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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룡(旦龍) 님의 서재입니다.

기연 첫날에 무림이 멸망했다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단룡(旦龍)
작품등록일 :
2023.09.23 06:39
최근연재일 :
2023.11.13 19:20
연재수 :
5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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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5
추천수 :
455
글자수 :
263,236

작성
23.09.30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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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개판이네(1).

DUMMY

호북 양양에 있는 작은 촌락, 대우현.


황궁이 무너지면서 이제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 지명이지만, 대우현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들이 밟고 있는 이 땅이 아직 대우현이라고 여겼다.


왜냐하면 그 이름을 없애버리는 순간 대우현이라는 곳을 설명할 길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만큼이나 평범한 촌락지였다.


논과 밭이 있고 많지도 적지도 않은 사람들이 적당히 살고 있다. 특출난 기술이나 이름난 무엇도 없으나, 동시에 먹고 살기에 문제도 없다.


대우현은 원래 그런 곳이었다.


그러나 평범하다는 것이 나쁘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처지가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여 사는 만큼 인심에 각박하지는 않았으니까. 한 다리 건너면 동네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만큼 부족하면 얻을 줄 알고 넘치면 나눌 줄 아는 곳이 대우현이었다.


적어도 허겸은 그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허겸이 조용히 숨을 들이쉬고 집의 문을 두드렸다.


“안에 계십니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어설프게나마 그 몸에 무공을 익힌 허겸이 안에서 인기척이 들리는 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허겸은 굳은 표정으로 다시 한번 목소리를 냈다.


“무당파의 이대제자 허겸입니다. 불쑥 찾아오는 것이 객의 도리가 아님을 알고 있으나, 간곡히 청할 일이 있어서 이리 왔습니다. 문을 좀 열어주십시오.”


허겸의 말에도 문은 여전히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보다못한 허겸의 사제가 소리쳤다.


“이보시오. 이미 다 들었을 것 아니오! 우리가 동네를 몇 시진이나 돌았는데, 알고 있다면 문을 좀······!”

“사제.”


언성이 올라갈 듯하자 허겸이 사제를 보고 작게 고개를 저었다.


“······.”


사제, 공진은 아랫입술을 꾹 짓씹었다.


벌써 스무 집 넘게 돌았다. 이제 대우현에 남은 집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동안 단 한 군데도 문을 열어준 곳이 없었다.


“도통 열리지 않는군요.”

“어쩔 수 없다. 인심이라는 것이 동할만한 세상이 아니니까.”


대사형의 말은 정론이었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새에 중원의 인구가 일 할로 줄었다. 나머지 구 할은 서쪽에서 내려온 저 마교 무리들에게 죽임을 당한 것이다.


거기까지였다면 오죽 다행일까?


중원을 떠받치던 거파들과 함께 국가의 질서를 유지해야 할 황실조차 마교의 손에 하루도 채 버티지 못하고 쓸려나갔다.


도적이 창궐하고 일할 손은 없어진다.

민생은 각박하니 손님이 반갑지 않은 것도 당연했다.


공진도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말 어쩔 수 없습니까?”

“사제.”

“물론 이들도 어렵겠지요. 이해합니다. 그러나 이곳은 호북입니다. 호북 땅에서 살아온 사람 치고 무당의 은혜를 한 번이라도 받지 않은 자가 있습니까?”

“······.”

“흉년이면 아낌없이 곡식을 풀어 구휼하고, 마적들이 나타나면 무당은 목숨을 아끼지 않고 누구보다 먼저 달려가서 도왔을 터입니다. 심지어 마지막까지 무당은 중원을 지키기 위해 저 마교를 상대로 목숨을 초개처럼 던졌습니다. 제 말에 틀린 부분이 있습니까? 있다면 좀 알려주십시오.”


꾹꾹 눌러담은 듯한 목소리가 공진의 통렬한 울분을 고스란히 전해주고 있었다.


“예. 우리는 실패했지요. 우리뿐만이 아니라 중원의 모든 무인들은 물론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리 무시를 당할 일이었습니까?”


공진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사형의 대답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허겸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시를 당할만한 일이었다.”

“대사형!”

“현실을 봐라 사제. 전장에서 돌아가신 장로님들과 사형들이 돌아온다고 해서 나와 달리 말할 것 같더냐? 우리는 최선을 다했으나 알아주지 않는 민초들의 악함을 탓하실 것 같더냔 말이다.”

“······.”

“아니지. 아니다. 네가 생각하는 무당의 선대가 그리 속이 좁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저 마교를 막지 못한 우리의 빼아픈 실패를 인정하고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도록 정진하셨겠지. 그렇다면 우리도 그리하면 될 뿐이다.”

“······맞습니다 대사형. 못난 모습을 보여 죄송합니다.”


실수를 인정하고 고개를 숙인 공진이었지만 아직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억울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머리로는 납득했어도 감정은 그리 쉽게 꺾이지 않는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천하의 대무당이 마교로 인해 하루아침에 동네 거지보다 못한 신세로 몰락해버렸으니까.


문파의 전력이라 할 수 있는 고수들은 모두 죽고, 무공비급마저 본산까지 밀고 들어온 마인들의 손에 바스러졌다.


그와 동시에 무당의 날개도 부러진 것이다.


무학을 잃은 무당에게 남겨진 길은 하나뿐이었다.

몰락이라는 이름의 쓸쓸한 외길.


공진이 어린 나이에 이러한 극변을 받아들이기 힘든 것은 당연했다. 지금의 처사만 해도 나이에 비해 절제심이 높고 철이 들었다고 보는 것이 지당하리라.


그런 점에서 이대제자들의 대사형 허겸은 대단한 인물이었다.


‘대사형은 과연 명경지수시구나.’


평생을 배워온 경전 속의 이치들과 옛 성현의 현기어린 말들이 모두 부질없이 느껴지는 지금도, 허겸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담담하게 현실을 받아들였다.


대사형이라고 해도 공진과 터울이 그리 많지는 않은데도 말이다.

존경심이 절로 동했다.


‘나는 대사형의 등을 쫓으면 된다. 지금은 그것으로 충분하다.’


듬직한 사형의 등을 보고 마음을 다스린 공진이 자세를 바로했다.


공진이 다시 한번 응답이 없는 문에 대고 말했다.


“잠시면 됩니다. 막내 사제가 중독되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도저히 본파는 의원을 부르는 값을 감당할 여력이 없습니다. 조금이라도 좋으니 부디 손을 보태주십시오.”


무응답.


뻔히 마을에 공공연히 퍼져서 이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사정을 토로해봤지만 역시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들은 이 작고 낡은 문조차 넘을 수 없는 것이다.

이제껏 그랬듯이 말이다.


허겸이 나지막이 말했다.


“다음 집으로 가보지.”

“예, 대사형.”


쉬어빠진 상념 따위에 빠져 있을 시간은 그들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본산에 있는 그들의 막내는 지금 이 순간에도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으니까.


무당산이 있는 곳에서 이곳 양양까지 삼 일 밤낮이 걸렸다. 그리고 지금까지 발을 들였던 그 어떤 마을에서도 이렇다 할 성과가 없었다.

앞으로도 이대로라면 막내의 죽음을 그저 지켜보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만은 절대 안 된다.


무당이 어쨌고 저쨌고를 초월한 일이었다.


“다음은 이곳이다.”

“대우객잔······. 객잔이군요. 근방에 아직 객잔이 남아 있었다니.”


공진이 음각된 간판을 바라보며 씁쓸하게 말했다.


물론 허름하고, 전에 있던 객잔 건물을 보수, 수리도 없이 그저 운영할 뿐인 건물이었다.


하지만 객잔이 있다는 것은 음식을 사먹는 사람들이 있다는 뜻이다. 즉 상상했던 것보다 이곳 대우현의 주머니 사정이 나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허겸이 숨을 한번 삼키고 말했다.


“들어가자.”

“예 대사형.”


사형제가 객잔 문턱을 넘었다.

손님 맞는 점소이 따위는 없었다. 다만 손님이 몇인가 식사를 하고 있고 주인장으로 보이는 사내가 주방에서 손을 닦으며 나왔다.


사내는 손님을 맞으려다가, 사형제의 허리춤에 있는 검과 가슴팍의 태극 자수를 보고는 콧잔등을 찡그렸다.


허겸은 아랑곳 앉고 사내에게 포권했다.


“무당파 이대제자 허겸입니다. 부탁이 있어 이리 찾아왔습니다. 사제가 독초에 중독되어······.”

“일 없소.”


사내는 허겸의 말을 딱 잘랐다.


“지전(紙錢)이나 이전에 쓰던 통화는 안 받소. 은이나 금, 아니면 소금과 곡식을 내시오. 그게 음식 값이오. 뭣하면 과일이나 찻잎도 좋소.”

“주인장, 저희는 손님이 아니라······.”

“그럼 나가시오. 우리 객잔은 동냥금을 챙겨줄 정도로 풍족하지 않소.”


동냥금?

지금 그들에게 동냥질이나 하는 거지라고 말한 것인가?


공진의 치가 잘게 떨렸다.


빠듯하니 문전박대하는 것은 머리를 차게 식히면 이해할 수 있다. 허나 무당의 제자가 모욕을 받을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천하를 다 뒤져도 없을 것이다.


그 어디에도!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공진이 한 발짝 나서며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사제.”

“이건 아니지 않습니까 대사형!”


이번에는 말려도 소용 없었다.

그만큼이나 악에 받친 목소리였다.


“우리가, 뭘 그렇게 잘못했습니까.”


눈가가 벌개진 공진이 뭔가를 더 말하려는데, 굵고 걸걸한 목소리가 난입했다.


“쯧쯧쯧. 안됐군. 사정은 들었네. 듣자하니 참 안 됐더군.”


사형제와 주인장의 시선이 동시에 굵은 목소리를 향해 모였다.


일어난 것은 인상 험악한 인상으로 식사하던 이들 중 가장 덩치 커다란 사내였다.


“하지만 말이야, 자네들이 지금 하고 있는 행동의 의미를 알고 있는 건가? 이곳은 사갈파의 영역이네. 그런 곳에서 뭔가를 받아가겠다는 말은 사갈파의 주머니 속에 손을 넣어서 돈을 빼가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아.”


그제야 사내의 팔에 새겨진 전갈 문신이 눈에 들어왔다.

저 사내도 사갈파의 일원인 것이다.


“아 참. 내 소개가 늦었군. 사갈파의 안찰사, 곽자우라고 하네.”


사내의 이름은 꽤 유명했다.

사형제도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이었다.


물론 사파 따위의 이름 앞에 안찰사라니, 황궁이 건재하던 시절이었다면 하루도 지나지 않아 끌려가서 효수를 당해도 모자랐을 일이다.

아마 삼족이 끌려가서 죄다 목이 달아났겠지.


하지만 그걸 대놓고 말하기에는 사갈파가 호북 북부 지역에서 행사하고 있는 영향력이 결코 적지 않았다.

그야말로 지역 전체가 이런 같잖은 연극에 어울려줄 수밖에 없을 정도로.


사갈파와 직접 마주쳤으면 이 촌락에서는 더 이상 답이 없었다.


답이라면 싸움이 붙기 전에 어서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는 것이 답이었다.

저들도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명분이라는 것이 필요할 테니, 시비가 붙어 명분이 만들어지기 전에 피해야 하는 것이다.


“갑시다 대사형.”


공진이 대사형의 옷자락을 잡아끌었다.


그러나 허겸의 행동은 이제까지와 달랐다.


“이미 사정을 들으셨다면 긴 말은 필요 없겠군요. 이렇게 간청드립니다 대협. 제발 도와주십시오.”


허겸이 사파의 무인을 대협이라 부르며 허리를 굽힌 것이다!


“호오?”


곽자우가 흥미롭다는 듯이 턱수염을 문질렀다.

이어서 나온 허겸의 말은 청산유수였다.


“사제가 많이 위독합니다. 지금쯤이면 사경을 헤메고 있겠지요. 이리 홍역을 앓고 있는 문파를 도우시면, 호북에 사갈파의 위명이 더욱 널리 퍼질 것입니다.”

“대사형······.”


더없이 비굴한 말이었다.


사팔파의 이름은 위명이라며 치켜세우고, 무당은 상태가 나쁘다며 자학했다. 십 년만 전이었다면 천지가 개벽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공진은 그 비굴함 속에 숨겨진 대사형의 간절함을 보았다.


그래.

중한 것이 무엇이랴?


무당의, 아니 그들 사형제의 자존심인가. 아니면 위중한 막내의 목숨인가.

처음부터 고민할 필요가 없는 문제였다.


“저도 부탁드리겠습니다. 대인.”


결국 공진도 대사형을 따라 곽자우에게 고개를 숙였다.


비굴해야 한다. 시키면 아양이라도 떨어야 한다.

호북의 일각을 지배하고 있는 사갈파에게 의원 하나 왕진을 보내는 일은 누워서 떡 먹기보다 쉬울 테니까.


마침내 곽자우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흐흐, 그래. 이름이 바랬다고는 하나 그 남존무당의 제자들이 이 곽자우의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구나.”


그래, 이거면 됐다.


하지만 다음 순간 곽자우의 입에서 나온 말은 공진이 여전히 강호를 얕잡아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게 만들었다.


“허나, 소형제들이 이해해주길 바라네. 사갈파도 빠듯해서 말이야. 물론 우리가 좋자고 그러는 것은 아니네. 민생을 수호하는 데 여념이 없어서 여비조차 챙겨주지 못하는 것을 용서하게나.”


명백한 거절.


공진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때였다.

객잔의 문이 거칠게 열리더니 웬 누더기를 걸쳐 입은 청년이 걸어 들어왔다.


당장이라도 칼부림이 날 듯이 팽팽하게 당겨진 분위기는 신경도 쓰지 않고 성큼성큼 다가와 탁자에 앉은 사내가 뒤늦게 상황을 쓱 둘러보고는 작게 중얼거렸다.


“개판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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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이젠 거지한테 빌어먹네(3). +1 23.10.11 352 9 12쪽
19 이젠 거지한테 빌어먹네(2). +1 23.10.10 373 12 12쪽
18 이젠 거지한테 빌어먹네(1). +3 23.10.09 412 8 12쪽
17 누구냐, 너(3). +1 23.10.08 418 10 12쪽
16 누구냐, 너(2). +1 23.10.07 411 11 12쪽
15 누구냐, 너(1). +1 23.10.06 436 10 11쪽
14 화무십일홍이라더니(3). +1 23.10.05 435 10 12쪽
13 화무십일홍이라더니(2). +2 23.10.04 449 11 12쪽
12 화무십일홍이라더니(1). +1 23.10.03 506 14 12쪽
11 개판이네(3). +1 23.10.02 506 15 11쪽
10 개판이네(2). +2 23.10.01 537 15 12쪽
» 개판이네(1). +1 23.09.30 599 15 12쪽
8 그릇이 큰 거지가 밥도 많이 얻어먹는다(4). +3 23.09.29 576 18 12쪽
7 그릇이 큰 거지가 밥도 많이 얻어먹는다(3). +2 23.09.28 610 17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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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기연과 마도천하(1). +3 23.09.23 1,142 24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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