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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룡(旦龍) 님의 서재입니다.

기연 첫날에 무림이 멸망했다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단룡(旦龍)
작품등록일 :
2023.09.23 06:39
최근연재일 :
2023.11.13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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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04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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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화무십일홍이라더니(2).

DUMMY

간병하는 사람이 너무 많으면 인독이 옮는다. 무곤진인은 다른 제자에게 명완의 옆자리를 맡겨놓고 장문인실로 돌아왔다.


무당파의 장문인실은 소탈한 초옥이다.


그야말로 진흙과 풀과 나무를 덧대어 만든 양민들의 집과도 다를 바 없었다. 아니, 조금 더 검소하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도교를 창시한 태상노군께서 자연과 함께하는 무위자연을 강조하셨기 때문이며, 공수신퇴의 자세를 드러낸 결과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집이라는 것은 관리 여하에 따라 상태가 천차만별로 변하기 마련이다.


이전에는 무당의 장문인실이 설령 소탈한 초옥이라 할지라도 매일 누군가 걸레로 닦고 기둥에 기름칠을 해서 광을 냈다. 바닥에 먼지가 쌓일 일이 없었으며, 방안에는 각종 집기들과 언제든 우릴 수 있는 찻잎이 비치되어 있었다.


무곤진인도 가끔 수행을 쌓다가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문답을 나누고자 장문인실을 들락거리곤 했지만, 소탈함보다는 정갈함과 선기가 느껴지던 방이 무당의 장문인실이었다.

대남존무당의 이름이 이깝지 않은 방이었단 말이다.


하지만 지금 무곤진인이 머무르는 장문인실은 그야말로 폐옥에 가까웠다.


기둥에 바를 기름이 없으니 벌레가 먹고 나무가 쩍쩍 갈라진다.

집기와 가구는 전부 부서지거나 남은 것들을 팔아버린 지 오래였다.


찻잎?

찻잔?


물건이란 물건은 전부 사라지고 덩그러니 늙은 사람 하나만 남은 방은 을씨년스럽기 그지없었다.


그 달라진 방의 모습이 무당의 현주소를 나타내는 것 같아서, 물건을 전부 팔아치운 장본인인 무곤진인은 이 방에 들어올 때마다 어딘가 죄스러운 기분을 떨쳐낼 수 없었다.


그러나.

반대로 아직 팔지 않은 것도 있었다.


정확히는 팔 수 없었던 것이다.


무곤진인은 장문인실의 한쪽 구석으로 가서 바닥의 널빤지를 들췄다. 무곤진인도 이 방에 이런 공간이 있었다는 것은 장문인직을 떠맡은 이후 처음 알게됐다.


널빤지 아래에는 평범하게 진흙으로 채워져 있었는데, 그걸 또 들추고 보면 초옥의 뼈대가 되는 목재가 드러난다.


그리고 목재의 결을 자세히 관찰하면 가는 길이 붙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천잠사(千蠶事).

팔두마차가 끌어도 끓어지지 않는, 머리카락보다 얇은 실.


무곤진인은 그걸 살짝 퉁겼다.


장문인실의 기둥을 타고 지하 깊숙이 연결된 천잠사의 끝에서 무게감이 느껴진다.


쭉 당기니 실로 묶인 서책 한 권이 올라왔다.


“······잘 있구나.”


어디로 도망갈 리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하루에 몇 번씩 들춰보게 된다. 평생을 수행에 바쳤음에도 불안과 조바심을 떨쳐내지 못했으니, 누군가 그에게 수행이 부족하다고 꾸짖어도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실 끝에 보관된 물건은 그만큼이나 중요했다.


거기에는 웅혼한 필체로 태극검보라 쓰여진 비급서가 있었다.


태극검보, 즉 태극혜검.


무당의 진산절기는 아직 완전히 소실되지 않았다.


그러나 태극검보를 바라보는 무곤진인의 얼굴은 어둡기만 했다.


태극혜검은 초상승의 무공이다.


그리고 초상승의 무공이라는 것은 범인인 그가 감히 상상하기도 어려운 내력의 운용과 복잡한 묘리로 점철되어 있다. 무곤진인으로서는 검보에서 말하는 진의를 도저히 단 한 줄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상세히 기록한다 한들, 책의 형태인 비급서가 담을 수 있는 것은 결국 한계가 있는 것이다.


본래라면 태극혜검을 이미 익힌 전대 고수가 선별된 제자에게 차근차근 가르쳤어야 한다. 그렇게 해도 무당을 통틀어 한 대에 셋조차 익히지 못하는 것이 태극혜검이다.


하지만 태극혜검을 진의를 깨닫고 가르칠 수 있는 선인들은 더 이상 이 세상에 남지 않았다.


그렇다고 섣불리 손을 댔다가는 살짝만 삐끗해도 진기의 순환이 꼬여서 죽거나 수명만 줄이게 될 수 있다.

그나마 경지가 높은 무곤진인도 그럴진데, 현 무당의 제자들은 오죽하겠는가?


괜히 검보가 있다는 사실을 공표했다가 제자들이 죽어나가면 그만한 낭패가 없었다. 경지가 낮을수록 구름 같이 드높은 진의가 신기루인줄 모르고 덤벼들기 마련이니까.


결국 태극검보는 계륵 같은 존재였다.


어찌저찌 발견하긴 했지만,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상태.


‘쓸 수 있는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무곤진인이 태극검보를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팔면 된다.


무당의 태극검보라고 하면 살 사람은 차고 넘쳤다. 어쩌면 명완의 병세를 고칠 의원을 부르고도 몇 년은 굶을 걱정이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찌 그러겠는가?


이것이 마지막 남은 무당의 희망인 것을.


“미안하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명완아.

제자가 죽어가는데 쓰지도 못할 검법을 아끼고 있다니.


못난 장문인이라 할 말이 없다.


죽어서도 등선은 못할 것이다.


“무량수불······.”


나직한 도호에 감정이 고스란히 실린다.


‘화무십일홍이라더니.’


무당의 장문인으로서 입에 담을 말은 아니지만 무곤진인은 그 말을 뼈아프게 실감했다.


장문인실 문 너머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쯤이었다.


“자, 장문인!”

“무슨 일이냐?”


현재 무당 내에서 다급하게 그를 찾을 일이라고 하면 하나뿐이다.

다급하게 문을 열고 나간 무곤진인이 물었다.


“명완의 상태가 악화됐더냐?”

“아, 아닙니다!”

“그럼?”

“데려왔습니다!”

“뭐?”


잘못들었나 싶어 다시 물었다.


누가 누구를 데려와?


“진정하고 말해라, 누구를 말이냐?”

“허겸 대사형이, 명완을 치료해줄 사람을 데려왔단 말입니다!”


무곤진인은 쇠망치로 이마를 한 대 세게 맞은 기분이었다.

충격적이었다.


이 마도천하에, 얻을 것도 없는 문파에게 도움을 주겠다는 이가 아직 있다는 말인가?


순식간에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이, 이럴게 아니지. 당장 안내하거라! 아니다, 어디냐? 내가 가겠다!”

“지금 막 산을 올라 해검지를 지나고 있다 합니다!”

“알았다!”


다 쓰러져가는 무당이 넓으면 얼마나 넓겠냐마는, 무곤진인은 전속력으로 어설픈 경공을 전개했다.


도움을 줄 누군가 왔다.

손을 뻗어준 이가 있다.


그것이.


무곤진인이 장문인이 된 후로 흐른 칠 년동안 들은 소식 중 가장 희망적인 것이었다.


* * *


해검지(解劍地).


무당의 산문을 넘고자 하는 이라면 누구든 이 땅에서는 검을 풀어놓아야 한다. 이것은 대문파의 원로가 오든, 황실의 요직이 방문하든, 장강에서 노 젓는 뱃사공이 향화를 하러 들르든 차별이 없다.


그 어떤 이가 오더라도 도를 닦는 내부에서 감히 사특한 날붙이를 차고 있을 수는 없다.


심지어 무당파 내에서 검을 수련하는 검수들도 해검지에서만큼은 잠시 검을 반납하고 수련 장소로 가서야 애병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


해검지는 그 정도로 신성한 땅이다.

무당파를 방문하는 이가 가장 먼저 밟게 되는 땅이자, 무당의 기상을 상징하는 땅.


“저, 저······.”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무곤진인은 해검지에서 검을 풀지 않은 제자를 탓할 기분이 들지 않았다.


“지, 진짜 자고 있는 건가?”


검도 정신이 있어야 풀어놓을 것이 아닌가.

허겸과 공진은 웬 청년의 옆구리에 짐짝처럼 들린 채 코까지 골면서 자고 있었다. 하지만 그 잠조차 탓할 수가 없다.


사람이 얼마나 피곤해야 다른 사람의 옆구리에 들려서 잠을 잘 수가 있단 말인가?


“어, 어떻게 된 겁니까?”


무곤진은은 제자들을 들고 있는 청년에게 멍청한 얼굴로 물었다.


청년은 어깨를 으쓱했다.


“긴장이 풀렸나보죠. 무당파 현판이 보이자마자 기절하던데요.”


현판을 보자마자 기절했다.

그 말에서 무곤진인은 제자들이 겪었을 고초를 짐작할 수 있었다.


쓴 맛이 입안에 감돌았다.


“실례가 안 된다면 어디에서 오셨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대우현에서요.”

“양양에서부터 여기까지 오셨단 말씀입니까?”

“그런데요.”

“허어······.”


제자들이 산문을 나가 복귀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길어야 칠 주야가 된다.

그 안에 무당산에서 양양까지 다녀왔다는 것은 거의 잠을 자지 않고 이동했다는 말과 같았다.


‘내가 아이들에게 못할 짓을 했구나.’


앓아누운 막내는 무곤진인에게 삼대제자의 막내지만 이들에게는 귀여운 사질이다.

지금까지 살을 부대끼고 함께 살아온, 친형제와 진배없는 존재인 것이다.


그런 제자들에게 사질의 생사가 걸린 명을 내렸으니 그 어깨가 얼마나 부서져버릴 정도로 무거웠겠는가?


“이······.”


병신 같은 놈.


다름아닌 무곤진인 자신에게 속으로 하는 욕지기였다.


‘자신의 몸을 무엇보다 소중히 하라고 강조하고 또 강조했어야 했거늘.’


이것 하나 헤아리지 못해서 어이없게 생떼 같은 제자를 잃을 뻔하다니.

역시 그는 좋은 장문인이 아니다.


틀어쥔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하지만 지금은 참회보다 먼저 해야할 일이 있었다.


“제자들은 허겸과 공진을 처소까지 옮겨서 편안히 뉘여라. 누구도 둘의 잠을 방해하지 말라 이르고.”

“예, 장문인!”


그러자 홍광의 옆구리에 보릿자루마냥 끼워져 있던 둘의 몸을 제자들이 조심스레 들어서 데려갔다.


그제야 무곤진인은 뒤늦은 인사를 건넬 수 있었다.


무곤진인이 포권하며 입을 열었다.


“사정은 이미 들으셨겠지요. 그럼에도 무당을 이리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무당파의 장문인인 무곤이라 합니다.”

“홍광이에요.”


홍광도 맞포권했다.


홍광이 척 보기에 무곤진인은 도사라는 말에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갑작스런 방문임에도 흐트러지지 않은 도관과 정갈한 모습을 보면 그가 어떤 생활을 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변했을 거라 생각했는데.’


사부에게 전해들은 것과 똑같았다.

무당은 아직 무당이었다.


“홍 소협이시군요.”

“그렇게 부르셔도 되고요.”

“예 그럼 그리하겠습니다. 곧장 죄송하지만 홍 소협께서는 어떤 의원이십니까?”


제자들이 데려온 은자를 의심하고 싶지는 않지만, 세상에 돌팔이는 많다.

검증되지도 않은 치료법을 들이밀고 오히려 상태를 악화시킬 수도 있는 것이다.


“저는 거진데요.”

“거지······말입니까?”

“네.”


행색이 영락없는 거지가 맞긴 했다.


누더기를 걸친 데다가 산발로 뻗은 머리카락, 땟국물이 줄줄 흐르는 얼굴이 거지가 아니면 뭐란 말인가.

하지만 평범한 거지는 아닐 것이다.


다른사람도 아닌 허겸이 치료법을 안다고 떠벌리는 길바닥 거지를 데려왔을 리는 없으니까.

중독에 대한 지식이 있는 거지일 터였다.


무곤진인이 확신을 담아 물었다.


“혹, 소협께서는 개방도십니까?”

“맞아요.”

“역시 그러셨군요.”


개방도!


무곤진인이 개방도를 찾아볼 생각을 못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개방도라고 해도 개방도 나름이다.


중독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있는 사결이나 오결 이상의 살아남은 개방도를 어디에서 찾겠는가? 사결만 되어도 분타의 관리자급이다.

마도천하에 사결개 이상을 달았던 거지를 찾겠다는 것은 의원을 찾기보다 수십 배는 어려운 일이었다.


떠올리긴 했되 가능성이 너무 낮으니 고려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의혹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사결 이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강호가 망한 것이 칠 년 전이다.


칠 년 전이면 눈 앞의 청년은 아직 코흘리개였을 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열 살 짜리 사결개가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였다.


“개방의 후개셨나보군요.”

“정확하네요.”

“증명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무곤진인은 더없이 긴장하며 물었다.


“몰염치한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위독한 제자를 조심스레 다룰 수밖에 없습니다.”

“이해해요. 후개라는 게 어디 땅바닥에 널린 것도 아니니까.”

“감사합니다.”

“그럼······.”


홍광이 손목을 탈탈 털었다.


개방의 후개임을 증명할 수 있는 무언가를 보여주려는 모양이다.


아마 타구봉법이나 항룡십팔장이겠지.


무곤진인이 긴장어린 얼굴로 그 광경을 지켜봤다. 그가 아무리 무공에 조예가 일천하다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한 치의 오판도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갑니다.”


무곤진인이 눈을 부릅뜬 그 순간!


“어?”


어라?


인지할 틈도 없이 시야가 거칠게 돌아간다.

뒤틀린 굉음이 터져나온 것은 덤이었다.


뻐어어어어어어억!


홍광의 장법이 깔끔하게 무곤진인의 아랫턱을 강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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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이젠 거지한테 빌어먹네(2). +1 23.10.10 373 12 12쪽
18 이젠 거지한테 빌어먹네(1). +3 23.10.09 412 8 12쪽
17 누구냐, 너(3). +1 23.10.08 418 10 12쪽
16 누구냐, 너(2). +1 23.10.07 411 11 12쪽
15 누구냐, 너(1). +1 23.10.06 437 10 11쪽
14 화무십일홍이라더니(3). +1 23.10.05 435 10 12쪽
» 화무십일홍이라더니(2). +2 23.10.04 450 11 12쪽
12 화무십일홍이라더니(1). +1 23.10.03 506 14 12쪽
11 개판이네(3). +1 23.10.02 506 15 11쪽
10 개판이네(2). +2 23.10.01 537 15 12쪽
9 개판이네(1). +1 23.09.30 599 15 12쪽
8 그릇이 큰 거지가 밥도 많이 얻어먹는다(4). +3 23.09.29 576 18 12쪽
7 그릇이 큰 거지가 밥도 많이 얻어먹는다(3). +2 23.09.28 610 17 12쪽
6 그릇이 큰 거지가 밥도 많이 얻어먹는다(2). +2 23.09.27 673 15 12쪽
5 그릇이 큰 거지가 밥도 많이 얻어먹는다(1). +3 23.09.26 732 14 12쪽
4 기연과 마도천하(3). +2 23.09.25 766 16 11쪽
3 기연과 마도천하(2). +2 23.09.24 876 18 12쪽
2 기연과 마도천하(1). +3 23.09.23 1,142 24 12쪽
1 낭인들(0). +3 23.09.23 1,523 26 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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