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단룡(旦龍) 님의 서재입니다.

기연 첫날에 무림이 멸망했다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단룡(旦龍)
작품등록일 :
2023.09.23 06:39
최근연재일 :
2023.11.13 19:20
연재수 :
50 회
조회수 :
19,104
추천수 :
455
글자수 :
263,236

작성
23.09.23 12:42
조회
1,523
추천
26
글자
6쪽

낭인들(0).

DUMMY

장대비가 줄창 쏟아져 산비탈을 물렁하게 녹였다.


발아래가 진흙이 되었지만 죽립을 눌러쓴 사내는 아랑곳않고 산길을 올랐다. 진흙이 아니라 늪이라도 그의 발걸음을 붙들지는 못할 것 같았다.


뒤에서 부하들이 힘겹게 따라오고 있었다.


“단주, 너무 빠르네.”

“아주 발이 푹푹 빠진단 말이오.”


사내는 서부 무림에서 명성이 자자한 협객단, 홍은단(洪恩團)의 단주였다.


강호에서 숱하게 굴러먹은 듯한 행색과는 달리 죽립 아래로는 아직 앳된 얼굴이 엿보였다.


“그럼 천천히 오시오. 나 먼저 갈 테니.”


사내는 그 말을 남긴 채 정말로 혼자서 순식간에 산을 올라갔다.


“아니······.”

“내버려두게. 단주가 어디 평소에 우릴 두고 간 적 있었는가? 그만큼 이 일에 한해서는 예민할 걸세.”

“그렇긴 하지.”


홍은단은 저마다 고개를 주억이며 납득했다. 단주가 이렇게 예민한 것도 이해할 수 있는 바였기 때문이다.


어떤 자에게 평생을 갚아도 다 못 갚을 은혜를 입었다지 않는가?

심지어 이 홍은단이라는 이름도 그 자의 이름에서 따 온 거라는 말이 있었다.


“그런데 그 자가 실종된 지도 벌써 칠 년이 지났으니······.”

“혈안이 될 만도 하군.”


그 사이 어찌나 많은 곳을 돌아다녔는지, 풋내기에 불과했던 단주는 수십 번 죽을 고비를 넘기며 어느새 서부 무림에서 동년배로는 당할 자 없는 고수가 되어 있었다.


홍은단의 명성도 덩달아 올라가 규모며 실력들이 일취월장했다.


하지만 아직 찾고자 하는 자는 단서조차 잡은 적이 없었다.


그러니 단주의 속이 타들어갈만도 한 것이다.


“이번에는 쓸만한 정보들이 모였으면 좋겠는데.”

“솔직히 나는 지금까지 단서를 찾지 못한 게 더 신기하네. 그 자에게 은혜를 입고 담합한 이들이 어디 보통내기들인가? 솔직히 그들 앞에서는 우리 단주의 이름도 작아질 지경이거늘, 어찌 칠 년이나 지나는 동안 족적 하나 발견하질 못한 건지.”


누군가 혀를 찼다.


“어쩔 수 없지. 정작 그러는 우리도 이 칠 년 동안 뭐 하나 알아낸 게 없으니까.”

“하긴······.”


홍은단은 할 말이 궁해졌다.


곧 그들은 말없이 산을 타는 데 집중했다.


* * *


단주가 산을 주파해서 도착한 곳은 동굴 입구였다. 안쪽에 야명주가 알알이 박혀 있는 덕에 동굴 내부는 낮처럼 환했다.


단주는 암막을 걷어내고 벽면에 새겨진 글자들을 천천히 읽어내렸다.


감숙(甘肅).

난주, 무위, 주천······ 무(無).


[내년에는 북해로 가겠습니다.]


청해(青海).

서녕, 곤륜······ 무(無).


[청해가 워낙 넓어서 다 찾지 못했네. 우리는 청해에서 일 년간 더 머물기로 했으니 양해 바라네.]


운남(雲南).

곤명, 석림, 애뇌, 중전, 점창, 판납, 문산, 학경, 부녕······ 무(無).


[장난하나? 좀 더 뛰어라. 그리고 야수궁 가까이는 접근하지 말도록.]


복건(福建).

복주, 복청, 영안, 대전······ 무(無).


[강서로 감.]

[적어도 산과 강에는 없다.]


벽면에는 각각 이번 일 년간 수색한 지역과 짤막한 글씨가 쓰여 있었다.


“없구나.”


단주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혹시나 했지만 이번에도.


그 대단한 이들이 모여서 강호 전체를 이 잡듯 뒤지고 다녔건만.


또다시.

누구도.

그를 찾지 못하였다.


“홍 소협······.”


홍광(洪垙).


그들이 애타게 찾고 있는 사내의 이름이었다. 동시에 멸망한 지 한참이 지난 무림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기도 했다.


단주 공명완은 피가 날 정도로 주먹을 꾸득 쥐었다.


하지만 이내 화를 낼 시간조차 아깝다는 것을 깨닫고 힘을 풀었다.


날카로운 돌을 주워든 공명완은 자신도 동굴 벽면에 글자를 새기기 시작했다.


수색의 효율을 위해 모두가 일 년 주기로 기록을 남기기로 합의한 것이다.


무문검룡이 새긴 것.

이름 없는 낭인단이 새긴 것.

파천회주가 새긴 것.

암왕과 독왕이 새긴 것······.


그 뒤로 홍은단주 공명완의 글씨가 새겨졌다.


귀주(贵州).

귀양, 여경, 대방, 삼도, 태강, 동인······ 무(無).


“다음은 광서로 가야겠군.”


중얼거린 공명완은 동굴 벽에 [향 광서]라고 짧게 새긴 후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반드시 다시 만나러 갈 것이다.


그게 받은 은혜를 갚는 유일한 길이니까.


공명완이 떠난 자리에 동굴의 암막이 쳐졌다. 칠 년 동안 빼곡이 새겨진 수많은 지명과 글씨들이 다시 어둠살에 잠겼다.


홍은단은 한 시도 낭비할 수 없다는 듯이 그 길로 방향을 틀어 곧장 광서로 향했다.

.

.

.

잠시 뒤, 공명완이 사라진 동굴에 한 사내가 비를 맞으며 들어왔다.


신기하게도 발소리나 옷자락 스치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혹자가 보면 귀신이라고 착각할 수준의 무위였다.


사내는 글씨들이 새겨진 벽면을 손끝으로 훑고는, 짧고 굵게 감상평을 남겼다.


“······염병들을 하고 있네.”


심지어 올해는 수색 범위가 더 늘었다.


때가 되면 어련히 알아서 돌아갈 것을, 그새를 못 참고 안달들이었다.


“감숙, 청해, 운남, 복건, 귀주, 강서, 광서······ 북해로 가겠다는 놈은 미친놈인가? 여하튼 피해다니는 것도 일이군.”


귀신처럼 나타난 사내.

그의 이름은 홍광이었다.


홍은단 단주 공명완이 그토록 찾던 이름.


찾는 이들이 등잔 밑을 놓칠 고수들은 아니었지만, 홍광의 은신이 그보다 뛰어났던 것이다.


“내 팔자야. 어쩌다 인생이 이렇게 꼬여서는, 약한 놈들 상대로 도망이나 다니고 있고.”


홍광이 머리를 벅벅 긁으며 툴툴거렸다.


“에휴.”


짧게 한숨을 내쉰 그는 암막을 걷고 왔던 것처럼 귀신 같은 움직임으로 동굴을 빠져나갔다.


동굴 밖은 여전히 진흙밭이었으나, 홍광이 지나간 자리에는 발자국 하나 남지 않았다.


그러게.

생각해보면 어쩌다가 그의 인생이 이렇게 꼬였을까? 대체 어디부터가 이 사태의 시발점이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 이야기를 하려면 꽤 예전으로 돌아가야 한다.


한낱 거지발싸개였던 홍광의 인생에 처음으로 기연이란 놈이 굴러들어온 날이자.


무림이 멸망하던 날.


십사 년 전 그 날로.


작가의말

금일 오후 7시 20분부터 1화씩 업로드가 시작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3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기연 첫날에 무림이 멸망했다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22 어찌하시겠습니까?(2). +2 23.10.13 315 7 11쪽
21 어찌하시겠습니까?(1). +1 23.10.12 328 10 12쪽
20 이젠 거지한테 빌어먹네(3). +1 23.10.11 353 9 12쪽
19 이젠 거지한테 빌어먹네(2). +1 23.10.10 374 12 12쪽
18 이젠 거지한테 빌어먹네(1). +3 23.10.09 412 8 12쪽
17 누구냐, 너(3). +1 23.10.08 418 10 12쪽
16 누구냐, 너(2). +1 23.10.07 412 11 12쪽
15 누구냐, 너(1). +1 23.10.06 437 10 11쪽
14 화무십일홍이라더니(3). +1 23.10.05 435 10 12쪽
13 화무십일홍이라더니(2). +2 23.10.04 450 11 12쪽
12 화무십일홍이라더니(1). +1 23.10.03 506 14 12쪽
11 개판이네(3). +1 23.10.02 507 15 11쪽
10 개판이네(2). +2 23.10.01 537 15 12쪽
9 개판이네(1). +1 23.09.30 600 15 12쪽
8 그릇이 큰 거지가 밥도 많이 얻어먹는다(4). +3 23.09.29 578 18 12쪽
7 그릇이 큰 거지가 밥도 많이 얻어먹는다(3). +2 23.09.28 611 17 12쪽
6 그릇이 큰 거지가 밥도 많이 얻어먹는다(2). +2 23.09.27 673 15 12쪽
5 그릇이 큰 거지가 밥도 많이 얻어먹는다(1). +3 23.09.26 734 14 12쪽
4 기연과 마도천하(3). +2 23.09.25 766 16 11쪽
3 기연과 마도천하(2). +2 23.09.24 876 18 12쪽
2 기연과 마도천하(1). +3 23.09.23 1,142 24 12쪽
» 낭인들(0). +3 23.09.23 1,524 26 6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