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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룡(旦龍) 님의 서재입니다.

기연 첫날에 무림이 멸망했다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단룡(旦龍)
작품등록일 :
2023.09.23 06:39
최근연재일 :
2023.11.13 19:20
연재수 :
50 회
조회수 :
19,073
추천수 :
455
글자수 :
263,236

작성
23.09.25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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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1쪽

기연과 마도천하(3).

DUMMY

마인의 섬뜩한 음성이 톱날로 고막을 깍아버리는 듯했다.


단순히 듣기 싫은 소리라는 것도 있었지만, 그 목소리 안에 살기가 넘칠 정도로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온 몸에 소름이 내달렸다.


‘젠장.’


홍광이 충자를 끌어들인 것은 자의가 아니었다.


내버려두었다가 죽는 순간에 이쪽으로 눈길이라도 주면 아주 곤란해진다는 걸 홍광은 알았다. 전장 경험도 없는 열두 살 꼬마가 예상하기는 어려운 일이었지만 왠지 알 수 있었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구한 것이다.


자신의 목숨을 위해서.


하지만 그런 발악조차 무색하게도 마인은 가까워지고 있었다.


홍광이 품 속의 은장도를 꽉 쥔 순간.


“찾았다, 이놈.”


마인의 목소리가 들린 것은, 그들이 있는 밑둥을 지나친 뒤편이었다.


“사, 살려······!”

“역겹다.”


푸확!


뭔가가 사람의 몸을 관통하며 나뭇잎 위로 피가 튀기는 소리가 났다.


단말마 한 번 없는 깔끔한 살인이었다.


“겉으로는 협의나 정의를 표방하면서 죽을 때가 되니 목숨 구걸이라니. 역시 네놈들은 더럽고 추악하구나.”


마인의 목소리는 한없이 무심했다.


충자의 몸이 사시나무 떨 듯 떨렸다.


방금 들린 목소리.

짧은 음성이었지만, 방금 죽은 사람은 분명 충자가 아는 동네 노거지였다.


수십 년 길바닥 생활을 해온 노개답게 성질이 고약한 양반이었지만 결국 굶는 날이면 밥 한 덩이 챙겨주었던 영감이었다.


그런데 방금 죽었다.


너무도 쉽게.

순식간에.


멀게만 느껴졌던 죽음이라는 개념이 실체를 가지고 엄습하자, 충자는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들키면 안 된다. 절대!’


그러나 떨림을 멈추기 위해 숨조차 쉬지 않고 혀를 질끈 씹은 충자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었다.


홍광이 일어나서 나무 밑둥을 나갔다.


‘저 미친놈이!’


충자가 다급하게 바짓단을 붙잡았지만 소용 없는 일이었다.


이미 인기척은 났다.

다시 들어와 숨기에는 늦었다.


나무 밑에서 나온 홍광을 본 마인이 대견하다는 듯이 말했다.


“용케 스스로 나오는군.”

“이미 들켰으니까요. 살기를 이쪽으로 그리 흩뿌려대는데 모를 수가 있나요.”


살기 때문에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였다.


그러자 마인이 입매를 살짝 말아올렸다.


“무공을 익히지도 않은 듯한데 그걸 느끼다니, 어린 놈이 꽤나 트여 있구나. 길바닥에서 영약이라도 동냥해 먹은 거냐?”

“왕거지도 제게 재능이 있다고 하던데. 확실히 그런가보네요? 다른 사람들은 이걸 못 느끼는 건가요?”

“보통은 그렇지.”

“신기하네요. 누가 등허리를 바늘로 콕콕 찌르는 수준인데.”


홍광은 그쯤에서 마인의 눈치를 살살 살폈다.


그는 살고 싶었다.

당연히 아무런 생각 없이 나온 게 아니었다.


이쪽에게 재능이라는 가치가 있음은 분명하게 전달했다. 용두방주의 안목이니 의심의 여지는 없으리라.


남은 것은······.


“입교할 수는 없나요?”

“호오.”


머리를 쥐어짜낸 그의 마지막 한 수였다.


마교라 함은 오직 강함을 숭상하기로 유명하다.


그러니 강해질 수 있는 재목도 높게 평가해줄 가능성이 있었다.


악당의 편으로 돌아서는 느낌이 들어서 껄끄럽긴 하지만, 애초에 정파에 대한 소속감도 그다지 없었던 홍광이었다.


물론 개방에 정을 붙인 적도 없었다. 오히려 싫어했다. 경력과 나이 미달로 실패했을 뿐이지, 후개로 지목되기 전에는 가능하면 점소이나 쟁자수로 전직하고자 했을 정도였다.


기껏 후개가 된 게 아깝긴 했지만 이제와서 매듭 따위는 의미가 없었다.


“입교라······.”


마인이 섬뜩한 웃음을 흘렸다.


“아무런 가치 없는 목숨 구걸은 혐오스러울 뿐이지만, 그런 목숨 건 발악은 싫어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허나.”


마인이 표정을 가볍게 일그러뜨렸을 뿐인데 방금 전까지 대화를 나누던 사람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있는 것은 거대하고 또 거대한 살기.


줄기줄기 뻗어나가는 마기였다.


“만마앙복. 중원 땅을 밟으면 마주치는대로 아홉을 죽이고 열 번째는 살려라. 이를 끝없이 반복하라는 것이 내가 명 받은 것의 전부다. 너는 딱 아홉 번째다. 안됐구나 아이야.”

“네?”


순간 이해가 되지 않아 되물었지만 마교도는 단언했다.


“천명은 이언불가. 그게 네 운의 끝이라고 생각해라.”


마인의 손이 쳐올라갔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은 손이었으나 스멀스멀 피어오른 시꺼먼 마기가 곧 검의 형상을 만들어냈다.


‘여기까진가!’


마인이 뿜어내는 기백에 감히 반항할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


홍광이 모든 것을 내려놓은 그때였다.


“당장 그만두지 못하겠느냐 이 사악한 마귀 놈아! 그 착한 녀석에게 무슨 짓이냐!”


숨어 있던 충자가 목청이 찢어져라 소리치며 모습을 드러냈다.


충자는 애써 가슴을 펴고 길쭉한 나뭇가지를 집어들었다.


“개방의 타구봉법이라는 이름은 들어봤겠지! 썩 물러가지 않으면 네놈에게 개방의 절학을 몸소 느끼게 해주겠다!”

“······.”


허세를 부리고 있지만 그는 여전히 온 몸이 덜덜 떨었고,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쉴새없이 흘렀다.

마인이 아니라 동네 꼬맹이가 봐도 저 말이 허장허세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인은 충자를 물끄러미 보다가 불쾌한 듯이 미간을 좁혔다.


“너는 딱 열 번째다. 같잖은 허세는 좋아하지 않지만, 천명을 거스를 수는 없지. 네 앞의 아홉이 희생해서 네 목숨을 구했다고 여기고 당장 꺼져라.”

“······살려주시는 겁니까?”


이미 죽었다 생각하고 용기를 끌어올리긴 했지만 사람이 그렇게 쉽게 변하랴.


마인의 꺼지라는 말이, 충자에게는 마치 떨어졌던 목이 다시 붙은 것처럼 느껴졌다. 이대로 홍광을 버리고 도망치고 싶은 충동이 빠르게 머리를 지배했다.


“정말 가도 됩니까?”

“······.”

“진짜로?”

“그렇다.”

“이래놓고 쫓아오지는 않는 거죠?”

“신교의 교도는 천명으로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아니 그래도······ 기왕 봐주실 거면 거기 있는 놈까지 살려주시면 안 됩니까? 이대로 두고 가면 꿈자리가 사나울 것 같아서요.”

“이런 멍청한.”


신교의 교도는 천명을 결코 어기는 법이 없다. 그러나 명 받은 것은 어디까지나 열 번째의 목숨을 살리라는 것. 죽이지만 않으면 어떻게 되든 상관 없었다.


어차피 죽이지 않을 거라면 차라리 도망치게 놔두고 그 시간에 한 명을 더 죽이는 쪽을 택할 뿐, 이리 귀찮게 굴 경우는 예외였다.


“팔이 하나 뜯겨나가면 그때는 도망치겠지.”


마인이 성큼 걸어서 충자의 앞에 섰다.


그의 입장에서는 걸어간 것이지만 충자의 시선에서 보자면 그것은 ‘나타났다’고 보는 게 정확하리라.

미처 반응할 틈조차 없었다.


“히, 히익!”


놀란 충자가 나뭇가지를 휘적였다.


그러나 공력 한 올 실리지 않은 나뭇가지는 마인의 몸에 닿자마자 끝이 바스라졌다.


마인이 손을 뻗었다.


충자가 눈물을 머금고 눈을 질끈 감았다.


‘응?’


그러나 다음 순간 충자에게는 아무런 고통도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여기가 삼도천인가 싶어서 한쪽 눈을 살짝 떴을 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아랫배가 꿰뚫린 채 피를 토하고 있는 마인의 모습이었다.


그가 들었던 하찮은 나뭇가지.


그것이 마인의 아랫배에 틀어박혀 있었다.


말 그대로 눈 깜짝할 새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 믿을 수 없는 일을 해낸 사람의 뒷모습을 곧장 알아본 충자가 소리쳤다.


“요, 용두방주님!”

“허허.”


전장에서 실종됐다고 들었는데.


분명 곳곳에 깊은 상처가 보이고 팔 한쪽이 없긴 했지만, 그는 분명히 살아 있었다.


“용기가 가상하다. 이름이 무어냐?”

“추, 충자라고 합니다.”

“그래. 하지만 내가 너까지 구할 수 없음을 용서해다오. 비루먹을 내 목숨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강호의 미래를 위한 일인 즉······.”


말끝을 흐린 용두방주의 몸에서 푸른 빛의 아지랑이가 피어났다.


“적어도 이곳에서는 죽지 않게 해주겠다고 약속하마.”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울창한 숲속의 나뭇잎들이 괴이스럽게 진동했다. 바람에 의한 것과는 명백하게 달랐다.


곧이어 어디선가 열 명이 넘는 마인들이 나타나서 사방을 애워싸기 시작했다.

한 명 한 명이 방금 죽은 마인보다 강력한 이들이었다.


심지어 열로 시작한 마인들의 수가 순식간에 스물, 서른, 마흔으로 점차 늘었다.


미친 듯이 진동하던 나뭇잎들이 이제는 검게 썩어들어가고 있었다.


“용두방주. 도망치느라 수고하셨소. 그러나 이 추격전도 끝이 보이는구려. 산조차 덮을 듯하던 그대의 항룡기(降龍氣)가 이제는 고작 호신을 하는 수준이라니.”

“그 입 다물어라 이놈들.”


용두방주가 무시무시한 태세로 말했으나 마인은 더욱 비릿한 음성을 토해냈다.


“그래도 당신은 운이 좋은 편 아니겠소? 함께 합류한 구파의 수장 아홉이 먼저 죽어준 덕에 그 질긴 목숨을 챙겨 도망칠 수 있었으니. 그분의 하해와 같은 자비를 감사히 생각하시오.”

“허, 개똥 같은 소리하고 있네. 죽이지는 않겠지만 사지 근맥을 자를 거라고 득달같이 쫓아와 천라지망을 펼친 놈들이. 자비라는 말은 그럴 때 쓰는 말이 아니야.”

“흐흐흐, 어차피 그대가 이해할 거라 생각하지도 않았소.”


마인들이 뿔어내는 살기가 서서히 날카롭게 벼려진다.

짙은 살기의 난무 속에 충자가 버티지 못하고 정신을 잃었다.


그러나 홍광은 달랐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두 다리로 꼿꼿이 서서 용두방주와 마인들을 직시하고 있었다.


“후개.”

“네.”

“좋은 판단이었다. 살 수만 있다면 마교에 입교하는 것도 괜찮았겠지.”

“······.”

“하지만 안타깝게도 일이 이렇게 됐구나. 어쨌든 네가 후개라는 부름에 대답했으니 잘 봐두거라. 어쩌면 다시는 시범을 보일 수 없을지도 모르니.”


홍광은 눈을 부릅떴다.


감각이 예민한 그는 방금 전부터 충자가 느끼고 기절한 압박의 수십 배에 달하는 살기가 창날처럼 온 몸을 푹푹 찔러대는 상황 속에 서 있었다.


당장이라도 졸도해서 쓰러질 것만 같다.


그러나 결코 눈을 감지 않았다.


살고 싶다.

그러려면 이 광경을 눈에 새겨놓아야 할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이 개방 무학의 진수, 항룡십팔장(降龍十八掌)과 타구봉법(打狗棒法)인 바-”


수십의 마인들이 일제히 마기를 흩뿌리며 달려드는 그 순간, 용두방주의 안광이 푸른 빛으로 번쩍 빛났다.


“지금, 제사십삼대 용두방주 장일홍이 후대에 그 무학을 전한다.”


용두방주는 상처 입었다.


팔 한쪽이 이미 잘렸고, 진기는 바닥을 드러낸 상태였으며, 그의 병장기인 타구봉도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그가 지금 손에 든 것은 고작 연약한 나뭇가지였다.


그러나 충분하다.


그 나뭇가지를 든 자가 용두방주였기에.


이 순간, 평범한 나뭇가지 하나는 수십의 마인들조차 도살할 수 있는 신병이기로 거듭난다.


나뭇가지의 끝이 마인의 목을 쳐냈다.


뜯겨나간 목이 바닥을 뒹군다.


푸른 기가 일렁이는 손바닥에 닿은 마인의 몸통은 마치 잘 익은 수박처럼 터져나갔다.


홍광은 정신을 잃지 않으려 혀를 짓씹으며 그 모든 광경을 눈에 담았고.


정신을 차려보니 처음 보는 동굴 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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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누구냐, 너(2). +1 23.10.07 410 11 12쪽
15 누구냐, 너(1). +1 23.10.06 436 10 11쪽
14 화무십일홍이라더니(3). +1 23.10.05 435 10 12쪽
13 화무십일홍이라더니(2). +2 23.10.04 449 11 12쪽
12 화무십일홍이라더니(1). +1 23.10.03 506 14 12쪽
11 개판이네(3). +1 23.10.02 506 15 11쪽
10 개판이네(2). +2 23.10.01 537 15 12쪽
9 개판이네(1). +1 23.09.30 598 15 12쪽
8 그릇이 큰 거지가 밥도 많이 얻어먹는다(4). +3 23.09.29 576 18 12쪽
7 그릇이 큰 거지가 밥도 많이 얻어먹는다(3). +2 23.09.28 610 17 12쪽
6 그릇이 큰 거지가 밥도 많이 얻어먹는다(2). +2 23.09.27 673 15 12쪽
5 그릇이 큰 거지가 밥도 많이 얻어먹는다(1). +3 23.09.26 732 14 12쪽
» 기연과 마도천하(3). +2 23.09.25 765 16 11쪽
3 기연과 마도천하(2). +2 23.09.24 875 18 12쪽
2 기연과 마도천하(1). +3 23.09.23 1,142 24 12쪽
1 낭인들(0). +3 23.09.23 1,523 26 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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