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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룡(旦龍) 님의 서재입니다.

기연 첫날에 무림이 멸망했다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단룡(旦龍)
작품등록일 :
2023.09.23 06:39
최근연재일 :
2023.11.13 19:20
연재수 :
50 회
조회수 :
19,074
추천수 :
455
글자수 :
263,236

작성
23.10.09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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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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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글자
12쪽

이젠 거지한테 빌어먹네(1).

DUMMY

“기다려보게.”


정군자가 홍광의 어깨를 붙잡았다.


정군자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삼척동자가 봐도 진지한 이야기를 꺼낼 기세였다.


그래서 홍광은 선수를 쳤다.


“잠시만요.”

“뭔가.”

“사실은 제가 거지였거든요. 거지는 쉰밥이라도 얻어먹으려면 사람 심기를 잘 구슬려야 해요. 그래서 저도 눈치 하나는 백단이죠.”

“그래서?”

“그런 제가 보건데, 영감님 지금 얼굴이 딱 빌어먹기 직전 거지의 얼굴이에요.”


사람의 표정이라는 것은 오묘하다.


한 사람이 지을 수 있는 표정도 숫자로는 다 헤아릴 수가 없는데, 세상에는 사람이 너무 많다.


모두가 다른 얼굴로 다른 표정을 짓는다.

심지어 대개 표정에 담긴 의미는 한두 가지가 아니고 복합적인 감정을 나포할 때가 많다.


오죽 한 얼굴에 수많은 의미가 담기면 오만상(五萬相)이라는 말까지 있겠는가?


신기한 것은 그럼에도 대충 보면 그 표정의 의미를 해석할 수 있다는 점이다.

특히 한 가지 표정을 많이 봐온 이들은 척 보면 상대방의 생각을 파악할 수 있을 정도다.


홍광이 그랬다.


정군자의 지금 얼굴은 틀림없이 빌어먹는 얼굴이다. 거지들이 ‘한 푼 줍쇼’하며 허리를 굽실거릴 때의 표정을 짓기 직전이란 말이다.


“아, 기분 나빠하지 마세요. 거지 얼굴이라는 건 그런 심정으로 보인다는 거였고, 영감님 얼굴의 미추를 논한 건 아니었으니까요.”

“······허.”

“아무튼 영감님이 저한테 뭘 요구하실 생각인지 모르겠는데, 안 된다고요. 저는 위험한 일에는 끼지 않을 거에요.”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


홍광의 신조였고, 사부의 격언이었다.


정군자는 어이가 없다는 듯 물었다.


“자네가 방금 펼친 건 항룡장이 아닌가?”

“맞는데요?”

“그럼 적어도 전대 용두방주의 제자란 말인데, 내가 아는 그분께서는 누구보다 협의지심을 생각하시는 분이셨다. 후개인 자네에게 협을 가르치지 않고 무공만 전수했을 리는 없을 텐데?”

“협이요?”


홍광은 피식 웃었다.


“저한테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남으라고 한 장본인이 사부님이에요. 그 설득은 안 먹혀요.”

“그럴 리가! 내가 아는 그분은······!”

“아는 그분은, 뭐요? 영감님은 사부에 대해 얼마나 알았길래 그런 말을 하세요? 설마 강호의 풍문으로 전해들었다거나, 먼발치에서 몇 번 마주치고 인사를 나눴을 뿐인 친분으로 말씀하시는 건 아니죠?”


정곡이었는지 정군자가 찔끔했다.


그럴 수 밖에.


사부는 외로운 사람이었다.


겉으로는 가볍게 농담을 던지거나 자신에게 위엄이 없다며 투덜댔지만, 그건 사부의 희망사항이었을 뿐이다.


천하제일의 용두방주.


그 드높은 자리에 있는 사내에게 어찌 위용이 없었겠는가?


사람들은 용두방주에게 굴하지 않는 협의를 기대하고, 후개들은 천하제일인에게 절세의 가르침을 기대했다.


홍광은 제외하고 장일홍이라는 한 명의 사람으로 사부를 대한 이가 단 하나라도 있었는가?


동굴에서의 칠 년 동안 사부는 한 번도 친우에 대해 말한 적이 없었다.

벗에 대해, 동료에 대해 말한 적이 없었다.


‘전장에서 죽어간 이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하긴 했으나, 누군가 그립다는 말을 한 적은 없었다.


사부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저 외로운 사람.


“영감님이 무슨 말을 해도 제 마음이 동할 일은 없어요. 그러니 포기하세요.”

“자, 잠깐 다시 생각을······.”

“안 돼요. 포기하세요.”


홍광은 깔끔하게 못 박았다.


그렇게 신형을 돌려 돌아가려고 한 순간.


“뭐 해요.”

“······.”

“뭐하시는 거냐고요. 아니, 무당의 장로셨다는 분이 부끄럽지도 않나?”

“······한 번만.”

“표정이 거지라고 했더니 이제보니 행동도 거지발싸개가 따로 없네. 배째라 이거에요? 당장 바짓가랑이 놓으세요!”


그러나 땅에 배를 딱 붙이고 누워버린 정군자는 홍광의 바짓단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


“안 된다니까!”

“······.”

“도사가 뭐 이래!”


홍광이 힘으로 움직이려 하자 정군자는 바닥에 질질 끌려왔다.


거적데기인 바지가 사람을 매달고 찢어지지 않는 걸 보니 매달리겠다고 바짓단에 내공까지 주입한 모양이었다.


“자네가 아니면 무당을 지켜줄 이가 없만 말이네! 십 년만, 아니 이십 년만 산문을 수호해주게! 그리하면 내 반드시 그 안에 무당을 다시 호북 제일의 문파로 만들어놓을 테니!”

“영감님이 직접 하세요!”

“졌다고! 아까 들었잖아, 사갈파 대장이라는 놈한테 져서 간신히 살아남았다고!”

“놓쳤다면서!”

“거짓말은 안 했다. 내가 언제 그놈을 놓쳤다고 했어! 그놈이 나를 놓쳤지!”

“이런 미친 영감탱이가!”

“제에에에에바아아아아알!”


추태도 이런 추태가 있을까?


무당의 장로, 그것도 무당칠검이라는 자가 약관도 안 된 청년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애걸복걸하다니!


역시 세상이 망하니까 거꾸로 돌아간다.


무당의 제자가 사파에게 고개를 숙이면서 자비를 구하질 않나, 민초를 구휼해야 할 무당의 도사가 이젠 거지한테 구걸을 하질 않나.


“딱 이십 년마아아아아안!”

“떨어지라고요!”


격식 있는 영감인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시장에서 장난감 사 달라고 떼 쓰는 아이와 다를 바가 없었다.


“안 돼요! 안 된다고! 그리고 영감님도 진 거면 너무 위험하잖아요.”

“자네가 나보다 세잖아!”

“조금 셌죠, 조금. 종이 한 장 차이. 영감님 눈만 멀쩡했어도 또 몰랐어요.”

“말 같지도 않은 소리하지 말고!”

“끄으응.”


솔직히 너무 개소리라서 홍광도 할 말이 없었다.


일격에 병장기를 흔적도 없이 부숴놓고 종이 한 장 차이는 너무 심했나?


“아무튼! 산골짜기에서 제 꽃다운 청춘을 버릴 순 없어요.”

“아니야, 잘 생각해봐.”

“네?”

“내가 해봤는데 그것도 나름 할만해. 가끔 좀 적적하다 싶어도 사는데 지장은 없어. 오히려 결혼하고 내일모레 환갑에 바가지 긁히는 속세 영감들 보면 이게 낫다 싶을 때도 있다니까?”

“어?”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순간 홀릴 뻔한 홍광이 서둘러 고개를 저어서 마를 떨쳐냈다.


“그,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요. 저는 세상을 보고 뜻을 세우라는 사부님의 말씀도 따라야 한단 말이에요. 여러 곳에 돌아다녀야 한다고요.”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도 몰라? 인생 길게 봐, 젊은이. 내가 살아보니까 불혹도 아직 청춘이야. 이십 년 금방이다?”

“에라, 더 못 들어주겠네!”


홍광은 내공을 써서 정군자를 밀쳐냈다.

이런 일에 진심으로 힘을 쓴다는 게 어이가 없긴 해도 어쩔 수 없었다.


나동그라진 정군자가 ‘어이쿠 소경 죽네!’하며 곡소리를 내 발을 묶으려 했지만, 사지가 없는 사부와 장장 칠 년을 생활한 홍광에게 동정 유발 작전은 씨알도 안 먹혔다.


동정심이 일기는커녕 자업자득이라 고소했다.


홍광이 소리쳤다.


“아무튼 절대 못해요! 안 해요! 치료 결과만 보면 바로 하산할 거니까 그렇게 아세요. 그럼 전 갑니다.”


홍광은 그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무당의 산문으로 들어가면 다시는 이곳에 올 일이 없다. 그리고 정군자는 무당으로 돌아올 수 없으니 그와 다시 조우할 일 또한 없으리라.


‘그래도 보내줄 때는 보내주네.’


눈물 콧물 짜면서 애원하길래 찰거머리처럼 끈질기게 따라붙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마지막 순간 정군자는 얌전했다.


그의 나름대로 최소한의 도의를 지킨 걸까?


혹은 홍광이 마음 먹고 힘으로 떼어나면 어쩔 도리가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어느쪽이든 아무려면 어떠랴.

어쨌든 이걸로 의문은 깔끔하게 풀렸다.


이제는 공명완의 상태를 지켜보다가 결과를 보고 떠날 일만 남았다.


‘무당이 어떻게 되든.’


그와는 상관 없는 일이었다.


* * *


정군자를 만나고 다음 날 아침.


산뜻한 산 공기와 새 소리를 들으며 쾌청한 아침을 맞이했어야 할 홍광은 아침 댓바람부터 콧잔등에 주름을 짓고 있었다.


그 원인은 홍광이 머무른 무당의 처소 안에 있었다.


‘웃는 얼굴에도 침을 뱉을 수가 있구나.’


홍광은 그렇게 생각하며 침을 뱉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물었다.


“영감님이 왜 여기 계세요?”

“그야 자네를 설득하기 위해서지.”

“누가 그걸 몰라서 물어요?”

“그럼?”

“여기는 무당파 객청 처소잖아요! 무당에 도망자의 자리는 없다면서? 무려 칠 년 동안 먼산에서 지켜봐놓고 뭔 바람이 불어서 들어왔어요?”


그러자 정군자가 진지하게 표정을 고치곤 점잖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문의 존망이 걸린 일이네. 자네를 설득하기 위해서라면 지옥인들 마다하겠는가.”

“아니, 당신이 돌아오면 무당이 망한다니까?”

“걱정 말게. 무곤과 아이들 몰래 들어왔으니 무당에 장로가 돌아왔다는 소문이 퍼지지는 않을 걸세. 그럼 만사 해결이지.”

“해결은 얼어죽을 해결.”


생각은 하고 있었다.


정군자는 무당파에 몰래 들어와서 막내를 치료하고 다시 몰래 빠져나가는 일이 가능한 실력자였다. 물론 마음만 먹는다면 산문에 숨어드는 일 정도는 쉽다.


하지만 죄책감은?


“무당에 돌아올 자격이 없다면서?”

“당장 사문이 오늘내일 하는데 스스로의 면피 때문에 이를 외면할 수야 있겠는가. 벌이라면 참수형이라도 달게 받고말고.”


그렇게 말한 정군자는 빙그레 웃었다.


진심이다.

이 영감탱이, 진심이다.


언뜻 선선한 도사의 웃음 같지만, 어떻게 해서든 홍광을 무당파에 묶어놓겠다는 의지와 오기가 엿보이는 웃음이었다.


등골이 서늘하다.

잘못 걸린 느낌이었다.


“계속 그러시면 무당칠검이 아직 살아 있다고 세간에 알릴 건데도요?”

“허허, 그 정도로 자네가 악인이 아니라는 걸 본도는 알고 있네. 그리 하면 무당파는 망하는 수준이 아니라 오체분시가 될 테니까.”

“크윽······.”

“만약 자네가 악인이었다면 애초에 아무런 대가 없이 삼대제자의 치료를 하러 무당산을 오르지는 않았겠지.”


나름 강수를 던졌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쳐졌다.


상대하기 어렵다.


수십 년 도가에서 산 세월이 헛되지는 않았는지, 정군자는 무공보다 주둥아리가 더 강한 인물이었다.


“그렇게 고집 부리셔도 소용없어요. 제 발로 나가겠다면 영감님이 무슨 수로 말리실 건데요?”

“그렇잖아도 그 부분을 밤새 생각해봤네.”


정군자는 가볍게 웃더니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말했다.


“만일 무당이 망하면 내가 천하를 돌면서 자네의 위명을 퍼트리고 다닐까 하네. 물론 용모파기와 함께.”

“······.”

“참고로 저 벽에 걸린 산수화는 내가 손수 그린 걸세. 장로 시절 객청이 영 휑한 것 같아서 말이야.”


정군자의 손가락이 가리킨 벽면에는 그림으로 먹고사는 화백이 그렸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멋들어진 산수화가 걸려 있었다.


그림 속에서 떨어지고 있는 듯한 폭포수, 지금이라도 그림 속에서 튀어나와 날아갈 듯한 새까지.


저 실력으로 용모파기를 그리겠다는 말은 얼굴 도장을 찍어가겠다는 말과 같았다.


“······소경이신데 전처럼 잘 그리실 수 있겠어요?”

“그리고자 하면 이 정도는 문제 없네. 자네도 잘 알 텐데? 완숙에 이른 고수의 기감은 눈보다 세상을 입체적으로 볼 수 있네.”


반박할 말이 없다.


정군자가 독초를 구분하지 못했던 것은 풀에 대한 지식의 부재와 더불어 굳이 시도하지 않았기 때문이지, 결고 감각이 모자라서가 아니었다.


정군자는 다시 한 번 자신의 뜻을 강조했다.


“걱정 말게나. 어디까지나 무당이 망하면이네. 망하면. 그럼 안 망하면 되겠지? 허허허.”


이제 와서 도사처럼 웃는 정군자를 보며 홍광은 생각했다.


세상이 망하더니 이젠 거지한테 빌어먹네.


빌어먹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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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어찌하시겠습니까?(1). +1 23.10.12 328 10 12쪽
20 이젠 거지한테 빌어먹네(3). +1 23.10.11 351 9 12쪽
19 이젠 거지한테 빌어먹네(2). +1 23.10.10 373 12 12쪽
» 이젠 거지한테 빌어먹네(1). +3 23.10.09 411 8 12쪽
17 누구냐, 너(3). +1 23.10.08 417 10 12쪽
16 누구냐, 너(2). +1 23.10.07 410 11 12쪽
15 누구냐, 너(1). +1 23.10.06 436 10 11쪽
14 화무십일홍이라더니(3). +1 23.10.05 435 10 12쪽
13 화무십일홍이라더니(2). +2 23.10.04 449 11 12쪽
12 화무십일홍이라더니(1). +1 23.10.03 506 14 12쪽
11 개판이네(3). +1 23.10.02 506 15 11쪽
10 개판이네(2). +2 23.10.01 537 15 12쪽
9 개판이네(1). +1 23.09.30 598 15 12쪽
8 그릇이 큰 거지가 밥도 많이 얻어먹는다(4). +3 23.09.29 576 18 12쪽
7 그릇이 큰 거지가 밥도 많이 얻어먹는다(3). +2 23.09.28 610 17 12쪽
6 그릇이 큰 거지가 밥도 많이 얻어먹는다(2). +2 23.09.27 673 15 12쪽
5 그릇이 큰 거지가 밥도 많이 얻어먹는다(1). +3 23.09.26 732 14 12쪽
4 기연과 마도천하(3). +2 23.09.25 765 16 11쪽
3 기연과 마도천하(2). +2 23.09.24 875 18 12쪽
2 기연과 마도천하(1). +3 23.09.23 1,142 24 12쪽
1 낭인들(0). +3 23.09.23 1,523 26 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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