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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룡(旦龍) 님의 서재입니다.

기연 첫날에 무림이 멸망했다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단룡(旦龍)
작품등록일 :
2023.09.23 06:39
최근연재일 :
2023.11.13 19:20
연재수 :
5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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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7
추천수 :
455
글자수 :
263,236

작성
23.10.11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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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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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글자
12쪽

이젠 거지한테 빌어먹네(3).

DUMMY

“아주 손모가지를 비틀어버릴까보다.”


홍광은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혀를 쯧 찼다.


무당이 망하면 용모파기를 그려서 전국에 돌리겠다는 협박을 들었다.

안전하게 몸을 사리고 싶은 홍광의 바람과는 정반대의 일이었다.


그러니 정군자의 손목을 비틀어서 글도 쓰지 못하고 그림도 못 그리게 만들어리겠다는 섬뜩한 이야기가 나온 것이다.


“농담 아니에요 영감님.”

“그렇겠지.”

“영감님이 뭐라고 하시든 저는 위험한 일에 말려들 생각이 없어요. 만약 정말로 일이 터질 것 같으면 영감님 손목이라도 부러뜨리고 떠날 거라고요.”

“알고 있네.”


홍광의 닦달에도 정군자는 담담히 대답할 뿐,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자네가 무당을 도와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네. 내가 강요할 수 없는 일이니 스스로 그리 결정했다면 어쩔 수 없지.”


거기에 정군자는 몇 번이고 했던 말을 다시 덧붙였다.


“허나 나 또한 포기할 수는 없네. 사문을 구할 유일한 방법이야. 설령 내 손목이 아니라 목이 잘리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청을 멈추지 않을 걸세.”


확고한 결심을 굳힌 사람의 말이었다.


설득이라는 건 마음이 바뀔 여지가 있는 사람에게 해야 의미가 있다. 지금 정군자에게 가타부타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할 거라면 정말로 손목을 부러뜨리거나 목이라도 꺾어놓아야 했다.


아니, 목을 꺾는 수밖에 없었다.


손목만 꺾어놓고 떠났다가 정군자의 복수심이 화해서 발로 그림을 그리거나 입으로 붓을 물고 용모파기를 그려서 홍광을 천하의 역적으로 만들 수도 있었다.


그럴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사람이란 그럴 수도 있는 것이다.


결국 정군자의 억지를 확실하게 저지하려면 선택지는 살인멸구뿐인데, 아마 정군자는 당장 홍광이 그리한다고 해도 저항 한 번 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목숨으로 홍광에게 약간의 심적 부담이라도 줄 수 있다면 이득이라고 여길 테니까.


결국 손을 놓는 수밖에 없었다.


“미친 영감.”

“허허.”

“마음대로 하세요. 저도 제 마음대로 할 거니까. 때 되면 떠날 거고, 만약 영감님이 정말로 용모파기를 그리고 다니시면 그때는 지금처럼 참지 않을 거에요.”


이전과 다를 바 없는 어조였지만 그럼에도 섬뜩한 칼날이 돋은 말이었다.


설사 약관에도 이르지 못한 청년이 뱉은 말일지라도 홍광에게는 그 말을 실행으로 옮길 실력이 있었다.


하지만 정군자는 여전히 초연했다.


“억울해하지 않으마. 남에게 무언가를 내어달라고 할 때는 자신도 거는 게 있어야겠지. 애석하게도 지금 내가 걸 수 있는 것이 내 목 밖에 없구나.”


정군자는 주름진 자신의 목을 매만지고는 가만히 웃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 이전에 무당을 지켜준다는 선택지도 분명 존재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줬으면 좋겠군.”

“허.”


홍광이 저도 모르게 헛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진짜 도사는 무공보다 혓바닥으로 부리는 지계가 천하일절이라더니 맞는 말이었다.


별로 뭔가를 강하게 주장하거나 강조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 말 사이에 자신의 생각을 살포시 올려놓는 것만으로 상대를 부담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반박을 하려 해도 딱히 부정당한 말이 없으니 할 말이 없다.

아까부터 홍광이 하는 말은 족족 전부 고개를 끄덕이면서 인정해버리니까 똑같은 말을 반복해봐야 답답한 건 자신뿐이었다.


말을, 말을 말아야지.


혓바닥이 만악의 근원이요, 침묵이 금보다 값지다 했다.


홍광은 주둥이를 봉인하기로 결정하고 방바닥에 벌러덩 드러누워버렸다.


‘반응이 없으면 말도 못하겠지.’


아예 떠날 때까지 필요하지 않은 말은 한 마디도 뻥끗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아닌 말로 지금 당장 정군자의 목을 백팔십도 돌려버리고 무당을 떠날 수도 있긴 했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살인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 아니었다.


마적이 홍광의 앞을 가로막으면 그는 주저 없이 마적의 목을 몸통과 분리 시켜버릴 것이다.

무공을 익힌 이상 사람을 죽이는 일을 망설일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정군자는 마적과 같은 악인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정군자는 악인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냥 좀 간절한 영감일 뿐이다.


그렇기에 껄끄러웠다.


“입을 다물 생각인가?”

“······.”

“그래. 그것도 좋겠지. 실은 나도 처소에서 조용히 머무는 것을 좋아했다네. 그저 앉아만 있어도 무당의 모든 것이 나를 감싸는 기분이 들어서 말이야. 자네도 이 평안한 기분을 기억해준다면 더할 나위 없겠군. 무당에 조금이라도 정이 붙을 것 아닌가.”

“······영감탱이가 진짜.”


대꾸가 없어도 청산유수다.


무시하려고 했는데 그 말을 듣고 보니 선선한 바람이라든가 머무는 이를 배려한 객청의 고즈넉함이 신경 쓰여서 정말로 정이 붙어버릴 것 같았다.


단순히 홍광을 꿰어내기 위한 발린 말이었다면 몰라도 방금 같은 정군자의 말에는 진심이 묻어 있지 않은가.


간절한 진심은 외면하기 어려운 법이었다.


“소협,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그때 방문 너머로 목소리가 들렸다.


진즉에 기감을 펼쳐 파악하고 있던 정군자는 구렁이 담 넘어가는 듯한 움직임으로 가볍게 몸을 날려 문 반대쪽에 난 창틀 밖으로 빠져나간 뒤였다.


퇴장하기 직전까지도 빙긋 웃으면서 ‘부디 무당을 살펴주시게’하는 표정을 짓고 말이다.


‘껄끄럽다니까.’


홍광이 앓는 소리를 내면서 대자로 뉘였던 몸을 일으켰다.


“들어와.”


이어서 문을 열고 나타난 것은 허겸이었다.


“조반을 가져왔습니다.”


허겸이 꾸벅 목례하며 들고 온 소박한 상차림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말투와 몸짓 하나하나에 정중함이 베었다.


비슷한 나이대이니 말을 놓으라고 해도 은혜를 입은 입장에서 그럴 수는 없다며 한사코 거절한 사람다웠다.


“찬이 조촐하여······.”

“그거 그만 좀.”


홍광은 하루 세 끼, 세 번을 꼬박꼬박 듣는 말을 일찌감치 끊어버렸다. 겸양도 한두 번이지 이렇게까지 매번 들으면 불편하다.


홍광이 젓가락을 집으면서 문득 말했다.


“그런데 말이야.”

“예.”

“왜 매번 음식 가져다주러 네가 오는 거야? 나름 대사형 아니었어?”

“제가 소협을 데려왔으니 당연히 할 수 있는 한은 제가 책임져야지요. 사제들에게 일늘 떠넘길 리가 있겠습니까? 아니면 혹 제가 무슨 결례라도 저질렀습니까?”


어리둥절한 허겸의 물음에 홍광은 속으로 경악했다.


자기 일을 자기가 하는 상급자가 있다니!


삼백육십오일 구걸한 돈을 상급 거지에게 바쳐야 했던 홍광으로서는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이게 제대로 된 조직이지.”

“예?”

“아무것도 아니야. 역시 명문이라 그런지, 어떤 영감탱이가 만든 치졸한 조직이랑은 다르구나 싶어서.”

“······.”

허겸은 ‘그거 혹시 개방 얘깁니까?’ 물어보려다가 실례인 것 같아서 참았다.


“아무튼 대견하네. 윗사람이 솔선수범한다는 게 말이 쉽지, 여러모로 어려운 일인데.”


윗사람이 무작정 일을 도맡아 하는 것도 좋지 않다. 아랫사람이 경험을 쌓을 수 없게 되며, 집단의 위계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허겸은 훌륭했다.


사제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으면서도 할 일을 하고 있으니까.


무곤진인이 어째서 허겸을 칭찬했는지 알겠다.

책임을 질 수 없는 상황에 이렇게 책임감이 강하게 자라준 아이가 어찌 대견하지 않겠는가?


이는 무공이 강하다거나 약하다거나 그런 영역의 문제가 아니었다.


무공의 고하는 논하는 것은 인간의 재능을 말할 때가 많지만, 이건 재능만으로 되는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뭐 그냥 그렇다고.”


홍광은 어깨를 으쓱했다.


뭔가 더 말을 하자니 정군자 영감의 노림수대로 무당에 정이 드는 것 같아서 영 고까웠다.


“별 뜻은 없고.”

“······.”


허겸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잠깐 입을 우물거렸다.


대견하다니.

솔선수범이라니.


“그렇게 보였습니까?”

“응.”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최대한 그렇게 보이고자 했으니까요.”


허겸은 알고 있다.

자신이 나약하다는 사실을.


마교가 진산까지 쳐들어오기 전, 그는 대사형이 아니었다. 수많은 이대제자 중 하나에 불과했다.


어쩌다보니 살아남은 이대제자들 중 가장 항렬이 높았을 뿐이다.


“사실은 무너질뻔 했습니다.”


막내 사제가 독에 중독되었을 때.


무당산을 내려와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해야 했을 때.

그리고 수없이 거절 당했을 때.


객잔에서 사갈파의 안찰사를 만났을 때.


허겸은 수도 없이 무너져내릴 뻔했다.


단지 등 뒤의 사제는 자신의 뒷모습을 보고 따를 거라는 생각에 약한 모습을 감췄을 뿐이었다.


과거, 나약했던 허겸의 강한 대사형이 그랬던 것처럼.


그의 대사형은 진산에 쳐들어온 마인들을 상대로 어린 제자들을 대피 시키고 끝까지 저항하다가 전사했다.


그때는 그 두려운 마인들을 상대로 물러서지 않는 대사형이 대단해만 보였으나 이제는 안다.


그가 얼마나 공포에 떨었을지.

얼마만큼 그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었을지.


알기에.

알고 있기에 허겸은 도망칠 수 없다.

그만은 무너질 수 없다.


무너지더라도 마지막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그의 대사형이 가르쳐준, 대사형이라는 자리였으니까.


허겸은 이끄는 자의 등이 얼마나 넓어야 하는지 알고 있었던 것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소협이 그때 나타나주시지 않았다면 저는 무너졌겠지요. 생각해주시는 것처럼 저는 강하지 않습니다.”


허겸이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젠장.’


홍광은 위기의식을 느꼈다.


말린다.

소용돌이 속으로 점차 말려들어가는 것이 느껴진다.


정군자의 악독한 계략이라는 소용돌이에!


위장이 아프다.

이 생떼같은 사람들을 두고 혼자만 도망가려니까 평생 있는 줄 몰랐던 양심통이 위벽을 바늘로 콕콕 쑤셔대고 있었다.


그때였다.

객청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대, 대사형!”


들어온 이는 공진이었다.


하지만 기별도 하지 않고 문을 활짝 연 것을 꾸짖을 생각도 들지 않은 만큼 공진의 안색은 창백했다.


“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목소리가 잘게 떨리고 있다.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 같았다.


그러자 온건하던 허겸의 모습은 이미 온데간데 없어졌다. 어느새 책임자의 눈빛으로 돌아온 허겸이 즉각 몸을 일으켰다.


“무슨 일이더냐?”

“민초들이 왔습니다.”

“뭐?”


민초들?

민초들이라면 양민들이라는 말이 아닌가.


국가가 붕괴했으니 민초나 양민이라는 말이 완전히 적합하지는 않겠지만, 민초라고 하면 적어도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말이었다.


하지만 공진의 반응은 결코 평범한 사람들을 본 반응이 아니었다.


“적어도 향화를 하러 온 것은 아닌 모양이군.”

“예. 무당산 근처에 있는 장정들을 전부 끌어모은 듯합니다. 지금 각자 무기를 들고 산문 앞에서 난동을 피우며 시위를 하고 있습니다만, 당장이라도 해검지를 넘어 밀고 들어올 기셉니다.”

“무장 시위라고? 그들이 무당에서 시위를 할 일이 뭐가 있단 말이냐!”

“저도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공진이 침을 꿀꺽 삼켰다.


불안하다는 듯이 눈알을 굴리는 모습이, 눈치를 보고 있었다.

홍광과 공진의 시선이 마주쳤다.


‘여기서 말하지 않더라도 어차피 알게 될 것이다.’


이내 공진의 입이 파르르 떨리며 열렸다.


“무당파 내에 머무고 있는 정체불명의 고수······가 원인인 것 같습니다.”


누가 봐도 홍광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한 순간에 객청의 분위기가 얼음물을 끼얹은 것처럼 싸해졌다.


홍광은 표정을 굳혔다.


생각보다 사갈파의 대응이 너무 빨랐다.


‘오늘 저녁에 하산하려고 했는데 대체 얼마나 벼르고 있었던 거야? 무당에 돈이라도 묻어놨나?’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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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어찌하시겠습니까?(1). +1 23.10.12 328 10 12쪽
» 이젠 거지한테 빌어먹네(3). +1 23.10.11 352 9 12쪽
19 이젠 거지한테 빌어먹네(2). +1 23.10.10 373 12 12쪽
18 이젠 거지한테 빌어먹네(1). +3 23.10.09 411 8 12쪽
17 누구냐, 너(3). +1 23.10.08 417 10 12쪽
16 누구냐, 너(2). +1 23.10.07 410 11 12쪽
15 누구냐, 너(1). +1 23.10.06 436 10 11쪽
14 화무십일홍이라더니(3). +1 23.10.05 435 10 12쪽
13 화무십일홍이라더니(2). +2 23.10.04 449 11 12쪽
12 화무십일홍이라더니(1). +1 23.10.03 506 14 12쪽
11 개판이네(3). +1 23.10.02 506 15 11쪽
10 개판이네(2). +2 23.10.01 537 15 12쪽
9 개판이네(1). +1 23.09.30 598 15 12쪽
8 그릇이 큰 거지가 밥도 많이 얻어먹는다(4). +3 23.09.29 576 18 12쪽
7 그릇이 큰 거지가 밥도 많이 얻어먹는다(3). +2 23.09.28 610 17 12쪽
6 그릇이 큰 거지가 밥도 많이 얻어먹는다(2). +2 23.09.27 673 15 12쪽
5 그릇이 큰 거지가 밥도 많이 얻어먹는다(1). +3 23.09.26 732 14 12쪽
4 기연과 마도천하(3). +2 23.09.25 765 16 11쪽
3 기연과 마도천하(2). +2 23.09.24 876 18 12쪽
2 기연과 마도천하(1). +3 23.09.23 1,142 24 12쪽
1 낭인들(0). +3 23.09.23 1,523 26 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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