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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구석 님의 서재입니다.

F급 무한재생 헌터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현대판타지

새글

능구석
작품등록일 :
2023.11.26 0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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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03 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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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09 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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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17화

DUMMY

“크하하하하! 큰소리치던 주둥이가 막히기라도 했느냐?! 아까부터 조용하구나!”


그라고스가 나를 비웃었다.

솔직히 비웃을 만하다고 생각한다.


“어디 한 번 또 지껄여 보거라! 말할 힘도 남지 않았나?!”


그라고스는 곧 테르고스의 불씨를 얻을 생각에 아주 싱글벙글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벌써 하루 동안, 시간으로 따지면 거의 22시간 가까이 싸움을 지속해 왔음에도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테르고스의 불씨가 폭주하기까지 이제 5분 정도나 남았다.

나는 22시간 동안 수백, 수천 번의 공격을 시도했음에도 그라고스에게 조금의 데미지도 입히지 못했다.

솔직히 예상하고 있던 일이라 딱히 놀라거나 절망스럽지는 않았다.


제일 고생한 건 당연히 아린 누나였다.

A급 보스를 상대로 자신의 몸만 챙기기도 어려울 텐데 나까지 건사해줘야 했으니 얼마나 까다로울까.

심지어 누나는 그라고스에게 제대로 된 공격을 해서도 안 됐다.


내가 화로를 얻기 위한 조건은 데미지 점유율 20% 이상으로 그라고스 처지였다.

이 조건을 자세히 뜯어보면 그라고스의 전체 체력 중 20%를 깎으라는 게 아니라 그라고스가 죽기 전까지 입은 모든 데미지의 20% 이상을 차지하라는 뜻인데 그라고스는 A급 보스인만큼 뛰어난 회복능력도 가지고 있었다.


즉, 누나가 괜히 데미지를 입히면 내가 뻘짓거리를 하는 동안 그라고스는 그 데미지를 회복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내가 그라고스에게 입혀야 하는 데미지는 더 늘어난다는 소리였다.

저번 던전의 그 제단도 마찬가지고 이쪽 동네는 조건들이 참 악랄하기 그지없었다.


물론 우리가 통하지도 않는 공격을 계속하며 무식하게 한 가지 방법만 고집한 것은 아니었다.

먼저 누나가 내 창을 함께 쥐고 찔러 보는 방법을 써봤다.

누나의 힘과 마력이 실린 창은 간단히 그라고스의 비늘을 뚫고 들어갔지만 그렇다고 내가 데미지를 입힌 판정은 나지 않았다.


그래서 다음엔 투창을 시도해봤다.

내가 창을 꼭 붙들고 있으면 누나가 나와 함께 창을 던져 데미지를 입히는 순간엔 나만 창을 쥐고 있게 되는 식의 꼼수를 부려본 것이다.

하지만 역시 데미지를 입히는 힘의 근원이 누나의 것이라 그런지 이것도 내가 데미지를 입힌 판정은 나지 않았다.


누나가 그라고스의 단단한 비늘을 베어주면 내가 살갗을 찌르는 방법도 시도해봤지만 그라고스는 살갗마저 강철처럼 질기고 단단했고 눈알을 찌르는 방법도 시도해 봤지만 이 미친 괴물은 눈알마저 단단해 내 힘으론 창날이 전혀 박히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나는 데로 이것저것 많은 방법을 시도해 봤지만 시스템의 판정은 그리 허술하지 않았고 결국 아무 성과 없이 지금에 도달하게 되었다.


“포기하지 마. 아직 방법은 있을 거야.”

“응, 포기 안 했어.”


그렇게 오랫동안 힘겹고 불리한 싸움을 이어갔음에도 누나는 여전히 건재했다.

진짜 괴물은 그라고스가 아니라 그녀로 느껴질 정도였다.

이미 퀘스트 완료는 사실상 실패했다.

22시간 동안 아무 성과도 없었는데 고작 5분 만에 반전이 일어나길 기대하는 건 그냥 헛된 희망일 뿐이다.


“에휴, 그런데 잠깐 쉬자.”


그래서 나는 그냥 자리를 깔고 앉았다.


“에엥?!”

“누나 마늘 남았어?”

“어⋯ 으응⋯ 하나 남았어.”


내가 주저앉아버리자 누나는 적잖이 당황했지만 그래도 주머니를 뒤적여 마늘을 꺼내주었다.

싸움이 이렇게 길어질 줄이야, 배가 너무 고팠다.


“꼴사납구나,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발버둥 친 것도, 그 발버둥조차 끝까지 치지 못하는 것도. 허나 네놈에게 딱 어울리는 말로다. 크하하하하!”


내가 주저앉자 그라고스가 실컷 조롱했다.


“야, 말 시키지 마, 네 말대로 말할 기운도 안 남았으니까. 나 이제 불씨 폭주까지 한 5분 남았거든? 그때까지 그냥 좀 쉬자 우리. 갈 때 가더라도 좀 편하게 가게 해주면 서로 좋잖아?”

“⋯⋯⋯⋯.”


웃기게도 그라고스는 제 제안을 3초 정도 고민하더니 조용히 옥좌로 돌아가 앉았다.

자존심 상해서 대놓고 말은 못 하지만 솔직히 지도 힘들긴 힘든가 보다.


그라고스가 옥좌로 돌아가자 누나도 내 옆에 앉아 말없이 마지막 남은 마늘을 까주었다.

시장이 반찬이라더니 나는 생마늘의 향을 맡은 것만으로도 군침이 돌았다.

내 행동만 보면 이미 다 포기한 사람 같지만 누나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여기서 괜히 무슨 생각이냐 작전은 있냐는 둥 그런 걸 물어보다간 상대가 뭐라도 눈치챌 가능성이 있으니 그냥 날 믿고 맡기고 있다는 게 눈빛으로 전해졌다.


『 경고! [테르고스의 불씨] 흡수 실패! 』

- 테르고스의 불씨 폭주까지 00:04:11


나는 하염없이 흐르는 타이머를 보며 마늘을 씹었다.

시간이 흐르는 건 어떻게 늦출 수도 막을 수도 없었다.


『 경고! [테르고스의 불씨] 흡수 실패! 』

- 테르고스의 불씨 폭주까지 00:00:11


내 마지막 만찬이 될지도 모를 마늘을 천천히 음미하고 나니 10초 정도 시간이 남아 있었다.


“누나.”

“응?”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해보자.”


그렇게 말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 그라고스!”

“뭐지? 유언인가?”

“1라운드는 오케이! 내가 졌어! 깔끔하게 인정!”


『 경고! [테르고스의 불씨] 흡수 실패! 』

- 테르고스의 불씨 폭주까지 00:00:00


며칠간 가슴 졸이며 지겹게 보던 타이머가 드디어 끝났다.

타이머가 0에 달함과 동시에 몸이 점점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리고.


『 경고! [테르고스의 불씨] 흡수 실패! 』

- 테르고스의 불씨가 폭주합니다!


- 콰아아아아아!


온몸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으아! 아아아아악!”


뜨거웠다.

제단에서 겪었던 고통이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고통의 끝인 줄 알았는데 이건 그것보다 더했다.

왜 쓸데없이 이런 부분에서 한계점이 높은 거지.


“크하하하하하! 타올라라! 네 놈의 더럽고 하찮은 몸뚱이 따위 재 한 줌 남김없이 모조리 불타거라!”


그라고스는 불에 타며 고통스러워하는 나를 보며 즐거워했다.


“크하하! 크하하! 크하하⋯하하⋯하⋯ 응?”


하지만 그라고스가 무언가 잘못됐음을 느끼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체력 : 460(-110) / 570

체력 : 350(-110) / 570

체력 : 240(-110) / 570

체력 : 130(-110) / 570

체력 : 20(-110) / 570


『 전용특성 [힐링팩터] 가 발동합니다. 』


체력 : 570(+550) / 570


제단 때와 똑같았다.

나의 전용특성은 불씨의 폭주로 입는 데미지보다 더 빠르게 내 몸을 재생시켰고 그렇기에 나의 몸은 맹렬한 기세로 끝없이 불탈지언정 결코 죽는 일은 없었다.


와, 그나저나 위험했다.

누나와의 훈련으로 체력이 상승해 망정이지 예전의 나였으면 재생되기 전에 죽는 데미지였는데?

훈련하기를 천만다행이다.


“주, 준호야, 너 괜찮아?!”

“크아아악⋯! 아, 아프긴 한데⋯! 죽진 않을 것 같아⋯!”


불씨의 화력은 대단했다.

내 몸에서 멀어질수록 더 많은 산소를 공급받은 불꽃은 더욱 뜨겁게 타올랐고 그 온도는 A급 헌터인 누나조차 눈을 가늘게 뜨고 손으로 얼굴을 가려야 할 정도였다.


“야! 그라고스!”


그리고 그 말인즉.


“2라운드 시작이다, 씹새야.”


A급 보스 몬스터인 그라고스에게도 뜨겁다는 말.

나는 그라고스를 향해 달려들었고 작전이라고 하기도 민망한 내 작전을 눈치챈 누나도 활짝 웃으며 나와 보조를 맞춰주었다.


“어⋯ 어어⋯ 어어어!”


온몸이 활활 불타는 내가 멀쩡히 살아 움직이는 것도 모자라 자신에게 달려들기까지 하자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상황 파악이 되지 않은 그라고스는 옥좌에서 앉았다 일어섰다 엉덩이를 들썩이다 결국 몸을 던져 피신했다.


“어디가 인마! 옥좌의 주인이 옥좌를 버리고 도망을 가?! 넌 그러면 자격 없어!”

“이, 이게 어떻게 된⋯?!”


당황한 그라고스가 나에게 정신이 팔린 사이 누나는 그의 뒤통수에 돌려차기를 먹었다.


- 퍼억!


“크억!”


돌려차기의 충격에 그라고스는 인사하듯 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고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뒤통수에 매달렸다.


“크억! 모, 몸에 붙은 불나방 따위 때려죽이면 그만!”


역시나, 그라고스도 이 정도의 열기는 뜨거운지 꼴사납게 발을 동동 구르며 팔을 파닥거리더니 급히 나를 붙잡으려 손을 올렸지만.


- 까앙!


“크윽!”


검을 거꾸로 들어 칼날을 쥔 누나가 크로스 가드 부분으로 그라고스의 팔을 쳐내 방해했다.

날 부분으로 그냥 베었다간 데미지를 입을 테니 내가 그라고스를 충분히 요리하는 동안 데미지는 입히지 않으면서도 저지력을 높이기 위한 방법 같았다.

근데 저렇게 날을 쥐고 휘두르면 손 안 베이나?

뭐, 그건 웨펀 마스터가 알아서 하겠지.


“크아아! 방해하지 마라!”

“이 새끼, 아깐 실실 쪼개더니 지 불리해지니까 바로 역정 내는 거 봐라?”


제단에서 예행연습을 한 덕일까, 나는 온몸이 활활 불타는 와중에도 비교적 온전히 정신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일단은 나름 불타기 경력직이니까.


- 까앙! 까앙! 까앙!


“으아! 으아아아! 하찮은 불나방 새끼가아아아!!!”


그라고스는 나를 떼어내려 목덜미를 향해 몇 번이고 손을 올렸지만 그때마다 누나의 검에 막혔고 궁여지책으로 몸을 털기 시작하자 누나는 아예 그라고스의 대갈통을 내려찍어 무릎 꿇려버렸다.

고작 목덜미에 붙어있는 쪼그만 인간 하나를 떼어내는 것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는 무력감과 무릎을 꿇었다는 굴욕감.

부아가 올라 제 성질을 이기지 못한 그라고스는 소리를 꽥 질렀다.


“조용히 해, 동네 시끄럽게 왜 소리를 질러?”


나는 그라고스의 비늘 사이로 손을 집어넣어 그의 살갗에 다이렉트로 불길을 넣어주었다.

몸을 보호하기 위해 나 있는 단단한 비늘이 지금은 오히려 살과 비늘 사이에 불꽃을 가두어 더욱 효과적으로 데미지를 입힐 수 있는 단열재 역할을 해주었다.


그렇게 몇십 초 정도 그의 몸에 들러붙어 있었을까, 마침내 퀘스트 창에 변화가 생겼다.


- 데미지 점유율 20% 이상으로 그라고스 처치 (0.1% / 20%).


데미지가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됐다! 데미지 들어가고 있어!”

“좋아! 이대로 일주일이고 한 달이고 한번 해보자!”


희망이 보이자 바닥을 치던 혈기가 갑자기 팍 돌기 시작했다.




***




또 몇 시간이 지났다.

전에는 타이머가 있어서 시간을 알았는데 지금은 그냥 대충 그 정도 지났을 거라고 예상할 뿐이었다.

그동안 많은 위기가 있었다.

재생되기 직전 체력이 20까지 떨어지는 바람에 작은 데미지라도 입었다간 그대로 아웃인데 한 번은 그라고스가 몸을 터는 힘을 버티지 못하고 떨어져 나가 벽에 부딪히며 17의 데미지를 입어 오싹했다.


“허억⋯ 허어억⋯!”


하지만 상황은 분명히 역전돼 있었다.

이젠 그라고스가 말이 없어졌다.

몇 시간 동안 꾸준히 그라고스의 몸 여기저기를 지지고 볶은 나는 벌써 8% 정도의 데미지를 입힌 뒤였다.

속도는 말도 안 되게 더디지만 어쨌든 데미지를 입히는 게 가능하긴 하다는 게 중요했다.


“지금 얼마나 됐어?”

“지금⋯ 8% 정도⋯!”

“그래? 그럼 슬슬 쟤 팔다리 잘라줄까? 못 움직이게 만들고 불태우면 더 빠를 것 같은데.”


누나는 해맑은 얼굴로 무시무시한 말을 했다.

하지만 그라고스를 위해 인도주의적인 배려를 할 필요는 없겠지.

애초에 저건 인간도 아니고.


“부, 부탁할게.”


표면적인 상황만 보면 그라고스가 궁지에 몰린 것 같지만 솔직히 진짜 궁지에 몰린 건 나다.

나는 벌써 몇 시간째 전신이 활활 불타는 고통을 느끼고 있었고 1초에도 몇 번씩이나 이 고통을 끝낼 수만 있다면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반드시 살아나가겠다는 결심으로 고쳐먹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후우, 좋아, 정신 차리자.

이제부턴 그야말로 100% 정신력 싸움.

성공을 위한 모든 조건은 완성되어 있고 그저 내가 포기하느냐 마느냐에 모든 게 달려있다.


“자, 잠깐⋯! 잠깐만⋯! 주겠다⋯! 화로를 주겠다⋯!”


그런데 의외로 정신력이 먼저 다 한 건 그라고스 쪽이었다.

그라고스는 대뜸 그런 말을 했다.

이대로는 정말 내가 조건을 달성하게 될 것 같다는 불안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니, 이제 그만⋯!”

“필요 없어, 인마! 어차피 죽여버리면 얻게 될 물건인데 뭘 선심 쓰듯이 말하고 있어?”


오히려 죽이는 쪽이 몬스터도 죽이고 화로도 얻고 일석이조인데.


“그럼 잠시만 기다려, 팔다리 자르고 올게?”


누나는 그 말과 함께 몇 시간 만에 거꾸로 들고 있던 검을 제대로 들었다.


- 쿠구구구구⋯.


그 순간 위력이 가늠도 되지 않는 짙은 마력이 검에 실리며 공기가 떨렸다.

검을 쓰는 각성자 중에서도 극소수만이 다다를 수 있는 지고의 경지인 검기.

검기를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지만 나는 누나의 검기는 검기 중에서도 최상급의 검기라는 것을 느꼈다.

검을 향해 한 발짝만 더 다가가도 온몸이 갈기갈기 찢길 것만 같은 위압감이 느껴졌다.


“자자자자, 잠깐⋯! 좀 진정하고 대화를⋯ 크아아아!”


누나가 검기까지 발하며 달려들자 기겁을 한 그라고스는 메이스를 휘두르며 저항했다.


- 콰아아앙!


하지만 허무하게도 그라고스의 저항은 단 일격에 무력화됐다.

검기가 둘린 검과 메이스가 충돌하자 거의 폭발이 일어났고 그 폭발에 메이스는 팽그르르 저 멀리 날아갔다.


- 촤아악!


그리고 이어지는 연계에 그라고스의 오른팔이 떨어져 나갔다.


“끄아아아아아!”


아무리 A급 보스라도 팔 한 짝이 절단되고도 평정을 유지하진 못했다.

그라고스는 비명을 지르며 크게 당황했고 그 사이 이미 다음 공격을 위한 포지션을 잡은 누나는 그의 등 뒤에서 검을 휘두르다 말고 갑자기 움찔거리며 공격을 멈췄다.


“앗! 큰일 날 뻔했다⋯!”


반사적으로 무방비하게 드러난 약점인 목을 향해 검을 휘둘렀기 때문이었다.


“⋯! 후유⋯.”


그 모습에 나도 안도의 한숨을 뱉었다.

만약 누나가 전투본능이 이끄는 대로 빈틈을 보인 그라고스의 목을 댕강 잘라 죽여버렸다면 퀘스트는 자동으로 실패하게 되는 셈이니 나로서도 상당히 아찔한 장면이었다.


- 촤악! 촤아아악!


누나는 급히 자세를 바꾸고 그의 왼팔을 마저 잘라내고 검을 크게 휘둘러 그라고스의 양다리까지 한 번에 도려낸 뒤 제자리로 돌아왔다.


- 쿵!


누나가 시원하게 칼춤을 한 번 추고 나자 사지가 절단된 그라고스는 무력하게 바닥에 쓰러져 발버둥조차 치지 못하는 몸이 되었다.

아무리 몬스터라고는 해도 일단 인간의 신체 구조를 가진 생물⋯? 을 저 모양으로 만들어놓으니 상당히 그로테스크했다.


“그럼 이제 다시⋯.”

“아, 잠깐만?”


다시 그라고스를 굽기 위해 그를 향해 걸어가던 차, 누나는 잠시 나를 제지하더니 한참 바닥을 뒹굴던 창을 들고 왔다.

그리고.


- 콰직!


“크허억!”


쓰러져있는 그라고스의 목덜미를 관통해 창을 바닥에 박아넣어 그를 단단히 고정했다.

분명 같은 무기인데 내가 쓸 땐 이쑤시개 같던 게 누나가 잡으니 간단히 그의 비늘과 살갗을 꿰뚫었다.


“이렇게 해두면 더 못 움직일 거야.”


사람이든 동물이든 곤충이든 모든 생물은 목을 제압당하면 꼼짝도 하지 못한다.


“누나, 이런 건 어디서 배웠어?”

“응? 배웠다기보다 그냥 그런 것 같던데⋯ 왜, 아니야?”

“아니⋯ 너무 정확해서⋯.”


나는 그 사실을 복싱을 배우던 시절 관장님에게 배웠다.

관장님은 시합이든 스파링이든 내가 지쳐서 고개가 처지기 시작하면 항상 대가리 들라고 바락바락 소리 질러 주었다.

목이 향하는 곳으로 몸 전체가 따라가기 때문에 고개를 떨구고 있으면 충분히 버틸 수 있는 펀치에도 몸 전체가 끌려 내려가 ko를 당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누나는 그 원리를 누구한테 배운 게 아니라 그냥 수없는 실전 속에서 감각적으로 깨우친 모양이다.

역시 싸움을 업으로 하는 사람은 달라도 뭐가 달랐다.


“크하악! 크아아악!”


안 그래도 팔다리도 없는데 목까지 고정 당한 그라고스는 문자 그대로 꼼짝도 못했다.

나는 그런 그의 등짝에 편안히 누워있으면 그만이었고 그렇게 그라고스는 나를 밀치지도 떼어놓지도 못하고 천천~히 자신의 몸이 불타며 죽어가는 것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만! 제발 그만!!! 화로를 넘기겠다! 당장 넘길 테니 제발 그만!!!”


그는 이제 아예 절규하며 애원하기 시작했다.

차라리 단칼에 억하고 죽으면 모를까 자신의 죽음이 점점 다가오고 있지만 도저히 피할 방법이 없다는 걸 몇 시간 동안 통감하며 죽어가는 건 그 절망감과 공포감이 차원이 다르기에 정신이 나간 것 같았다.

하긴, 나 같아도 어디 묶여서 모기한테 피 다 빨려 죽을 때까지 그저 기다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면 저럴 것 같다.


“너, 너도 이대로면 몇 시간은 더 불타야 하지 않나?! 고통스러울 것 아닌가! 내, 내가 지금부터 작정하고 방어에만 몰두하면 그 시간이 몇십 시간으로 늘어날 거다! 하지만 그럴 필요 없이 지금 당장 끝낼 수 있어!!!”

“까짓거 버티지 뭐! 화로 잘 쓸게! 고맙다!”

“조, 좋다! 화로뿐 아니라 다른 것도 얹어주겠다!”


마음이 흔들렸다.

말로는 허세를 부리고 있지만 솔직히 나도 미쳐버리기 직전이었다.

죽지도 못하고 끝없이 불타는 고통을 느껴야 한다니, 산 채로 불지옥을 경험 중이었다.


“내, 내 무구는 어떻느냐?! 아, 아니면⋯!”

“야.”


누나의 의견은 묻지 못했지만 이해해줄 것이라 생각한다.

솔직히 나도 이미 한계다.

하지만 이 새끼의 요구를 너무 덥석 물면 나도 여유롭지 않은 게 티나 날 테니 나는 적당히 밑 작업을 하기로 했다.


“근데 너 왜 계속 말이 짧냐?”


우선 위아래 서열정리부터 확실히 하고 가자고.


“⋯⋯⋯⋯.”


그라고스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하지 못한 표정으로 잠시 멍때리더니 곧 입을 열었다.


“사, 살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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