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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룡(旦龍) 님의 서재입니다.

기연 첫날에 무림이 멸망했다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단룡(旦龍)
작품등록일 :
2023.09.23 06:39
최근연재일 :
2023.11.13 19:20
연재수 :
50 회
조회수 :
19,025
추천수 :
455
글자수 :
263,236

작성
23.10.13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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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1쪽

어찌하시겠습니까?(2).

DUMMY

무곤진인은 이를 꽉 물었다.


사갈파가 찾아오는 일은 예상했다.


아무리 자의와 상관없이 않게 된 자리라고 해도 명색이 무당의 장문인이다. 된 사람을 자리에 앉혀야 하는 법이지만 때로는 자리가 사람을 만들기도 한다.


무곤진인은 제자들을 산 아래로 내려보낼 때부터 사갈파의 방문을 예측했다.


쥐 죽은 듯이 지내고 있던 그들이 산 아래로 내려가서 무당임을 자처하는 순간 눈엣가시가 될 거라는 사실을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무곤진인은 멍청하지 않았다.


무당의 이름으로 의원을 데려가기라도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무당의 이름이 아직 사람들에게 먹힌다는 반증이 아닌가?


일대를 지배하는 사갈파의 입장에서는 아무리 작고 어설픈 머리라고 해도 머리가 둘이 되는 상황을 원치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제자의 목숨이 위태로우니 초미지급의 심정으로 하산을 명한 거였다.


하지만 이리 상황이 닥치고 돌이켜보니 안일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무당을 유린하고 싶다면 얼마든지.


무곤진인이 스스로 나서서 사갈파의 잡졸에게라도 패배할 생각이었다. 패배해서 꺾인 사기는 언젠가 다시 회복할 수 있으니까.


직접 사갈파에 와서 담판을 지으라면 그리 할 심산이었다. 홀로 가서 곱사등이가 될 때까지 허리를 굽히고 올 수 있다.


하지만 현판을 내리는 일은 달랐다.


그건 무당의 이름을 포기하라는 말과 같다. 그리고 삼배구고두를 하는 순간, 무당은 일개 무파로써 사갈파의 명령을 들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돌이킬 수 없다.’


제자들은 아직 어리다.


가장 나이가 많은 이라 해도 약관을 겨우 넘긴 실정이다. 헌데 지금부터 사갈파의 아래서 그들의 수족처럼 일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정신은 부정할지 모른다.

자신은 무당의 제자라고, 끝까지 마음만은 굴복하지 않겠다고 되뇌이며 살아갈지도 모른다.


하나 몸은 뼛속까지 노예가 될 것이다.


사람이란 그런 생물이니까.


‘그렇게 둘 수는 없다. 죽어도!’


하지만 그렇다면 그는 어찌해야 하는가?


하늘은 감당할 수 있는 시련만을 내린다지만, 정녕 그가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단 말인가?


무곤진인은 알 수 없었다.


당장이라도 표정이 무너질 것만 같다.


‘차라리.’


차라리 돈만을 요구했다면.


물질적인 대가만을 명분으로 들었다면 유예를 구할 수 있었다. 직접 사갈파의 본단으로 가서 무곤진인이 담판을 짓는다는 선택지도 희미하지만 분명 존재했다.


그러나 저들은 돈이 목적인 것처럼 말하면서 현판을 내릴 것을 요구했다.

무당의 치욕스러운 복속을 요구했다.


이를 거절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하나는 사갈파가 직접 병력을 몰고 무당을 칠 명분을 주는 것이요.

하나는 무당이 자존심을 지키느라 민초를 외면했다는 오명을 얻을 것이다.


이렇게 되어도 무당은 망한다.


게다가 호북민들은 더 이상 기억 속에서조차 무당을 의협문으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이 어쨌든, 그렇게 소문이 퍼질 테니까.


빠져나갈 길이 안 보인다.


어떤 선택을 해도 당장 망하느냐 서서히 죽어가느냐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결과는 같았다.


동굴 깊숙한 곳에서 배고픈 범을 마주치면 이런 기분일까?

아니, 만약 그렇더라도 이보다는 나은 기분일 것 같았다.


범에게 물려 죽는 것은 혼자지만 지금 무곤진인의 결단에는 수많은 제자들의 명운까지 걸려 있다.


“어찌하실 거냐고 물었소, 장문인.”


즐거운 듯한 미소를 숨길 생각조차 없는 서균.


서균의 등 뒤에서 ‘그깟 현판 따위야 얼른 내려버리고 절이나 몇 번 하면 끝날 문제가 아니냐’는 눈빛으로 무곤진인을 채근하는 장정들.


그리고 하나같이 파리해진 안색으로 그의 입술을 응시하고 있는 제자들.


이제 겨우 마흔을 넘긴 무곤진인이 견뎌내기에는 무거운 무게의 시선들이다. 그러나 버텨내야 했다.

이 순간 그는 무곤이라는 한 사람이 아니라 무당의 장문인이니까.


‘냉철하게, 또 냉철하게 생각해야 한다.’


무곤진인의 입이 무겁게 열린다.


“······생각할 시간을 조금만 주시오.”

“그러지요. 더 생각한다고 해서 결과가 바뀔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부디 현명한 판단 하시길 바랍니다. 끌끌끌.”


서균이 비웃는다.

그 웃음이 마치 완벽하게 짜여진 덫에 빠져나갈 길 따위는 없다는 의미로 들린다.


무곤진인은 얼굴이 멋대로 경련할 것만 같은 아찔한 상황 속에서 눈을 지그시 감았다.


길게 끌어서 좋을 게 없다.


어차피 결과는 같거늘, 무당이 저울질을 하고 이해득실을 따졌다는 이야기만 나돌 것이다.


“무당은······.”


무곤진인은 결단을 내려야 했다.

설사 죽어서 선조들의 원망을 한 몸에 받더라도.


“현판을······.”


내리겠소.


상황이 이 지경까지 온 이상, 그 다음 말은 누구든 예상할 수 있었다.


아, 무당이 이렇게.

끝나는구나.


제자들조차 그렇게 생각했다.


누구도 앞길이 보이지 않는다고 여겼다.


무당의 길었던 역사가.

이 순간 정말 역사로 남게 되리라고.


그 순간.


이미 체념한 듯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제자들 중 하나.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인물이 움직였다.


공진이었다.


허겸의 사제이자, 이제 겨우 열다섯이 된 삼대제자일 뿐인 그 아이가.


“어, 어어······?”


한 발짝.

한 발짝.


앞으로 나선다.


맥없이 축 늘어져 있기만 했던.

아무것도 쥘 수 없던 그 손이 서서히 올라간다.


이윽고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어?”

“어어, 어어어어어어?”


후려친다.


펼쳐진 손바닥이, 서균의 웃는 낯짝을.


툭.


서균의 시야가 천천히 돌아간다.

결코 강하지 않게. 부드럽게.


손바닥으로 뺨을 때렸음에도 통쾌한 타격음이 나지 않은 것만 봐도 그랬다.


볼이 화끈거린다든가, 그런 말을 붙일 정도의 세기가 아니었다. 때렸다기보다도 뺨을 밀어버린 것에 가까웠다.


하지만 때렸든지 밀쳤든지 그런 전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


지켜보는 모든 이의 어안이 벙벙해졌다.


장정들.

제자들.

무곤진인과 허겸.


그리고 서균 본인까지도.


하지만 서균은 화를 낼 수 없었다.

이 이상일 수 없는 무례한 처사를 당했음에도, 쉽사리 돌아간 고개를 다시 원위치하지 못했다.


뺨을 타고 식은땀이 흐른다.


빠르지 않았다.

강하지도 않았다.


‘허면 어째서 피하지 못했는가?’


그 눈에 훤히 보이는 느릿한 동작을.


예상하지 못한 행동이라서?

맞아도 별 타격이 없을 것 같아서?


아니었다.


그랬다면 반대로 피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피한 다음 무례를 논했어야 옳다.


그래야 자신의 입지가 굳혀지고 상대를 깎아내리는 꼴이 될 테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서균은 피하지 못했다.


어째서인가?


‘어째서인가? 어째서인가?’


모르겠다.

아무리 되짚어봐도 그건 충분히 피하고도 남는 손놀림이었다.


하나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이 모순이 의미하는 바는 간단했다.

복잡한 현상이었지만 놀라우리만큼 간단한 결과로 귀결된다.


‘보아도 이해하지 못할 정도의 경지.’


사고회로가 순식간에 이어진다.


방금, 무슨 짓을 했어도 서균은 뺨을 맞았을 것이다.


손을 피해도 따라왔을 것이고, 막으려 해도 막히지 않았을 것이며, 반대로 달려들어 팔을 잘라버리려고 했어도 똑같이 뺨을 맞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항거조차 할 수 없다는 말인가.’


서균이 무당산을 자신 있게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무공에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설령 무당파 전체가 이성을 잃고 달려들더라도 산 아래까지는 충분히 피신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이 그에게는 있었다.

지금의 무당이라 해봐야 어린애들과 반편이 고수 하나의 오합지졸이니까.


헌데 방금의 일격은 어땠는가?


충격적이었다.


감히 고개를 다시 들 수가 없었다.


산바람마저 숨을 죽인다.


그 안에서 최초로 입을 연 것은 다름아닌 공진 본인이었다. 자신의 손으로 뺨을 쳤건만, 정확히는 건드렸건만, 말투에서 당혹과 혼란스러움이 느껴졌다.


“어······. 제가 그러려고 그런 건 아닌데. 죄, 죄송합······.”


당장이라도 울 것만 같았다.

어깨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서균이 돌처럼 굳어서 그 얼굴을 바라보지 못한다는 것이 다행이라고 느껴질 정도였다.


그런 공진의 어깨에 손을 얹은 것은 허겸이었다.


“사과하지 마라.”

“······대사형.”

“네가 어째서 사과해야 한단 말이냐? 저들은 분명 무례했고, 네 행동을 지당했다. 그렇다면 어깨를 펴라.”

“하지만······.”

“허겸의 말이 옳다.”


무곤진인이 공진의 반대쪽 어깨에 손을 얹으며 성큼 나섰다.


“꼴사나운 모습으로 너를 참지 못하게 만든 나를 용서하거라. 무당이라면 그리 했어야 하거늘. 장문인이 되어 모범은 고사하고 추태를 비추고 말았다. 방금의 처사들은 잊거라.”


복잡했던 무곤진인의 생각이 쭉 펼쳐졌다.


그가 고민해야 할 것은, ‘무당을 어찌해야 하는가’가 아니었다.


‘무당이라면 어찌할 것인가.’


그가 아는 무당이라면.

평생을 바친 자랑스러운 무당이라면 어떤 결론을 내렸을 것인가.


그가 무당을 이끄는 것이 아니다.

몸을 맡길 뿐이다.

함께 가는 것이다.


그것이 도(道)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자명했다.


무당의 선조들은 마교에 대적했다.

이기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두려움을 떨치고 한번 더 나아갔다.


어째서인가?


민중의 지지를 받기 위해서?

전쟁터에서 공을 올리기 위해서?


아니다.


죽은 뒤에 얻는 지지며 공로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저 그것이 무당이기 때문에.’


무얼 고민했는가.


세상이 도(道)를 필요로하는 한, 몇 번을 꺾이고 부러지더라도 무당은 다시 일어날 것이다. 날개가 불타 없어지고, 그 전신마저 한 줌 재가 되어 흩뿌려지더라도.


설령 무당이 아닌 다른 이름이더라도.


무당은 다시 일어날 것이다.


이것은 끝이 아니다.


그렇다면 죽어도 무당으로 죽어야하지 않겠는가?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무곤진인이 평생을 배우고 가르쳐온 일이었다.


그럼에도 중요한 순간에 눈을 가렸다.


그 눈을 다시 뜨게 만들어준 것이 그의 반절도 살지 않은 어린 제자였다.


“무당의 입장을 정리하겠소.”


무곤진인의 눈에 현기가 돌아왔다.


“무당의 현판은 내리지 않겠소. 물론 삼배구고두도 마찬가지로 거절하겠소. 무당은 도와 의 앞에서만 고개를 숙이외다.”

“무슨······!”


혼이 빠진 듯이 고개를 떨구고 있던 서균이 발작하려 했지만 무곤진인이 먼저 말을 이어갔다.


“무당은 파산했소! 내 확실히 말해두지. 우리는 땡전 한 푼도 없는 무일푼이오. 낼 돈이 있을 리가 없지. 그리고 있다고 해도 그대들에게 세금을 바칠 이유는 없소!”

“장문인은 지금 그 발언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계신 겁니까?”

“그대는 내가 그 정도도 모르는 멍청이로 보이오? 그렇다면 잘못 짚었소. 아암! 잘못 생각해도 한참을 잘못 생각했지! 나는 무당의 장문인이오! 그대야말로 이 의미를 모른다는 말이오!”


무곤진인이 한 차례 격노했다.


그것도 잠시.

어느새 다시 냉철해진 무곤진인이 농기구를 맨 장정들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분명 무당은 호북민들을 구휼할 때 무언가를 바라고 하지는 않았소. 허나, 원수의 힘이 강하다고 하여 친구의 등에 칼을 꼽다니.”

“······.”

“부끄러운 줄 아시오.”


무당당은 희생을 선택하지 않았다.


대신 내려진 것은 더 없이 엄중하고 무거운 철퇴였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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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어찌하시겠습니까?(1). +1 23.10.12 327 10 12쪽
20 이젠 거지한테 빌어먹네(3). +1 23.10.11 350 9 12쪽
19 이젠 거지한테 빌어먹네(2). +1 23.10.10 372 12 12쪽
18 이젠 거지한테 빌어먹네(1). +3 23.10.09 409 8 12쪽
17 누구냐, 너(3). +1 23.10.08 415 10 12쪽
16 누구냐, 너(2). +1 23.10.07 409 11 12쪽
15 누구냐, 너(1). +1 23.10.06 435 10 11쪽
14 화무십일홍이라더니(3). +1 23.10.05 434 10 12쪽
13 화무십일홍이라더니(2). +2 23.10.04 448 11 12쪽
12 화무십일홍이라더니(1). +1 23.10.03 504 14 12쪽
11 개판이네(3). +1 23.10.02 504 15 11쪽
10 개판이네(2). +2 23.10.01 535 15 12쪽
9 개판이네(1). +1 23.09.30 597 15 12쪽
8 그릇이 큰 거지가 밥도 많이 얻어먹는다(4). +3 23.09.29 575 18 12쪽
7 그릇이 큰 거지가 밥도 많이 얻어먹는다(3). +2 23.09.28 608 17 12쪽
6 그릇이 큰 거지가 밥도 많이 얻어먹는다(2). +2 23.09.27 671 15 12쪽
5 그릇이 큰 거지가 밥도 많이 얻어먹는다(1). +3 23.09.26 730 14 12쪽
4 기연과 마도천하(3). +2 23.09.25 763 16 11쪽
3 기연과 마도천하(2). +2 23.09.24 874 18 12쪽
2 기연과 마도천하(1). +3 23.09.23 1,140 24 12쪽
1 낭인들(0). +3 23.09.23 1,521 26 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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