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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룡(旦龍) 님의 서재입니다.

기연 첫날에 무림이 멸망했다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단룡(旦龍)
작품등록일 :
2023.09.23 06:39
최근연재일 :
2023.11.13 19:20
연재수 :
5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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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6
추천수 :
455
글자수 :
263,236

작성
23.09.24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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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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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2쪽

기연과 마도천하(2).

DUMMY

강호가 초토화되는 나흘간 홍광은 한 가지 교훈을 얻었다.


사람은 굶어죽거나 맞아 죽을 수만 있는 게 아니었다.


천하가 멸망해서 죽을 수도 있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항상 그가 했던 고민이라고는 기껏해야, 오늘은 밥 몇 덩이를 얻어먹을 수 있을까, 충자에게 덜 아프게 맞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디 대감집에서 거지도 참석할 수 있는 연회를 벌여주진 않을까······ 이런 고민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막상 강호의 존망이 눈앞으로 닥치자 홍광은 굉장히 당황했다.


‘강호가 이렇게 망한다고?’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현실감이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강호에 대단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용두방주만 해도 그렇고, 콧대높은 구파도 있다. 그 옆에는 철옹성같은 오대세가도 떡하니 버티고 있지 않은가?


그들을 뚫는다고 쳐도 사도련이 있다.


설령 무림이 모두 패배한다고 해도 만인지상의 황실이 있다.


설령 새외의 모든 국가들이 합심해서 침공한다 해도 그리 간단히는 함락되지 않을 십만대군과 금의위가 있단 말이다.


그들이 있는 한 중원은 안전하다.


안전해야 할 터였다.


그런데 아니었다.


오대세가 괴멸.

구파의 패배.

사도련 중추 붕괴.

십만대군 몰살.

황궁 찬탈 및 황제 사망.


이런 일들이 고작 나흘 만에 이루어졌는데 중원이 아직도 안전하다고 믿는 사람은 병신이거나 나흘 동안 동굴에 처박혀 있는 사람뿐이었다.


물론 홍광은 어느쪽에도 해당되지 않았다.


‘중원이······ 망했네?’


홍광은 곧 현실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게 끝이었다.


중원이 확실하게 끝났다는 건 알았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개방이 개 같은 집단이라는 걸 알아도 반항할 수 없었던 것과 같았다.


홍광에게는 힘이 없었다.


하다못해 자유롭게 도망칠 힘도 없었다.


명령이 떨어지기 전에 개방 분타에서 벗어나면 다른 거지들에게 걸리는 순간 탈주자로 몰려 심하게 얻어맞는다.


실제로 도망치려고 시도하던 거지 몇 명이 그렇게 피떡이 되는 걸 봤다.


홍광은 손톱을 잘근잘근 씹으면서 분타주가 있는 막사를 노려봤다.


도망치라는 말만 기다렸다.


* * *


영겁처럼도, 순간처럼도 느껴졌던 나흘.


그동안 분타주인 오결개가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고 기다린 이유는 하나였다.


용두방주께서 기다리라 하셨기 때문에.


물론 구파일방이 격파를 당한 건 나흘 중 첫날의 일이었지만, 용두방주의 처리는 사망이 아니라 실종이었다.


실종.


그 불확실한 말이 오결개를 목 메게 만들었다.


‘그분이라면 살아계실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타나서 우리를 이끌어주실 것이다.’


용두방주를 향한 오결개의 믿음은 그 정도였다. 살아만 있다면 어떻게든 타개책을 가지고 돌아올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나흘째 일관되게 ‘조금만 더 기다려보세’를 연신 남발하던 오결개도 이제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분타주님.”

“알고 있네.”


오결개가 침통한 음성으로 머리털을 쥐어뜯었다. 그의 얼굴에는 절망이 빛이 어렸다.


원래 오결개 쯤 되면 강호에서 가지는 힘이 상당하다. 웬만한 식당에서는 무전취식을 해도 불만을 제기할 수 없으며, 한 지역 거지들을 통솔하는 분타의 결정권자가 바로 오결개다.


하지만 지금 오결개는 통렬할 정도의 무력감을 느끼고 있었다.


하기사 칠결개, 팔결개들도 전장에서 바람 앞의 등불처럼 픽픽 죽어갔는데 한낱 오결개 따위에게 이제 와서 무슨 힘이 있겠는가.


“마교가 바로 머리 위에 있습니다.”

“······.”

“분타주님.”


지금이 아니면 최소한 도망쳐 숨을 기회조차 잃는다.


‘더는 기다릴 수 없다.’


오결개는 벌떡 일어나서 거칠어진 숨을 몰아쉬었다.


“본 분타에 인원이 얼마나 남아 있지?”

“예, 사결이 넷이고 삼결이 열하나, 이결이 마흔둘, 일결과 백의개들이 합쳐서 백 명 정도 있습니다.”

“전부 짐 싸라고 해. 아니다, 목숨보다 중요한 짐은 없겠지. 그냥 싹 다 당장 튀어나가라고 내가 직접 전해야겠다.”


이러는 동안에도 마교는 믿지 못할 속도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굳은 얼굴로 막사를 나간 오결개가 어수선하게 뭉쳐 있는 거지들을 향해 소리쳤다.


“주모오오오옥!”


평소라면 이 뒤 잠시 침묵해서 거지들의 주의가 집중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겠지만 그러지 않았다.


오결개는 다급함이 느끼져지는 목소리로 내공을 실어 말했다.


“무조건 남쪽으로 튀어라 이놈들아! 강호는 망했다! 남쪽으로 튀어! 배를 타고 도망치든, 구석에 짱박혀 숨든, 너희가······ 아니 우리가 살 방법은 그것뿐이다!”


거지들은 긴장한 표정으로 오결개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전달은 그걸으로 끝이었다.


“뭣들 하고 있어! 당장 뛰엇!”


마지막으로 오결개가 노호성을 터트리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거지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막사가 비워진다.


어떤 이는 보따리에 식량을 욱여넣었고, 좀 더 사태의 심각성을 아는 이는 식량마저 내팽겨친 채 곧바로 경공을 전개해서 남쪽으로 도망쳤다.


하지만 그럼에도 결코 많이 살아남지는 못하리라는 사실이 잔혹했다.


“마도천하가 오는가.”


오결개가 혼비백산하는 거지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저 안에 용두방주께서 지목한 후개가 있다고 들었는데······.”


그 사실을 떠올린 오결개는 피식 웃어버렸다.


“하긴, 용두방주 당신께서도 실패한 마당에 이제 막 지목된 후개 따위가 뭘 어쩌겠습니까.”


후개는 형식상 여덟 개의 매듭을 짓지만 정녕 그 매듭에 어울리는 자격을 갖추기까지는 수십 년이 넘는 세월이 필요하다.


고작 나흘 전에 후개의 자격을 얻고 아직 매듭조차 매달지 못한 애송이에게 기대를 걸 만큼 희망적인 상황이 아니었다.


운명이 그렇다면 살고, 아니면 죽겠지.

다른 거지들이 전부 그렇듯이.


아무리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식물이라도 개화 전에 죽음을 맞이하면 잡초들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오결개는 순식간에 휑하게 비어버린 막사를 둘러보며 마지막으로 남은 인원이 없는지를 확인했다.

아무도 없음을 확신한 그가 바닥에서 묵직한 돌덩이 하나를 들었다.


퍽!


곧이어 박이 터지는 듯한 둔탁한 타격음이 울렸다.

오결개가 스스로 천령개를 내리찍었다.


자결이었다.


* * *


일결개 충자는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더 달리면 폐가 찢어질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달릴 수밖에 없었다.


뒤에서 범이 쫓아오는데 죽을 힘으로 달리지 않는 초식동물이 어디 있겠는가.


구파일방과 사도련과 황궁.

무림의 삼대 세력을 모두 몰살하고 진격하는 마교의 이름은 심지어 한낱 범 따위에 비할 바조차 아니었다.


그러나 발악은 어디까지나 발악일 뿐.


“허억! 허억! 허억!”


제대로 된 경공은커녕 무기를 그 손에 쥐어본 적도 없는 그였다.


이제 막 허리춤에 매듭을 지은 일결개가 죽을 힘으로 치는 도망이라고 해봐야 하루에 산 하나 넘기도 어려웠다.


이대로 가다가는 꼼짝없이 마교의 파죽지세에 따라잡혀 죽는다.


‘더 늦기 전에 숨을 장소를 찾아야 해.’


충자는 달리기를 멈추고 산중을 두리번거렸다.


동굴이나 묘지처럼 누가 봐도 사람이 숨을만 한 장소는 불안했다. 그때 충자의 눈에 들어온 것은 사람이 들어가기 좋은 크기로 갈라진 거목 밑둥이었다.


보인 순간 확신했다.


저곳이다.


저기 숨으면 죽지 않을 수 있겠다.


충자는 밑둥에 반쯤 차 있는 흙을 맨손으로 퍼내기 시작했다. 이대로 들어가도 되겠지만 기왕이면 조금이라도 몸을 더 숨기고 싶은 마음이 컸다.


삼 주야. 딱 삼 주야만 죽은 듯이 숨어 있다가 나오면 이미 마교 놈들은 강서를 지나 해남으로 향할 무렵일 것이다.

그때 눈치를 봐서 나오면 된다.


헌데 밑둥 공간에는 이미 선객이 있었다.


흙을 조금 파내자, 얼마 지나지 않아 허물어지며 아래 숨어 있던 사람의 얼굴이 드러났다.


“네, 네놈이 어떻게······.”


먼저 은신처를 선점한 것은 홍광이었다.


얼마 전까지는 그가 쥐 잡듯이 잡을 수 있던 백의개이자, 나흘 전부터 갑자기 용두방주의 눈에 들어 후개가 되었다는 소문이 자자했던 그놈.


사람을 맞닥뜨리고 싶지 않은 상황에 맞닥뜨리고 싶지 않은 사람과 만났다.


“두이.”

“홍광이다.”

“그거야 내 알 바가 아니고. 당장 거기서 꺼져라. 여긴 내가 써야겠다.”


말도 안 되는 요구였다.


홍광이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자, 충자는 강경하게 말했다.


“강호가 망해보니 네놈이 나를 이겨먹을 수 있을 성 싶으냐? 후개가 되었다고 하루아침에 강해지지는 못했을 터. 그러니 피 보기 싫으면 튀어 나와.”


그러나 홍광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자신 있으면 들어오든가.”

“뭐?”


충자의 눈썹이 꿈틀한 순간 그의 눈이 홍광의 손에 들린 작은 날붙이를 포착했다.


크기가 작고 수수했지만 그것은 틀림없이 여인들의 노리개로 취급되는 은장도(銀粧刀)였다.


노리개는 노리개라도 가검은 아니다.

분명 날이 서 있을 터였다.


“여기까지 오는 길에 챙겼지. 피란민들이 내버려두고 간 가판대 위에 그대로 방치되어 있더군.”

“네놈······!”

“나라면 실랑이를 벌일 시간에 다른 은신처를 찾겠어. 아니면 여기서 너 죽고 나 죽어보든가.”


젠장할!


아무리 열다섯 살인 충자가 완력으로 어린 홍광을 압도한다지만 상대의 손에 날붙이가 들렸다면 이야기는 달랐다.


거지 생활을 좀 오래했을 뿐이고 무공 따위는 익힌 적 없는 일결개.


따지자면 충자의 무력은 평범한 코흘리개들과 비슷했다.


“너, 다음번에 만나면 죽여버리겠다.”

“누가 할 소릴.”

“빌어먹을!”


충자가 인상을 험악하게 구기며 다른 은식처를 찾으려고 몸을 돌린 그때.


무언가가 그의 발목을 쭉 잡아당겼다.


덕분에 충자는 뒤로 자빠지면서 밑둥 공간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무슨!”

“쉿.”


그를 잡아당긴 것은 홍광의 손이었다.


결코 은신처를 내주지 않겠다고 딱 버티고 서 있던 홍광이 갑자기 충자를 끌어들인 것이다.


이해가 가지 않는 모순된 행동이었지만, 충자는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를 느끼고 단숨에 숨소리를 낮췄다.


아니나 다를까 발소리가 들렸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피란민이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다.

만약 마인이라면 방금 충자는 죽었다.


‘이놈이······ 날 살렸어?’


어째서?


만약 충자가 홍광이었다면 죽든지 말든지 내버려뒀을 것 같은데.


아니, 과장 조금 보태서 깨소금을 먹는 심정으로 구경했을지도 몰랐다. 선점한 은신처를 순순히 빼앗겨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


충자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자신보다 어린 아이에게 목숨을 빚진 것에 대해, 그 아이를 자신이 지금껏 괴롭혀왔다는 것에 대해.


생에 처음 느껴보는 감정.

그것은 죄악감이었다.


심장이 따끔거렸다. 목구멍에서부터 뜨거운 무언가가 올라와 충자의 시야를 뿌옇게 가렸다.


‘나는 지금껏 대체······.’


충자의 얼굴이 벌개졌다.


동시에 홍광을 다시 봤다.


어두웠지만 공간이 좁은 덕에 홍광의 얼굴이 자세하게 보였다.


냉정을 잃지 않은 눈빛이다.


‘그러고 보니 이놈. 어떻게 나보다 빨리 이곳에 왔지?’


충자는 오결개의 노호성을 듣자마자 곧장 한 방향으로 달려서 산을 올랐다. 민가가 위험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홍광 이놈이 자신보다 빨랐다니.


심지어 가판대에서 은장도를 챙길 여유까지 있었다니!


‘이놈이 이렇게 운동신경이 좋았던가?’


아무리 빠르다고 해도 고작 열두 살짜리가 올해로 열다섯 살이 된 충자를 이 정도로 앞지르기란 쉽지 않다.


게다가 이놈은 나흘 전에 자신이 흠씬 패놓지 않았던가?


정말 웬만큼 발이 빠른 게 아니라면 말이 안 됐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충자의 얼굴이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그때, 쇠를 갈아 마신 듯한 목소리가 충자의 귀를 긁었다.


단박에 알 수 있었다.

마인의 목소리다.


“하찮은.”


목소리와 함께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충자의 고동도 시끄럽게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숨는다고 발견하지 못할 줄 알았느냐?”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2

  • 작성자
    Lv.24 별랑(別狼)
    작성일
    23.10.08 16:33
    No. 1

    글을 참 맛깔나게 쓰시네요. 문피아 뿐만아니라 네이버 베스트리그에서 독자좀 유치하고 네이버 시리즈 유료화 ㄱㄱ하셈 개인 유료화도 돈주고 볼 사람이 좀 될듯, 이 정도 퀄이면

    찬성: 0 | 반대: 2

  • 작성자
    Lv.96 묘한인연
    작성일
    23.11.05 16:59
    No. 2

    목 메게//매게
    절망이 빛이 어렸다
    헌데//(그러)한데

    찬성: 0 | 반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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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어찌하시겠습니까?(1). +1 23.10.12 328 10 12쪽
20 이젠 거지한테 빌어먹네(3). +1 23.10.11 351 9 12쪽
19 이젠 거지한테 빌어먹네(2). +1 23.10.10 373 12 12쪽
18 이젠 거지한테 빌어먹네(1). +3 23.10.09 411 8 12쪽
17 누구냐, 너(3). +1 23.10.08 417 10 12쪽
16 누구냐, 너(2). +1 23.10.07 410 11 12쪽
15 누구냐, 너(1). +1 23.10.06 436 10 11쪽
14 화무십일홍이라더니(3). +1 23.10.05 435 10 12쪽
13 화무십일홍이라더니(2). +2 23.10.04 449 11 12쪽
12 화무십일홍이라더니(1). +1 23.10.03 506 14 12쪽
11 개판이네(3). +1 23.10.02 506 15 11쪽
10 개판이네(2). +2 23.10.01 537 15 12쪽
9 개판이네(1). +1 23.09.30 598 15 12쪽
8 그릇이 큰 거지가 밥도 많이 얻어먹는다(4). +3 23.09.29 576 18 12쪽
7 그릇이 큰 거지가 밥도 많이 얻어먹는다(3). +2 23.09.28 610 17 12쪽
6 그릇이 큰 거지가 밥도 많이 얻어먹는다(2). +2 23.09.27 673 15 12쪽
5 그릇이 큰 거지가 밥도 많이 얻어먹는다(1). +3 23.09.26 732 14 12쪽
4 기연과 마도천하(3). +2 23.09.25 765 16 11쪽
» 기연과 마도천하(2). +2 23.09.24 876 18 12쪽
2 기연과 마도천하(1). +3 23.09.23 1,142 24 12쪽
1 낭인들(0). +3 23.09.23 1,523 26 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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