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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룡(旦龍) 님의 서재입니다.

기연 첫날에 무림이 멸망했다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단룡(旦龍)
작품등록일 :
2023.09.23 06:39
최근연재일 :
2023.11.13 19:20
연재수 :
5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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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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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5
글자수 :
263,236

작성
23.10.08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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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누구냐, 너(3).

DUMMY

무당고검.


검신이 날아갔어도 손잡이에 각인되어 있는 태극 문양으로 그 검의 특별함을 보이기는 충분했다.


무당 내에서도 고검(古劍)은 단 열한 자루만 존재하는 신물이다.


이 검을 지닌 자라면 신분에 예측이 가는 것도 당연하다.

무당파에서도 지대한 공을 세웠거나 상징적인 이에게만 패용하는 것이 허락된 물건이니 말이다.


하지만 노인이 상상했던 것과 홍광의 반응은 다소 다른 면이 있었다.


홍광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어······ 아끼시던 검이었나요?”

“아꼈다 뿐이겠느냐?”

“그래도 미안하다는 생각은 안 드네요. 그걸로 제 목을 따려고 하셨으니까 검을 상하게 하는 것 정도는 정당한 처사였어요.”

“그 말이 아니잖느냐.”

“그럼요?”

“무당의 고검을 모른단 말이냐?”


강호에 몸담았던 이라면 무당의 고검을 모를 수가 없을 텐데?


하지만 홍광은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견문이 좀 짧아서요. 동굴에서 사부에게 들은 것 말고는 딱히 아는 게 없는데, 사부는 병장기에 관심을 두시는 편이 아니셨거든요.”


심지어 타구봉도 대충 깎아 쓴 양반이니 말하자면 입만 아팠다.


용두방주는 사람이 중요하지 손에 든 물건이 중요하냐며 그다지 신병이기에 대해 설명하지 않았다.

하기야 맨손 장법으로 천하의 고수들을 다 때려잡고 다니던 사람인데 무기가 눈에 들어오기나 했겠냐마는.


“그래서 그게 뭔데요?”


태극 문양이 각인되어 있는 걸로 보아 무당파의 물건인 것 같았다.


하지만 고검이라고 들어도 짐작가는 바가 없으니 물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노인은 떨떠름하게 입을 열었다.


“무당파의 신물이다. 총 열한 자루가 있지만 대부분의 시대에는 일곱 명 정도만이 고검을 소지할 자격을 얻지. 무공 실력, 수양, 모든 면에서 뛰어나고 강호행에서 공적을 세운 이들만이 누릴 수 있는 광영이다.”

“대단한 물건이라는 거네요?”

“그렇지. 대개 고검을 소지한 일곱 명은 무당칠검이라 불리면서 천하 어디를 가도 존경을 받는다.”


고검에 관해 들어본 적 없는 홍광이라도 무당칠검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 있었다.


사부가 ‘실력도 없으면서 모여서 까부는 놈들’이라는 평가를 내렸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아무튼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뭐 잘 알았어요. 그럼 영감님께서 그 무당파의 검을 왜 가지고 있는 거에요? 훔쳤어요?”

“훔치다니!”


노인이 발작했다.


“내게 과한 물건이었음을 인정하나, 나는 정당하게 고검을 받았다. 장문인께 정식으로 식을 거쳐 하사 받았단 말이다.”

“음. 아무튼 귀한 물건이라는 걸 아니까 살짝 미안하네요.”

“그럴 것 없다.”


노인은 검파를 들어올려 달빛에 비췄다.


검신은 깔끔하리만치 사라졌는데 손잡이 부분부터는 멀쩡했다. 방금 닦은 것처럼 광이 날 지경이었다.


“고검은 명검과는 다르다. 검날이 무시무시하게 예리하다거나 부러지지 않는 경도를 가진 것이 아니지. 검날은 나중에 붙인 것일 뿐, 애초에 검날이 존재하지 않았던 검이 고검이다. 본래의 형태로 돌아간 것뿐이라고 봐야겠지.”

“검날이 없는 검이라고요?”

“그래. 본래 고검은 베지 않기 위한 활검(活劍)이다. 무당이 무파라고는 하나 그 이전에 도가다. 검은 베기 위함이 아니라 마음을 수양하기 위한 물건이지. 고검은 그 성능에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선인들이 마음을 닦았던 검이라는 것에 의미가 있는 물건이다.”

“흠.”


홍광으로서는 잘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손잡이 없는 칼을 휘두르면서 마음을 수련한다는 말 아닌가.


‘뜬구름 잡는 소리 같은데.’


세인들이 만들어낸 환상에 쉽게 휘둘리지 않는 홍광이다. 그가 보기에 활검은 좀 개소리에 가까웠다.


하지만 동시에 눈치도 키운 홍광은 내색하지 않고 물었다.


“그럼 영감님이 무당칠검이에요?”

“지금은 은거기인에 불과하다. 허나 과거, 무당칠검의 정군자 장로가 나를 뜻하는 말이었던 것은 맞지.”

“그럼 정군자 영감님?”

“······그렇지.”


놀라는 척이라도 해주면 어디가 덧나나?

심지어 호칭도 그래로였다.


지금은 무당칠검도 아니고 무당파의 장로도 아니니까 정군자 영감이 맞긴 맞지만서도 영감님이라니.

마치 동네 할아버지 대하는 태도 같지 않은가.


‘하긴 그럴 자격이 있으니까.’


그를 동네 할아버지처럼 바라볼 수 있는 실력을 갖췄으니 뭐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데 영감님.”

“뭐냐.”

“무당파 장로였다면서요. 그런데 어른 된 입장에서 일대제자가 장문인 돼서 허덕이고 있는 거 보면서 아무런 생각이 안 들어요? 이상하네.”

“······.”


순진무구한 얼굴로 아픈 곳을 찌른다.


비난할 의도가 아니라 진심으로 궁금해서 물어본다는 듯한 저 태도가 더 아팠다.


살짝 숙인 정군자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어찌 아무런 생각도 없겠느냐. 그 아이들은 나의 자식과도 같은 이들이거늘.”


그뿐인가?

무당의 모든 제자들은 사형의 자식, 사제의 자식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가 어찌.

그가 어찌 저들을 외면할 수 있겠는가.


“그럼 왜 여기서 궁상 떨고 계세요? 산문이 코앞인데.”

“갈 수 없다.”


정군자는 이를 악 물었다.

눌린 잇몸에서 피맛이 느껴졌다.


“비겁한 도망자는 무당의 산문에 발을 들일 자격이 없으니.”


누군가에게 털어놓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날로부터 칠 년. 정군자는 누군가와 대화라고 부를만한 것을 해본 적이 없으니까 말이다.

쌓였던 것이 터지듯이 밀려와 목구멍을 뜨겁게 달군다.


“열에 하나는 살려준다더군. 사형제들의 희생 끝에 겨우 건진 목숨이었다. 대가로 눈을 잃긴 했지만 싸우는 데는 문제가 없었지. 검을 휘두를 수 있는 손과 팔이 남았고, 달릴 수 있는 다리와 발이 남았다. 허나······.”


죽음의 문턱을 한 번 밟았다가 돌아왔다.


그 공포를 겪어보지 못한 자에게 설명할 수 있을까?

죽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도가에서 말하는 등선?

적어도 정군자가 겪은 전장에서 그런 고결한 죽음따윈 없었다.


죽음 앞에서는 소림의 승들조차 두려움에 떨고 삶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였다.


숭고한 죽음은 없다.

죽음은, 그저 죽음이다.


죽음은 대단한 것이 아니다.


내가 죽는다고 세상도 함께 죽어주지 않는다. 죽는 것은 나 하나뿐이다. 그렇게 잊혀질 거라는 공포가 스멀스멀 머릿속을 잠식해간다.


잠깐의 고통이 두려운 게 아니다.

사라지는 것이 두려운 게 아니다.


지워지는 것이 두렵다.


모든 사람의 기억 속에서, 전장에서 스러져간 수많은 목숨 중 하나로 잠시 머물렀다가 풍화되어 잊혀진다.


그것이 죽음이다.


“두려움과 공포에 절어 전장으로 돌아가지 못한 나는, 죽을 시기를 놓친 망령일 뿐이다. 내가 아는 무당에 망령의 자리는 마련되지 않았다.”


그때 전장으로 돌아갔어야 했다.

살아남은 모든 무당의 무인이 그러했듯이.


하지만 정군자는 그러지 못했다.


이것은 스스로에 대한 형벌이다.


누구와도 대화하지 않고, 소통하지 않고, 산문으로 돌아가지도 않은 채 모습을 숨기고 그저 홀로 잊혀지는 것.


그것이 순간의 공포로 죽음을 면피해버린 정군자 스스로에 대한 벌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몰래 뒤에서 무당을 돕고 계신 거에요? 마음에 안 드는 사람들을 쫓아내면서?”

“······.”

“무당에 본인 자리는 없다면서, 막내를 몰래 치료해놓고 간 것도 영감님이죠? 말로는 산속에 틀어박혀서 자중이라도 할 것처럼 하시더니 엄청 간섭하고 계시네요.”


사람의 마음이 이렇다.


마음은 물줄기와 같아서, 한 방향으로 곧게 이어지는 듯해도 결코 그렇지 않다. 땅 밑으로 스며들고 하늘로 증발하며 바위를 만나면 갈라지고, 물가를 방문한 사람에 의해 논으로 흘러들어가기도 한다.


물은 한 갈래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천 갈래, 만 갈래로도 찢어져 있다.


그 안에서 역행하여 모순하는 한 줄기 물살이 있다고 해도 과연 이상할 점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잘못된 일도 아니다.


“솔직히 전 잘 몰라요. 영감님이 지금이라도 무당으로 돌아가서 도움을 주는 게 옳은지, 아니면 이대로 은인자중하시다가 아무도 모르는 골짜기에서 운명하시는 게 옳은 선택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건 안다면 구태여 협을 찾으라는 사부의 명을 수행하러 돌아다닐 이유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는 알겠네요.”


홍광은 검지를 펼쳐보였다.


“무당에 영감님의 자리가 있다 하더라도 영감님은 돌아갈 수 없어요. 설령 도망치지 않았더라도. 끝까지 싸우다가 살아남았더라도. 맞죠?”


생각해보면 간단한 일이다.


죄책감이고 나발이고, 무당은 지금 쓰러지기 직전의 움막이다. 바람만 불어도 삐걱이는데 외부의 충격을 견딜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런 와중 무당에 장로 배분이 살아돌아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어떻게 될까?


문파 무공의 거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장로, 그것도 무당칠검 중 하나가 건재하다는 것은 무당이 다시 날개를 펼칠 거라는 약속과도 같다.


그것을 주변에서 두고 보겠는가?


당장 무당을 노리던 사갈파만 해도 곧장 병력을 이끌고 무당산을 오를 것이며, 어찌어찌 사갈파를 막아낸다 쳐도 다음, 또 다음 세력이 나타날 것이다.

한 마디로 끝이 없다.


그런데 반면 무공이라는 것은 느리다.


특히 무당의 검은 대기만성(大器晩成)으로, 당장 제자들에게 정군자가 직접 지도를 내린다고 해도 본래 저력의 반의반을 되찾는 데 몇 년이 걸릴지 알 수 없다.


빠르면 십 년.

길면 사십 년도 걸릴 수 있다.


그동안 무당이 무사하겠는가?

이 마도천하에?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소리다.


“영감님이 돌아오시면 무당은 확실하게 망해요.”

“······.”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그것이 대답이었다.


“고민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네요. 이해해요.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어도 속죄라는 식으로 합리화하지 않으면 눈 앞에서 망해가는 무당을 보면서 버티기 어려웠을 테니까요.”


이 청년은 누군가?


정군자는 만난 지 불과 일각도 지나지 않아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방금 전까지 문답무용으로 죽이려고 했던 상대지만, 그 상대는 지금 몇 마디 나눈 것만으로 자신의 뱃속 창자의 빛깔까지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영리하다. 그걸 넘어서 영악하다.


“너, 정체가 뭐냐.”

“알려드릴 이유가 있나요? 영감님은 이대로 영원히 산속에 틀어박혀 속세에는 관여하지 않으실 분인데. 차라리 잘 됐어요.”

“뭐가 잘 됐다는 거냐?”

“어찌됐든 어차피 무당이 망할 거라는 걸 알아서요. 저 때문에 망하는 줄 알고 약간 양심에 찔렸거든요. 그런데 뭐, 씨독까지 뿌리러 왔을 정도면 애초에 말려 죽일 심산이었나보네요.”


천천히, 느긋하게 말이다.


무당의 무력한 죽음을 호북 전역이, 아니 강호 전체가 알 수 있도록.


“어쨌든 저랑은 상관 없는 일이라는 게 밝혀졌으니 안심이네요. 걱정 마세요. 저는 사갈파인가 뭔가 하는 놈들이 쳐들어와서 무당을 불태우기 전에, 아침 쯤에는 바로 하산할테니까.”


홍광이 하산한다고 해도 무당은 천천히 말라죽어갈 테지만 말이다.


거기까지 신경을 써줘야 할 이유는 이제 없다.


이유가 있어도 너무 위험하다.


정군자 정도의 실력자가 당하지 못한 상대가 사갈파에 있다. 호북 일각의 지배권은 골패로 딴 게 아니라는 소리다.


그런 인물의 반대편에 일부러 서 있는 행위는 홍광의 안전제일주의 위반이다.

제일 원칙은 어디까지나 생존인 것이다.


“그럼 갑니다. 보중하세요.”


홍광이 뒤돌아 손을 흔들었다.


궁금증도 다 풀렸고.

공명완의 치료가 끝나면 이제는 무당과의 작별이다.


“잠깐.”


그때 정군자가 홍광을 멈춰세웠다.


엄청하게 결연한 표정으로.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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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이젠 거지한테 빌어먹네(2). +1 23.10.10 373 12 12쪽
18 이젠 거지한테 빌어먹네(1). +3 23.10.09 410 8 12쪽
» 누구냐, 너(3). +1 23.10.08 417 10 12쪽
16 누구냐, 너(2). +1 23.10.07 410 11 12쪽
15 누구냐, 너(1). +1 23.10.06 436 10 11쪽
14 화무십일홍이라더니(3). +1 23.10.05 435 10 12쪽
13 화무십일홍이라더니(2). +2 23.10.04 449 11 12쪽
12 화무십일홍이라더니(1). +1 23.10.03 506 14 12쪽
11 개판이네(3). +1 23.10.02 506 15 11쪽
10 개판이네(2). +2 23.10.01 536 15 12쪽
9 개판이네(1). +1 23.09.30 598 15 12쪽
8 그릇이 큰 거지가 밥도 많이 얻어먹는다(4). +3 23.09.29 576 18 12쪽
7 그릇이 큰 거지가 밥도 많이 얻어먹는다(3). +2 23.09.28 610 17 12쪽
6 그릇이 큰 거지가 밥도 많이 얻어먹는다(2). +2 23.09.27 672 15 12쪽
5 그릇이 큰 거지가 밥도 많이 얻어먹는다(1). +3 23.09.26 732 14 12쪽
4 기연과 마도천하(3). +2 23.09.25 764 16 11쪽
3 기연과 마도천하(2). +2 23.09.24 875 18 12쪽
2 기연과 마도천하(1). +3 23.09.23 1,141 24 12쪽
1 낭인들(0). +3 23.09.23 1,523 26 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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