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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룡(旦龍) 님의 서재입니다.

기연 첫날에 무림이 멸망했다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단룡(旦龍)
작품등록일 :
2023.09.23 06:39
최근연재일 :
2023.11.13 19:20
연재수 :
5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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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1
추천수 :
455
글자수 :
263,236

작성
23.09.27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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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2쪽

그릇이 큰 거지가 밥도 많이 얻어먹는다(2).

DUMMY

한타방 웃고 나니 용두방주는 다시 그 입을 조개처럼 다물었다.

긴긴 침묵이 이어졌다.


홍광도 함부로 입을 떼지 못했다.


애써 유쾌한 듯 굴고는 있지만 용두방주가 전선에서 겪었을 비극은 홍광이 감히 이해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자신이 결코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홍광은 이해하고 있었다.


다만 용두방주의 회한 어린 그 얼굴이, 잘려나간 사지가 그의 입을 대신하여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아직은 이해하지 못하겠지.”


용두방주가 힘겹게 입술을 뗐다.


“아직 네게는 제대로 된 강함의 척도가 없고, 강호의 정세가 머릿속에 들어 있지 않으니까. 지금 이 상황이 얼마나 충격적이고 허탈한지 모를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직도 꿈이 아닐까 싶다. 눈만 감았다 뜨면 모든 것이 내 상상일 뿐이었던 것은 아닌가.”


정말 그렇다는 듯이 용두방주의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았다가 다시 떠졌으나, 여전히 이곳은 동굴이었다.


“허허······ 우습지 않으냐?”

“뭐가 말이에요.”

“강호의 몰락 말이다. 난공불략의 첩첩성을 쌓았다 생각했는데, 마치 어린아이가 장난처럼 쌓아올린 모레성처럼 무너졌다. 만약 내가 옆에서 이 광경을 구경했다면 배를 잡고 굴렀겠지. 천하의 멍청이들을 모아 놓았다면서. 그러나 정작 내가 그 꼴이구나.”


홍광은 대답할 수 없는 문제였다.


말마따나 홍광은 아는 게 별로 없었으니까.


용두방주는 갚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말을 이었다.


“헌데 정말로 우스운 것은 뭔지 아느냐?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이 사태를 막을 자신이 없다는 것이다.”

“······.”

“나흘 걸렸던 멸망을 칠 주야 정도로 늘릴 수는 있겠지. 하지만 결코 상황을 크게 변화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설사 내가 깨달음과 내공을 온전히 갖고 갓난아기 시절로 돌아간다 해도 말이다.”


용두방주의 눈에는 아직도 생생했다.


구파의 장문인들이 만들어낸 가공할 위력의 검강과, 산도 쪼개버릴 신위가 천마의 앞에서 마치 성글게 뭉친 눈덩이처럼 흩어지던 장면이.

그건 중원의 무학이 통째로 부정 당하는 기분이었다.


어떤 공격도 천마의 몸에 생채기를 내지 못했고, 어떤 이도 천마의 옷자락 한 올을 만질 수 없었다.


천마가 장난처럼 휘두른 손에 구파의 장문들이 죽어나갔다.

전투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유린이었다.


그 말을 들은 홍광은 표정을 굳혔다.


‘너무 심한 거 아닌가?’


이제 용두방주가 왜 이렇게까지 충격적이라고 말했는지 조금 알 것 같았다.


당금의 용두방주 장일홍이라 하면 강호의 확고부동한 천하제일인이었다. 개방사에서 천하제일을 논한 적은 몇 번인가 있었지만 이렇듯 당당하게 천하제일이라고 자부할 수 있었던 적은 없다.


그런 용두방주가 이 정도로 절망했다는 것은 마교와 중원의 차이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라는 의미였다.


침음성을 흘리던 홍광이 물었다.


“주변 나라들이 영토를 빼앗으려고 침공해오지 않을까요?”

“아직 열둘인데 똑똑하구나. 네 말이 맞다. 마교 놈들이 기어코 황실까지 불태우는 걸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으니, 아마 굶주린 아귀들처럼 논 한 마지기라도 더 가지려 물어뜯을 거다.”

“그럼······!”

“허나 결국 한 줌의 모레도 쥘 수 없겠지.”


용두방주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마교는 그런 놈들이다.”

“······.”

“그놈들이 통치나 지배에 관심이 없어서 굳이 강호를 벗어나려고 하지 않으니 망정이지, 만약 마교의 칼 끝이 주변을 향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주변의 도움을 기대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야.”


물론 홍광은 알고 있었다.


범이 잠자고 있다고 해서 위협적이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근방의 나라들은 굳이 영토에 대한 욕망 때문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합심해서 마교라는 범을 최대한 멀리 몰아내고자 시도할 것이다.


‘하지만 그게 나라의 멸망보다 중요할까?’


이미 답은 나왔다.

주변국은 범을 쫓아보려다가, 그 범이 실은 용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중원 방향으로는 오줌도 싸지 않게 될 것이다.


만약 용두방주의 말이 전부 과장 없는 사실이라고 한다면 그랬다.


그리고 그 말은······.


‘이대로 동굴에 박혀 있다가 나가도 마교는 멀쩡하겠구나.’


결국 마도천하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홍광이 심각한 표정으로 침중하고 있자 용두방주가 다시금 가벼운 어투로 물었다.


“걱정되느냐?”

“네. 당장은 동굴 안에서 무공을 수련한다고 해도 언젠가는 밖으로 나가야 하니까요.”

“새끼, 쫄기는.”

“어떻게 안 쫄려요? 듣자하니 아무리 강해진다고 해도 밖으로 나가는 순간 목이 썰릴 것 같은데.”

“걱정할 것 없다, 이놈아.”


오?


이 절망적인 상황에 걱정할 것 없다니, 무슨 비장의 수라도 숨겨둔 건가?


그럼 그렇지 괜히 용두방주가 아니다.

저 이름이 골패로 딴 이름은 아니구나.


홍광이 일말의 기대를 품은 눈빛으로 용두방주를 바라봤다.


그에 답하듯 용두방주가 씩 웃었다.


“고개만 돌리면 피안이라고 했다.”

“네?”

“굳이 네가 그 문제에 몸을 던질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온 세상이 마도천하인데 몸을 던질 필요가 없다니.


“내가 보니 마교 놈들은 굳이 나라를 통치할 생각이 없는 것 같더구나. 그럼 어떻게 되겠느냐?”

“······무법천하가 열리겠죠.”

“그렇지! 그리고 무법천하에서 가장 유용한 게 뭐냐? 바로 주먹이다. 심지어 법이 있을 때도 주먹이 법보다 가깝다는 말이 있었는데 마도천하가 되었으니 어지간하겠느냐?”

“아니······.”

“왜?”

“그러니까 사부님 말씀은, 마교는 대충 피해서 숨어 다니면서 가르쳐줄 무공으로 잘 먹고 잘 살아라 이 말입니까?”

“정확하게 들었구나. 어린데 영특하군.”


용두방주가 낄낄 웃었다.


그래도 나름대로 협의와 정의를 표방한다는 정파의 기둥이 구파일방인데.

이 양반이 무려 그 일방의 방주인데.


‘이래도 되나?’


홍광이 개방을 낮게 평가하긴 했지만 이건 그나마 먼지만큼 남아 있던 환상까지 산산히 부수는 말이었다.


“어? 이번에는 협의지심 없다고 까는 것 같은데?”

“네.”

“끄응, 이젠 숭길 생각도 없군.”

“숨긴다고 숨겨지는 게 아니더라고요.”


홍광이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사부님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는 알 것 같아요. 저로는 어차피 마교를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하신 거죠?”

“······눈치까지 빠른 제자구나.”


용두방주의 눈살이 낮게 가라앉았다.


분명 홍광의 그릇은 충분하리만치 넓다.


아니, 충분한지 그렇지 않은지를 판별할 수 없을 정도로 넓으니 감히 자신은 이 아이가 가진 오성을 헤아릴 수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대기(大器)를 가졌다 해서 강한가?


결코 아니었다.


만일 천마에게 삼류 무사 만큼의 내력만 있고, 용두방주 본인에게 두 배, 세 배의 내력이 있었다면 승패가 달라졌을까?


그렇게 생각해보면 답이 나왔다.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무엇도.


제자가 스스로 천마를 넘어설 정도의 무리(武理)를 깨닫는다면 모를까, 가르치는 것만으로는 마교에 적대할 수 없을 것이다.


다 스승 된 스스로의 모자람이었다.


“하지만 네게 마교를 피해 살라고 한 것은 그저 마교가 강하기 때문은 아니란다.”


용두방주가 입을 열었다.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었다.


“개방에 대해 어찌 생각하느냐?”

“어······ 굶주린 거지들을 도와주는 집단이요.”

“이놈아, 거짓말도 그럴 듯하게 해야지. 서열이 낮은 개방 거지들의 삶을 나는 모르지 않는다. 바꾸려고도 해봤지만 쉽지 않더구나. 조직에 있어 위계란 그만큼 중한 것이니.”


용두방주가 멋쩍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여하튼, 하려던 말은 이것이다. 꼭 중원의 사상이 옳은 것은 아니다. 개방 또한 무조건 옳았던 건 아니지. 정말 우리가 그리도 옳은 길을 걷고 있었다면 어찌하여 마교와 같은 이들이 생겨났겠느냐?”


그 말을 하는 용두방주의 눈에는 현기마저 깃들어 있었다.


“나는 네게 낡아빠진 협의지심을 가르칠 생각이 없다. 그건 이미 효용을 다했다고 봐야겠지.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느냐?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옳으냐? 천하는 이미 변했거늘.”


용두방주가 부드러운 웃음을 지었다.


“그건 네가 찾거라. 그것이 네 협이다.”


세상은 두 종류로 이루어져 있다.


변해가는 것들과 변하면 안 되는 것.


용두방주는 평생토록 협의가 변해선 안 되는 것이라 여기고 살아왔다. 그러나 이제는 알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니 너는 살아남아라. 도망치든, 진흙탕을 구르든,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세상을 보거라. 그래야 결론이든 개뿔이든 나지 않겠느냐?”

“알겠어요.”

“장하다.”


사실 용두방주 본인도 변한 세상을 괄목하고 결론을 내리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 같았다. 아니, 어찌 그 마음을 굴뚝 따위에 비유하랴?

그가 평생을 쫓아온 것은 과연 무엇이었는가를 확인하는 일이다.


그러나 용두방주에게는 시간이 없다.


의문을 제기하고 회의가 밀려올 즈음에는 이미 늦어 있다.


그것이 얼마나 무력하고 또 한스러운 일인지 겪어보지 않은 이들을 모를 것이다. 이제야 무언가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는데 생을 마감해야 할 때가 함께 찾아온다는 것이.


‘하지만 다 그런 거겠지.’


이제야 용두방주는 그의 스승이었던 전대 왕거지가 어떤 심정으로 눈을 감았는지 이해할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까.”

“응?”

“충자 그놈은 어찌 됐어요? 왜, 같이 있었던 새끼 거지 하나요.”


홍광에게 그놈은 씹어먹어도 시원찮을 놈인 건 맞지만, 마지막에 충자가 마인의 앞에 나서서 시간을 벌어주지 않았다면 용두방주가 도착하기도 전에 죽었을 것이다.


괜히 신경이 쓰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용두방주가 씁쓸한 웃음을 머금었다.


“나도 모른다.”

“모른다고요?”

“그래. 나는 분명히 그놈을 살렸지만 도저히 한 사람을 더 챙길 여력은 없었다. 그랬다가는 셋이서 사이좋게 길바닥에 엎어져서 지금쯤 개밥이나 됐겠지.”

“······.”

“운이 좋았다면 살아남았을 수도 있고, 웬만하면 죽었을 것이다.”


홍광은 고개를 끄덕였다.


용두방주를 탓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누군가를 탓해야 할 만큼 친분이 있는 사이도 아니었다.


“궁금한 것은 다 물어봤느냐?”

“네, 사부님.”

“그래. 그럼 첫 번째 수련이다.”


용두방주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러자 동굴의 공기가 순간 변했다.


동시에 동굴 안쪽에서 무언가 깨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불쾌하다는 듯이 낮게 울더니 점차 이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윽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한 마리의 거대한 곰이었다.


털을 잔뜩 부풀린 것이, 아무래도 영역을 침범 당해서 약이 잔뜩 오른 모습이었다.


“사, 사부님?”


홍광이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용두방주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허허, 내 남은 힘을 쥐어짜서 기척을 숨기고 있었으나 슬슬 힘에 부치는구나. 그놈은 네가 상대해야겠다.”

“······.”

“동굴 밖으로 도망칠 생각일랑 접어두거라. 곰의 달리기는 네 생각보다 훨씬 빠르니. 등을 보이는 순간 끝이다.”


홍광은 잠시나마 용두방주를 믿었던 자신을 원망했다.


하지만 욕은 목구멍 밑으로 넣어두고 최대한 침착하게 물었다.


“그럼 어떡하죠? 사부님의 내공을 이용해서 물리치나요?”

“아니? 상식적으로 네가 그걸 어떻게 쓰느냐. 명검을 줬다고 전부 그걸 알맞게 다룰 수 있다면 누가 검술을 수련하겠느냐? 제자는 내공만 있으면 만사가 해결될 거란 안일한 생각을 버리도록 해라.”

“······.”


홍광은 곰과 싸우기 전에 용두방주의 머리통을 한 대 때려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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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어찌하시겠습니까?(1). +1 23.10.12 328 10 12쪽
20 이젠 거지한테 빌어먹네(3). +1 23.10.11 351 9 12쪽
19 이젠 거지한테 빌어먹네(2). +1 23.10.10 373 12 12쪽
18 이젠 거지한테 빌어먹네(1). +3 23.10.09 410 8 12쪽
17 누구냐, 너(3). +1 23.10.08 417 10 12쪽
16 누구냐, 너(2). +1 23.10.07 410 11 12쪽
15 누구냐, 너(1). +1 23.10.06 436 10 11쪽
14 화무십일홍이라더니(3). +1 23.10.05 435 10 12쪽
13 화무십일홍이라더니(2). +2 23.10.04 449 11 12쪽
12 화무십일홍이라더니(1). +1 23.10.03 506 14 12쪽
11 개판이네(3). +1 23.10.02 506 15 11쪽
10 개판이네(2). +2 23.10.01 537 15 12쪽
9 개판이네(1). +1 23.09.30 598 15 12쪽
8 그릇이 큰 거지가 밥도 많이 얻어먹는다(4). +3 23.09.29 576 18 12쪽
7 그릇이 큰 거지가 밥도 많이 얻어먹는다(3). +2 23.09.28 610 17 12쪽
» 그릇이 큰 거지가 밥도 많이 얻어먹는다(2). +2 23.09.27 673 15 12쪽
5 그릇이 큰 거지가 밥도 많이 얻어먹는다(1). +3 23.09.26 732 14 12쪽
4 기연과 마도천하(3). +2 23.09.25 764 16 11쪽
3 기연과 마도천하(2). +2 23.09.24 875 18 12쪽
2 기연과 마도천하(1). +3 23.09.23 1,141 24 12쪽
1 낭인들(0). +3 23.09.23 1,523 26 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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