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단룡(旦龍) 님의 서재입니다.

기연 첫날에 무림이 멸망했다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단룡(旦龍)
작품등록일 :
2023.09.23 06:39
최근연재일 :
2023.11.13 19:20
연재수 :
50 회
조회수 :
19,028
추천수 :
455
글자수 :
263,236

작성
23.10.02 19:20
조회
504
추천
15
글자
11쪽

개판이네(3).

DUMMY

“자, 잠깐!”


곽자우가 황급히 목소리를 올렸다.


그는 사갈파의 안찰사다.

안찰(按察)이라는 말 그대로, 그의 직무는 맡은 바 구역 내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을 살피고 발생할 법한 사고를 그의 선에서 억누르는 것이다.


그 직무의 내용이야말로 권력이었으며, 그밖에 곽자우가 누리고 있는 호사 또한 직무를 수행하는 능력에서 나온다.


눈치 빠른 그에게 참으로 어울리는 직무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만한 고수를 사전에 발견했음에도 방치한다면 안찰사로서 곽자우가 가지던 신뢰는 어찌 되겠는가?

우호 관계를 쌓기는커녕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기싸움을 벌인 것이 들통난다면?


그의 신뢰는 끝없는 나락으로 곤두박질 칠 것이다.


고수를 적으로 돌리는 순간 고혈같은 병력을 잃어야 할 테니까. 어찌어찌 붙잡아 목을 친다고 해도 얻을 것도 없는 싸움에 소모한 전력은 돌아오지 않는다.

곽자우가 지금까지 쌓아온 자잘한 공로들은 그 한 번의 거대한 실 앞에 풍전등화가 될 것이 불보듯 뻔했다.


‘만약 그리 되면?’


이마에 능력부족의 낙인이 찍힌 채 안찰사의 직위를 내려놓거나, 최악의 경우 사갈파에 발을 붙일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것만큼은 절대 안 된다.’


곽자우는 이를 꽉 물었다.


누군가는 그의 이런 생각을 과대망상증이라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당금의 강호를 모르는 이들의 이야기다.


황궁이 없으니 관도 없다.

그나마 무인들을 통제할 구파일방이나 이전의 강대한 세력들도 모조리 사라졌다.


고수가 활개를 치기 이보다 좋은 환경이 어디에 있겠는가?


결국 고수란 힘 쓰는 자들.

극단적으로 말하면 죄다 싸움에 환장한 망나니들이다. 눈 앞에 무법지대라는 넓고 쾌적한 무대가 마련되어 있는데 얌전히 지낼 종자들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 환경에서 칠 년의 폐관수련을 마치고 나온 고수가, 평화롭게 아무런 사고도 치지 않고 살아가리라고 믿는 편이 어리석었다.

당장 입장을 바꿔 곽자우라도 칠 년 동안 동굴에서 힘만 키웠다면 실력을 확인해보고 싶어서 좀이 쑤실 테니까.


그리고 이 고수가 사갈파의 영역에서 대형사고라도 터트리는 순간, 그렇게 사갈파와 고수가 대치하게 되는 순간, 그 순간이 곽자우의 목이 떨어지는 순간일 것이다.


말 그대로 모가지가 걸린 일이었다.


‘이대로 보내는 건 최악의 수다.’


당황해서 잠시 언성이 올라갔던 곽자우가 냉정함을 되찾고 입을 열었다.


“흠흠. 잠시 기다려보게 소형제.”

“왜요?”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 아닌가. 실력이 출중한 젊은이를 만난다는 것은 나같은 평범한 강호인에게는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네. 대화를 좀 더 해보지 않겠나?”

“으음.”


그러자 홍광이 이보라는 듯이 두 팔을 벌렸다.


“저 진짜 돈 없는데요. 사부도 저도 거지였어서 땡전 한 푼 없어요. 제가 좀 많이 먹었다는 건 인정하지만, 이제 와서 음식값을 달라고 하셔도 곤란해요.”

“······돈 달라는 말은 하지 않을 테니 안심하게.”

“그렇다면 뭐. 말씀하세요.”


또 언제 마음이 바뀔지 모른다. 겸양도 여유가 있을 때 떠는 것이다.


곽자우는 최대한 빠르게 용건을 꺼냈다.


“소형제는 동굴에서 나왔다고 했지?”

“그런데요.”

“그럼 아직 변한 세상을 많이 돌아보지는 못했겠군. 칠 년 사이에 천하는 더 이상 이전의 것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격동을 겪었으니까 말이야. 그만한 실력을 갖추었으니 세상을 돌아다니고 싶은 마음도 있을 거야. 그렇지 않은가?”

“하고 싶은 말이 뭐에요? 들어주고 싶어도 한 시가 급해보이는 분들이 계서서요.”


객잔 입구에서 초조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는 두 사형제 말이었다. 발만 동동 안 굴렀지 아주 안달나 죽겠다는 듯이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이 청년 고수가 저들을 돕기로 결정한 이상, 그만큼 대화할 시간도 없다는 뜻이었다.


곽자우가 돌리지 않고 말했다.


“본론만 말하지. 앞으로도 계속 호북 북서부의 땅에 머무를 생각인가? 보다 정확하게는 사갈파의 영역에 말이네.”

“그게 중요한가요?”

“중요하네. 가령 자네가 농부고, 몇 계절을 일구어낸 밭이 있다고 생각해보게나. 그 밭에 힘센 멧돼지가 들어오면 기분이 어떻겠는가?”

“쫓아내고 싶겠죠.”

“바로 그거네. 심지어는 멧돼지가 현재로써 아무런 피해를 입히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말일세. 힘이 세다는 것 자체만으로 농부의 입장에서는 충분한 위협이 되는 거지. 이해가 되는가?”


홍광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해력이 느린 편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농부는 사갈파고, 농부가 일군 밭은 사갈파가 지배하는 호북의 북서부, 난입한 멧돼지가 홍광 자신이었다.


“지금 떠나라고 협박하시는 건가요?”


직설적인 물음.

그 물음 안에 희미하게 담긴 적의.


홍광은 사부의 유일한 명을 수행할 생각이었다. 그것은 세상을 보고 자신의 생각을 바로세우라는 것이었다.


그는 이미 고수다.

물론 힘 없는 거지였던 적보다 훨씬 낫긴 하지만 그럼에도 모든 일에는 장단점이 있는 법이었다.


어떤 때는 고수라는 것이 장점으로 작용하겠지만 또다른 관점에서는 언제나 주변의 경계 대상이 된다는 단점도 존재한다.


세상이 이 꼴이니 가는 곳마다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고, 그때마다 같은 방식으로 쫓겨나서야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나대지 말라는 말도 중요하지만 이쪽도 못지 않게 중요하다.

입 다물고 물러나줄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곽자우는 예상했다는 듯이 손을 살짝 들어올리는 것으로 부정했다.


“그런 게 아니네. 정말 순수한 물음이었어. 예를 든 것은 우리의 입장을 이해해주길 바라서였지, 대립하기 위함이 아니야. 상황이 그렇다는 거지 자네가 멧돼지는 아니지 않은가.”

“······그렇긴 하죠.”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잠시 우리 사갈파에서 식객으로 머물러볼 생각은 없냐는 거였네. 말 그대로 식객. 소형제에게 일을 시키지도 않을 거고, 나서달라고 요청하는 일도 없을 거라고 약속하지. 또한 사갈파 내에 머무를 필요도 없네. 자유롭게 호북의 북서부를 유람하시게나.”

“오오?”


그것 참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흥미를 보이는 듯하자 곽자우가 말에 살을 덧붙였다.


“당장 무당으로 달려가는 이유가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우리쪽에서 호북 제일의 의원을 섭외하여 보내주겠네. 어떤가?”

“으음.”


홍광이 잠시 침음하자 곽자우가 빠르게 눈치를 굴렸다.


“그래. 당연히 고민이 되겠지. 우리들이 소형제를 이용하는 것은 아닐까, 다른 속셈이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의심도 당연하네. 솔직히 말하자면 욕심이 없는 것도 아니지. 소형제의 의심은 옳아.”

“······.”

“다만, 그것은 말 그대로 욕심일 뿐이지.”

“그렇다 하심은?”

“지금은 그저 사갈파의 좋은 인상을 소형제에게 심어주는 걸로 족하다는 말이네. 내가 바라는 것은 그저 피차 무용한 소모전을 벌이는 일이 없도록 예방하는 것이지, 욕심은 그 다음이야.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나?”

“으음.”


속사포로 말을 쏘아내다시피 한 곽자우가 한 입에 침을 바르고 대답을 기다렸다.


청산유수와 같은 말을 만들어내고 또 검열하고 뱉어내느라 머리에서 불이 날 지경이었다.

그에 반해 홍광은 느긋하게 한 가지를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아저씨가 하신 말은 충분히 알겠어요.”

“다행이군.”

“그런데요, 사갈파는 사파죠? 그럼 원한도 많겠네요? 호북의 북서부를 관리하고 있으니 주변 세력들이랑도 다툴 테고요. 우호적이라 해도 물밑에선 치열하겠죠. 제 말이 틀린가요?”

“그리 묻는다면 솔직하게 그렇다네. 아니라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소형제가 그 은원에 말려들 일은······.”

“있겠죠. 당연히.”


홍광은 단호하게 곽자우의 말을 끊어버렸다.


“밭에 멧돼지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농부에게는 위협이 되니까요. 그렇죠?”

“······.”

“그럴 바에야 저는 나대지 말고 안전한 무당으로 가서 보신할게요.”


말이라는 것이 이렇게 무섭다.


빠져나갈 길 없는 외통수다.

자신이 깔아놓은 덫에 자신이 걸려넘어진 꼴이었다.


곽자우가 최후의 발악을 하는 심정으로 물었다.


“사갈파라는 농부가 휘두르는 낫은 무섭지 않은가?”

“괜히 그쪽에 붙어서 사방의 농부로부터 노려지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은데요. 기왕 이렇게 된 거 아저씨가 말을 좀 잘 전해주세요. 저는 안전제일주의라서 부득이하게 못 가게 됐다고요.”


더 이상의 설득은 의미가 없다. 이미 청년은 마음을 굳힌 듯이 몸을 돌리고 있었으니까.

곽자우는 이를 부득 갈았다.


“······후회할 것이네.”


홍광은 어이가 없단 듯이 뺌을 긁었다.


“말려들기 싫어서 발좀 빼겠다는데 그게 그렇게 후회할 일이 되나요?”

“세상은 그런 법이지. 내가 나이를 이만큼 먹고 느낀 거지만, 이제 와서 세상의 불합리함을 탓할 거라면 접시물에 코박고 죽는 게 낫네. 세상은 원래 불합리하니까.”

“그도 그렇네요.”


홍광은 금방 곽자우의 말에 납득했다.


세상이 합리적으로 돌아간다는 말은 모르는 자들의 탁상공론에 불과했다.


“원래 세상은 개판이었죠. 생각해보니 이제 와서 새삼스럽지도 않네요.”

“······.”

“그렇네요. 음, 지금 아저씨 입을 막는다고 해서 될 일 같지도 않고.”


입을 막는다.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챈 곽자우가 섬짓함을 느끼며 등 뒤의 귀두도를 향해 팔을 살짝 뒤로 뺐다.


홍광은 손을 휘휘 내저었다.


“됐어요. 쓸데없는 살생은 해봤자죠.”


상태를 악화 시키면 시켰지 좋은 판단은 아니었다.


곽자우는 청년의 이해가 빨라서 진심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럼 진짜 갈게요. 음식은 맛있게 잘 먹었어요.”

“······살펴가시게.”


중간부터 입을 닫고 있던 무당파 제자 둘과 홍광이 그 길로 객잔을 나갔다.


공간을 짓누르던 중압감도 그와 함께 사라졌다. 식사를 마치고도 감히 일어설 생각을 하지 못하던 이들은 서둘러 곽자우의 눈치를 살피며 객잔을 빠져나갔다.


“무당, 무당이라.”


무당은 과거 범이었다.

사갈파의 영역 안에는 무당이 있다.


범을 집안에 둔다는 것은 애초에 어불성설이다. 그러나 발톱과 이빨이 빠진 범이라면 말은 다르다.

더 이상 위협이 되지 않는 범은 일부러 안채에 전시해놓고 과시하기 딱 좋았다.


무당이 그랬다.

사갈파에게 무당은 살아있는 박제였다.


자신들의 영역에 범이 살고 있음에도 일부러 숨통을 끊어놓지 않은 이유는, 단지 무당의 이름 위에 사갈파가 있다는 것이 아직까지 유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이 이렇게 틀어지다니.


집안에 전시해놓은 이빨 빠진 범에게 이빨이 제발로 걸어 찾아가고 있었다.


“어리석은.”


지금껏 자신들이 연명할 수 있었던 까닭은 순전히 위협이 되지 않았기 때문임을 어째서 모른단 말인가.


우드드드드득!


재수 없이 곽자우의 손에 잡힌 식탁 상판이 으스러지며 비명을 질렀다.


“당장 본단으로 복귀한다. 짐들 싸라.”

“예!”


그렇게 사갈파의 안찰사, 곽자우가 수하들을 데리고 객잔을 벗어났다.


천하를 뒤바꿀 기인(奇人)의 행적이 지금 호북의 작은 객잔에서 시작되려 하고 있었으나, 그때의 누구도 이 사실을 알 리는 없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1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기연 첫날에 무림이 멸망했다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22 어찌하시겠습니까?(2). +2 23.10.13 312 7 11쪽
21 어찌하시겠습니까?(1). +1 23.10.12 327 10 12쪽
20 이젠 거지한테 빌어먹네(3). +1 23.10.11 350 9 12쪽
19 이젠 거지한테 빌어먹네(2). +1 23.10.10 372 12 12쪽
18 이젠 거지한테 빌어먹네(1). +3 23.10.09 409 8 12쪽
17 누구냐, 너(3). +1 23.10.08 415 10 12쪽
16 누구냐, 너(2). +1 23.10.07 409 11 12쪽
15 누구냐, 너(1). +1 23.10.06 435 10 11쪽
14 화무십일홍이라더니(3). +1 23.10.05 434 10 12쪽
13 화무십일홍이라더니(2). +2 23.10.04 448 11 12쪽
12 화무십일홍이라더니(1). +1 23.10.03 505 14 12쪽
» 개판이네(3). +1 23.10.02 505 15 11쪽
10 개판이네(2). +2 23.10.01 535 15 12쪽
9 개판이네(1). +1 23.09.30 597 15 12쪽
8 그릇이 큰 거지가 밥도 많이 얻어먹는다(4). +3 23.09.29 575 18 12쪽
7 그릇이 큰 거지가 밥도 많이 얻어먹는다(3). +2 23.09.28 609 17 12쪽
6 그릇이 큰 거지가 밥도 많이 얻어먹는다(2). +2 23.09.27 671 15 12쪽
5 그릇이 큰 거지가 밥도 많이 얻어먹는다(1). +3 23.09.26 730 14 12쪽
4 기연과 마도천하(3). +2 23.09.25 763 16 11쪽
3 기연과 마도천하(2). +2 23.09.24 874 18 12쪽
2 기연과 마도천하(1). +3 23.09.23 1,140 24 12쪽
1 낭인들(0). +3 23.09.23 1,521 26 6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