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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구석 님의 서재입니다.

F급 무한재생 헌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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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구석
작품등록일 :
2023.11.26 0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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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1 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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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19화

DUMMY

모든 일로부터 이틀이 지났다.

그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으어어어어⋯.”


그래서 심심해 죽을 것 같다.


“하아⋯.”


약 2주간, 너무 힘든 시간을 보낸 나는 한 달 정도는 푹 쉴 예정이었다.

하지만 피로 따위는 휴식 하루 차인 어제 다 풀렸고 이틀 차인 지금은 벌써 지루해 죽을 것 같았다.


“하긴⋯ 내가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옛날엔 뭐 하고 놀았더라, 분명 놀기만 해도 시간이 부족할 때가 있었던 것 같긴 한데⋯ 가게도 쉬고 훈련도 안 하는 지금 난 대체 뭘 해야 하는 건지 시간 속에서 헤매고 있었다.


- 우우우웅!


침대에 누워 그저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고 있을 때 김지호 덕분에 4년 만에 최신 기종으로 바꾼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역시 신형이라 그런지 진동도 우렁찼다.


“뭐지?”


번호도 바꿨으니 또 문자 테러는 아니겠지만 하도 시달리다 보니 확인하기가 무서웠다.

하지만 돈이 준비됐다는 김지호의 연락일 수도 있으니⋯ 보긴 봐야겠지.


- [뭐해?]


그런데 나에게 연락한 인물은 너무나 뜻밖의 인물이었다.

나는 아직 새 스마트폰에 적응을 못 해 뭘 잘못 보고 있나 다시 확인해봤지만 맞았다.

내게 연락한 사람은 다름 아닌 아린 누나였다.

언제든 연락해도 된다고 했지만 이렇게 빨리할 줄은 몰랐는데.


- [아무것도 안 해.]


진짜 아무것도 안 하고 있어서 사실대로 대답했다.

내가 답장하자 상대가 메시지를 읽었는지 알려주는 1 표시는 곧장 사라졌지만 누나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몇 분 뒤.


- [방금 레이드 끝났는데 놀러 갈래?]


그런 답장이 돌아왔다.




***




약속 장소인 훈련장으로 향하는 내내 많은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놀러 가자니, 어딜 가자는 말이지?’


근데 왜 놀러 가자고 해놓고 훈련장으로 불러?

설마 놀러 가자고 유인해서 또 무슨 훈련 시키려고 하는 건 아니겠지?

아니면 이거 혹시 누나가 아니라 김지호가 부른 건가?

천만 원도 아끼고 입막음도 확실하게 할 겸 아예 끝장내버리려고?


“아! 왔어?”


나는 갖은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내게 닥칠지 모를 위험을 시뮬레이션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내가 아는 그 모습의 아린 누나가 날 반길 뿐이었다.

훈련할 때는 매일, 아니 사실상 24시간 붙어있었으니 어색할 겨를이 없었는데 겨우 하루 안 봤다고 누나가 뭔가 되게 낯설고 서먹하게 느껴졌다.

큰 은혜를 입었지만 아직 마음의 문을 완전히 열진 못한 것 같다.


“잠깐만, 빨리 정리할게!”


누나는 레이드를 다녀와 막 손질을 마친 갑옷과 각종 무기를 보관함으로 옮기고 있었다.


“나도 도와줄⋯!”


이제 나름 근력도 세졌고 뭐라도 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바닥에 놓인 비교적 만만해 보이는 작은 단검 하나를 들어보았다.

들리진 않고 겨우 까딱거리기만 했다.


“⋯기다릴게.”


아, 그냥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거구나.

빠르게 주제를 파악한 나는 괜히 길이나 막지 않게 자리를 비켜주었다.


“휴, 다 했다⋯ 저기⋯ 준호야, 불러 놓고 미안한데 나 좀 씻고 와도 될까?”


준비가 끝나면 부르겠다는 걸 심심해서 바로 달려온 건 나였다.

나는 천천히 씻고 오라고 했고 약 20분 뒤 깨끗한 새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은 누나는 아직 덜 마른 머리카락을 손으로 탈탈 털며 돌아왔다.

괜히 일찍 와서 재촉했나?


“기다렸지! 가자!”

“어⋯ 근데 어딜?”


심심해서 일단 오긴 왔는데 뭘 하자고 부른 건지는 몰랐다.

내가 그렇게 묻자 누나의 걸음이 뚝 멈췄다.

저거 100% 아무 생각 없다가 방금 깨달은 반응이다.


“그, 그건 생각 안 했는데⋯.”

“그래서 내가 생각해놨어.”


그럴 줄 알고 대충 생각해 놓은 곳이 몇 가지 있었다.

갑자기 연락해서 놀러 가자고 하니 당황스러웠지만 누나가 뭐 의미를 꼬거나 다른 의도를 가지고 말할 사람은 아니니 오늘 하루 진짜 그냥 놀면 되는 일이었다.

물론 나는 재밌게 노는 것과는 거리가 있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쉬는 날 기분전환 겸 혼자 이곳저곳 돌아다닌 덕에 오늘 한나절을 보낼 코스 정도는 금방 머릿속에 그려졌다.


“밥은 먹었어?”

“던전에서 먹었어, 그런데 준호 안 먹었으면 한 번 더 먹어도 괜찮아!”

“아니, 나도 먹고 와서 물어본 거야. 그럼 카페라도 가서 오늘 뭐 할지 정해볼까?”

“그래, 좋아!”


괜한 기대감을 주지 않기 위해 적당히 말했지만 사실 카페부터가 오늘 코스 중 하나였다.

훈련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상당히 괜찮은 카페가 하나 있다.

커피를 담당하는 사장님은 이탈리아인이고 빵을 담당하는 사모님은 프랑스인으로 각 분야를 대표하는 두 국가 출신의 외국인 부부가 운영하는 카페라니, 거의 치트키 수준의 조합이다.


“⋯⋯⋯.”

“안 잤어?”


카페로 이동하던 중, 누나의 눈이 또 점점 가늘어지길래 물었다.


“응.”

“⋯설마 밤새 훈련하다 바로 던전 들어간 거야?”

“응.”

“왜?”

“그냥 원래 그러는데? 레이드는 보통 2, 3시간이면 끝나니까 끝내고 자려고.”

“뭐?”


누나가 어째서 단 한 번도 말똥말똥한 상태로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는지 그 비밀을 드디어 알아냈다.

보통 레이드를 앞둔 헌터는 푹 쉬며 만전을 기하기 마련인데 이 미친 사람은 밤새 훈련에 몰두하다 낮에 후다닥 레이드를 해치우고 자러 가기 때문이었다.


“오늘 참가한 레이드는 등급은?”

“뭐더라? C? 아닌가, B였나?”

“자기가 참가한 레이드 등급을 몰라?”

“A랑 S 아니면 거기서 거기니까.”


이게 A급 헌터의 품격인가.

A급 밑으로는 거기서 거기라니, 더 높은 등급의 던전에 도전하기 위해 뼈를 깎는 노력을 하는 다른 헌터들이 들으면 피눈물 흘릴 말이었다.


“와! 예쁘다!”


카페에 도착하자마자 누나는 반쯤 감겨있던 눈을 번쩍 뜨며 탄성을 뱉었다.

기대하던 반응이 나와 뿌듯했다.

이곳은 커피나 음식의 맛도 좋지만 인테리어도 창밖을 보지 않으면 유럽에 와 있다고 착각이 들 정도로 잘 꾸며놨기에 그럴 만했다.


“뭐 마실래?”

“음~ 잠깐만~.”


점심시간이 지나 한산한 카페 안에서 느끼는 은은한 커피향과 따사로운 오후의 햇빛, 달그락거리며 식기를 정리하는 백색소음.

정말이지 평화롭기 그지없는⋯.


“나 그거 마셔볼래! 아이스 아메리카노!”


여유롭게 접시를 닦고 있던 사장님이 스윽, 이쪽을 돌아봤다.

나와 눈이 마주쳤지만 사장님은 결코 눈을 피하지 않았다.


“가, 갑자기 그건 왜?”

“일할 때 다들 그거 마시던데? 난 한 번도 안 마셔봐서 궁금했거든.”

“그, 그건 맛없어⋯!”

“맛없어? 맛없는데 다들 왜 먹는 거지?”

“맛 때문에 먹는 게 아니라 물약처럼 살려고 먹는 거라 그래⋯! 그런 거 말고 마키아토 같은 건 어때?”


이대로는 뭔가 안 좋은 일이 벌어진다.

그런 직감이 든 나는 예전에 카페에 방문했을 때 사장님이 여담으로 알려준 이야기가 생각나 마키아토를 추천했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우유=아침 식사라는 인식이 있어 오후엔 라떼나 카푸치노 같이 우유가 들어간 커피는 잘 마시지 않고 대부분은 에스프레소를, 정 우유가 들어간 커피가 마시고 싶으면 마키아토를 정도를 마신다고 했다.


“아~ 마키아토! 그것도 들어본 것 같아, 난 좋아!”


다행히 누나는 내 제안을 수긍해주었고 다시 사장님 쪽을 돌아보자 사장님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식기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일이야?”


주문한 커피를 마시며 물었다.


“뭐가?”

“솔직히 말하면 갑자기 놀자고 해서 조금 당황했거든.”


당황스럽다고 할까 얼떨떨하다고 할까, 상상조차 하지 않던 일이 갑자기 일어났다.


“음⋯ 그게⋯ 실은 예전부터 친구랑 놀러 나가보는 게 꿈이었거든.”


누나는 부끄럽다는 듯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근데 이게 뭔 소리야?

이해되지 않는 포인트가 한두 곳이 아니라 어디서부터 어떻게 질문을 해야 할지 잠시 말문이 막혔다.


“누나, 혹시⋯ 친구 없어?”


그래서 단도직입적으로 질문했다.

어감이 좀 뭐 하지만 괜히 돌려 말하다간 근본적인 의문이 해결되지 않을 것 같아 이렇게 물었는데.


“⋯네가 처음이야.”


누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참 많은 의미가 담겨 있는 한마디였다.

25살에 친구를 처음으로 사귀었다는 점에서도, 나를 친구로 생각해준다는 점에서도.


“학교 친구는?”

“초등학교랑 아카데미⋯를 다니긴 했는데 한 달에 한 번 1교시만 출석하고 하교하는 식이라 딱히 아는 사람은⋯.”

“한 달에 한 번 1교시만? 그러고 졸업이 돼?”

“글쎄⋯ 잘 모르겠는데?”


예전에 길드와의 계약 건에 물어봤을 때도 그렇고 누나는 뭔가 자신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는 일에 대해서도 모르는 게 많은 것 같았다.

처음에는 그냥 맹한 구석이 있는 정도로만 여겼지만 이건 마치⋯.


“난 그냥 길드에서 하라는 대로 한 거라⋯.”


꼭두각시 같았다.

자신이 지금 뭘 하고 있는지도, 앞으로 어떻게 되는지도 모른 채, 그저 시키는 일에만 몰두하고 끝나면 다시 지시를 내려주길 기다리는 꼭두각시.

너무 과하고 무례한 표현일 수도 있지만 그렇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럼 아카데미 안 가고 하루 종일 뭐 했는데?”

“훈련했지?”

“어디서?”

“길드에서 헌터님들이랑.”


아카데미의 교관들도 대단한 사람들인 건 맞지만 그들은 헌터였다가 어떠한 이유에서, 이를테면 신체적, 정신적 문제로 일선에서 물러난 뒤 교관으로 재취업한 경우가 대다수다.

그러니 냉정히 말해 한물간 아카데미의 교관보단 여명길드의 뛰어난 현직 헌터들에게 훈련과 교육을 받는 게 질적으론 훨씬 우수할 것이었다.


“몇 살 때부터 그렇게 했는데?”

“8살 때부턴가?”

“몇 살 때까지?”

“그건 잘 기억 안나는데⋯ 아카데미 졸업하기 직전까지도 헌터님들한테 훈련을 받은 것 같아. 지금은 내가 더 강해져서 혼자 훈련하지만.”


하지만 그건⋯ 한참 또래의 친구와 선생님 등 많은 사람을 사귀고 이런저런 교류와 경험을 나누며 세상을 배워가야 하는 유년, 청소년기 아이의 정서발달엔 최악인 방법이었다.

누나가 태생이 착하고 정의로운 사람이라 다행이지 삐딱선 탔으면 뒤틀린 인격을 가진 자아도취 사이코패스 A급 헌터가 탄생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진짜로 내가 첫 친구라고?”

“진짜로.”

“아니, 그 사람들도 있잖아. 길드 동료들.”


길드의 헌터 동료는 일반회사의 동료와는 거리감이 달랐다.

서로에게 등을 맡긴 채 함께 죽고 사는 사이인 만큼 가족만큼이나 돈독한 경우가 꽤 흔했다.


“아⋯ 그게⋯ 내가 뭘 잘못 했나 봐.”


하지만 누나는 멋쩍게 볼을 긁었다.


“잘못했다니, 뭘?”

“이유는 잘 모르겠는데⋯ 다들 날 딱히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거든? 그런데 어디 놀러 가거나 회식 같은 자리에 나를 부르지는 않더라고⋯.”

“어⋯.”


그러니까 길드에서도 왕따라는 소리잖아?

나는 진심으로 놀라 입을 막았다.

대체 어떤 인생을 산 거야?


“그럼 지금까지 혼자 훈련이랑 레이드 딱 그 두 가지만 하면서 산 거야?”

“아니야! 취미로 드라마나 영화도 보고 책도 읽고 그랬어!”

“아니⋯ 어⋯ 그래, 훈련이랑 레이드만 하고 산 건 아니긴 한데⋯ 그 외에, 뭐 다른 취미나 활동 같은 건?”

“⋯⋯⋯⋯.”


누나는 대답하지 못하고 멍한 눈동자로 가만히 있었고 나는 그 텅 빈 눈동자에서 무언가를 읽어냈다.

저건 훈련과 레이드 외에 해 본 게 없어서 대답을 못 하는 게 아니라 남들은 훈련과 레이드 외에 대체 뭘 하고 사는지,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 그 자체를 아예 모르는 사람의 눈이었다.


“누나, 그럼 설마 카페에 와 본 것도 처음이야?”

“응! 그냥 누구랑 같이 외출해 본 게 처음이야!”


누나는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그냥 타인과 외출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지금 이 순간이 너무 즐겁고 행복하다는 듯이 말했다.

나는 잔에 반 정도 남아있던 에스프레소를 원샷했다.

쓰다.

하지만 겨우 이게 누나의 인생보다 쓸까?

세상에, 이런 외로운 사람이 있었을 줄이야.


“일어나, 가자.”

“응? 어딜?”

“어디든.”


나는 누나의 손을 잡아끌었다.


“하고 싶은 거 있으면 말만 해. 오늘 월북 빼고 아주 다 해 보자고.”


나는 오늘 하루, 내일 죽는다는 각오로 최선을 다해 놀아보기로 작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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