 그러니까 네가 아이들이랑 온다고 했을 때, 나나 네 시애비 모두 짐작이 갈 수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생긴 문제들이 있어요. 주성 씨도 중간에서 곤란하게 됐어요.”


잠시 나이 든 두 남자는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가 시할아버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게··· 일종의 출생의 비밀 또는 정체성 문제 같은 거냐?”

“네. 속인 거나 마찬··· 아니 제가 속였던 거예요. 말씀 못 드려서 죄송합니다.”

“그냥··· 말 못할 사정이 있었다고 해 두는 게 낫겠구나.”


온갖 뉴스와 영상을 접했던 두 남자도 낮부터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시할아버지는 적절한 질문을 찾는데 시간이 걸렸다. 숨쉬기에도 뻑뻑하게 느껴지는 침묵이 이어지다가,

“부부 사이에··· 주성이랑은 서로 다 얘기하고 결정하는 거냐? 속에 숨기는 거 없이?”

“네.”

시할아버지의 매우 절제된 질문에 미랑이 짧게 답했다.

“그래. 너희 둘이 남한테 해끼칠 결정을 했을 리가 없다. 난 믿겠다.”


고맙다고 대답을 하려는데 울컥 목이 메어 왔다. 미랑은 아무 말 못 하고 고개를 숙였다. 대신 시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아버지.”

“와이?”

“뭐라고 설명은 잘 못하겠는데, 주성이도 나처럼 되는 거 아닌지··· 난 여우한테 홀렸다가 평생 그 후, 후유증을 겪은 거 같거든요. 살면서 내내···”


‘여우한테 홀렸다’는 표현에 미랑은 가슴이 철렁했다. 시아버지가 미랑의 정체를 알고 한 얘기는 아니겠지만···

“아버님께··· 무슨 일이 있으셨는데요···?”

“주성이 낳고 얼마 안 돼서 사라져버린 마누라 얘길 하는 거다. 너 싫다고 사라진 여자 때문에 여태 가슴이 아플 순 있지. 그래도 이 타이밍에 그 얘길 꺼내는 건 넌센스다. 자중해라.”


시할아버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유교 아저씨인 시아버지는 토를 달지는 못했지만 수긍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는 자기 아버지와 논쟁을 벌이는 대신 마음을 가라앉히고 미랑에게 당부했다.


“지금··· 여기저기서 여러 가지 문제들이 터지고 있는데··· 내가 알아야 될 게 있으면 적당한 시점에 알 수 있게 해 줘라.”

미랑이 보기에 의외로 시아버지는 너그러웠다. 일단 우리편이 됐으면 믿고 돕는다는 대대로 지켜온 가풍 덕이었다.


* * * * * * * * * * * * * * * * * * *


경찰청에서 나온 나는 집에 들렀다가 미랑의 차를 몰고 시골집으로 달렸다.

휴대폰을 끄고 톨게이트 통행료도 현금으로 계산했다. 누군가 나와 미랑을 찾거나 뒤쫓는 자들이 있다면 그들을 조금이라도 힘들게 만들려는 의도였다.

미랑과 옥,희는 나보다 먼저 고속버스로 이동했고, 아버지가 트럭을 몰고 터미널에 가서 며느리와 손주들을 태워왔었다.


미랑과 옥,희가 오고 나서 한 시간만에 시골집에 도착했다.

집에 오래 머물 생각은 없었다. 미랑과 나를 잡으려는 자들이 나타날 수도 있으니까. 우리 부부가 그들과 맞닥뜨린다면 아이들과 노인들에게 흉한 모습을 보일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아버지와 할아버지께 인사를 드린 다음 아이들이 잠든 걸 보고 집을 나섰다.


“옥,희 애비야.”

그랜파는 당신 방에서 문을 열고 손을 흔드는 걸로 배웅을 마치셨다. 결혼한 다음부터 나를 옥,희 애비라고 부르는 아버지는 차를 세워 놓은 집 앞까지 따라 나오셨다.


“잘 해 보려고··· 결심한 거지?”

미랑이 먼저 조수석에 타자 아버지는 나한테 말을 건넸다. 평소보다도 더 어눌하게. 끄덕끄덕 나는 고갯짓으로 긍정의 답을 했다.


“잘 될 거라고··· 희망이나 의지 같은 게 있는 거냐?”

“네.”

“그럼 됐다.”


그리고 아버지는 주머니에서 돈뭉치를 꺼내 나한테 건넸다.

뭉치라고 말하니까 무지하게 거액 같지만··· 5천원 지폐까지 다 합쳐서 30만 원 정도였다. 약초꾼이 지닌 현금치곤 많았다.


“아니에요. 애들 때문에 저희가 돈을 드려야 되는데···”

나는 당연히 사양했는데··· 아니 이 양반 그걸 즉시 콜 하시네.

“그럼 반띵.”

아버지는 지폐 뭉치를 대충 반쯤 덜어낸 다음 나한테 내밀었다. 그건 받았다.


“더 필요한 건··· 우리가 도와줄 건 없는 거냐?”

“아버지··· 혹시 휴대폰은···”

그러자 아버지는 흔쾌히 주머니에서 표면에 실금이 많이 간 오래된 폴더폰을 꺼냈다.


“이게 워낙 알뜰하게 쓰던 거긴 한데··· 인터넷 검색도 되고, 톡, 영상통화 될 건 다 된다.”

“쓰셔야 될 텐데···”

“일주일에 한두 통 쓸까 말까다. 제비다방 망한 후로는···”


거기까지 말씀하실 필요는 없었는데··· 어쨌거나 연락 잘 안 하는 아들로서 쏘리였다. 나는 아버지의 폰을 받은 다음 곧바로 시동을 걸어 서울로 향했다.



내 명의의 휴대폰과 경찰서에서 지급된 공용폰, 미랑의 휴대폰 모두 전원을 꺼버린 채로 이동했다.

조수석에서 미랑이 아버지 폰으로 잠깐 뉴스를 검색해서 세상에 난리가 난 걸 다시 확인했다. 공영방송 뉴스에 미랑이 변신한 채 시내를 걸어가던 장면까지 나오고 있었다.


“끄고 가요.”

“알았어요.”


미랑은 흥분해서 변신했던 일을 후회하고 있었다. 아니 미랑의 괴로운 심정을 표현하려면 후회라는 말보다 천 배, 만 배 강력한 단어가 필요했다.

지워버릴 수 있다면, 도망가서 잊어버릴 수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미랑은 말할 것도 없고 나부터 그런 심정이었다.


“우리는 빠져나갈 수가 없어요.”

“미안해요. 주성 씨.”


앞을 보고 차를 몰면서도 나는 고개를 저었다.

처음에 서울 시내 골목에서 미랑이 변신했던 건 스패너를 든 깡패한테서 나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지난 낮에 또 시내 한복판에서 변신한 것도 결국 내 의심 때문이었다.

되려 미안한 건 나라고 말하자 이번엔 미랑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떨리는 음성으로 그러나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야. 그렇게 생각하면 안 돼요. 우리가 책임지고 우리가 끝까지 싸우더라도. 잘못은 우리 게 아니야. 일부러 공개한 놈들. 그놈들이 나쁜 거야. 이 난리는 결코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야. 중간자들 이용해온 놈들이 계획을 바꾼 거라고.”


미랑은 의식적으로 분노를 키우는 것 같았다. 단호한 결심으로 두려움을 이겨내고 있었다.

나는 이번에는 확실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미랑의 결심에 동참하겠다는 표시였다.


그리고··· 미랑 말이 맞았다. 우리 죄가 아니었다.

뒤에서 이 난리를 꾸민 놈들이 있었다. 우리가 그놈들에게 유도되기는 했다. 하지만 일부러 중간자란 존재를 터뜨리려는 자들이 없었다면 그냥 해프닝이었을 거다. 미랑의 변신 활보는 K-분장의 힘을 보여 주는 밈이 됐을 거다.


“분명히 멀더랑 스컬리 쪽에서 일을 벌인 걸 거예요. 중간자 존재를 까발려서 다른 쪽으로 이용하려는 거겠죠. 산이란 산을 싹 다 밀어버리고 개발을 하든, 공포 분위기 조성해서 세상을 얼려놓고 뒤에서 무슨 공작을 벌이든···”


휴게소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TV 뉴스속보를 보고 아버지 휴대폰을 열어서 세상 돌아가는 상황을 확인했다.

여자가 뱀으로 변신하는 올타마 영감의 유튜브 영상 조회수는 300만이 넘어 있었다. 황대호 체포 작전 뉴스 영상은 방송사 채널만 500만, 나머지 군소 채널에서 관련 영상으로 떠들어댄 것까지 합치면 1000만이 넘었다. 미랑이 찍힌 영상. 여우 여인, 구미호 실사판 도심 활보. 이것도 150만 돌파. 같은 소재의 다른 채널 영상까지 합치면 250만이 넘었다.


평소 유튜브 들여다 보는 인간들은 모두 중간자 영상을 봤다 해도 될 정도였다. 가장 인기 있는 쇼츠는 황대호가 개를 뜯어내는 장면 앤드 사슴소녀가 뱀 여인으로 변신하는 장면이었다.


외신에서 소개된 영상들과 외국 유튜버들이 만든 영상들도 무진장 올라와 있었다.

미국 전직 대통령 크럼프와 늑대를 합성한 영상, 광견병 걸려서 거품 문 개가 크럼프로 변신하는 영상도 있었고, 늙은 염소가 나이든 현 대통령으로 변신하는 영상도 있었다. 전직 농구 스타 테니스 로드맨이 지네 같은 흉물스런 벌레와 반반으로 섞인 영상도 엄청난 조회수를 기록 중이었다.


“엄청난 신드롬이구만.”

나와 미랑은 허탈해져서 마주보고 웃었다. 휴··· 이 시점에서 확실해진 게 있었다. 이제 중간자들은 더 이상 숨어 있을 수 없었다.

휴게소 화장실에 들렀다 나오면서 생각해 봤다. 뭔가를 알게 된다는 것, 누군가에게 알려진다는 것··· 이런 것들은 다 긍정적인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차로 걸어가면서 혼자 질문하고 혼자 고개를 저었다.



새벽 다섯시가 돼서 서울로 들어왔다. 이제 잠깐 눈을 붙이고 쉬었다가 대혼란 속으로 뛰어들어야 했다.


“집으로 갈까? 아니면 숙박업소?”

내 질문에 미랑은 고개를 저었다.

“어느 쪽으로 가는 거에 반대예요?”

“둘 다요.”

집에 가는 건 감시망 속으로 들어가는 기분. 숙박업소는 도망자가 된 우울함이 가중될 것 같아서 싫다는 거였다.


“도망자가 된 거는··· 맞지 않나?”

“그렇긴 한데··· 오래 머물 것도 아니고··· 있으면 좀 마음이 안정되는 장소였으면 해서···”


러브 호텔 같은 업소가 정서 안정에 좋을 것 같진 않았다. 미랑은 잠시 고민하다가 체육관으로 가자고 했다. 결혼 후 며칠 간 집을 나갔을 때 미랑이 머물던 곳. 오전 열 시까지는 아무도 안 오는 곳.


미랑이 보안장치를 해제하고 들어가서 체육관 마루바닥에 매트리스를 깔았다.

나는 양말을 벗고 매트리에 누웠다. 두 시간 남짓 눈을 붙일 시간이 있었다. 쉬는 건 중요했다. 각성 상태가 계속되는 건 두뇌와 몸뚱이 작동에 역효과를 초래할 테니까.


잠을 청하려고 눈을 감으니까 체육관으로 미랑을 찾으러 왔던 밤이 생각났다.

미랑은 나를 보고 반가워서 점프를 했었다. 그리고 재주를 펄떡펄떡 넘었었다. 기계 체조 기술 구사라기보다는 솔직한 감정, 동물적인 반가움을 그대로 드러낸 거였다. 그리고 우리는 뜨거운 몸과 마음을 확인했었다. 이 체육관, 이 매트리스 위에서.


사실 나는 그날 어떤 결심을 했던 거다. 깨달음이랄까, 생각의 변화랄까. 머리와 가슴에 새로운 바람이 스며들었던 거다.

괜찮다. 뭐 어떠냐? 나를 보고 미랑이 펄쩍펄쩍 뛰고, 아오오오! 기묘한 소리를 지르는 게 뭐가 나쁘냐? 그게 여우의 본성이든 인간의 애정이든 굳이 따질 필요가 있냐!


그때 생각을 하니까 스르르 미소가 지어졌다. 옆에 누웠던 미랑의 눈이 동그래졌다. 왜 그러냐 묻는 호기심의 눈.


“재주 넘어 볼래요? 마루 운동 점프.”

웃으면서 내가 말했다.

“지금?”

어이없다는 듯 미랑도 웃었다. 내 요청대로 점프를 하지는 않았다.


“내가 해볼까? 어릴 땐 됐었는데.”

물론 미랑과 같은 마루운동 동작은 아니었다. 마루를 두 손으로 짚고 옆으로 도는 재주넘기. 한 바퀴는 성공, 와우! 그런데 두 바퀴째, 꽈당!


마룻바닥에 널부러진 내 손을 잡고 미랑이 나를 일으켰다.

내 체중쯤은 간단히 일으키는 미랑의 힘 덕에 내 몸이 미랑 곁으로 바짝 당겨졌다. 어둠 속에서 내 아내의 눈이 촉촉이 빛을 내고 있었다. 나는 애써 균형을 잡지 않고 당겨지던 그대로 미랑에게 몸을 기댔다. 그리고 팔을 벌려 살며시 아내를 안았다.


폭신하고 따뜻한 감각이 나에게 스며들었다. 오랫동안 피로를 견뎌온 두 눈이 스르르 감겼다. 잠이 올 것 같았다.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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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돌아온 비구니 24.05.24 10 1 12쪽
88 빛 바랜 컬러 사진 24.05.23 8 1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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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한 걸음 먼저 24.05.21 7 1 12쪽
85 너희가 스며든다면 24.05.19 8 1 13쪽
84 Before & After +2 24.05.16 13 1 12쪽
83 머리카락이 보이면 24.05.15 8 1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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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손톱을 먹은 쥐처럼 24.05.11 11 1 15쪽
80 덫과 구렁 +2 24.05.08 10 1 13쪽
79 숨거나 덤비거나 24.05.07 11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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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이종족 색출 24.05.02 11 1 12쪽
» 멸종된 그늘 +2 24.05.01 13 1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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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씹다 멈춘 껌 24.04.26 12 1 14쪽
73 공무집행 방해 24.04.25 10 1 12쪽
72 사냥 중계방송 24.04.24 9 1 12쪽
71 사냥개들 24.04.23 8 1 12쪽
70 왕따는 선량한가? 24.04.18 9 1 12쪽
69 빈 책상들 24.04.18 12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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