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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룡(旦龍) 님의 서재입니다.

기연 첫날에 무림이 멸망했다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단룡(旦龍)
작품등록일 :
2023.09.23 06:39
최근연재일 :
2023.11.13 19:20
연재수 :
50 회
조회수 :
19,026
추천수 :
455
글자수 :
263,236

작성
23.09.28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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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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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2쪽

그릇이 큰 거지가 밥도 많이 얻어먹는다(3).

DUMMY

홍광은 성난 곰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물었다.


“그럼 어떻게 저걸 상대하는데요?”

“알아서······.”

“알아서 하라고 하시면 같이 죽는 수밖에 없습니다.”

“쩝, 원래 이런 건 스스로 타개책을 찾아야 하는 법이거늘. 뭐 협박도 하나의 계책이라 할 수 있나.”


용두방주는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시고는 말했다.


“칼 있지? 꺼내보거라.”


홍광은 순간 잊었던 품속 은장도의 존재를 떠올리고 서둘러 꺼냈다.


“자신이 가진 게 무엇인가 정도는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앞으로는 잊지 말도록.”

“예. 이 다음에는 어떡합니까?”

“어떤 상황이든 상대에 대한 파악이 먼저다. 곰의 가장 위협적인 무기는······.”


안타깝게도 용두방주의 말이 끝나는 것보다 곰의 인내심이 바닥나는 게 먼저였다.


홍광을 깔아뭉갤 기세로 달려든 곰이 앞발을 찍어내리듯 휘둘렀다.


홍광은 순간 몸을 던져서 바닥을 굴러 간신히 공격을 피했다. 아마 맞았다면 뼈도 추리지 못했을 것이다.


“······앞발이다.”

“말을 좀 더 빨리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사부님.”


용두방주는 재미 있다는 듯이 껄껄 웃었다.


“훌륭히 피하지 않았느냐? 앞으로 강해지더라도 제자는 나려타곤을 부끄러워하지 말도록. 어떤 상황이든 생존이 우선이다.”

“알겠으니까 다음에 어떻게 할지나 말해주시죠.”

“뭘 그런 걸 물어보느냐? 칼 들었으면 찔러야지. 곰 가죽은 잘못 찌르면 오히려 검이 부러질 수 있으니 주의해라.”


홍광은 바른 말을 못하는 한을 깨달았다.


당장 살아남아야 해서 미친 영감탱이에게 험한 욕 한마디 못하다니! 만약 곰을 무찌르면 앞으로는 용두방주고 뭐고 얄짤없이 대하겠다는 다짐을 새기는 홍광이었다.


“적어도 어딜 어떻게 찔러라 이런 건 없어요?”

“목 찔러라. 대부분의 생물은 보통 목이 잘리거나 크게 상하면 죽는다.”


대화를 나누는 사이 곰이 다시 한 번 달려들었다.


홍광은 몸을 한 번에 낮추며 곰의 앞발을 피하고, 그 다음 칼을 올려 찔렀다. 방금 처음으로 칼을 잡아본 어린아이가 한 공격 치고는 마치 한 동작인 것처럼 유려한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


곧게 뻗은 은장도는 단단한 곰의 가죽을 뚫지 못했다.

맹수의 피부는 생각 이상으로 질겼다.


하지만 홍광은 당황하지 않고 물러났다.


당황하고 있긴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가진 걸 파악하라고 했지.’


홍광은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침착하게 되짚어보았다.


그러자 무공의 무 자도 배운 적 없는 홍광이었지만 한 가지 떠오르는 게 있었다.


용두방주가 보여줬던 타구봉법과 항룡십팔장.


그 강렬했던 동작 한 올 한 올이 홍광의 머릿속에 화인(火印)처럼 아로새겨져 있었다. 내력까지 따라할 수는 없겠지만, 그 겉모습이라면 충분했다.


기본은 굳건하게.


타격 지점에서 폭발하듯이.


홍광은 그 움직임을 어설프게나마 흉내냈다.


손에 들린 것은 타구봉이나 나뭇가지가 아닌 은장도였으나 상관 없었다. 홍광이 본 바, 무공에 있어 무슨 무기를 쓰느냐가 그렇게까지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휘두르는 사람이다.


‘단호하게.’


이번에는 홍광이 도약했다.


곰이 반격하기 위해 일어난 순간, 은장도를 뻗었다. 딱히 빠르지도 정교하지도 않지만 동작에 군더더기가 없었다.


자신이 무얼 하려는지 정확히 아는 자의 움직임이었다.


푹!


박혔다.


곰의 두꺼운 목에 가냘픈 은장도가 틀어박혔다.


홍광은 양손을 포개 작은 손잡이를 감싸쥐고 온 힘을 다해서 내리그었다. 곰의 목이 크게 찢어지면서 대량의 피가 뿜어져나왔다.


홍광이 곧장 거리를 벌렸다.


곰은 비틀거리며 마지막까지 홍광을 노려보다가 옆으로 넘어지며 죽었다.


지켜보던 용두방주의 눈이 조용히 커졌다.


‘방금 그것은?’


용두방주가 기대했던 건 어디까지나 처음 보여준 움직임 정도였다. 기경팔맥과 십이경락이 모두 트인, 미친 재능을 가진 제자이니만큼 거기서 힘을 조금만 더 실었더라면 좀 더 좋았겠지만 그것만 해도 훌륭했다.


열두 살짜리 아이가 갑자기 나타난 맹수를 상대로 그정도 했으면 천하의 무재라고 봐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홍광은 예상을 뛰어넘었다.


방금 보여준 움직임은 분명 타구봉법의 첫 초식이었다.

그것도 희미하게 내공이 실린.


용두방주쯤 되는 고수가 아니라면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미미하긴 했지만, 분명 동작 위에 내공 한 올이 얹어져 있었다.


모양새는 엉성하고 지적할 점이 많긴 해도 분명 초식의 본질을 담았다는 증거였다.


‘대단하구나.’


용두방주는 아까부터 입 안에서 덜그럭거리던 어금니를 퉤 뱉어버렸다. 위험해지면 무리해서라도 선천지기를 쥐어짜서 날릴 생각이었는데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홍광은 몰랐겠지만, 이 일로 용두방주의 수명이 일 년쯤 늘어났다.


홍광이 거친 숨을 고르며 다가왔다.


첫 마디는 이랬다.


“미친 영감탱이.”

“······.”

“양심이 너무 없는 거 아니에요? 열두 살짜리 제자한테 난데없이 곰을 잡으라니. 사부님은 열둘에 곰 잡아봤어요? 예? 벌써 노망나신 거 아녜요?”

“잠시 진정을······.”

“지이인저어어엉? 아니 사부님, 사람이 목숨 걸고 싸우는데 빨리빨리 조언 몇 마디 해주기가 그렇게 어려웠어요? 명색이 용두방주라는 분이? 진짜 섭망 오셔서 기억이 잘 안 나셨나?”


관자놀이에 손가락을 대고 빙빙 돌리는 홍광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용두방주는 기특한 제자를 칭찬하려는 마음을 싹 고쳐먹었다.


“잡아봤다 이놈아! 내가 열둘에는 날아다니는 용도 잡을 기세였지, 내 똑똑히 기억하다, 아암! 그에 비하면 너는 한참 모자라다!”

“거짓말!”

“진짜다 이 모지리 제자야!”


놀랍게도 진실이었다.


용두방주는 열둘에 이미 개방에서 적수가 없는 후지기수였다.


“앉아라! 움직임에 허점이 너무 많아서 나는 네가 구멍을 휘두르는 줄 알았다! 쉴 틈이 어디있냐! 목숨을 건 싸움은 상응하는 대가를 주는 법. 다 싸웠으면 복기하고 발전의 밑거름으로 삼거라! 이게 기본이다!”

“에이 씨!”


홍광은 투덜대면서도 시키는대로 앉았다.


이번 일로 무공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꼈기 때문이다. 천하제일의 내공이 있어도 쓰지 못한다니 우습지 않은가?


“가르쳐줄 거면 제대로 가르쳐주쇼!”

“두말하면 잔소리지 버릇없는 놈아! 각오하거라, 혼천강룡심결(混天降龍心訣)과 타구봉법, 항룡십팔장을 그 몸에 때려박아줄 테니! 내 항룡기를 다루는 것은 결코 만만치 않을 것이야!”


어차피 개방도 망했고, 지켜보는 장로들도 없다!


체면을 벗어던진 용두방주는 속이 좁은 편이었다. 유치한 면도 있었다.


‘오냐, 원래 제자 기강은 초장에 빡세게 잡아두는 것이지.’


용두방주는 그런 마음가짐으로 가르침에 임했다.


* * *


몇 개월이 흘렀다.


맨 처음에는 식사로 이끼를 뜯어먹고 버티는 수밖에 없었지만, 그 다음에는 홍광이 나가서 생선을 잡아오고, 토끼를, 여우를, 멧돼지를, 늑대를, 그리고 곰을 아무렇지도 않게 잡아오기에 이르렀다.


아마 범이 있었다면 호랑이 고기 맛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쯤 동굴 바깥에는 눈이 내렸다.


다채로웠던 산속의 경관이 온통 새하얗게 덮어씌워져가는 걸 보면서, 홍광은 암약하는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차디찬 눈 밑에서 피어날 때를 기다리는 것들. 그런 걸 생각하고 있자니 문득 자신은 몇 계절을 더 거쳐야 꽃을 피울 수 있는지 궁금해졌다.


“사부님, 저는 언제쯤 동굴을 나갈 수 있습니까?”

“그놈 참 빨리도 묻는구나.”


몇 개월 사이에 운기조식으로 내력을 좀 회복한 사부는 허공섭물로 구워진 곰 고기를 입에 쏙 넣으며 답했다.


“적어도 어디 가서 잡스러운 놈에게 칼 맞고 죽을 정도가 아니게 되려면······ 어디보자, 그래. 내가 죽을 때까지는 안 될 듯 싶구나.”


용두방주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왜, 걱정 되느냐? 걱정 따위가 들지 않을 정도로 굴려줄까?”

“······아닙니다.”

“그래야지.”


처음에는 홍광이 일일이 떠먹여주지 않으면 식사도 못했던 사부였지만, 허공섭물이 가능할 만큼 회복된 후로는 그런 재미가 없어서 입과 행동이 더욱 거칠어졌다.


흡족하게 웃은 용두방주가 이번에는 허공섭물로 홍광 몫의 고기를 둥실 띄워서 입으로 집어넣었다. 겨울잠 자던 곰을 잡은 거라 그런지 지방이 적절하게 녹아서 부드럽게 씹혔다.


홍광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물었다.


“혹시 사부님, 남은 수명이?”

“······아예 나 죽으라고 고사를 지내지 그러냐 이놈아?”

“헤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요.”

“이런 것도 제자라고. 어휴. 말세다 말세야.”


용두방주가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진짜 말세 맞는데.


눈물이 앞을 가리지만 상황에 맞는 질문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남은 시간을 말해줬다.


“길어봐야 오 년 정도 살 것 같구나.”

“오 년이나요?”

“······.”

“아차, 말실수.”


개방의 용두방주이자 천하제일인 후보 장일홍. 그의 존재만으로 개방이 얻는 실리를 헤아릴 수 없었다.

그런 그에게 조금이라도 더 살아주길 바라는 이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개봉 총타에 산처럼 쌓였던 영단과 보약들이 아직도 생생하다.


헌데 지금은 제자가 빨리 안 죽는다고 아쉬워하고 있으니.


“길게 사시면 좋죠. 제가 배움이 좀 짧나요? 사부님에게 배울 시간이 늘어나서 제자는 감읍합니다. 헤헤.”

“이미 늦었다 이 새끼야.”


인생이 이렇게 서글프다.


오성이 좀 달리더라도 다른 제자를 찾아봤어야 했나.


뒤늦은 후회를 해도 사태는 이미 가호지세에 낙장불입이었다.


갑자기 울컥한 용두방주가 소리쳤다.


“에잇! 괘씸한 놈, 오늘은 외공 수련 한 시진 추가다! 돌 들어!”

“예에? 사부님 저 아직 다 못 먹었잖······ 아니 내 고기가? 사부님!”

“먼저 먹는 놈이 임자지 이놈아. 그러니까 누가 밥 먹다 말고 눈 구경이나 하고 있으랬냐?”

“이 노친네가!”


홍광은 발작했지만 하는 수 없이 머리통 만한 돌을 들어올릴 수밖에 없었다.


나이 먹고 사지가 모두 없는 노인과 드잡이질을 벌일 수는 없지 않은가? 심지어 용두방주가 팔다리를 잃은 것은 모두 홍광을 지키기 위함이었는데.


“하면 되잖아요, 하면.”

“진즉 그럴 것이지.”


용두방주는 툴툴댔지만 정작 속마음은 홍광과 다를 바 없었다.


오 년이란 시간이 너무 길게 느껴진 것이다. 그것이 자신의 남은 수명이었음에도 그랬다.


‘누가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있는지 시간 참 안 가는구나.’


아무리 허공섭물을 쓸 수 있다고 해도 손발이 없는 불편함은 이루말할 수 없었다.


잠시 바람을 쐬기도 어려웠고, 생리적인 일들을 혼자서 해결하기도 녹록찮았다.


매일이 전쟁이다.


어떤 날에는 자신이 그저 죽을 날에 죽지 못해서 불행하진 것처럼도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저 기다려야겠지.’


제자의 성장은 천하의 온갖 기재들을 보아온 용두방주조차 입을 떡 벌릴 정도로 놀라웠다.


그런 굴러다니는 기재들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일 만큼 홍광은 빠르게 강해졌다. 이젠 동년대의 용두방주도 찜쪄 먹을 수 있을 정도였다.


‘이것이 내게 하늘이 내린 마지막 사명이라면 끝까지 완수해야겠지.’


용두방주가 탄식하며 곰 고기를 마저 씹었다.


그러나 시간은 막 활대에 끼워졌을 뿐이고, 이제 쏘아지기 시작했다.

즐거운 한 때는 화살처럼 지나간다 했던가?


시간이 가지 않는다 불평하던 시절은 눈 깜짝할 사이에 저 너머로 아득히 멀어져서 이제는 보이지도 않게 되었다.


“제자야.”

“예 사부님.”


집채 만한 바위를 각각 손등에 올리고 정수리에도 하나를 얹은 홍광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돌을 내려놓아라. 오늘이 마지막 수련이다.”


용두방주가 미소를 머금었다.


눈 깜짝할 새에 칠 년이 지났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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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어찌하시겠습니까?(1). +1 23.10.12 327 10 12쪽
20 이젠 거지한테 빌어먹네(3). +1 23.10.11 350 9 12쪽
19 이젠 거지한테 빌어먹네(2). +1 23.10.10 372 12 12쪽
18 이젠 거지한테 빌어먹네(1). +3 23.10.09 409 8 12쪽
17 누구냐, 너(3). +1 23.10.08 415 10 12쪽
16 누구냐, 너(2). +1 23.10.07 409 11 12쪽
15 누구냐, 너(1). +1 23.10.06 435 10 11쪽
14 화무십일홍이라더니(3). +1 23.10.05 434 10 12쪽
13 화무십일홍이라더니(2). +2 23.10.04 448 11 12쪽
12 화무십일홍이라더니(1). +1 23.10.03 504 14 12쪽
11 개판이네(3). +1 23.10.02 504 15 11쪽
10 개판이네(2). +2 23.10.01 535 15 12쪽
9 개판이네(1). +1 23.09.30 597 15 12쪽
8 그릇이 큰 거지가 밥도 많이 얻어먹는다(4). +3 23.09.29 575 18 12쪽
» 그릇이 큰 거지가 밥도 많이 얻어먹는다(3). +2 23.09.28 609 17 12쪽
6 그릇이 큰 거지가 밥도 많이 얻어먹는다(2). +2 23.09.27 671 15 12쪽
5 그릇이 큰 거지가 밥도 많이 얻어먹는다(1). +3 23.09.26 730 14 12쪽
4 기연과 마도천하(3). +2 23.09.25 763 16 11쪽
3 기연과 마도천하(2). +2 23.09.24 874 18 12쪽
2 기연과 마도천하(1). +3 23.09.23 1,140 24 12쪽
1 낭인들(0). +3 23.09.23 1,521 26 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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