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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룡(旦龍) 님의 서재입니다.

기연 첫날에 무림이 멸망했다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단룡(旦龍)
작품등록일 :
2023.09.23 06:39
최근연재일 :
2023.11.13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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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3,236

작성
23.09.23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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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기연과 마도천하(1).

DUMMY

그날은 수많은 날들 중 평범한 하루였다.


시작은 분명 그랬다.


평범한 새끼 거지에 불과했던 홍광은 아직 두이라는 이름으로 평화로운 거지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아니, 사실 평화롭지는 않았던 것 같다.


“두 푼이 끝이냐?”


오늘의 상납금을 확인한 일결개 충자(沖子)가 위협적인 어투로 물었다.


두이는 대꾸하지 않았다.

이럴 때 변명을 해봐야 결과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고작 두 푼, 허.”


충자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지만 그것은 두이의 평균적인 하루 수입이었다. 거지 치고는 그리 적은 편도 아니었다.


거지가 불쌍하면 식은 밥이나 던져주고 말지, 누가 피 같은 돈을 주겠는가.


같은 가치라도 식은 밥을 줄 때와 돈을 줄 때의 느낌은 다른 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두 냥은 길바닥에 널리고 널린 거지들 치고 아주 평균적이거나 혹은 평균보다 살짝 높은 금액이었지만, 충자는 어김없이 소매를 걷어붙였다.


“명망 높은 개방에 속한다는 것이 그리 만만해 보이더냐? 길바닥에서 얼어죽었을 놈을 먹여주고 재워준 은혜를 고작 두 푼으로 보답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안 되겠다. 네 충의가 부족하니 선배 된 내가 교육해주어야겠지.”


충자는 짐짓 주먹에 입김을 하 불었다.


“내가 오늘 개방의 은혜가 얼마나 무거운지에 대해 똑똑히 알려주마.”


그놈의 개방.


두이는 아랫배에 힘을 주면서 속으로 개방을 욕했다.


세인들은 흔히들 개방이 오갈 곳 없는 거지들에게 잠자리와 일감을 주는 의협심 높은 문파라고 말하곤 하는데 그건 정말이지 개소리였다.


개방이 길바닥 거지들을 주워 거두는 건 그냥 인력이 필요해서였다.


구걸하고 돈 벌어올 앵벌이들, 혹은 저잣거리 정보 물어올 정보원들. 개중에서도 재능 놈 있다 싶으면 무공도 좀 시켜서 무급으로 요긴하게 써먹고, 키워준 은혜 들먹이면서 묶어두는 것이다.


하지만 그걸 알면 뭐하겠는가.


힘이 없는데.


“두 푼을, 누구, 코에, 붙이란, 말이냐!”


음절로 끊어서 다섯 대.

오늘은 적은 편이었다.


“쿠와아아압, 퉤.”


마지막으로 싯누런 가래침을 뱉은 충자가 등을 획 돌렸다.


“내일도 이 꼴이면 더 맞을 줄 알아라.”


평균적인 수입을 올리면 더 때리겠다니.


역시 ‘거지는 하루가 다르게 패고패고 또 패서 불쌍하게 만들어야 동냥질이 잘 된다’는 지론의 소유자다운 발언이었다.


충자는 마지막까지 만두 같은 주먹을 흔들어 보이며 휘적휘적 골목으로 들어갔다.


찔끔 흘러나오는 코피를 쓱 닦았다.


“개새끼.”


켜켜이 쌓인 분노가 느껴지는 음성이었지만 안타깝게도 그 목소리를 들어줄 충자는 이제 이곳에 없었다.


두이는 그 뒤로도 한참을 서서 충자와 개방 욕을 하다가 골목을 나갔다.


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음 상납금이라도 제때 바치려면 지금부터 열심히 구걸해야 했다.


그래봤자 상대는 매듭 하나인 일결개였지만 아직 열세 살을 넘기지 못해서 의결식을 행하지 못한 두이는 복종하는 수밖에 없었다.


거부하면 그 길로 하극상의 죄를 물어 동네 거지들에게 돌을 맞아 죽을 가능성이 다분했다.


무슨······ 기사멸조라나?


솔직히 길바닥에서 밥 몇 덩이 더 처먹은 것뿐인 거지에게 좀 대든다고 해서 뭐가 그리 큰 죄가 되나 싶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힘이 없는데.


“킁.”


두이는 다시 길가에 쭈그려 앉았다.


쪽박을 놓고 ‘이 불쌍한 거지에게 한 푼 줍쇼’를 외치며 행인들을 향해 구걸을 시작했다.


그날 두이가 한 거라곤 이게 끝이었다.


평화롭진 않았지만 평범한 거지의 하루가 아닐 수 없는 하루. 처맞고 구걸하며 보내는 일상.


평소와 다른 이변이 일어난 것은 저녁이 되었을 즈음이었다.


“장로님들 곧 오신다!”

“재능 있는 거지는 본타로 데려가신단다!”


동네에 장로들이 방문한다는 소식에 거지들이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단순히 얼굴만 비추는 것이라도 한바탕 소란이 일어날 텐데 대놓고 거지들을 뽑아가겠다고 하니 개난리가 날 수밖에 없었다.


거지들은 조금이라도 장로들에게 잘보이기 위해 냇가에 가서 몸을 씻고 거적데기 옷을 빨래했다. 어떤 거지는 안하던 무공 수련을 하거나 작대기 하나를 주워들고 어설프게 휘두르는 이도 있었다.


두이도 거지들을 따라 장로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자신이 눈에 들 거라는 기대보다는, 개 같은 개방을 운영하는 장본인들의 낯짝이나 보자는 심정이었다.


어떻게 보자면 저들이 충자보다 개새끼들 아닌가?


상납금 가져가고, 일해도 돈 안 주고, 잠자리 준다면서 대충 천막이나 쳐놓고, 평소에 그래놓고 정작 죽을 것 같을 때 찾아가면 쉰밥 몇 덩이로 떼우려고 드는 것이 개방인데.


‘기회 봐서 다리라도 걸 수 있으면 좋겠다. 혼자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지는 않으려나?’


장로들이 들었다면 큰일 날 상상을 하면서, 거지들 틈바구니에 낀 홍광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이놈 이거, 물건이로고.”


두이가 얼굴을 내밀자마자 나이 지긋한 노인 하나가 다가오더니 두이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봤다.


물론 두이도 노인을 마주봤다.


백 살은 넘어 보이는 외모, 흩날리는 길고 흰 수염과 봉두난발도 심상치 않았지만,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노인의 허리에 묶인 매듭의 숫자였다.


두이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노인의 매듭을 찬찬히 다시 세어봤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진짜 아홉 개다.


그가 알기로 매듭을 아홉이나 묶을 수 있는 거지는 강호에 단 하나뿐이다.


개방의 방주!


이런 작은 마을에서 골목대장 노릇이나 하는 일이삼결개 어중이떠중이 거지들이 아닌, 천하 아홉 개의 거파(巨派)라 일컫어지는 구의 장문인들과도 어깨를 나란히 하는 진짜 구결개(九結丐)!


노인은 개방의 일인자이자, 세간에서 용두방주(龍頭幇主)라고 불리우는 인물이었다.


“기묘하다 기묘해. 난세에는 영웅이 나는 법이라더니 정말이군.”


노인이 주름 그득한 손으로 두이의 몸을 조물조물 만졌다.


“놀랍구나. 근골, 십이경락, 기경팔맥이 모두 트였는데 흐름까지 유순하다니. 어찌 이런 일이 가능한 거지? 진즉에 단전이 터져 죽었어야 하거늘······ 아, 아니 이건?! 어찌 이럴 수가!”


노인은 혼자 알 수 없는 말을 중얼대더니 갑자기 경악성을 질렀다.


그러자 두이를 애워싸고 있던 장로들이 더 놀랐다. 그 반응에서 노인이 원래는 이리 격하게 반응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윽고 턱수염을 몇 번이나 만지작거린 노인이 두이에게 손을 뻗었다.


“아이야, 나를 따라오겠느냐?”


살다 보니 이런 일도 있다.


‘이게 그 기연란 거구나.’


저잣거리에서 흔히들 누가 기연을 얻어 무시무시한 고수가 되었느니, 하루아침에 대감집 아들내미가 되었느니 하는데 이번에는 두이가 그 주인공인 것 같았다.


일이 이렇게 돌아가자 두이는 고수해왔던 자신의 생각을 고쳐먹을 수밖에 없었다.


‘개방은 은혜로운 문파가 맞다!’


용두방주의 제자로 들어간다는 것은, 즉 후개(後丐)가 된다는 뜻이다.


후개의 매듭은 여덟 개다.

개방에 평생을 바친 장로들보다도 높다.


그를 괴롭히던 충자 정도는 당연히 곁눈질로도 눌러 죽일 만한 지위였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라고 저주해서 죄송합니다.’


두이는 속으로 사과하고 냉큼 노인의 손을 잡았다.


“갈게요.”


그쯤 노인 뒤에 서 있던 장로들의 표정이 시시각각 의문과 불신으로 물드는 것이 보였지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이름이 무엇이냐?”

“두이에요.”

“부모가 지어준 이름은 아니구만.”

“······.”

“그럼 내가 하나 새로 지어주어도 되겠느냐?”

“좋아요.”


두이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은 흐뭇하게 웃었다.


“그래, 개방의 방주와 후개는 대대로 이름 안에 홍(洪)자 돌림을 쓴다. 나 또한 선대께 장일홍이라는 이름을 받았지. 음······ 그래, 네가 너를 길바닥에서 발견했으니, 네게는 홍광(洪垙)이라는 이름을 주마.”

“좋아요.”


노인이 웃으며 홍광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름이 길바닥이 됐는데 싫어하지 않는구나. 기특하다. 거지가 되어 길바닥을 부끄러워해서는 안 되지.”


노인은 쭈그려 앉으며 홍광과 눈높이를 맞춰주었다.


“길바닥이란 방황하는 자들에게 있어 가장 크고 넓은 집이다. 안락하지는 않아도 언제든 누구든 받아주는 곳이지.”

“······.”

“너는 그런 길이 되어라.”


홍광은 사실 이름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어떻게든 관심이 있는 티를 내보려는 홍광의 움직임을 눈치챘는지, 노인은 선선하게 웃으며 원하는 말을 해주었다.


“내일 당장 개봉으로 가자. 거기서 네 매듭을 묶어 주마.”


그러자 홍광의 표정이 폈다.


개봉은 개방의 총타가 있는 지역이다.


매듭을 묶어주겠다는 것은 의결식을 행하겠다는 것이고, 총타에서 의결식을 하겠다는 것은 공식적으로 두이의 신분 상승을 공표하겠다는 말이었다.


인생을 피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홍광의 강호 인생은 이렇게 꽃피우게 된 것이다.



······라고 생각했다.


그때의 홍광은 아주 중요한 세 가지를 간과하고 있었다.


첫째는 용두방주와 장로들이 왜 굳이 이런 외진 곳까지 직접 발걸음을 옮겨가며 인재를 찾아다녔는가에 대해서.

이미 강호의 정세는 심상치 않았다.

지금 있는 인재들로는 도저히 후세를 감당할 수 없으리라 생각될 정도로 불안한 상태였다.


둘째는 출세가 꼭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것에 대해서.

태평성대에 출세하면 잘 먹고 잘 살겠지만 난세에 힘을 얻으면 허리가 휘도록 고생하는 것이다. 홍광은 노인이 난세라는 말을 꺼냈을 때 이 사실을 알아차렸어야 했다.


마지막으로 셋째.

중원이 다음 날 망할지도 모른다는 것에 대해서.


홍광이 한창 행복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데, 멀리서 창백하게 질린 오결개 하나가 다급하게 달려왔다.


“용두방주님!”

“무슨 일이냐?”

“마, 마교가 발호했습니다! 곤륜으로부터 서신이 왔습니다! 청해는 이미 뚫렸다고 합니다!”

“뭐라? 그걸 왜 이제 알았느냐! 천산에서 청해까지 밀고 들어왔을 정도라면 벌써 며칠은 지났을 것을! 신강에 있던 거지들은 뭘 하고 있었던 말이냐!”

“그, 그것이······.”

“똑바로 말하거라!”


노인의 준엄한 꾸짖음에 거지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마교가 발호한 것은 바로 오늘 자시(子時)의 일입니다.”


그 말을 들은 노인과 장로들의 표정이 순간 굳어버렸다.


“그러니까, 네 말은 천산에 웅크려 있던 마교가 하루만에 청해를 함락 시켰다는 말이더냐? 지금도 진군하고 있고?”

“······예.”

“피해는? 곤륜이라면 일방적으로 당해주지만은 않았을 터, 적들은 어느 정도의 피해를 입었다더냐?”

“그것이, 거의 전무하다고만······.”

“······.”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노인이었다.


노인은 보고를 한 오결개에게 간단한 조치사항을 일러준 뒤, 일언반구도 더 하지 않고 청해로 날아갔다. 뒤이어 장로들도 무작정 북쪽으로 경공을 펼치기 시작했다.


홍광은 멍한 얼굴로 그 광경을 지켜봤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그날을 기점으로 마교가 중원을 향해 남하를 시작했다.


그들은 멈추는 법을 모른다는 듯이 진격했고, 구파일방이고 사도련이고 심지어 황궁까지 전부 밀어버렸다.

싹 다. 말 그대로 정말 싹 다, 깔끔하게.


불과 나흘 만에.

그렇게 중원은 망했다.


홍광의 기연이 시작된 첫째 날.


바야흐로 마도천하(魔道天下)의 개막이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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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3

  • 작성자
    Lv.24 별랑(別狼)
    작성일
    23.10.08 14:54
    No. 1

    꽤 참신한 발상이네요. 기연을 얻을 뻔했는데 무림이 날아갔다라...
    개인적인 견해로는 황궁까지 밀어버렸다는 좀 너무 간 것 같습니다. 시대가 어느때인진 모르겠지만 보통 무협 소설은 명 나라, 청나라를 주로 쓰는데 이미 홍무제때 명교 잔당은 퇴치가 되거든요. 무튼 건필 하시길.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7 빈배4
    작성일
    23.10.24 14:00
    No. 2

    고속열차로 가도 4일만에 못가요. 400일로 바꾸삼.

    찬성: 2 | 반대: 0

  • 작성자
    Lv.96 묘한인연
    작성일
    23.11.05 16:53
    No. 3

    거적데기//거적때기
    몇 덩이로 떼우려고//때
    두이에요//두이예요

    댓글들은 확인 후 삭제해 주세요.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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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이젠 거지한테 빌어먹네(2). +1 23.10.10 373 12 12쪽
18 이젠 거지한테 빌어먹네(1). +3 23.10.09 410 8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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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누구냐, 너(2). +1 23.10.07 410 11 12쪽
15 누구냐, 너(1). +1 23.10.06 436 10 11쪽
14 화무십일홍이라더니(3). +1 23.10.05 435 10 12쪽
13 화무십일홍이라더니(2). +2 23.10.04 449 11 12쪽
12 화무십일홍이라더니(1). +1 23.10.03 506 14 12쪽
11 개판이네(3). +1 23.10.02 506 15 11쪽
10 개판이네(2). +2 23.10.01 537 15 12쪽
9 개판이네(1). +1 23.09.30 598 15 12쪽
8 그릇이 큰 거지가 밥도 많이 얻어먹는다(4). +3 23.09.29 576 18 12쪽
7 그릇이 큰 거지가 밥도 많이 얻어먹는다(3). +2 23.09.28 610 17 12쪽
6 그릇이 큰 거지가 밥도 많이 얻어먹는다(2). +2 23.09.27 673 15 12쪽
5 그릇이 큰 거지가 밥도 많이 얻어먹는다(1). +3 23.09.26 732 14 12쪽
4 기연과 마도천하(3). +2 23.09.25 764 16 11쪽
3 기연과 마도천하(2). +2 23.09.24 875 18 12쪽
» 기연과 마도천하(1). +3 23.09.23 1,142 24 12쪽
1 낭인들(0). +3 23.09.23 1,523 26 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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