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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룡(旦龍) 님의 서재입니다.

기연 첫날에 무림이 멸망했다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단룡(旦龍)
작품등록일 :
2023.09.23 06:39
최근연재일 :
2023.11.13 19:20
연재수 :
5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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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3
추천수 :
455
글자수 :
263,236

작성
23.10.07 19:20
조회
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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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2쪽

누구냐, 너(2).

DUMMY

홍광이 밤산책을 시작하고 며칠이 흘렀다.


낮에는 무당파를 구경하거나 환자의 병세를 보고, 밤에는 산문 근처를 돌아다니면서 인적을 수색했다.


그 동안 알아낸 바에 의하면, 역시 무당파에서 벌어진 사건에는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는 거였다.


공명완이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도 그렇지만, 애초에 중독 자체에도 미심쩍은 부분은 존재했다.

무당산을 돌아다니면서 볼수록 의심은 확신으로 변했다.


‘천남성이 살만한 환경이 아니야.’


천남성이라는 독식물은 습지에서 자생한다.

물론 무당산에 습지 한두 군데가 없겠냐마는 무당파의 산문이 세워진 곳은 드높은 봉우리 정상이다.

천남성이 자생하기 좋은 습지 따위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거기까지는 그럴 수 있다.


식물이라는 것은 반드시 환경이 갖춰져야지만 자라지 않으니까.

절벽 끝에서도 자라고, 사막에도 식물은 있다. 천남성도 어딘가 바위 틈 같은 곳에서 작게 자랐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광경은 어떤가?


한 발을 딛으면 독초, 또 한 발을 딛으면 독초다.


그 안에는 물론 천남성도 있었고, 천남성과 같은 환경에서 자생하기 어려운 종류의 독초도 있었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살아야 할 독초들이 유독 무당파의 산문 근처에 모여서 자라고 있는 것이다.


부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일일이 심기에는 독초가 너무 많았고, 누군가 일부러 씨독이라도 뿌려놓지 않았다면 한 군데에 모일 수 없는 식물들이다.


그 증거로, 그나마 무당산에 영기가 충만하여 유지되고 있긴 하지만 독초들의 상태가 웃자랐거나 시들했다.

명백히 맞지 않는 환경이라는 의미였다.


“우연이 아니었네.”


공명완이 독에 중독된 것은 사고가 아니었다. 명백하게 의도를 가지고 일어난 사건이다.


그것도 무당파의 사정을 잘 알고 있으며 이런 짓을 할 동안 들키지 않을 정도의 실력자였다.


“혹시 그쪽이 한 거에요?”


홍광은 산중에 멈춰 있었다.


사위가 어둠으로 가득했다. 음산한 기운만 감돌뿐,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 야산의 한가운데였다.


하지만 홍광은 다시 물었다.


“이 독초들, 영감님이 뿌리신 거냐고요.”


영감님.

적어도 성별과 나이대를 파악했다는 뜻이 나포된 말이었다.


이미 들켰으니 나오라는 경고이기도 했다.


홍광의 눈동자가 한 곳을 응시했다.


아니나 다를까, 나무 뒤에서 새까만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방자한 놈이.”


평범한 사람이 봤다면 어둠살에 가려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생각했겠지만 이미 안력이 경지에 이른 홍광의 눈에는 선명하게 보였다.


산발로 기른 머리에 거친 수염.

그가 뿜어내는 흉흉한 살기까지.


무슨 원한이 있는지 피부가 저릿거릴 정도의 기파가 느껴졌다.


‘일단 말로 하고 싶은데.’


그러나 그건 홍광만의 희망사항이었고, 영감이 뿜어내는 기세는 달리 말하고 있었다.


입으로 하는 말은 필요 없다고.


그렇다면 남은 것은 하나뿐이다.


스릉.


검이 뽑히며 날이 검갑에 가볍게 닿는 소리가 났다.


그 파찰음마저 아름답다.


검을 수만 번 뽑아본 검수만이 낼 수 있는 소리였다. 일정한 힘과 낭비 없는 동작이라는 것을 그 진동만으로 알 수 있을 정도.

의심의 여지조차 없는 달인의 경지였다.


“그 정도나 되시는 분이 숨어서 뭐하는 짓이에요.”

“······.”


대꾸가 돌아오지 않는다.


힘을 빼고 검을 하단세로 내려놓은 노인의 자세는 한 점 흐트러짐도 없었다.


대화의 여지는 없다는 의미였다.


“민망하게스리.”


홍광은 곧게 편 손바닥을 내밀고 반대쪽 손은 살짝 둥글게 말아 명치에 붙였다. 동시에 하체의 중심을 낮추고 시선은 앞으로 내민 손끝을 응시한다.


항룡십팔장의 자세였다.


동굴에서 나와 겪는 첫 실전이다.


그것도 상대는 달인.

강호의 말로 하면 완숙의 경지에 이른 무인이었다.


여유가 있다면 거짓말이다. 방금 전부터 찌릿한 긴장감이 전신을 애워싸고 있다.


그러나 눈 녹듯 사라진다.


수천 번, 수만 번 취했던 자세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홍광은 차분함을 되찾았다.


상대가 수만 번 검을 뽑아본 검수면 어떤가? 홍광 또한 뒤지지 않을 만큼의 수련을 해왔다. 그것도 전 세대의 천하제일인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이 정도로 긴장 때문에 제 실력을 내지 못해서야, 사부는 죽어서도 죽지 못할 것이다.


사부의 목소리가 귓전에 들리는 듯했다.


‘강호에 가장 많은 병기가 있다면 그것은 검이다. 흔하다는 것은 그만큼 쓸모가 입증됐다는 뜻이지. 기억하거라.’


알았어요.

몇 번을 듣는 건지.


‘검을 상대할 때는 검 끝에 시선을 빼앗기는 순간 끝이다. 검이 아니라 상대방의 다리와 어깨를 봐야지. 결국 휘두르는 주체가 되는 것은 사람이다. 사람에게서 결코 눈을 떼지 마라.’


홍광의 눈살이 낮게 가라앉았다.


차게 식혀진 시선은 노인의 어깨를 꿰뚫을 것처럼 지켜봤다.


순간 노인의 신형이 사라졌다.


마치 귀신 같은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홍광의 눈은 가야할 곳을 이미 안다는 듯이 등 뒤를 바라봤다.


섬전처럼 휘둘러오는 검.


곧장 목을 노리고 들어오는 살검이었지만 홍광은 당황하지 않았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으니까.


‘검은 팔보다 길다. 천지가 개벽해도 이 사실은 변하지 않아. 적어도 네가 항룡십팔장을 운용하는 동안은 멀리서 공격해오는 적을 상대해야 할 거다. 그렇다면 어찌해야겠느냐?’


알고 있어요.


피하거나, 파고들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중심을 흔들거나.


하지만 제일은······.


“스읍.”


홍광이 숨을 들이마셨다.


푸른 불꽃.

그렇게 말하면 설명할 수 있을까?


발화하듯 강렬하게 피어난 항룡기가 홍광의 전신을 감싸며 일렁인다.


몸의 그릇이 상식을 벗어난 크기라 덜 찼다고는 하나, 홍광의 내공은 이미 천하제일인의 크기였다.


검수를 상대할 때 가장 좋은 방법.


‘검을 부숴라.’


간단한 이치였다.

상대방의 숙련된 병장기를 배제할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계책은 없다.


아침에 동쪽에서 해가 뜨는 것만큼 당연한 일이고, 뻔한 이치다.


그러나 누가 쉽다고 말하겠는가?


피륙으로 이루어진 몸으로 쇠로 된 검을, 그것도 날이 살아있으며 내공이 실린 병장기를 쳐부수라는 것은 단두대에 목을 집어넣으라는 말과도 같다.


하지만 사부는 쓸모없는 전술을 가르친 적이 없었다.


‘가능하다.’


강호 역사상 이 정도의 내공을 일신에 품었던 이가 얼마나 존재했을까.


사부의 말에 따르면, 당대의 강호에 이 내공을 넘어설 자는 천마를 포함하고도 손에 꼽는다.


워낙 홍광의 그릇이 커서 의식하지 못했던 것이지, 웬만한 강호인은 이 내공을 지니는 것만으로 몸뚱이가 터져나갈 양이다.


그런 내공을 가진 홍광이기에 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검로는 보인다.


그대로 전진하면 홍광의 목을 깔끔하게 잘라버릴 것이 분명한 검로다.

허나 피할 이유가 없다.

다음 수를 예측할 필요도 없다.


남은 건 무식하게 거대한 내공으로 검로 자체를 밀어버리는 일이다.


간결하게 뻗은 손바닥에서 무지막지한 양의 내공이 뿜어져나온다.


푸른 용이 승천한다.


사람이 뻗은 장법에서 용이 났타났다.


말이나 되는가?

내공도 결국 사람이 품은 힘이다. 그런데 거대한 용을 연상케 하는 광경을 만들어낸 것이다.


당장 이 장면을 설명하면 누군들 꿈 깨라고 하지 않을까? 고수가 즐비한 무림에서도 좀처럼 말이 안 되는 장면이었다.


웬 고수가 손바닥에서 용을 뿜었네, 하면 미친 거지로 취급 받아 개방에서도 쫓겨났을지 모른다.


차라리 개천에서 이무기를 줍는 편이 현실적이다.


그러나 이 비현실을 현실로 만드는 것이 사부가 건네준 내공의 힘이었다.


이것이 항룡십팔장이다.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무곤진인에게 장난처럼 내지른 장법은 가벼운 인사치례에 불과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푸른 광채가 산중을 뒤덮는다.


이윽고.


용이 지나간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벌목꾼들이 지나간 밀림처럼 밑둥만 남은 나무들이 달빛을 고스란히 받았다.


“어······.”


노인은 바람 빠진 소리를 냈다.


휘두르려던 검은 이미 검신이 증발이라도 한 것처럼 사라진 뒤였다.


허전해진 검을 한번 까딱거린 노인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파르르 떨었다.


“······어? 어어어? 어어어어?”


이, 이게 이러면 안 되는 건데? 라는 심정이 그대로 전해지는 반응이었다.


비상식에도 정도가 있다.


현묘한 몸놀림이나 기술적인 우위로 노인을 제압했다면 이렇게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허나 내공이다.


세월을 들여 쌓지 않으면 근본적인 양을 늘릴 방법이 거의 없다. 영약을 밥처럼 퍼먹는 황태자라도 저 나이에 이만한 내공을 가지지는 못했을 터였다.


“어, 어찌······.”


노인이 말을 잇지 못했다.


달아날 생각조차 들지 않는 일격을 보았기 때문이다.

경공을 극성으로 펼치면서 도망쳐도 청년이 무식하게 발바닥에 내공만 터트리면서 달리면 따라잡힌다.

그런데 도망이 의미가 있겠는가?


홍광이 한 발자국 다가왔다.


“이제 대화할 마음이 드셨어요? 이제 보니 몸도 불편하신 영감님이셨네.”


달빛에 드러난 노인의 얼굴에는 눈이 없었다.


본래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 커다란 흉터가 자리하고 있을 뿐, 우묵한 안와 속에는 눈꺼풀이라고 생각되지도 않는 얇은 선만 하나 그어져 있었다.


물론 경지에 오른 고수에게 시력이 중요하겠냐마는.


“한 번만 더 물을게요. 이번에도 대답 안 하시면 그런 줄로 알 거에요.”


홍광이 다시 한 번 물었다.


“무당 산문 근처에 일부러 씨독을 뿌려놓은 게 영감님이냐구요.”


그제야 완고하게 닫혀 있던 노인의 입이 열렸다.


“······아니다.”

“그럼 뭐에요. 무당파 사람들이랑 영감님 말고 여기 온 사람이 있었어요?”

“있었다. 불청객들이 꽤 많았지. 본문의 제자들은 모르겠지만 잡스러운 놈들이 진산을 올라 작당을 꾸미곤 했다.”

“음.”


홍광이 물었다.


“그럼 씨독을 뿌린 게 그 사람들이에요?”

“그것까지는 모르겠군. 나는 분명 앞이 보이지 않아도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지만, 매번 산문을 감시할 수는 없다. 그리고 특이한 냄새라도 풍기지 않는 한은 발 밑에 있는 풀들이 독초인지 잡초인지 알 수도 없다.”


노인의 말에 홍광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식물의 윤곽과 생김새가 선연하게 보여도 약초학에 조예가 없으면 구별은 힘들다.

전문가들도 헷갈려서 가끔 독초를 먹고 죽는 일이 비일비재한데 오죽하겠는가?


수련과 공부를 병행하면 또 모르지만 굳이 풀의 종류를 구분하는 법을 익혀야 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짐작 가는 놈이라면 있다.”

“오?”

“마지막으로 산을 올라왔던 잡놈. 다른 놈들은 감히 산문 근처에 발을 들이기도 전에 내가 손수 쫓아냈으니, 만약 씨독을 뿌리고 갔다면 그놈밖에 없다.”

“그놈이라 하심은?”


노인은 잠시 입을 우물거렸다.


말을 해야하나 말아야하나 고민하는 듯했는데, 결국에는 입을 열었다.


“사갈파라는 잡놈들 모임의 장(將)이라 하더군.”


사갈파.


홍광이 빠르게 무당파를 떠나고자 하는 원인이었다.

그가 이곳에 머무르면 머무를수록 사갈파가 이곳 제자들에게 해를 끼칠까봐 서둘러 떠나려 했는데, 애초에 무당파를 노리고 있던 모양이었다.


사갈파의 이름이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나왔다.


‘좋지 않은데.’


이유는 중요하지 않다.


만약 사갈파가 이전부터 무당을 도모해왔다면 홍광의 무당파 방문은 좋은 명분이 되었을 것이다.

이번에는 정말로 무당파가 멸문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제가 영감님 말을 어떻게 믿죠?”


일련의 상황은 이해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노인의 말이 사실이라는 증거가 없었다.


그러자 노인이 잠깐 눈치를 봤다.


‘생각했던 불청객은 아닌 모양이다.’


지금까지 무당산을 올랐던 잡스러운 것들과는 달랐다.

방금 보여준 일격은 감히 연출할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확실하게 경지에 오른 항룡십팔장이었다.


“이걸.”


노인은 검신이 깔끔하게 사라져 손잡이만 남은 검을 들어보였다.

검파에 선명하게 태극 문양이 음양각 되어 있었다.


강호에서 검에 새겨진 태극 문양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무당고검.


무당파의 상징과도 같은 검이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1

  • 작성자
    Lv.24 별랑(別狼)
    작성일
    23.10.22 00:52
    No. 1

    강호에 이 내공 -> 이만한 내공. 필력이 경쾌하고 어휘의 폭이 넓어서 참 좋네요. Paraphrase가 완숙한 작가인듯 건필요

    찬성: 0 | 반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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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이젠 거지한테 빌어먹네(3). +1 23.10.11 353 9 12쪽
19 이젠 거지한테 빌어먹네(2). +1 23.10.10 374 12 12쪽
18 이젠 거지한테 빌어먹네(1). +3 23.10.09 412 8 12쪽
17 누구냐, 너(3). +1 23.10.08 418 10 12쪽
» 누구냐, 너(2). +1 23.10.07 412 11 12쪽
15 누구냐, 너(1). +1 23.10.06 437 10 11쪽
14 화무십일홍이라더니(3). +1 23.10.05 435 10 12쪽
13 화무십일홍이라더니(2). +2 23.10.04 450 11 12쪽
12 화무십일홍이라더니(1). +1 23.10.03 506 14 12쪽
11 개판이네(3). +1 23.10.02 507 15 11쪽
10 개판이네(2). +2 23.10.01 537 15 12쪽
9 개판이네(1). +1 23.09.30 600 15 12쪽
8 그릇이 큰 거지가 밥도 많이 얻어먹는다(4). +3 23.09.29 578 18 12쪽
7 그릇이 큰 거지가 밥도 많이 얻어먹는다(3). +2 23.09.28 611 17 12쪽
6 그릇이 큰 거지가 밥도 많이 얻어먹는다(2). +2 23.09.27 673 15 12쪽
5 그릇이 큰 거지가 밥도 많이 얻어먹는다(1). +3 23.09.26 734 14 12쪽
4 기연과 마도천하(3). +2 23.09.25 766 16 11쪽
3 기연과 마도천하(2). +2 23.09.24 876 18 12쪽
2 기연과 마도천하(1). +3 23.09.23 1,142 24 12쪽
1 낭인들(0). +3 23.09.23 1,523 26 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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