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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룡(旦龍) 님의 서재입니다.

기연 첫날에 무림이 멸망했다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단룡(旦龍)
작품등록일 :
2023.09.23 06:39
최근연재일 :
2023.11.13 19:20
연재수 :
50 회
조회수 :
19,029
추천수 :
455
글자수 :
263,236

작성
23.09.26 19:20
조회
730
추천
14
글자
12쪽

그릇이 큰 거지가 밥도 많이 얻어먹는다(1).

DUMMY

“일어났느냐?”

“······.”


홍광은 가만히 눈을 꿈뻑였다.


처음에는 어둠살에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나 조금씩 앞이 보이기 시작했다. 몽롱했던 감각도 한 올 한 올 깨어났다.


고드름 같은 석순이 줄기줄기 매달려 있는 낯선 천장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고,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와 스산한 공기, 퀴퀴한 냄새가 차례로 느껴졌다.


이곳은 동굴 안이었다.


“······어떻게 된 거에요?”

“어떻게 되긴 이놈아. 그걸 꼭 물어봐야 아느냐? 똥구멍에 불 붙은 개마냥 도망쳐서 숨은 게지.”


역시 용두방주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분명 그 마인들은 방주께서 전부 물리치지 않았어요?”

“그놈들은 애시당초 마교 내에서 이름조차 받지 못한 놈들이다. 도주가 길어질수록 더 강한 놈들이 오는 건 당연지사지.”

“아······.”


거기서 마인들이 더 왔다니.

심지어 그 많은 마인들을 다 뿌리치고 이렇게 홍광까지 챙긴 다음 살아남아 숨었다니.


사람이 가능한 일인가 싶었지만 너절해진 용두방주가 혼자서 마인 마흔을 도살하는 광경을 눈 앞에서 보았으니 그런가보다 했다.


“몸은 좀 괜찮으냐?”

“덕분에 멀쩡해요. 아픈 곳도 없고.”

“그럼 불을 좀 피워보거라. 이거 원, 앞도 안 보이고 벌레들 때문에 죽겠구나. 거지로 살면서 웬만한 벌레에는 면역이 생겼는데 이렇게 많으니 간지러워서 참을 수가 없다.”

“알겠어요.”


듣고 보니 몸 곳곳이 근질거리는 것 같았다.


다행히 홍광은 길바닥에서 겨울을 나며 불을 피워본 적이 있기에 작은 불씨가 피어나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지척에 있던 나뭇가지와 손에 잡히는 가루들을 모으니 금방이었다.


빛이 생기자 곧바로 온 몸을 뒤덮고 있는 벌레들의 향현이 눈에 들어왔다. 동굴 바닥에 얼마나 누워 있었는지 모를 일이었으니 당연했다.


“으으으으!”


홍광은 발작하하듯이 온 몸을 털어냈다.


거지 생활을 하며 매일 밤 벌레와 동침한 홍광이었지만 기겁할 숫자였다.


“다 털었느냐?”

“허억, 허억, 예.”

“그럼 이리와서 내 것도 좀 털어보거라.”


홍광은 이게 무슨 소릴까 하다가, 용두방주의 팔 하나가 없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불편한가보네.’


하지만 홍광이 고개를 들어 용두방주를 보았을 때, 그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끌끌끌, 내 몰골이 말이 아니긴 하지.”


팔 한 쪽만 없는 게 아니었다.


용두방주의 사지는 모두 거친 단면만을 남기고 사라졌다. 힘겹게 벽에 기대 옴짝달싹 할 수 없는 그의 몸을 온갖 벌레들이 달라붙어 사부작사부작 좀먹고 있었다.


“어, 어떻게.”

“말했잖느냐, 마인들에게 당했다고. 아니면 어찌 살아남았는지를 묻는 게냐? 원래 경지에 오른 고수는 내공으로 지혈하고 봉합하면 외상으로는 그리 쉽게 죽지 않는다.”

“······.”

“것보다 와서 털어보래도. 아주 간지러워서 죽겠다.”


홍광이 다급하게 웃옷을 벗어서 용두방주의 몸을 털었다.

벌레들이 우수수 떨어져 나갔고 살점을 콱 물고 있는 종류는 손으로 뽑아냈다.


“으하하하! 이제야 좀 살겠구나. 긁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은데 긁을 손이 없으니 얼마나 답답했던지. 고놈들, 속이 다 시원하다.”


아직 충격이 가시지 않아 멍하니 서 있는 홍광에게 용두방주가 부드럽게 말했다.


“이리 와서 앉아보거라.”


홍광이 가서 앉자 용두방주가 힘겨운 듯 입을 열었다.


“중원은 망했다.”


용두방주는 단언했다.


“아무리 강호에 은거기인들이 많다지만, 그 누가 튀어나와도 천마와 주교들의 적수가 될 수 없다고 나는 확신한다. 그런 자가 있었다면 진즉에 무림일통을 이루지 않았겠느냐?”

“그럼 이제 어찌합니까?”

“어쩌겠느냐. 나는 책사도 아니거니와 문사도 아니다. 그저 무인이지. 이런 상황에 무인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뿐이구나.”


죽어가는 듯이 혼탁하던 용두방주의 눈이 이채를 되찾았다.


“수련이다.”


그 말에 홍광이 주먹을 꽉 쥐었다.


고수가 되겠다.

이제는 잊어버린 빛바랜 꿈인 줄 알았다.


아닌 말로, 강호에서 어린 시절에 천하제일인의 꿈을 꾸지 않는 사내는 거의 없다. 홍광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가진 것 없는 거지로 태어났다지만 꿈꾸는 데는 돈을 받지 않는 법.


거지들이 하는 말을 어느정도 알아들을 만큼 컸을 때, 홍광의 꿈은 천하제일고수였다.


하지만 차쯤 깎여나간 것이다.


세상이 그리 만만치 않다는 걸 알았는 때는 적당한 고수로.


그것조차 아주 어렵다는 걸 깨달았을 때는 그냥 점소이로, 쟁자수로, 하인으로, 종복으로, 청소부로, 잡일꾼으로, 시다바리로, 일결개로······.


그렇게 지금의 홍광이 된 거였다.


그런데.

수련이라는 말에 다시 심장이 약동하고 있었다.


“뭐부터 하면 됩니까?”


그러자 용두방주가 끌끌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왜 이 녀석아. 내 꼴이 이러해서 수련을 제대로 못 시켜줄 것 같더냐?”

“아, 아닙니다.”


바로 대답하긴 했지만 솔직히 걱정이 된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홍광은 상납금 바치니까 더 가져오라며 패는 충자같은 놈이 아니었다. 용두방주가 구해주고 수련까지 시켜주겠다고 했으면 의심이 아니라 감사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걱정이 든 건 사실이지만 금방 생각을 고쳐먹었어요.”

“그래 아무렴 그랬겠지. 네 똥 굵다.”


홍광의 입매가 움찔했다.


같은 거지라고는 해도 용두방주라는 거창한 직위를 달고 있으니 품위가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전혀 틀린 생각이었다.


위기의 순간에 뛰어들어 구해줄 때는 영웅의 품모도 있었는데, 하는 말로만 봐서는 용두방주가 아니라 왕거지라는 호칭이 더 어울렸다.


“어어? 이놈 봐라. 이번에는 격식 없다고 까는 것 같은데?”

“아니에요.”

“이번에는 뉘우치지도 않는구만.”

“······.”

“에잉, 됐다. 내가 제자들 앞에서 위엄이 있어본 적이 있어야지. 어차피 기대도 없었어.”


홍광이 갸웃하며 물었다.


“저 말고도 제자가 있으셨습니까?”

“그럼 네가 유일한 후개라고 생각했느냐? 너를 지목하기 전에도 후개는 너를 포함해서 일곱 명이나 있었다. 개중에는 벌써 제법 쓸만해진 놈도 있었지. 원래였다면 너도 그놈들과 방주 자리를 두고 경쟁했어야 할 테지만······.”


제자들의 얼굴이 떠올랐는지 용두방주의 얼굴이 수심에 젖었다.


물론 뒷말은 들을 것도 없었다.

세상이 망했는데 뭐 어쩌겠는가?


헛기침으로 음울한 분위기를 떨쳐낸 용두방주가 이야기를 이어갔다.


“큼, 뭐 아무튼. 내가 여덟 명의 후개들 중 하필 너를 찾아온 것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그것이 강호를 위함이었기 때문이지.”

“네?”

“바꿔 말하면, 결국 네가 가장 강해질 그릇이었다는 말이다. 다른 놈들에 비해 재능이 너무나도 압도적이야. 가르치기도 전에 이미 트여 있다고나 할까.”


모르긴 몰라도 재능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기절하기 전 마주쳤던 마인도 제게 트여 있다는 말을 했어요.”

“그래. 하지만 그놈이 느낀 것과 내가 느끼는 것은 차원이 다를 것이다. 그놈이 네 재능에 대해 어렴풋이 느꼈다면, 내게는 마치 들여다보듯 보인다. 네 몸의 대막과 세맥이 범인의 배 이상으로 팽팽하게 늘어나 있는 것이 말이다.”

“그런가요?”

“본래라면 급류를 견디지 못하고 단전히 터졌어야 정상일 정도다.”


홍광이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자 용두방주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 어떤 기재라 해도 직접 경험해보지 않으면 대맥이니 세맥이니, 진기니 내공이니 하는 말들은 아무리 설명해도 알아들을 수 없음이야. 그야말로 백문이불여일견이지.”

“알겠어요.”

“그럼 당장 가부좌를 취해 봐라.”


홍광은 군말 없이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딱히 거창하게 느끼려고 하지 않아도 좋다. 아랫배에 힘을 살살 줘보거라. 뭐 쌀 때 하듯이.”

“······.”


비유를 해도 좀.

용두방주라는 인간이 말끝마다 자꾸 똥이 뭐냔 말이다, 똥이.


여하튼 시키는대로 아랫배에 힘을 주니 정말로 꿀렁이는 무언가 느껴졌다.


“이제 눈을 떠보거라. 뭐가 느껴지더냐?”

“응어리 같은 것이 있었어요.”

“그래, 그것이 네 단전이다. 무인의 또다른 심장이자 내공의 둥지라고 할 수 있지. 모든 내공과 진기의 순행은 단전에서 시작해서 단전에서 끝난다.”

“네, 그런데······.”

“문제가 있더냐?”

“그게······,”

“내공이 너무 많다?”


용두방주는 예상했다는 듯이 묻고는 자지러져라 웃기 시작했다.


“푸하하하하하! 그럼, 많아야지. 아주 넘쳐 흐른다고 느껴야지! 그것이 누구의 내공인데! 본래 단전도 그리 쉽게 느껴지는 것이 아니야, 아랫배에 변이 그득하게 차면 느끼고 싶지 않아도 느껴지는 것과 같은 원리인 게지!”


만약 용두방주에게 팔다리가 아직 달려 있었다면 무릎을 탁 치면서 웃었을 것이다.


간신히 웃음을 그친 용두방주가 숨을 골랐다.


“이 동굴에 숨었을 때는 이미 상처 입은 팔이 거의 문드러지기 시작했어서, 급한대로 네게 격체전공을 했다. 이제는 내가 가지고 있어봐야 쓸모도 없는 내공이니.”


격체전공이 뭔진 몰라도 맥락으로 내용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럼 이게 용두방주님의 내공?”


용두방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이제 너는 내공의 양만으로 따지자면 천하에서 손에 꼽힐 것이야. 당금의 강호에서 나보다 내공이 심후했던 자는 그 천마를 포함해도 손에 꼽으니까.”

“그, 그렇군요.”

“고놈 얼굴 좀 봐라. 생각이 다 드러나는구만. 왜, 듣고 보니까 그 정도는 아닌 것 같냐?”


말투는 가벼워도 눈 앞의 노인은 용두방주였다.


숨긴다고 숨겨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빠르게 깨달은 홍광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솔직히 좀 그래요. 확실히 많기는 한데, 막 대단한 건 못 느끼겠어요. 용두방주님의 표현대로 하자면, 아랫배에 똥이 있긴 있는 것 같은데 마려울 정도는 아니랄까······.”


홍광은 말하면서도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달리 표현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 것을. 이게 다 자꾸 더러운 것만 골라 언급하는 왕거지 잘못이었다.


용두방주는 혀를 끌끌 찼다.


“내공이 부족한 게 아니라 네 그릇이 너무 큰 거다. 보통 사람이 내 항룡기를 한 번에 모두 받았으면 몸이 버티지 못하고 터져도 이상하지 않거늘, 네가 이상한 것이다. 기맥이 미친 듯이 넓어 상시 급류가 흐름에도 네가 멀쩡한 것 또한 이 때문이지.”

“그, 그런가요?”

“그러하다. 네가 가진 그릇은 상상조차 안 될 정도로 말도 안 되게 넓다. 아니, 그걸 그릇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는지조차 모르겠구나. 물을 담는 것은 물그릇이지만 바다를 그릇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지 않느냐?”

“······네.”

“그래. 한낱 인간이 바다에 물을 부었는데 조금 찼다고 느낄 정도면 내 내공이 얼마나 심후한지 이제야 좀 알겠느냐?”


솔직히 모르겠다.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현실감이 없기도 하고, 당장 느껴지는 감각이 그리 대단하지 않았다.


하지만.


“네, 알겠어요.”


홍광에게는 한평생 처맞으면서 배운 경험이 있었다.

서열 높은 이에게는 깍듯할 것!

기분을 더럽히지 말 것!


홍광은 배가 부르다는 듯이 아랫배를 텅텅 두들기며 활짝 웃었다.


"정말 대단하시네요!"

“그럼 그럼, 누구의 내공인데. 푸하하하하하하!”


용두방주가 만족스럽다는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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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어찌하시겠습니까?(1). +1 23.10.12 327 10 12쪽
20 이젠 거지한테 빌어먹네(3). +1 23.10.11 350 9 12쪽
19 이젠 거지한테 빌어먹네(2). +1 23.10.10 372 12 12쪽
18 이젠 거지한테 빌어먹네(1). +3 23.10.09 409 8 12쪽
17 누구냐, 너(3). +1 23.10.08 415 10 12쪽
16 누구냐, 너(2). +1 23.10.07 409 11 12쪽
15 누구냐, 너(1). +1 23.10.06 435 10 11쪽
14 화무십일홍이라더니(3). +1 23.10.05 434 10 12쪽
13 화무십일홍이라더니(2). +2 23.10.04 448 11 12쪽
12 화무십일홍이라더니(1). +1 23.10.03 505 14 12쪽
11 개판이네(3). +1 23.10.02 505 15 11쪽
10 개판이네(2). +2 23.10.01 535 15 12쪽
9 개판이네(1). +1 23.09.30 597 15 12쪽
8 그릇이 큰 거지가 밥도 많이 얻어먹는다(4). +3 23.09.29 575 18 12쪽
7 그릇이 큰 거지가 밥도 많이 얻어먹는다(3). +2 23.09.28 609 17 12쪽
6 그릇이 큰 거지가 밥도 많이 얻어먹는다(2). +2 23.09.27 671 15 12쪽
» 그릇이 큰 거지가 밥도 많이 얻어먹는다(1). +3 23.09.26 731 14 12쪽
4 기연과 마도천하(3). +2 23.09.25 763 16 11쪽
3 기연과 마도천하(2). +2 23.09.24 874 18 12쪽
2 기연과 마도천하(1). +3 23.09.23 1,140 24 12쪽
1 낭인들(0). +3 23.09.23 1,521 26 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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