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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룡(旦龍) 님의 서재입니다.

기연 첫날에 무림이 멸망했다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단룡(旦龍)
작품등록일 :
2023.09.23 06:39
최근연재일 :
2023.11.13 19:20
연재수 :
50 회
조회수 :
19,027
추천수 :
455
글자수 :
263,236

작성
23.10.03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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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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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2쪽

화무십일홍이라더니(1).

DUMMY

“와아.”


두 제자와 함께 무당산으로 향하는 길, 홍광은 잠시 멈춰서서 진심으로 감탄했다.


“진짜 대박이네.”

“후욱! 후욱!”

“너희들 어떻게 여기까지 왔냐?”


말을 타고 왔나?


대우현까지 돈 빌리러 갔다고 했으니 그럴 리는 없는데.

말 한 필을 기르고 길들이고 유지하는 데 드는 기회비용을 생각하면, 설령 세상이 망해서 사람보다 말이 많다고 해도 허겸과 공진이 말을 탄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럼 이 사태는 뭐란 말인가.


고작 두 시진이나 달렸을까?

무당파의 제자라는 사내 두 명이 흙바닥에 엎어져서 성난 황소개구리마냥 흉곽을 부풀리고 있었다.


시퍼래진 얼굴로 말이다.


“고작 그거 뛰고 이 꼬라지야?”

“후욱, 후욱, 소협이 너무 빠른 겁니다!”

“아니 내가 빠른 건 알지. 근데 그걸 감안하고도 너무 느린데? 너희 대우현까지 가는 데 얼마나 걸렸었어?”

“사, 삼 일 정도······.”

“삼 일? 삼 주야? 삼 일 밤낮?”


홍광은 도저히 못 믿겠다는 듯이 되물었다.


“중독됐다던 막내, 출발하기 전부터 위독했던 거 아니야? 여기까지 오는 동안 사젠지 뭔지 이미 숨 넘어갔을 것 같은데? 만나려면 무당산이 아니라 삼도천으로 가야되는 거 아니야? 아직 살아있는 거 확실해?”

“그, 그게.”


허겸이 말끝을 흐리면서 눈을 피했다.


“미치겠네.”


홍광은 이마를 탁 쳤다.


천하의 무당이 어쩌다가 이렇게 됐나?

남쪽의 드높은 것은 즉 무당이라 하여 남존무당(南尊武當)이라는 이름으로 칭송을 받았던 무당이 아니던가?


그런 명문 무당파의 제자쯤 되면 아무리 배분이 낮은 이대제자라 한들, 웬만한 문파의 일대제자는 찜 쪄먹을 실력이어야 이치에 맞다.


그 이대제자가 특별한 인재가 아니더라도 이대제자 중 아무나 나오라고 한 뒤에 중소문파의 일대제자와 대련을 시키면 이겨야 한다는 말이다.

그게 홍광이 생각하는 무당의 최소치였다.


경험과 실전 감각을 배제하고 보면 어린 제자들마저 수십 년을 고련한 무림인과 맞먹는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랬을 터인 무당파가 어쩌다가!


답답한 홍광이 따지듯이 물었다.


“경공은 어디에다 팔아먹고 왔어? 무당파 하면 경신법, 경신법 하면 무당파잖아. 구름 위를 밟는다던 고매한 무공은 어디 갔냐고!”

“마인들이 진산까지 들이닥치는 바람에······ 소실됐습니다.”

“소실? 무당의 경신법이?”

“예.”

“지금 말하는 게 무당의 신공절학이던 제운종 맞지? 그게 없어졌다고?”

“예.”

“허, 이런 미친놈들을 봤나.”


헛웃음이 나왔다.

칠 년 전 강호를 아는 이들이 이 소식을 듣는다면 누구라도 어이가 없어서 홍광과 같은 반응을 보일 것이다.


제운종의 신묘함이 어디 보통인가?


홍광도 사부에게 경공을 배웠지만, 경신법의 정교함 만큼은 무당의 제운종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 뒤에 ‘물론 무학 자체의 수준이 그렇다는 거지, 펼치는 사람의 격이 다르니 말코도사놈들은 나를 잡은 적이 없었지만 말이다.’라며 낄낄 웃긴 했어도 말이다.


사부가 그렇게까지 높게 평가하는 무공은 흔치 않았다.


그 평가에 맞게, 어찌 보면 무당의 진산절기인 태극혜검보다 유명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제운종이다.


‘그런데 그걸 잃어버려?’


무당의 선조들이 하늘에서 보면 땅을 치고 통탄을 할 일이었다.


‘어쩐지 사갈파인가 하는 놈들이 무당하고 멀쩡하게 얘기를 하더라니.’


무당이 경신법 하나라도 멀쩡했다면 결코 지금과 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애저녁에 둘 중 하나가 죽어나갔겠지.

경신법 하나만으로도 무당이라는 존재는 충분히 부담스러웠을 테니까 말이다.


어쩌면 차라리 제운종까지 깔끔하게 전부 잃은 것이 무당파에게 있어 행운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한 홍광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화무십일홍이라더니.”

“······.”

“천하의 무당파도 빌어먹는 날이 오는구나. 어쩌겠냐, 달이 찼으면 기우는 거지.”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젠 다시 차올라야겠지요.”

“말은 잘하네. 말할 기운 있으면 이제 출발하자. 다 쉬었지?”

“예.”

“충분합니다.”


담백하게 대답하고 일어난 허겸은 그나마 나았지만 공진은 다리가 푸들푸들 떨리고 있었다.


‘설마 올 때도 이렇게 왔나?’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홍광이 물었다.


“너희 마지막으로 잔 게 언제야?”

“나흘 전입니다.”


나흘.


대우현까지 오는 데 사흘이 걸렸다고 했으니까 즉 출발한 날부터 한 번도 잠을 잔 적이 없다는 말이었다.


사람이 나흘 동안 잠을 안 잔다는 것도 충분히 견디기 어려운 일인데 심지어 그중 삼 일은 내내 달리기만 했다니.


홍광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너희 그러다가 죽어.”

“······.”

“농담이 아니라 막내보다 너희가 먼저 뒈진다고. 너희가 무슨 고수야? 고수 발끝에라도 걸치면 내가 말을 안 해. 그런데 너희 수준에서 그러는 건 평범한 사람들이 똑같이 행동하는 거랑 별로 다를 바가 없어.”


무공을 익힌 적 없는 평범한 사람이 나흘을 잠도 자지 않고 뛰면 그건 더 이상 사람이 아니라 시체라고 부른다.


그나마 개미 똥구멍 만한 내공이 있기에 버티고 있는 거지, 아니었다면 죽어도 진즉에 죽었다.


“안되겠다. 일단 좀 자.”

“하지만 그럴 수는······!”

“됐어. 지금 더 가겠다는 건 용기가 아니라 만용이야. 그냥 네 마음 편하자고 자살하는 거라고.”


그 말에 허겸이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뜨겁게 달궈진 돌을 삼키는 심정이었지만 맞는 말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자겠습니다. 하지만 딱 한 시진만 잔 뒤에 출발해도 되겠습니까?”

“그것도 간당간당하긴 한데, 알아서 해. 거기서부터는 내가 간섭할 바는 아니지.”

“감사합니다.”


허겸은 굳이 일어나서 포권하며 허리를 숙인 뒤에 곧바로 다시 누워 눈을 감았다. 울퉁불퉁한 흙바닥이었지만 천근 같은 눈꺼풀이 시야를 덮자 몇 초도 지나지 않아서 수마가 몰려왔다.


공진도 마찬가지로 놀라울 만큼 빠르게 잠에 빠져들었다.


홍광도 잠시 앉았다. 이 정도로 지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딱히 서서 할 짓도 없었다. 사람 셋이 모두 입을 닫자 별안간 고요가 찾아왔다.


‘묘하네.’


홍광에게는 이 고요가 마치 폭풍의 전야처럼 느껴졌다.

그저 감일 뿐이었지만 말이다.


* * *


마른 나뭇가지처럼 얇은 손목이다.


현 무당파의 장문인 무곤진인은 가냘픈 그 손목에 조심스럽게 검지와 중지를 가져다 댔다.


분명 살아 있다.

약하지만 분명히 동맥이 맥동하고 있었다.


“허어······.”


통상적으로 한숨에는 많은 의미가 있다.


하고자 하는 말이 있는데 도저히 나오지 않아서 숨으로 대신하거나, 말해도 소용없는 상황에 사람은 주로 한숨을 내쉰다.


지금 무당이 처한 상황을 생각하자면 무곤진인이 내쉬는 한숨에는 말로 이를 수 없는 무거움이 어렸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의 한숨은 순수한 안도였다.

이 가냘픈 맥이 아직 뛰고 있다는 것에 대한 감사와 안도의 한숨.


그만큼 맥을 짚을 때마다 무곤진인은 심장이 덜컹거리면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숨이 너무 얕아서 흉부가 부풀질 않으니 살아 있는 것을 확인하려면 직접 만져보아야 했기 때문이다.


“명완아.”


공명완.

지금 독초에 중독되어 쓰러져 있는 삼대제자 막내의 이름이었다.


무곤진인은 그새 뜨끈해진 천을 다시 찬 물에 적셔서 명완의 이마에 올렸다. 그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가끔 이렇게 맥을 짚어 생사를 확인하고 진기를 흘려넣는 일과 물수건을 갈아주는 일밖에 없었다.


이 얼마나 한심한 장문인인가?


죽어가는 제자를 위해서 해줄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 고작 어설픈 간병뿐이라니. 의원 하나 구해주지 못하고 독에 대한 지식도 없다.

그나마 아직까지 정에 기대 도움을 청해볼 수 있는 것은 안휘의 남궁세가 정도겠지만, 거기까지 왕복할 시간이면 명완은 죽고도 남는다.


결국 제자들을 시켜 주변의 아무에게나 도움을 청해보라는 명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비굴한 명이었다.

결국 제자들에게 구걸을 시킨 셈이었다.


그러나 마도천하가 된 이후 장로 배분이 모두 죽고, 산 속에서 도를 닦는 데 전념하던 무곤진인을 제하면 일대제자들도 전부 죽었다.

싸울 줄 아는 이들은 설령 무곤진인처럼 운 좋게 살아남았더라도 다시 마인들에게 달려들어 그 목숨을 태운 것이다.


사태가 이렇다보니 어쩔 수 없이 최연장자로서 장문인직을 떠맡게 된 무곤진인은 무학에 대해서도 정말 최소한의 지식만 있었고, 뭔가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도 없었다.


말 그대로 허울뿐인 장문인.

단 한 번도 장문인이 되리라고 생각해본 적 없는 장문인이 그였다.


그런 제자는 없지만, 가령 무당의 제자 중 누군가 무곤진인을 욕한다고 해서 그가 입이라도 뻥끗할 수 있을까?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 것이다. 그건 욕이 아니라 사실이니까.


그런 상념에 다시 한번 물수건을 쭉 짜는데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장문인, 허동입니다.”

“들어와라.”


무당은 예로부터 정 무 허 공 솔의 도호를 쓰고 있다.


일대제자였던 무곤진인이 무자 배이니 허자 배인 허동은 이대제자였다. 공자 배인 삼대제자와 함께 하산했다가 돌아온 것이다.


“······.”


방에 들어오고도 한참 동안 허동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 표정과 꽉 쥔 주먹에서 이미 결과가 짐작됐다.


그럼에도 묻지 않을 수는 없다.


“성과는 있었느냐?”

“죄송합니다 장문인.”

“아니다. 네가 죄송할 일이 뭐가 있겠느냐. 사죄해야 한다면 미욱한 장문인인 나겠지. 미안하구나.”


그렇게 말한 무곤진인이 이대제자에게 고개를 숙였다.

허동은 식겁하며 손사레를 쳤다.


“자, 장문인. 고개를 들어주십시오! 어찌 제게 고개를 숙이십니까! 장문인의 희생을 모르는 자는 무당에 단 한 명도 없습니다. 부디 자책하지 말아주십시오.”


어찌 모르겠는가?


가라앉는 배의 선장을 떠맡았음에도 피하거나 도망치지 않고 묵묵히 뱃머리를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큰 희생인지.

심지어 옆에서 쭉 지켜봐온 이라면 더더욱 무곤진인의 대단함을 모를 수가 없었다.


하지만.


허동은 죽어가는 막내의 얼굴을 조용히 바라봤다. 명을 받고 하산했을 때보다 훨씬 상태가 나빠진 듯했다.


“······아직 복귀하지 않은 제자들이 몇이나 있습니까?”


그 물음에 무곤진인은 애써 침통한 표정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잠시 마음을 다잡았다.

장문인이 동요하면 문파가 동요한다. 설령 이 자리에서 명완이 죽더라도 그는 우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


무곤진인은 한차례 숨을 들이쉬고 담담하게 말했다.


“둘이다.”

“둘······.”


이대제자와 삼대제자를 붙여서 둘씩 내보냈으니, 단 한 조가 남았다는 말이었다.

반대로 말하면 모든 제자들이 주변에서 도움을 청하는 데 실패했다는 뜻도 됐다.

이 호북 땅에서, 무당이.


이를 악 문 허동이 물었다.


“남은 조는 누굽니까?”

“허겸과 공진의 조다.”

“대사형입니까. 뛰어난 인원이 남았군요. 혹시 모르겠습니다. 그 조가 의원을 데리고 올지.”

“그래······.”


혹시 모르지.


세상에는 기적이라는 것이 있으니까 말이다.


마도천하에 얼굴도 모르는 사람 하나를 살리겠다고 자기 것을 내주는 이가 있을지도, 이 먼 무당산까지 발을 옮길 자가 어딘가 존재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사람이 운 좋게 호북의 북서부에 있었고, 또 천운이 이끌어 제자들 중 하나와 만나는 것이다.


아주 운 좋게.

기적처럼.


무곤진인은 눈을 지그시 감고 평정을 가슴에 새겼다.


어느새 달아오른 물수건을 다시 찬 물에 적셔서 쭉 짰다.


그러나 이제는 그릇에 퍼온 물 자체가 미지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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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이젠 거지한테 빌어먹네(2). +1 23.10.10 372 12 12쪽
18 이젠 거지한테 빌어먹네(1). +3 23.10.09 409 8 12쪽
17 누구냐, 너(3). +1 23.10.08 415 10 12쪽
16 누구냐, 너(2). +1 23.10.07 409 11 12쪽
15 누구냐, 너(1). +1 23.10.06 435 10 11쪽
14 화무십일홍이라더니(3). +1 23.10.05 434 10 12쪽
13 화무십일홍이라더니(2). +2 23.10.04 448 11 12쪽
» 화무십일홍이라더니(1). +1 23.10.03 505 14 12쪽
11 개판이네(3). +1 23.10.02 504 15 11쪽
10 개판이네(2). +2 23.10.01 535 15 12쪽
9 개판이네(1). +1 23.09.30 597 15 12쪽
8 그릇이 큰 거지가 밥도 많이 얻어먹는다(4). +3 23.09.29 575 18 12쪽
7 그릇이 큰 거지가 밥도 많이 얻어먹는다(3). +2 23.09.28 609 17 12쪽
6 그릇이 큰 거지가 밥도 많이 얻어먹는다(2). +2 23.09.27 671 15 12쪽
5 그릇이 큰 거지가 밥도 많이 얻어먹는다(1). +3 23.09.26 730 14 12쪽
4 기연과 마도천하(3). +2 23.09.25 763 16 11쪽
3 기연과 마도천하(2). +2 23.09.24 874 18 12쪽
2 기연과 마도천하(1). +3 23.09.23 1,140 24 12쪽
1 낭인들(0). +3 23.09.23 1,521 26 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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